창작 글

[바람과나라 : 이고갱] 제 22화. 바위에서 주운 애

22화.  바위에서 주운 애








뜻밖에 주모를 알아 본 가을뫼는 크게 놀랐다.




'그래... 역시... 일개 주모가 우연히 자객일리가 없지... 흑건적이었구나... 


 근데 머리카락 색은 왜 은발이지? 분명 검은 머리였는데...'


죄수들을 이끌고 온 장수는 목간을 펼쳐 큰 소리로 읽었다.




"흑건적의 두목 육병관은! 천하를 어지럽히고 민생을 유린했으며


 역모 짓을 행하였다! 이를 과시할 수 없어 태왕 태하의 명으로


 이들을 잡아 참수하니, 온 백성들은 혹세무민을 행한 죄인의 말로를 볼지어다!"




장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장검을 든 병사 둘이 앞으로 나왔고 다른 병사들은


죄수들을 둘씩 앞으로 끌고 나왔다. 


죄수 하나는 죽기 싫어 최후의 발악을 했지만 사지가 꽁꽁 묶여 있어 별 소용이 없었다.




 『서겅』


별다른 신호나 기다림 없이 죄수들은 곧장 목이 베였다.


곧바로 육병관으로 보이는 자의 차례였다.


그자는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어


재갈을 물은 채,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하지만 그는 남들보다 갑절은 더 여러 번 묶여, 


마찬가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서겅』


육병관의 목이 떨어졌다.


목이 몸에서 떨어지고도 잠시 동안, 


육병관은 알아들을 수 없는 악을 써댔다.




순서로 보았을 때 주모의 차례가 마지막으로 보였으나


죄수들을 워낙 속전속결로 베어버려 곧 순서가 오려 했다.


목이 떨어진 죄수들은 그대로 창 끝에 머리가 꿰뚫려 장터 중앙에 효수 되었다.




'주모...'


주모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그녀가 몇 명을 죽였는지,


가을뫼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주모가 죽는 모습을 간과하려니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주모가 지어 주던 미소와 선했던 말투들...


그것들은 분명 다 거짓이었을 테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심장이 쿵쾅거리지?


왜... 왜...




『서겅』


주모의 앞순번 둘도 목이 잘려 나갔다.


이제 주모와 옆 죄수 한 명만 남았다.




이 상황에서 주모를 구하려면...




'화살이 꽂힌 곳에 검은 연기가 잔뜩 피어올라서 


 사냥터 같은 곳에서 도망칠 때 아주 유용하지.'





번뜩, 장터에서 화살 팔던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가을뫼는 황급히 소지품을 뒤적였다.




'연막시, 연막시, 그래 이거...'


가을뫼는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장터의 모든 사람은 일제히 처형집행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을뫼는 두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연막 효과가 너무 느리게 나타나면 어쩌지...'


연막의 크기나 발동 속도를 자신할 수 없는 가을뫼는 초조했다.


병사가 주모를 포함한 두 사람을 앞으로 끌고 나와 무릎 꿇렸다.


더 이상은 이것저것 따질 시간이 없었다.




'화살을 쏘고 12시 방향으로 25보... 


 좌로 돌아 붙잡고, 10시 방향으로 틀어 [위위주보]... 


 바로 다시 뒤돌아 전력 질주...'


가을뫼는 앞이 안 보일 것을 대비해 머릿속으로 빠르게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스으으익』


연막시는 빠르고 조용히 날아가 주모와 집행인 사이에 꽂혔다.




『푸쉬이....』


예상보다 굉장히 맹렬한 속도로, 엄청난 양의 검은 연막이 장내를 채웠다.




"적습이다! 칼을 들어라!!"


장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20보...15보...10보... '


시커먼 연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병사들의 외침과 구경꾼들의 놀란 목소리로


아수라장이 된 집행장에서 가을뫼는 냉정하게 보폭을 재며 빠르게 주모를 향해 다가 갔다.




'5보...3보...1보... 여기!'


가을뫼는 왼쪽으로 돌아 손을 짚으니 여성의 몸으로 추정되는 왜소한 어깨가 잡혔다.


"읍!!읍읍!!..."


바애는 병사인 줄 알고 안간힘을 다해 저항했으나, 


며칠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묶여 있던터라 


제대로 반항할 수 없었다.


가을뫼는 주모를 들쳐메고 10시 방향으로 몸을 틀어 


[위위주보]를 썼다.  


      *위위주보 - 뒤로 일정 거리를 순간 이동하는 궁사의 회피기, (ex- 뒤로 나가는 축지법)




그러곤 뒤를 돌아 자욱한 연기 속에서 앞뒤 잴 것 없이 전력 질주로 뛰쳐나갔다.


가을뫼는 거의 200여 미터를 달리고 나서 헐떡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따라붙은 병사는 없었다.




'이제 어떡하지...'


흑건적 일당에게 붙은 죄목은 한 두 개가 아니었고 그중 역모죄도 있었기 때문에


주모를 도와 준 것을 들켰다간, 태녀의 배필이고 뭐고 꼼짝없이 처형당할 것이다.


'후우... 침착하자 침착...'


"읍....읍...읍..."


입에 재갈이 물려 있는 바애가 뭐라 뭐라 소리쳤다.


'아마 곧 대대적인 수색이 있겠지... 일단 몸을 숨길 곳부터 찾자.'




설상가상으로 하늘에서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 제발... 이 와중에 비까지...'


가을뫼는 서둘러 움직였다.




병사들이 들이닥치지 않을 만한 곳... 


두 사람이 잠시 숨을 수 있는 곳...




'그래 오히려 이러는 게 맞을 거야.'


가을뫼는 근처에 보이는 집들 중 제일 넓어 보이는 집 담벼락으로 향했다.


담벼락에 다다른 가을뫼는 주모를 잠시 내려놓고 까치발을 들어 안쪽 상황을 염탐했다.


워낙에 넓은 집이라 작은 마구간이 있었고 그 옆에는 여물을 쌓아논 것으로 보이는 작은 창고가 있었다.


가을뫼는 빠르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가을뫼는 바로 주모를 담 뒤로 넘겼다.




『철퍼덕』


주모가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가 났다.


'어쩔 수 없어... 그래도 다리부터 닿게 내렸으니까...'




가을뫼도 곧바로 담장을 넘었다.


바애는 비가 내려 흙탕물이 된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가을뫼는 다시 주모를 들쳐메고 재빨리 여물 창고를 향해 뛰었다.


창고 문을 급하게 열고 주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후..."


겨우 한숨 돌린 가을뫼는 주모를 보았다.


주모는 반쯤 의식이 없었다.




주모의 목과 얼굴에는 빗물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가을뫼는 다급히 건초를 깔고 그 위에서 주모의 주박과 재갈을 풀었다.




"누....구....냐..."


바애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 겨우 한마디 내뱉고는 기절했다.


가을뫼는 바애의 이마에 손을 댔다.


'엄청 뜨거워...'


아마 온도계가 있었다면 40도는 될 것 같았다.


가을뫼는 우선 바애의 젖은 겉옷을 벗겼다.


옷을 벗기자, 속옷조차 없이 적나라한 알몸이 드러났다.


바애의 나체에는 수많은 멍들이 가득했다.




가을뫼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덮어 주었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되지?... 이대로 두면 죽는 거 아냐?'


가을뫼는 초조해졌다. 


초조하게 창고 안을 서성이다 우선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의식을 차리면 물과 음식이 필요할 거야... 물과 음식을 구해 보자.'


가을뫼는 창고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어 집의 구조를 관찰했다.


아마 집주인이 사는 것으로 보이는 큰 기와 건물 한 채와 별채가 2개... 


연기가 솟아오르는 것으로 보아 주방으로 보이는 곳이 작게 한 채 더 있었다.




가을뫼는 조용히 창고 문을 닫고 날래게 움직여 연기가 나는 곳 벽에 붙었다.


벽너머 주방 안에선 하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갑자기 왤케 쏟아지니? 


 자가께서 일찍 돌아오시겠다야."


"그럼 차를 미리 우려 놓을까요? 태녀님이 오시면 차부터 찾으실 터이니..."




'태녀...?'




『끼이이익』


대문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레 한대와 하녀무리가 들어왔다.


갑자기 쏟아진 비에 하녀들은 물에 빠진 생쥐꼴 이었다.


집에서 대기하던 하녀들은 서둘러 우산을 들고 수레를 향했다.


수레에선 6태녀 희라가 내리고 있었다.


'! 저 사람은?'




"고생들 많았다. 들어가서 쉬거라. 쉬러 가는 길에 주방 아이들 좀 부르고."


희라는 안채에 오르며 말했다.       *안채 - 안방




'잠깐만... 그러면 여기가 최성배의 집?'




병사들의 눈을 피해 일부러 부잣집에 숨었지만 


그 집이 흑건적 일당을 소탕한 최성배의 집일 줄이야...




"자가, 차를 내 왔습니다."


"그래, 들어오거라"




가을뫼는 머리가 어지러이 돌았다.


사람들 눈을 피해 숨어 있는 것은 한계가 분명할 것이다.


이 집에서 가장 신분이 높다 할 수 있는 희라가 도와 준다면


주모를 살리고 국내성을 조용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과연 가을뫼에게 이것저것 묻지 않고 수상한 행동에 도움을 줄까?




'이 사람... 이 사람의 됨됨이는 어땠지?


예진이를 확실히 좋아했고, 아랫사람을 그리 막 대하지 않아 보였고...


아 근데 최성배의 마누라잖아!.. 하 어쩌지...'




"허업!!!"


사람이 놀라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나이 든 여자하나가 별채에서 나오다가 벽에 숨어 있는 가을뫼를 발견하고는 기겁하고 있었다.




"근벼엉!!!... 여...우웁.."


나이 든 하녀로 보이는 그 여자가 고함을 지르려하자 가을뫼는 총알처럼 튀어 나가 우선 입을 막았다.




'젠장 이젠 어쩔 수 없잖아...'


"저는 태녀님의 지인입니다. 


 태녀님의 부탁으로 이리 조용히 온 것이니 부디 소리를 지르지 마십쇼."


가을뫼는 태연히 거짓을 말했다.


나이 든 하녀는 의심의 눈초리로 가을뫼를 올려다보았다.




"정 못 믿겠으면 저는 이곳에 기다리고 있을 테니, 


 조용히 태녀님께 가서 가을뫼가 이곳에 와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주십시오."


나이 든 하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뫼가 놓아주자. 하녀는 가을뫼를 위아래로 슥 훑어보더니, 안채로 뛰어갔다.


잠시 뒤 하녀는 안채에서 나와 가을뫼에게 다가와 말했다.




"태녀님께서 안으로 뫼시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괜한 시선이 무서우니 저쪽 한적한 별채로 오시지요."




별채로 안내받은 가을뫼가 잠시 기다리자 6태녀 희라가 왔다.


"매부께서는 이리도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오늘 예진이와 함께 졸본으로 돌아가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가을뫼는 대뜸 무릎을 꿇었다.




"처형께 부탁이 있습니다. 


 제 아내는 처형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했지요. (그런 말 한적 없음)


 제가 지금 사람 하나를 구해 이 집 여물창고에 숨겨 놓았습니다. 


 부디 다른 것을 묻지 마옵시고 잠시 기력을 회복하고 떠날 수 있게 2,3일 정도만 숨겨 주십시오."




"..."


희라는 잠시 말이 없었다.


'비에 젖으니까 더 관능적이네...'


희라는 가을뫼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흠...흠... 예진이는 제 친동생이나 다름없습니다. 


 매부는 어서 일어나세요.


 그리 무릎 꿇으실 것까지 없습니다. 


 숨기시는 분이 누구인지는 여쭈지 않겠으나,


 여물창고에 두어선 안 됩니다. 


 이곳 별채는 저와 제 유모가 관리하는 곳이니 이리 모셔오시지요.


 아... 방금 매부를 이 별채로 모신 사람이 제 유모입니다. 


 제 친어머니 같은 분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가을뫼는 절 한번 크게 박고 일어났다.


일어나는 가을뫼의 옷사이로 탄탄한 가슴이 슬쩍 보였다.


"혹...혹시나 다른 하녀들이 볼 수 있으니 유모가 아이들을 주방에 모으고 나면 그때 옮기시지요.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않겠으나, 때가 되면 설명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이 순간, 이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가을뫼는 대답했다.


희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혼 안 한다던 예진이를 돌려 새울만 하네... 어쩌면 저렇게...'


가을뫼의 탄탄한 가슴이 희라의 머리에서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게 희라와 유모에게 바애를 뉘울 곳과 음식을 제공 받은 가을뫼는 


바애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리며 쭉 옆에 있었다.


바애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가을뫼는


예진과 서유가 크게 걱정할까 봐 유모를 통해 짧은 서신도 보냈다.




[미안 조금 늦을 것 같아. 그래도 일주일 안에는 꼭 돌아갈게. -예진과 서유에게 가을뫼가]






***






『쾅!!』


"그깟 다 잡아논 계집에 하날 놓쳐?"


최성배는 탁상을 내리치며 분노했다.


최성배 앞에선 장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졸개놈 칼 좀 쓴다고 장수자리까지 올려놔줬더니 일하는 꼬라지가 이따구야!!"


"면목이... 없습니다."


최성배는 장수를 노려보았다.




"면목이 없을 것까지 있나."


장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최성배를 바라보았다.


[백호참]!


『스익』


순식간에 장수의 머리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목만 없으면 되지. 여봐라! 이한수를 불러오너라!"




잠시 뒤 최성배의 심복 중 하나인 이한수가 들어왔다.


"이놈의 목을 저잣거리에 내걸고 그 계집년과 놀아나 풀어 준 거라고 방을 붙여라."


"예. 장군."


"그리고 부여에서 사로잡은 노예중에 비슷하게 생긴년을 베어다 도망친년인 것처럼 내걸어."


"예. 그리하겠습니다."


"하나 더. 비밀리에 정예부대를 풀어서 어떻게 해서든 도망친년과 그년을 내뺀새끼를 찾아내!"


"분부 받잡겠습니다."


이한수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










바위에서 주운 애, 바애


그게 내 이름이었다.


나를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


나를 키운 '이모'란 사람은 날 바위에서 주웠다고 했다.


'이모'는 그렇게 주워 오거나 데려온 고아들을 많이 키웠다.


왜냐하면, 그렇게 키워서 팔았기 때문이다.




9살도 안 된 아이들을 주워다가 11~14살 정도로 크면 팔았다.


아이들에 대한 대우는 당연히 밑바닥이었다.


이모는 동굴 옆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는데 아이들은 숫자가 많아


동굴에 대충 실내를 만들어 거기 다 재웠다.


밥은, 굶지 않으면 다행인 정도...


이모가 가져다준 일 거리를 다해내야지만 멀건 죽 같은 밥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손이 부르트도록 짚을 꼬거나 타작을 하거나 돈이 되는 일은 다하였다.


조금 나이를 먹은 아이들은 도주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면 어김없이 이모부라는 작자가 귀신 같이 잡아 왔다.


잡혀 온 아이는 죽을 만큼 맞아 반 병신이 되거나 진짜로 죽었다.


이모는 직업을 가진 아이는 좀 더 비싸게 팔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몸이 날래거나 마력을 쓸 수 있는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직업상급자에게 데려갔다.


물론 상급자에게 데려가기 전에, 


함부로 입을 놀리면 혓바닥을 잘라버린다는 엄포를 놓았다.




나는 운동신경이 좋고 습득력이 빨라 도적이 될 수 있었다.


직업을 단 아이들은 그나마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았다.


초보자사냥터나, 쥐굴에서 도토리, 토끼고기, 쥐 고기들을 모아 오게 했다.


늘 갑갑한 동굴 안에서 짚신이나 짜던 아이들에게 사냥은 놀이였다.




13살이 되던 해, 6년을 같이 지냈던 자매 같은 친구가 옥저로 팔려나갔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엉엉 울기만 했다. 곧 나의 차례였다.


이모는 나를 백제의 한 귀족이 사갈 것이라 말했다.


얼마 전 동굴 방문했던 귀족이 날 고른 것 같다.




그때 난 성적인 것은 전혀 모르는 아이였음에도,


날 바라보며 입맛을 다시던 그 귀족놈이 본능적으로 싫었다.




나의 판매가 결정된 다음날,


그동안 필사적으로 몰래 모아왔던 금전과 사슴고기로


[금수]를 배웠다.        *[금수] - 고양이, 돼지, 강아지, 누렁이로 변하는 도적 기술


그동안 순종적으로 말을 잘 들었기에 ,


사냥에서 조금 늦게 돌아와도 의심 받지 않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난 동굴을 탈출했다.


나는 흰색털에 검회색 무늬가 있는 고양이로 변했다.


완벽히 변신한 나는 이모부 조차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대로 멀리 졸본성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탈출은 더 넓은 감옥으로의 수감이었다.

 


13살 여자아이가 살아남기에 세상은 그리 녹록지 않았던 것이다.


훔치고, 사냥하고, 길에서 잠들고, 운이 좋으면 주막에서 자고


떠돌이 생활을 하며 겨우겨우 자라갔다.


도적으로 내 악명이 조금씩 높아 가던 중,


난 한 귀족집을 털다가 붙잡혔다.


졸본성의 귀족들이 자주 도둑질을 당하자 99단 전사를 경호원으로 고용했던 것이다.


난 사지가 묶인 채 포박당했다. 


집주인은 귀싸대기를 몇 번 후려치고는 하인들에게 날 관아로 넘기라 명했다.


그날 밤.


흑건적이라 자칭하는 무리가 졸본성 귀족 집들을 싸그리 털기 시작했다.


낮에 상인들로 위장한 흑건적들이 성안에 모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흑건적은 내가 잡혀 있는 귀족집을 약탈하다가 날 발견했고, 난 간부의 제안으로


흑건적에 합류하게 되었다.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을 뿐 솜씨가 좋았던 나는


흑건적내에서 승승장구했다.


흑건적에 합류한지 4년 만에 99단 도적이 되어 간부가 되었다.


간부가 된날 밤, 두목 육병관은 나를 품었다.


그가 썩 마음에 내키진 않았지만,


흑건적은 내 인생에서 날 인정해준 유일한 집단이었기에


도망치지 않고 몸을 받쳤다.


육병관은 성욕이 무척이나 강한 사내였지만


조루였고, 여자욕심이 많아 이미 충분한 첩들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나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불려갔다.


그 정도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이세계에서 여자의 몸이란 그런 것이었다.


강한 자에게 대주면서 더 나은 삶을 연명하는 도구.


사랑이란 건 인생을 편하게 사는 얼빠진 놈들이나 내뱉는 망상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난 연정에 빠져 간이고 쓸개고 다 내주는 놈들을 혐오했다.


간혹 펼치는 내 미인계에 허우적대는 놈들을 보면 그렇게 같잖을 수 없었다.




그러다 읍루성 작전에 투입되고 


가을뫼를 보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숨이 가빠왔다.


그의 포근한 내음이 살짝 어지럽기까지 했다.




남몰래 그를 사모하며 애타고, 그를 죽이라 명하고, 


그럼에도 살아남은 그의 소식을 들으며 기뻐했던 순간들...




바애는 눈을 떴다.


눈앞에는 가을뫼가 앉아 졸고 있었다.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나 보다.'


하도 가을뫼를 원했더니 천지신명이 꿈에 잠깐 그를 보내주셨나 싶었다.


'아니, 혹시 이미 천국일까... 그럴 리 없지... 난 죄를 너무 많이 지었는걸.'


점점 시야가 또렷해졌다.


조금씩 정신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바애는 몸을 일으켰다.


'여긴 어디지... 이게 무슨 일...'


번개처럼 마지막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처형당하기 위해 끌려나간 것, 갑자기 검은 연기가 치솟더니 누군가 자기를 들쳐메고 도망친 것,


담벼락 안으로 던져진 것... 그 이후로 기억이 끊겨 있다.




"음...으...으으엉?  뭐야 일어났네?"


가을뫼는 졸다가 어렴풋이 눈을 떴는데 바애가 몸을 일으킨 채로 있자 깜짝 놀랬다.




"저를 아십니까?..."


바애가 물었다.


"알지... 읍루성 주모였잖아. 그치?"


"...  혹시 저를 구해주신겁니까?"


"맞아."


"어째서 절 구하셨습니까? 저를 잘 알지 못하실터인데..."




"음... 일단 내가 아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게 마음이 불편했고,


 나도 묻고 싶은 게 많거든."


바애는 울먹였다.


"...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뭐든...뭐든... 답해드리겠습니다..."




가을뫼는 바애에게 전 주모 암살에 대해 물어 봤다.


바애는 주모암살은 읍루성을 점거하기 위한 작전의 일부였다고 말해주었다.


부여의 태자가 읍루성으로 자주 온다는 것을 알아낸 흑건적은


그를 암살하고 군량과 말, 가능하다면 그의 병사들까지 뺏을 계획을 세웠다.


흑건적이 주목한 것은 그의 여성 편력인데, 부여의 태자는 그렇게 여자를 밝힌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특히나 일반 모험가 여성들을 자주 노려 자기 첩처럼 삼고는 읍루성에 모아 둔다는 것이다.


부여태자가 자주 읍루성에 들리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흑건적은 부여태자가 여자 모험가들을 물색하러 자주 온다는 읍루성 주막에 바애를 투입시켰다.


그러기 위해 관청에 미리 뇌물을 먹여, 정체를 숨긴 바애를 주모 발령 대기자로 만들어 놓고,


팽경지를 보내 원래 있던 주모를 암살했다.




이야기를 차분히 다 들은 가을뫼는 바애에게 물었다.


"허... 그런데 왜 흑건적은 부여 태자를 노린 거지? 


 얻는 것보다는 리스크.. 아니 어, 위험이 너무 크지 않나? 


 나라 하나를 적으로 돌리는 일인데..."




"가을뫼님은 최성배라는 자를 아십니까?"


"최성배? 너희 흑건적을 일망타진한 최성배?"


"네 맞습니다. 모든 게 다 그자의 술수였습니다."


졸본성에서 세력을 키운 흑건적은 고구려와 부여를 가리지 않고 약탈해 두 나라 모두에게 골칫거리였다.


어느 날 고구려 대당주의 사신이라는 자가 흑건적 일당을 찾아와 거래를 제안 했다.


자기들과 협력하면 고구려로부터 공격 받지 않게 끔 도와주고, 


나아가 자기들에게 협력하여 부여를 쓰러뜨리면,  부여의 땅 절반과 차후에 점령하게 될 옥저땅을


내주고 자주권을 가진 나라로 인정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니 잠깐만... 대당주라고 해도, 고작 병사 만 명을 다스리는 일개 장수가 그런 약속을 할 수 있다고?"


"최성배는 자신이 곧 권력을 쥐게 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협조해 부여를 쓰러뜨리면
 
 더욱 확실히 권력을 쥘 것이라 우리를 설득하였지요..."




'최성배... 역모를 꿈꾸고 있는 건가...'




"그 작자의 말이 달콤하여 속아 넘어간 우리가 쓰레기였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고구려군의 정보를 흘려, 
 
 고구려군이 우릴 잡으로 와도 우린 늘 한 수 앞서 피하거나 되받아 칠 수 있었지요.


 그렇기에 그를 더욱 신뢰했던 것입니다. 허나 부여를 사실상 쓰러뜨리고 우리가 크게 필요 없어지자,


 1만 정예명으로 우리의 본진을 습격하여 모든 간부를 잡아가고 나머지는 그 자리에서 죽였습니다."




가을뫼는 처형 당하기 전, 죄수들 입에 재갈이 물려 있던 것을 떠올렸다.


'이 내용을 떠벌리지 못하게 죽기전까지 재갈을 물렸구나...'

 

 

가을뫼는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차츰 이해가 되었다.

 

 

생각을 정리하던 중 문득 바애의 야윈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배고프지 않아? 죽을 받아 놨는데."


바애는 그 말을 듣자 깨닫지 못했던 허기가 미친 듯이 몰려왔다.


"네에...배고픕니다..."




가을뫼가 쟁반에 받쳐 죽을 가져다주자 바애는 무척 송구스러워했다.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됩니다. 소녀는 모자라고 나쁜년입니다."


"나쁜 사람도 배는 고프잖아, 일단 먹어. 그리고 기운을 차리면... 후... 일단 여기 국내성은 위험하니까,

 

 같이 탈출할 방법을 찾아보자."

 

 

바애는 주르륵 눈물을 흘리고 죽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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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2022.07.08

바람의나라로 보고왓는데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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