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구의 자리 - 3

 

 

 

십수명의 자객이 포진한 침전 앞에는 대감과 일곱명의

서자들이 있었다. 그 중 셋째인 인회가 앞장 서 문을 열었다.

달빛을 받으며 서있는 신유의 모습이 보였다.

요괴라기엔 여전히 고고한 아름다움의 자태였다.

 

" 야심한 시간에 어연일로 전하를 뵈러 오신지요. "

 

신유는 기다렸다는 듯 침소 앞에 서서 인회군을 맞이했다.

사방에 살기가 형형함에도 얼굴엔 여전히

인자한 미소를 띄운 채였다.

 

" 그대도 알고있지 않은가. 전하의 용태를 살펴보러

온 것 따위가 아님을. "

 

" 그렇다면 군께선 왕위를 찬탈하러 오신 것인지요? "

 

" 아니, 인간을 요괴에게서 해방하기 위해서 왔다. "

 

" 태평성대에 그럴 이유가 있는지요.

국경 밖의 다른 나라들에서 민초는 기근과 전쟁, 역병에 시달리고.

궁궐에 있는 자들조차도 조금이라도 높은 곳에 오르기위해

서로를 배반하며 혀 밑에 숨긴 비수로 심장을 찌릅니다.

군께서 바라시는건 속박에서 해방되어

고통에게 안기러 가는 것인지요? "

 

" 그것이 인간의 삶이라면 따라야겠지.

고통에 시달리든 행복을 누리든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요괴의 말 한마디에 본인의 의지는 죽여둔 채 친족을 살해하고,

추한 괴물에게 나인이 범해지는 것을 애써 무시하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닌, 가축의 삶이다. "

 

침전의 문이 열리며 서자들이 들어섰다.

신유는 그들을 흘겨보더니, 다시 인회군을 보며 말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원하시는대로 목을 베십시오.

영원히 이어갈 왕의 삶과 무소불위의 권력을 잘라내시지요. "

 

인회군은 검집에 손을 가져가며 왕에게 다가갔다.

누워있는 왕에게 다가가 검을 뽑으니,

왕은 눈을 뜨고 인회군을 바라보았다.

어떤 감정이나 동요도 없는 살아있는 것이 아닌 눈빛이었다.

 

" 전하. 제게 할 말은 없으십니까. "

 

왕은 이번에도 침묵하고 있었다.

모친을 죽인 것에 대한 사과도. 해방시켜줌에 대한 감사도.

검끝이 자신의 목을 겨눔에도 피할 생각도

물음에 답할 생각도 없이,

그저 인회군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 대답을 기대친 않았습니다. 전하도 마찬가지.

끊어져야할 실에 불과하니. "

 

인회군은 왕의 오랜 부탁을 이뤄주었다.

왕의 목과 머리의 단면에선 피가 흐르지 않았다.

천년을 이어온 왕권은 무미건조하게 바닥을 굴렀다.

 

" 경하드리옵니다. 하지만 아직 베어야할 목이 남아있지요? "

 

" 그래. 하나만 더 베어내면 끝이다. "

 

인회군이 몸을 돌려 검을 늘어뜨린 채 신유에게 다가가니,

신유는 입꼬리를 길게 올리며 소리내어 웃었다.

칼날같이 서늘하고 날카롭지만,

가여운 것을 보는 동정의 비웃음소리에 인회군이 멈춰섰다.

 

" 무엇이 그리 우스운가? "

 

" 군께선 어찌 베어낼 목이 하나라고 생각하십니까.

주변의 소란이 들리지 않는지요? "

 

" 소란? "

 

신유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뒤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파열음, 목이 베여 두개의 구멍으로 새는 소리.

피와 내장이 쏟아지는 소리, 자비를 구걸하는 목소리와 비명.

 

" 무슨.. 무슨 짓을 한게냐? "

 

신유에게 검을 겨누었지만 인회군의 손은 떨렸고,

그녀를 노려보았지만 눈은 공포에 질려가기 시작했다.

신유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와 손을 부드러히 잡아주었다. 

인간이 아닌 것이라기엔 따뜻한 손이었다.

 

" 저는 왕의 피가 섞인 자들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답니다.

그것이 내기의 대가. 왕이 원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이뤄주고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서자들에게도 왕의 피가 섞였으니,

저는 당신들을 해치지 않으며 바램을 이루어주는 존재입니다. "

 

신유는 인회군을 침실 밖으로 끌어주며 다정히 말했다.

침실에 나온 인회군의 앞엔 막내가 쓰러져 있었다.

막내는 단검을 찍어내리고 있는 여섯째의 손목을 붙잡고

악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침소의 사방은 피로 칠갑이 되어있었다.

이미 넷째는 갈라진 등 틈새로 내장을 쏟아내며 죽어있었고, 

다섯째는 자객들의 시체가 뒤엉켜 섞여있었다.

첫째와 둘째는 인파에 섞여보이지도 않았다.

 

" 무엇을 하는 것이냐.. 우리가 무얼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인데.. "

 

" 이것이 군께서 가져오신 자유입니다.

탐욕이 미덕이며, 신뢰는 허황된 것이고.

같은 피를 지니고 유년기를 함께한 가족이라한들

탐욕에 휩싸이면 그저 진에(瞋恚)를 일으키는 타인일 뿐이니.

오롯이 믿어야할 것은 자신인 뿐인 죄의 와중에선. "

 

인회군은 여섯째를 걷어차 막내에게서 떼어냈다.

여섯째의 단검이 인회군의 옆에 박혔다.

인회군은 몸을 낮춰 쓰러진 막내를 일으키며 바라보았다.

막내와 인회군의 떨리는 눈빛이 교차했다.

 

" 서로를 유린하고 헐뜯는 것이 자유이지요. "

 

격통이 인회군의 옆구리에서부터 치솟았다. 

막내는 피가 떨어지는 송곳을 인회군에게서 뽑아내곤 

아직 쓰러져있는 여섯째를 덮쳤다.

고기가 다져지는 듯한 뭉툭한 소리가 들렸다.

 

그런 막내는 곧 첫째의 검에 목이 달아났다.

서자들의 맏형으로서 부모와 같이 자신들을 길러준 첫째.

그 듬직하던 등 뒤로 막내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첫째가 인회군에게 다가왔다.

인회군은 피가 쏟아지는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첫째를 올려다보았다.

 

" 형님. 그리도 영원한 삶이 탐나신 것이었습니까.

인간 닮게 사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 생각해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유없이 모친을 잃는, 어명 아래 어떤 부정한 것이라도 벌어지는

이 나라를 인간답게 바꾸려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

 

동생들의 피로 물든 첫째의 검날이 인회군의 목에 닿았다.

첫째는 일그러진 얼굴은 어떠한 고통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이것이 인간의 삶 아니더냐. 반목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해

피를 흘릴 줄 알고, 흘리게 할 줄 아는 것. "

 

인회군의 뒤에서 신유가 작게 웃었다.

첫째의 뒤엔 대감과 자객들이 서있었다.

첫째가 검을 높히 들었다. 달빛에 반사된 핏빛이 내려왔다.

 

" 네 몸이 죽어가는 것이 느껴지느냐. "

 

인회군의 시야는 흐려지고, 입을 닫을 힘도 풀려

피가 섞인 침이 떨어졌다.

간신히 꿇은 무릎조차 힘이 풀려 주저앉아졌다.

피를 간신히 막은 손이 흘러내려 피가 쏟아지는 것이 느껴지지만,

오히려 고통은 줄며 이성은 분리되고, 본능만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 그것이 죽음이다. 계속해서 흘러갈 세상과 분리되어,

혼자만이 남겨지는 것. 끝없는 암흑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무력한 잠을 자는 것이다. "

 

' 살고싶다. '

 

" 요괴는 왕의 혈통이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이루어준다.

설령 그것이 영원한 왕위일지라도. "

 

검을 내리치던 첫째의 가슴이 꿰뚫리며 칼날이 솟아올랐다.

첫째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검날이 치켜올려져

첫째를 완전히 베어냈다.

대감의 놀라 외치니 자객들이 달려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첫째는 상반신이 갈라진 채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 지금 우릴 죽이면 영원의 왕위를 이을 수 없게된다! "

 

둘째는 자객들에게 몸을 돌리며 외쳤다.

대감이 한 손을 들어보이자 자객들은 전부 멈춰섰다.

그제야 둘째는 인회군에게 몸을 낮추곤 옆구리를 붙잡아 주었다.

인회군은 피를 토하면서도 입술을 뻐끔였다.

 

" 형.. 난... "

 

" 중요한 것이냐?! 그것보다 빨리 치료를 받아야한다!

 

인회군의 작은 중얼임에 둘째는 귀를 가까이 가져갔다.

죽음이 드리워졌다. 의원에게 간다한들 때는 너무 늦을 것이었다.

인회군은 필사적으로 말을 이으며, 온몸에 힘을 실었다.

 

 

" 살고싶어. "

 

인회군은 둘째의 귀를 어금니로 물었다.

둘째가 비명을 지르며 상체가 기울여지자 인회군은

박혀있던 여섯째의 단검을 뽑고는 드러난 둘째의 목에 찔러넣었다.

 

파육음과 함께 피가 솟아올라 뜨끈한 감촉이 손을 적셨다.

둘째가 꺽꺽대며 아직 숨이 붙어있자,

인회군은 단검을 직각으로 꺾어 마무리지었다.

둘째의 단말마가 울려퍼지며, 미세하던 몸의 저항이 사라졌다.

 

" 진심으로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

 

신유가 쓰러진 인회군을 자신의 무릎에 뉘이곤 몸을 쓸어내렸다.

신유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는 피가 멎고,

상처는 아물며 기운이 차올랐다. 흐려진 시야는 또렷해져갔다.

 

" 모든 것을 가지신 기분이 어떠신지요? "

 

신유의 가증스런 미소 뒤엔 수많은 검은 꼬리들이 보였다.

북실하고 풍성한 검은 여우의 꼬리. 신유에게서부터 솟아난

그 꼬리들은 침소의 온 천장을 덮고 있었다.

 

" 매구.. 이것이 네 본모습인가. "

 

" 네. 미천한 짐승에 불과하지요. "

 

천장을 뒤덮은 꼬리들을 인회군은 눈으로 따라갔다.

꼬리들 틈새로 내리는 은색 달빛은

시체들을 포식하고 있는 세자를 비추었다.

 

길게 늘어진 꼬리들 중 일부가 대감과 자객들의

뒤통수에 뿌리내려있었다.

 

" 이게 무슨.. "

 

" 허나 전하. "

 

그것은 궁 밖으로도 수없이 이어져있었다.

인회군이 뛰쳐나가니, 침소 밖엔 궁의 모든 인간들이 모여

인회군에게 절을 올리고 있었다.

 

검은 꼬리들은 하늘을 뒤덮어 그 인간들 하나하나에

전부 뿌리내리고 있었다. 신유가 인회군을 따라나왔다.

신유가 움직일때마다 꼬리가 흔들렸다.

 

" 이 모두가 저와 다를바 없는 한낱 짐승으로 보이는 것은 "

 

흔들리는 꼬리에 맞춰 한 인간이 일어나더니,

인회군의 머리에 금빛 왕관을 씌워주었다.

신유는 왕관을 바로 잡아주며 인회군의 눈을 마주보았다.

 

" 저 뿐만이 아니겠지요? "

 

신유는 초승달과 같은 미소를 지었다.

 

 

 

 

 

 

백년이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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