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구의 자리 - 1

 

 

하나의 왕 아래 천년간 번영한, 번영할 나라가 있었다.

이 나라의 왕실엔 특별한 점이 둘 있었는데,

 

첫째로 왕이 영생을 산다는 것이었다.

천년전, 요괴와의 내기에 이겨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왕. 

 

천년의 세월간 그가 익힌 지혜는 그 자체로 논어였고,

그것을 통해 펼친 정책들은 반론조차 없었다.

왕은 그 지혜와 무너지지 않을 왕권으로 실책도 없이

영원한 태평성대를 일궈냈다.

 

둘째론 왕의 옆엔 같은 천년의 세월을 산 요괴가 있다는 것이었다.

왕과의 내기에서 패배해 어떤 것이든 이루어주기로 약속한

요괴 신유(宸遊).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을 한 그녀는 배우자로서 왕을 보필해왔다.

동시에 누구에게나 미소를 짓고 친절히 대하니, 

누구도 그녀가 요괴라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었다.

 

단 한명. 서자 인회군(仁悔君)을 빼곤.

 

 

 

" 문안드리옵니다 전하. "

 

인회군이 인사를 올렸으나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인사를 받지 않았다한들 자식이 먼저 자리를 뜰 순 없는 법.

 

인회군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고개를 숙인 채 그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말이 없어지신지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매일 같이 인사를 올려도 하염없구나. '

 

천년을 통치한 왕의 모습은 그야말로 산 송장과 같았다.

용포로도 가려지지 않는 앙상한 몸은 피부가 뼈에 찰싹 달라붙어

흉했고, 퀭한 눈두덩이 주변은 붉은 기가 있었다.

 

옅은 숨으로 가슴이 미세히 오르내리는게 보였으나 숨만 쉴 뿐인

망자의 모습이었다.

 

왕은 4년 전까지만 건강한 모습이었다.

비록 모든 것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해 일탈을 일삼긴 했으나 

지금과 달리 영생에 걸맞게 기운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왕은 말이 없어졌다.

먹는 것은 최소한의 미음만을 먹었고,

일어나는데도 한 시진이 걸려 모든 것을 자리에 앉아 해결했다.

 

전국에 이름을 떨치는 명의들이 진찰해보았으나

지난 천년간 병환에 시달린 적이 없던 왕이 걸릴만한 병이나 독을

한낱 인간의 지식 따위로 알 수 있을리 없었다.

 

신통하다는 무당이나 명망있는 승려들 역시 설명치 못하는 가운데

 

" 왕의 육신에서 혼이 빠져나갔다. "

 

라고 말한 겁없는 무당의 육신에서 머리가 빠져나간 뒤론

더이상 이를 밝히겠다고 찾아오는 이도 없게 되었다.

 

" ... "

 

일각을 기다렸음에도 왕의 대답은 없었다.

그가 말이 없어진지도 4년이 지나 이미 익숙해지긴 했지만,

받지 못할 답을 위해 신하들 앞에서 묵묵히 서있어야한다는

수치심은 마음 깊이 뿌리내려 심장을 죄이는 것만 같았다.

 

" 이만 인사를 거두어도 좋다 하십니다. "

 

왕의 옆에서 신유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기에 패배해 왕의 옆자리에서 영원히 보필하는 요괴.

흑단과 같은 장발을 지녔으며 백자와 같이 깨끗하고

하얀 얼굴엔 늘 고혹적인 미소를 지녀 보는 이로 하여금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모습이었다.

 

왕이 말이 없어지고 난 뒤 1년간은 무엇을 하든 왕에게 먼저 고하고,

고개를 기울여 왕의 말을 듣고 답하는 "시늉"이라도 했으나

이젠 왕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 예. 그럼.. "

 

그러나 이것에 이의를 재기하는 이는 없었다.

속으로 품고있다한들 구태여 입 밖으로 낼 필요가 없었다.

 

왕이 말을 하지 않더래도 왕위는 그가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흠결이 없었고, 신유 역시 왕과 같이 영원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자.

그녀의 말만 따라도 태평성대는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 그렇다한들 요괴의 손에 멋대로 놀아나진 않겠다. '

 

그러나 인회군만은 신유를 의심하고 있었다.

왕이 말이 없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유가 세자를 배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영원히 이어질 왕의 자리.

 

여자와의 노름질에 서자는 생길 수 있어도

쓸데없이 왕권을 흔들 적자는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신유는 천년간 중전으로 있으면서도

자식을 가진 적이 없었다.

 

 

' 허나, 왕이 말을 잃음과 동시에 세자를 배었고, 태어난 세자는.. '

 

인회군은 김이 잔뜩 피어오르는 수라간의 문을 열었다.

수라간은 수많은 움직임과 소리로 분주해 시끄러웠다.

끊임없이 음식을 만드는 궁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안쪽으론 계속해서 음식이 날라지며 빈 접시가 나오고 있었고

요란스런 소음 사이 억누른 비명이 안쪽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수라간 상궁이 인회군을 알아보곤 바쁜 와중에도

황급히 다가와 공손히 인사하였다.

다른 궁녀들 역시 일제히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 세자께선 어디 계신가. "

 

" 세자께선 안쪽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 "

 

인회군이 상궁의 안내를 받으며 궁녀들이 드나들던

방에 들어서자 비명이 더욱 커졌다.

 

사방에 늘어진 음식물의 잔해들과 빈 접시.

벽에 붙어 일렬로 선 채 두려움에 떠는 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 저..저하.. 아픕..니다. 윽.. "

 

난장판의 한 가운데에선 어린 나인이 세자와 엉켜있었다.

정확히는 발정난 개와 같은 기세의 세자에게 일방적으로

나인의 가녀린 몸은 짓눌리고 있었다.

 

나이가 다섯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열댓살의 나인과 비슷한 몸집의 세자였지만

그 생김새는 투실투실한 아기와 같은 모습이었다.

 

머리는 털 한오라기 없이 짜인 고름같은 찌그러진 모양새였고,

두꺼비처럼 부풀어 툭 튀어나온 눈은 감겨진 사이로

먹과 같이 짙은 검은색이 보였다.

 

비대한 몸은 살구색에 음식물에 뒹굴었는지 살집 사이사이에

음식물이 끼어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할지, 매일 철저히 씻기기에 냄새만은 나지 않았다.

 

세자는 한쪽 손과 몸으로 나인을 짓누른 채 허리를 찍으며,

다른 손으론 쳐든 고개에 접시를 기울여 세자에게 맞춰

조리된 부드러운 고깃죽을 탐하고 있었다.

 

세자의 거친 행위에 나인이 억눌린 비명이나마 지르며 저항하자

세자는 접시를 던지곤 굵은 목에서 나오는,

소의 울음소리 같은 옹알이로 위협했다.

 

"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하... 부디, 용서.. "

 

그러자 세자는 만족한 듯 울상인 채 순서를 기다리는 나인이

내민 접시를 받아 입에 흘려넣었다.

 

다른 나인들은 사시나무와 같이 몸을 떨며 자비를 바랄 뿐이고,

4년간 이 광경을 보았을 상궁도 혐오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 세자저하. 중전마마께서 찾으십니다. "

 

인회군의 말에 세자는 음식이 담겨있는 접시를 던지고 일어났다.

다른 나인들이 곧바로 쓰러져있는 나인에게 다가가 추스려줬다.

 

세자는 거죽과 같은 배를 흘러뜨리며 불만스러운 듯

두터운 눈으로 인회군을 올려다보았다.

 

" 가보셔야지요. "

 

세자를 바라보는 인회군의 눈은 공포도, 혐오도 없이 무감정했다.

짐승이 제 본능대로 행동하는 것에 감정이 휘둘릴 정도로

인회군은 인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무감정한 눈을 똑바로 마주보던 세자는 못이기고 불만스런

옹알이를 하곤, 어깨로 인회군을 밀치며 지나쳤다.

세자가 비대한 몸과 나이에 걸맞지않게 성큼성큼 멀어지자

나인들은 눈물을 훔치고 상궁은 한숨을 내뱉었다.

 

" 나인들을 추스리게하고 정리해두게.

정오엔 또 세자 저하를 맞이해야할테니. "

 

" 감사하옵니다 인회마마. "

 

상궁의 말이 떨어지자 나인들 역시 울며 인회군에게 감사를 전했다.

신유가 세자를 찾았다는 것은 당연히 거짓말이나.

세자는 신유와 왕 앞에선 얌전했고, 신유 역시 구태여

이런 것으로 시비를 걸어 싸움을 일으키는 인물이 아니었다.

 

" 준비하신 것은 여기에 ... "

 

인회군은 수라간을 나서며 죽통을 받았다.

방에서 죽통을 여니 네모난 모양의 약밥 네덩이가 나왔다.

약밥들을 반으로 가르자 한가운데에 돌돌 말린 쪽지가 나왔다.

 

가신(假信)대감이 인회군에게 보내온 쪽지에는

두글자만이 쓰여져 있었다.

 

' 만전 '

 

처음에 불만을 가진 것은 인회군 뿐이었다.

그러나 왕이 입을 열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자 태평성대에

취해있던 대부분의 신하들 사이에서도 불안함이 싹트었고,

인회군은 그것을 노려 그들에게 접촉했다.

 

이후부턴 간단했다.

평화에 찌든 이들의 해밝은 등잔 아래에서 세력을 모은다.

불안감을 부추기기도, 권력으로 회유하기도 하며.

충성을 맹세하는 자는 혀를 자른 뒤 귀양을 보내거나

누명을 씌워 피를 보았다.

 

영민한 자들이 불온한 움직임을 눈치 채고 조사를 시작했을 땐,

이미 인회군의 세력은 커진 뒤였다.

 

그것을 확인하고 나면, 그들은 당연하게도 시대의 흐름을 타러

인회군에게 먼저 접해오는 것이다.

 

' 기다려주십시오 아버지. '

 

어릴적, 인회군이 글을 깨우치기도 전에 총명함을 잃지 않았던 왕.

아버지의 말은 지금까지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 부디 내 목을 잘라다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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