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어떤 연애

나에게는 사람을 질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첫 남자친구는 나와 동갑이었지만 특목고를 조기졸업해서 같은 대학의 한 학번 선배였다. 그는 컴퓨터를 전공했고 말하자면 알고리즘형 인간이었다. 단순하고 명쾌했다. 그리고 자기 전공을 사랑했다. 20대 초반에 벌써 죽을때까지의 대략적인 인생 계획을 세워두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매일 논문을 읽는 모습이 멋있어보였다. 나는  60대 할배가 되면 그때는 VR게임기에 촉감까지 구현될테니까 심장마비로 죽을까봐 공포게임 장르는 그만둘거라는 그의 미래에 자연스럽게 나도 옆에 같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생긴 것도 귀여웠다.
당시 나는 세상 모든 것이 싫지만 해결하기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병신이었다. 성적인 매력도 없었고 입꼬리는 스폰지밥의 징징이처럼 내려가 있어서 늘 우울해보였다. 그럭저럭 잘 지내다가도 문득문득 그가 내게 적지 않은 거부감을 느꼈을 거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우리는 3월 내내 붙어다녔다. 자주 만나서 밥을 먹고 같이 도서관에서 중간고사 공부를 했으며 밤에는 함께 학교 근처 강가를 산책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상으로는 좁아지지 않는 거리에 조바심을 느꼈다. 3살 위의 오빠는 나에게 "여자가 먼저 사귀자고 말할 관계는 이미 망한거다."라고 조언을 했다. 오빠는 썸녀에게 야구장에 가자고 했다가 거절 당하자 곧장 다른 후배에게 야구장에 가자고 해서 그날로 키스를 하고 사귀는 바람둥이였다. 하지만 나는 오빠 말이 입맛에 맞지 않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고민하다가 4월의 어느날 그에게 고백을 하는 강수를 두었다. 그는 당황하더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고 나는 차인 거라고 생각하고 체념했다. 여느때처럼 만화 콘티를 그리고 있는데 그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시간 돼?"
"응."
"어디야?"
"집에 누워있어."
"내가 그리로 갈게. 문자하면 집 앞으로 나와."
"응."
학교 기숙사와 내 자취방이 가까웠기 때문에 그는 금방 도착했다. 우리는 건물 입구 계단에 나란히 쭈구리고 앉았다. 나는 눈치를 보며 그가 입을 떼기를 기다렸다. 그는 앉아서 고개를 다리 사이에 묻고 꽤 오랜 시간 동안 머리를 쥐어뜯었다. 주먹 사이로 나오는 머리카락을 보며 그제서야 내가 무엇을 실수했는지 어렴풋한 느낌이 왔다. 하지만 완전히 깨닫는 것보다 그가 입을 여는 것이 빨라서 나는 그 느낌을 금방 잊어버렸다.
"사귀자."
"정말?"
"..어."
"고마워!"
나는 그를 껴안았다. 나는 정말로 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떨떠름한듯한 동작으로 어색하게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근데 사귄다고 해서 달라지는게 뭐지? 그냥 똑같은거 아니야?"
"사실 나도 모르겠어."
그날 밤 어색하게 손을 잡고 산책을 하며 이야기를 좀 더 했다. 한동안 나는 행복했다. 사귀는 사이가 된다는 것은 남들이 다 보는데서 손을 잡을 수 있고 남들에게 사귀는 사이라고 자랑을 할 수 있고 상대방의 인생에 간섭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점점 불행해졌다.
너무 오래된 이야기라서 헤어지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다. 자기 인생과 생각이 없고 세상을 증오하며 가만히 누워있기만 하는데다가 오로지 남자만을 바라보고 남자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내게 그는 점차 질려가고 있었다.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을뿐이지 마음이 떠났다는 것을 나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결정적인 사건이 하나 일어난다.
"이따가 저녁에 시간 돼?"
"응."
"그럼 저녁 같이 먹을래?"
"그래."
"그럼 7시에 xx역 3번출구 앞에서 만나."
"응."
낮에 내가 연락을 해서 이따가 저녁을 같이 먹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당최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약속시간이 다가올 수록 점점 초조해졌다. 남자의 연락이 없다는 이유로 약속을 깨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해보면 됐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문자를 보내서 멋대로 취소를 통보했다. <연락이 없어서 약속 잊어버린 것 같아서 나 혼자 먹었어.>
아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라는 황망함이 묻어나는 답장을 받았다. 이 날이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달 이내로 이별이 다가온 것 같다.
학기가 끝나고 일주일이 넘게 그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 사이에 오빠가 밥을 사주겠다며 찾아왔다. 서울에 오고 나서 처음 보는 것이다. 동기들에게 맛집을 물어서 고깃집으로 데려갔다. 자리에 앉아서 오빠는 개구진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떻게, 연애는 잘 되어 가냐?"
"아니.. 지난번에 만났을 때 나랑 있는게 지루하다고 했어."
내 말을 듣자마자 표정이 심각하게 변하더니 남자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이미 끝난 관계라고 했다. 나는 고기를 먹으면서 울었다.
잘 마무리 지으라며 오빠가 돌아간 후 그의 SNS를 보다가 멀리 경남에 있는 고향으로 내려간 것을 알았다. 그에게 전화해서 집에 간다고 왜 말을 안 했냐고 하자 그가 말하기가 두려웠다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너는 내가 안 보이면 하루종일 의욕을 잃고 슬퍼하기만 하잖아. 이번에도 그럴 것 같아서 말하기가 두려웠어."
세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마츠코의 세상에 남자 얼굴을 한 달이 떴던 것처럼 나에게도 그랬다. 그가 없는 세상은 온통 암흑이었다. 나는 전화를 하다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코가 막히고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헤어지고 싶은 거냐고 물었다.
"..."
"왜 대답을 안 해?"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처음부터 사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었어."
"그럼 왜 사귄 거야?"
"그냥.. 거절하면 너가 울 것 같아서.. 너가 슬퍼하는 것을 보기가 싫었어."
"헤어지는건 너 방학에 고향 가있는 동안 다시 생각해보면 안 돼?"
나는 매달렸지만 그는 계속 사귀는 것은 마음이 정리가 안 되서 어렵다고 미안하다고만 했다. 결국 헤어지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계속 울었다. 눈이 짓무르고 부어서 잘 떠지지 않을 무렵까지 계속 울다가 난생 처음으로 술을 마시기로 했다. 주량이 감이 안 와서 소주 5병을 사왔다. 책상에 앉아서 깡소주 한 병을 안주도 없이 그냥 들이키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음날 소주가 쏟아져서 푹 젖어버린 노트북과, 그의 SNS에 술냄새가 폴폴나는 오타가 가득한 메세지를 보낸 것을 발견하게 된다.
채팅 기록을 보자 그는 주정뱅이에게 성실하게 답해주고 있었다. 너가 힘들어하니까 너무 슬퍼, 미안해.. 그는 모질지 못했다. 동정심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창피함보다도 그가 답장을 해주었다는 것이 훨씬 기뻤다. 이별이 닥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순순히 헤어지지 못하는 유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헤어지고 약 3학기 동안 나는 아침에 왜 눈을 떠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뭘 해도 사는 것이 재미 없고 바닥에 우울과 슬픔이 덕지덕지 깔린 것 같았다. 하루하루가 막막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 들었다. 겨우 버티기만 하는 것 같았다. 고작 3개월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만나놓고.

 


=후기=
20.6.16
좀 더 길게 쓸 수 있으면 좋을텐데 더 떠오르는게 없어서 여기서 끊음.

1개의 댓글

2020.06.17

처음 헤어졌었을때 2주 갔었고

그 다음 이별이 찾아왔을때 이틀이면 멀쩡해지더라

 

어느 누구한테도 나는 진정으로 마음 쓸 줄을 몰랐고

이태끔이되 나는 아직도 마음쓰는 법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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