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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활에 젖어버린 건 아닌지

38e63679 2017.02.20 199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아는 애가 오티 다녀왔다고 이야기하던데 그게 그렇게 속이 쓰릴 수가 없었다.


유학 가겠다고 그나마 희망있던 수시도 걸렀고, '보험'이라고 자위하며 본 수능도 344를 띄웠다. 그래도 괜찮을 줄 알았다. 전부 보험일 뿐이니까. 유학 가서 잘하면 뭔가 이루어질테니까.


그런데 유학을 못 가게 됐다. 모두 보는 앞에서 보기 좋게 나자빠진 느낌. 생각해보면 자세히 유학 계획을 세워놓은 것도 아니고, 100%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그저 공허하게 '유학, 유학' 소리만 되뇌였다. "나는 유학 갈 거니까 좀 쉬엄쉬엄해도 되겠지, 어차피 외국으로 갈 거니까. 어차피 난 떠날 거니까, 어차피, 어차피..."


스스로 그렇게 되뇌이며 끝없이 나를 속였고, 부모를 속였고, 주변을 속였다. 실체없는 달콤한 말에 어느새 나는 장밋빛 인생으로 가는 티켓을 쥔 사람이 되어있었고, 그런 내게 주변 사람들은 찬사를 마지 않았다. 달콤했다. 정말 달콤했다.


사실 한켠으로는 말도 안 되는 길을 걷고있다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꿈에서 깨기 싫었다. 남들 머리 싸매고 공부할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게 너무 좋았다. 그렇기에 그 말도 안 되는 거짓말에 내 스스로를 속여넘겼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플랜 B라도 세워놨어야 했다. 아주 좋지는 않을지라도 믿고 걸을 수 있는 길을, 나는 닦아 놓아야 했다. 그러나 하지 않았다. 하기 싫었다. 내가 만들어낸 나는 콧대 높은 유학준비생이었고, 그 "콧대 높은 유학준비생"에게 그런 길들은 너무나도 비천해보이더라. 우스운 일이다. 결국 나는 실제로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는 맨몸 고졸이잖아?


내가 의미없는 일로에 젖어있는 동안 주변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손에 잡히는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대학 합격, 조리기능사 자격, 개중에는 아예 영화를 찍어서 이름있는 상을 탄 아이도 있었다. 내가 헛짓거리를 하는 동안 저들은 노력을 했다. 십 여년간 그들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기울였고, 그 찬란한 결과를 손에 쥐게 되었다. 간단하지만 묵직한,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려올때면 속이 참 쓰렸다.


노력의 결과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발가벗은 내 몸뚱이를 마주해야 했다. 실체없는 "유학준비생"은 온데 간데 없었고, 그 자리엔 손에 쥔 것 하나 없는 추한 내가 있었다.


*





...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할 게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무언가 해놓은 게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생기는 법이니까. 그런데 우연찮게 기회가 찾아왔다.


어찌어찌 아는 분이 운영하는 펍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영어 프리토킹을 할 줄 안다는 게 다행이었다. 주 6회 출근에 하루에 근무 시간이 10시간이 넘어갔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무것도 없는 고졸 살덩이에게 월 140이라니, 분수에 넘치고도 훨씬 넘치는 일자리지. 무엇보다도 내가 무언가를 실제로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게 좋았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또 다시 여기에 젖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다. 페이가 좋고 근무환경이 좋아도 아르바이트는 아르바이트다. 이 이상 발전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결국 이 즈음은 내가 무언가를 해야하는 시점인 거다. 그래야만 내가 잡을 수 있는 동앗줄이 내려올 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일을 다니는 요즈음은 정말 행복하다. 이렇게만 계속 살고싶다. 마치 따뜻한 바다에 유유자적하게 떠있는 느낌.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그렇게 고요하게 사는 그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생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해는 떨어지기 마련이고, 해가 떨어지면 바다는 식는다. 뭐가 됐던 너무 늦기 전에 물에서 나와서 다른 어딘가로 떠나야 한다. 떠나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바다에 죽치고 있다간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떠내려가 버리고 말테고, 그 때는 늦는다. 해가 떨어진 바다에 홀로 떠있는 인간에게 삶이란 없다.


그런데도 나라는 인간은 그저 한없이 떠내려간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 지금이란건 알고 있는데, 알고 있는데도 지금이 너무나도 달콤하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5개의 댓글

eea58555
2017.02.20
중간에 브금 뭐야ㅋㅋㅋㅋㅋ미드나잇감성 오지네
0
38e63679
2017.02.20
@eea58555
몰라ㅠㅠ 그냥 일 갔다와서 컴퓨터 켜니까 뭔가 몽글몽글한 느낌이라서 써봄
0
7b2a4637
2017.02.20
씹새 글은 잘쓰네
0
ce626c16
2017.02.20
소설이야? 뭔진 모르것는디 계획이 어처구니없이 무너졌을 때 겪는 슬럼프같은 그런 느낌이다. 지쳐버린 뒤에 찾아온 달콤함에 안주하다가 쇠퇴하는 나 자신에 비난하지만 발버둥치고싶진않다. 다시 지쳐버리지 않을까
0
ac924060
2017.02.20
너말대로 달려야하는 순간이 있음.
자책하는것만으론 부족하다는건 너가 제일 잘 알겠지.
이런 글 싸지르고 나서 그냥 나는 나자신을 알아 그정도로 된거야 라고만 해봤자
달라지는 현실은 아무것도 없고 널 더 옥죄고 기분만 안좋게 할거다.
왜냐하면 내가 존나 그랬거든.

유학이든 재수든 뭐든 너가 가고싶어하는 방향에 대해 조금더 알아보고
필요한게 뭐있는지 조사를 해서 하나씩 하나씩 조금이라도 해보는걸 추천할게.
일하느라 고생했고, 따뜻한 물에서 몸좀 담궜으면 이제 나와서 다시 빨리 달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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