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스압] 우리나라 남아선호사상의 폐해와 그 역사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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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0년대-1990년대에 일어난 사회문제 중 하나이자 현재 결혼대란을 일으킨 만악의 근원. 
대한민국에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수백 만의 여아가 추가로 낙태된 현상을 일컫는다. 
여기서 추가라고 한 말은 그 시절에 산아제한 등의 목적으로 남녀 가리지 않고 낙태가 이뤄졌으나 
그 중에서도 남아선호사상으로 여자가 더 많이 낙태되었단 의미이다. 

이미 1971년부터 30만 건씩 낙태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1975년에 들어와서는 매년 60만 건으로 크게 증가한 상태였고,
1980년대 초반 ~ 1990년대 중반에는 매년 150만 건의 여아 낙태가 이루어 진 것으로 본다. 
 이는 1994년 신생아 수인 72만 8천명의 약 두 배에 달하는 수치이다. 

그러던 것이 2001년부터 엄청난 속도로 줄어 2005년 34만건, 2008년 16만건, 2010년 18만건으로 줄어들었다. 
연간 신생아 수가 40만명 선까지 감소한 걸 볼 때 피임을 사람들이 제대로 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다. 
만약 80-90년대 시절에 이 애들이 모두 다 태어났다면 1980~1996년생의 인구의 총합은 4000만명에 육박했을 것이다. 
그리고 매년이 입시지옥과 청년실업으로 헬과 군대에 안 갈 확률이 높아진다 한국에서 제일 많이 태어난 생년이 1971년이고
102만명인 걸 감안하면 이 시절에 엄청난 인구 조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경과 

1971년 이전

한국은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의 특성상 다산을 숭상하였고 
근대 이전 높은 영유아사망율과 부족한 피임법 등의 이유로 가능한 한 자식을 많이 두려고 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한국전쟁 이후 베이비 붐(1955년 생~1963년 생) 시대까지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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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61년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 2년뒤인 1963년 산아제한정책이 실행되기 시작하면서 
서구의 의료지원에서 비롯된 낙태가 효율적인 산아제한정책의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1980-90년대와 같이 여아가 대량 낙태당해 발생하는 성비불균형은 일어나지 않았다.

196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남아선호사상이 아주 강고해지고 낙태도 20만건 정도로 활성화 되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모든 사람이 낙태를 받을 만한 의료여건이 될 수 없었으므로 경제적 여건을 가진 사람도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결정적으로 성감별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을 낳기 위해서는 우선 낳고 봐야했고 
태어난 딸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 시기에는 딸을 보통 네명 이상. 
그래서 1969년까지만 해도 딸만 줄줄이 네다섯씩 낳고 막판에 아들 하나 낳는 식의 딸부잣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971년이 되면서 점점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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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여아 낙태 문제 발생

1970년, 박정희 정권에서는 둘만 낳자, 덮어놓고 낳다가는 거지 꼴을 못 면한다(...)라는 주제로 산아제한을 본격 확산시킨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1년부터 여아 낙태가 30만건으로 급속도로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사실 1970년대 초반까지는 보통 평균 자녀수 3명 많으면 4명, 적으면 2명이였다.

박정희 정권을 이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매우 높은 강도로 산아제한정책을 실행하였다. 
특히나 이때 서구에서 일어난 멜서스 트랩을 위시한 인구폭탄론이 국내에 대대적으로 회자되었으며 
이에 따른 산아제한정책실시국가에 대한 지원이 전두환 정권의 산아제한정책을 부채질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1명만 낳자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980년의 성비는 105.3:100으로 매우 자연적인 성비였고 
1981~84년까지만 해도 성비는 107-108:100으로 아직까지는 불균형 상태에 이르지 않았으며 
남녀의 성비는 사회학적으로 어느정도 용인한 수준이었다. 
참고로 최대 108:100까지는 위험하지만 사회학적으로 용인되는 수치이다.

그런데 1985년부터 하나의 중요한 변수가 나타나면서 사회적인 상황과 맞아떨어져 
사상 유례가 없는 여아 낙태에 따른 성비불균형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원인은 바로 임신 중에 아이의 남녀 성별이 구별 가능할 정도의 초음파 검사 기기가 이 해부터 국내에서 완전상용화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1986년부터 셋째 이상 자녀는 1,000여 만원의 벌금과 의료보험에 들지 않는 제도까지 시행하면서 일은 더 커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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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성감별 검사 기기가 상용화 되기 전인 1980년대 초반에도 태어난 아이가 딸이면 해외 입양을 시키는 사례가 존재했다. 
다행히도 이 사례의 여아는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부모가 마음을 고쳐 먹고 잘 키웠다고 하지만, 
성감별 기술이 없던 시절에 저 정도였으면, 성감별 기술이 상용화가 된 1985년 이후엔... 

또한 이때부터 3저 호황을 타고 중산층이 늘어나기 시작함으로써 
질 좋은 의료서비스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계층들도 대거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산부인과마다 성별 감식부터 낙태 시술까지의 일련의 절차가 300만~500만원에 거래되었고 
그나마도 예약이 잔뜩 밀려 몇 달씩 기다리는 것이 예사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제동장치가 없었다. 여성계는 서구의 경험만을 생각하고 
이미 1973년에 산아제한정책에 협조하였으며 동시에 낙태를 권장하기도 하였다. 
이렇기에 아직 한국에 남아있는 뿌리 깊은 남아선호사상을 변화시키지 못하였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회문제는 민주화에 밀려 대부분 이슈화되지 않았고 정부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1986년 종교계와 뒤늦게 심각성을 느낀 여성계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고 
정부는 이에 따라 모자보건법을 개정, 1987년에 사전 성감별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낙태는 근친, 부모유전병, 산모의 건강침해 등의 사유만 허가하고 
임신 28주일을 넘긴 산모의 낙태는 모자보건법상 예외없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여아 낙태의 경우 대개 28주 이후여서 마음만 먹으면 쉽게 단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여전히 산아제한정책의 기조를 이어갔고 
이는 노태우 정권에서도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단속이 돼도 처벌은 미미했던지라 시한을 초과한 낙태시술이 빈번하였다.

그 뒤 김영삼 정부 시절 성비불균형이 위험수준에 이르게 된 것을 깨닫고 강력한 단속을 벌였지만 
이미 때는 늦어 이러한 풍조는 끝나지 않았고 1990년~1994년에는 남녀 성비 불균형이 매우 심했다. 
특히 1990년은 '백말띠의 해' 라 하여 이때 태어나는 여아는 팔자가 드세다는 근거없는 속설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116.5:100 라는 기록적인 성비를 기록했다.

또한 단순 통계로만 알 수 있었던 이 성비불균형 문제는 1985년 생~1989년 생이 취학연령이 되는 1990년대 초중반에 들어 
초등학교 한 반에 남-남 짝궁이 급격히 증가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마침내 1994년에 방영된 드라마 M에서 낙태를 소재로 하여 사회에 높은 경각심을 심어주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남아선호사상의 풍조는 1980년대 중반부터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1990년대 후반까지도 계속되다가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고 출산율이 급감하면서 사그라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여아선호로 이어진 건 아니고 그냥 아들딸 가리지 않고 키우는 수준이라 남자아이가 세 명, 네 명씩 태어나도 그냥 키웠다.


그러나 성비의 불균형은 2015년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출생성비가 사회학적으로 자연적인 수준의 성비인 106:100으로 맞춰진 것은 11년뒤인 2007년부터였고 
이후 4년뒤인 2011년에 들어서야 105:100으로 1980년 이후 31년만에 완전한 자연성비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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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아이의 출생성비 추이' 이지만 글 이해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서 첨부합니다.)


3. 원인

기본적으로는 장손을 원하는 사람들의 남아선호사상과 정부가 인구억제를 위해 
산아제한 정책을 밀어붙이는 상황이 겹쳐지면서 일이 커져버린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태아성감별을 가능하게 만든 초음파 기기의 상용화도 낙태를 일으키는 중요원인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경제발전에 따른 생활수준의 향상, 이에 따른 의료서비스의 대중화, 사회적 제동장치나 인식의 미비 등도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아직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게 남아있던 당대의 시부모 세대들은 아들 낳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겼고 
남아를 낳지 못하는 것을 며느리 탓으로 돌려 압박을 가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며느리를 학대하거나 이혼을 요구하는 사건이 이따금씩 있어왔다. 
물론 생물 시간에 졸지 않은 사람이라면, 태아의 성별이 결정되는 데엔 모체는 큰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 것이다! 

남성의 정자가 아이의 성별을 결정하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남성이 직접적으로 아이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한마디로 말하면 아이의 성별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또한 한국 특유의 전통적인 남아선호사상 속에서 교육 받고 성장해온 당시 젊은 여성들의 인식에도 
'그래도 아들은 필요하다'는 생각이 존재하고 있었다. 
다만 남아선호사상이 주요 원인으로 파악을 할 수 있어도 모든 원인의 근본이라곤 할 수 없다. 
만약 남아선호사상이 문제였으면 이미 과거부터 출생성비불균형이 상시화 되었어야 한다. 
하지만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출생성비는 항시 자연성비를 유지하였다.

게다가 1971년도에는 정부는 한 가정당 2명만 낳도록 권장하는 정책을 실시하였고 
이후 1980년도에는 1자녀까지 자녀를 줄이도록 권장하였다. 
이런 정책이 나온 이유 중 하나는 출생이 억제되어야 경제가 성장한다는 논리가 기승을 부렸던 영향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 시술은 이미 산아제한정책의 가장 중요하고 손쉬운 수단 중 하나였다. 

이미 1970년부터 낙태율이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던 대한민국은 
1977년 출산 1건 대비 낙태 2.75건이란 기네스북에 등재된 경이적인 낙태율을 보여주었다. 
원래 산업혁명 당시 유럽에서 사용된 일반적인 산아제한정책에선 낙태 같은 사후피임도 하나의 수단이었지만 
콘돔과 같은 사전피임의 확산과 대중화가 주요수단이었다. 
낙태에 따른 산모의 사망위험성이 높았던 만큼 사전피임이 주요 골자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효율성을 중요시한 당시의 독재정권은 낙태를 선호하게 되었고, 법으로는 일단 불법이지만 
사실상 정부에서 눈감아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단속도 허술하고 처벌도 미미한 편이었다. 
더불어 산부인과 측에서도 돈을 벌 수 있으니 암묵적으로 동조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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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경제발전에 따른 생활향상과 기술발전도 주요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우선 1980년대 중반부터 일어난 이른바 3저 호황으로 인해 대대적으로 국민 전체의 삶의 질이 향상되어 중산층들이 대거 양상되었다. 
이는 낙태에 필요한 재정적 여건을 만들어주는 밑거름이 된다. 동시에 이런 생활수준의 향상은 의료서비스의 질도 향상시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진료가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 또한 낙태에 필요한 사회기반적 여건을 조성하는데 일조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술됐듯 기술 발전에 따른 초음파 검사를 통한 효율적이고 완전한 태아성감별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1970년대 서구에서 제시했던 멜서스 트랩과 같은 '인구폭탄론'과 
미국식·유럽식 경재발전론에 입각한 여권신장을 숭상한 서구식 여성주의(여성해방운동)의 결합이 
아시아의 후진국에게 정책적 압박과 동시에 서구의 대대적인 의료지원과 맞물려 
낙태를 효율적인 산아제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결과를 초래시킨 것도 하나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애초에 박정희 정권 당시 낙태가 활성화된 것에는 서구의 낙태에 대한 의료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산아제한정책에 대한 UN의 재정적 지원은 전두환 정권이 산아제한정책을 실시하도록 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결국 아이를 많이 낳으면 사회의 눈총을 받고 남자 아이를 낳지 못하면 시부모의 눈총을 받는 상황에서 
동시에 여성 스스로도 아들이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겹쳐 성감별이 가능해진 상황에서 낙태 시술에 대한 접근성 역시 높았던 탓에 
결국 여자아이를 가지면 낙태해 버리는 일이 자주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만악의 근원이 시작되었다.



 
4.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4.1. 현재

2000년대에 들어서 현재 한국에서는 대부분 남아 선호 사상과 관계없이 딸이든 아들이든 구별하지 않는 분위기로 변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사회문제는 사실상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으로 판단된다. 출산율 자체가 급격히 낮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위험성은 존재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학자들도 있다. 
실제로 너무 심하게 줄어들은 출산률 때문에 구별없이 아이를 하나만 낳는 집안만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판단도 있다.


가장 먼저 남초 현상이 심각해졌다. 
특히 여아 낙태문제가 본격적으로 발생하기 시작했던 1985년생~1996년생은 대한민국 건국이래 최악의 남초현상이 나타나고야 말았다.
망했어요 급기야 1990년, 1993년~1994년에는 각각 출생성비가 무려 116.5, 115.3, 115.2까지 벌어져 문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경제개발기간 동안 이촌현상으로 여성이 빠져나간 농촌의 남초 현상이 더욱 심각해지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남초 현상이 심각해진 농촌을 중심으로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국제결혼이 빠르게 늘어났으며, 현재도 계속되는 추세이다. 
물론 도시 지역 역시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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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급제 결혼정보회사와 같은 결혼 선호도의 변화 같은 일로 공업도시에서도 성비 격차와 더불어 
결혼할 여자를 못 구하는 남성들이 속출하기 시작하면서 공업도시를 중심으로 36~44세의 노총각까지 국제결혼이 확산된 상태이다. 
이미 2010년 기준으로 국제결혼에서 공업도시가 차지하는 비율이 70%까지 늘어난 상황이다.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모쏠남이 요즘 많이 출현되고 있고, 대다수의 젊은 남성들이 결혼을 할 사람은 커녕 
애인조차 구하지 못하게 된 현실에 자조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도 당시 여아 낙태 문제의 여파가 곪아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낙태 문제에 대한 공론화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모자보건법에 기초한 낙태죄 논란에서도 여성계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데 실패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때의 기억으로 낙태자율화에 대한 대중의 거부감이 커져 낙태찬성측에게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게 되었다. 
더욱이 낙태찬성측의 논리는 태아를 여성 신체의 일부로 본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논리인데 
성감별을 통한 여아 낙태는 태아에 성별을 부여함으로써 태아를 인간으로 보는 근거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태아를 여성의 신체의 일부분에 불구하다면 성을 부여할 이유가 없다.

다만 이런 여파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낙태가 음성적으로 광범위하게 활성화되어 '낙태 공화국'이란 비아냥이 여전하다. 
물론 이것은 정부의 산아제한정책으로 형성된 낙태에 대한 인식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는 여아 낙태 대한 기억으로 낙태에 대한 거부감이 늘었지만 
동시에 낙태에 대한 의료서비스의 대중화로 접근성이 너무 높았던 것에 기인할 것이다. 
그리고 이 당시 여성계나 정부에서 성의 개방화, 사전피임에 대한 대중화와 인식전환에 소흘히 하여 나타난 문제가 바로 오늘날의 10대 임신 문제다.

한편 여아 낙태로 인한 성비 불균형의 여파로 2005년 제정된 생명윤리법에서는 
수정 및 착상 단계에서의 아이의 성별을 감별하는 출산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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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전망

긍정적인 전망과 부정적인 전망이 섞여있는 상황이지만 부정적인 전망이 훨씬 더 많은 편이다. 
긍정적인 전망으로는 대표적으로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결혼시장에서 여성의 중요성이 높아짐으로써 여성의 가치가 상승하고 여권이 신장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또한 이런 여성의 중요성 부각으로 여아의 출산률이 높아지고 여성이 좀 더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적인 전망은 이보다 더 심각하다. 
우선 산업이 극도로 발달하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진 현대에서
 여권 신장을 과연 결혼시장에 한해서 볼 수 있느냐는 비판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렇게 높아진 가치만큼 그 가치를 빼앗거나 쟁취하기 위한 경쟁도 심화될 수 있다는 점도 지목된다. 
수요공급 원리에 따른 판단 자체가 여성을 상품으로 보는 시각이라는 비판도 있다. 
성 상품화와 더불어 여성의 영향력이 더욱 줄어들어서 여성의 인권이 더욱 나아지지 않는 방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남녀차별 문제도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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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불황과 남초사회로 인한 경쟁과다로 되려 낙오되는 여성들 또한 속출할 것이란 견해도 존재한다. 
실제로 남성들에게 "이미 세상은 남초로 된 현대사회의 상황"을 넌지시 인식시키면
자신이 원하는 여성을 얻기 위해서 경쟁을 더욱 치열하게 했다는 심리학계의 연구결과가 있으며,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여성에게는 투자를 아끼지 않았지만 
자신의 목적에 방해가 되는 경우, 더욱 지독하게 내쳐버리는 모습까지 보였다고 한다. 

물론 상대가 같은 남성이라도 쳐내는 건 설명이 더 이상 필요한지? 여기서 현대사회의 경쟁의 폐해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 경제인구의 남초로 인하여 남성의 영향력은 증가하고 여성의 영향력은 더욱 감소하게 될 것이란 예측도 존재한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나라를 유지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경쟁에 직접 참여하여 생산을 행하는 세대이니만큼 
더 많이 참여하고 더 많이 생산하는 쪽이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2010년대 들어 1980년대 중반 생~1990년대 중반 생이 20~30대에 접어들기 시작, 
즉 결혼 및 가임 연령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IMF와 글로벌 경제위기 등으로 인해 벌어진 취업난을 비롯해
경제인구의 역동성 저하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런 남초현상까지 겹쳐서 초고령인구 사회로의 진입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 외에도 음성적 성매매의 증가, 성범죄의 증가, 국제결혼 증가와 
이에 따른 반작용, 남성의 여성혐오증 등의 반작용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남아 선호 사상에 따른 남녀성비의 불균형은 결혼대란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된다. 
물론, 결혼을 못하는 것에는 성비의 불균형 말고도 결혼에 대한 인식의 변화나 경제적인 문제 등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결혼대란은, 직접적인 1차적 문제점인 성비의 불균형 때문에 결혼을 못하는 것을 지칭하며, 
경제적인 문제점의 경우 삼포세대에 해당한다. 

90년대생들이 결혼적령기에 가까워지는 2020년이 될 경우, 장기적으로 보면 경우의 수는 두가지로 나누어진다. 
남성들이 아예 결혼을 포기하거나 거부하며 혼자 사는 것을 지향하는 독신자 숫자가 급증할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 사회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독신에 대한 시선 자체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젊은층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으며 업체를 통한 국제결혼도 바람직한 해답은 아니기 때문에 
결혼 자체에 대한 집착이 사회적으로 점차 떨어지게 되어 독신자들이 급증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그리고 국제결혼의 대규모 증가가 일어날 수도 있다. 
다만 국내 남성의 국제결혼의 경우 상당수가 연애결혼에 의한 국제결혼이 아니라는 게 문제. 
당장 통계청의 자료만 봐도 국내 남성의 경우 국제결혼시 과반수 이상이 중국, 동남아권 여성과 결혼한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연애 결혼에 의한 국제결혼이 아니라 알선 업체를 통한 결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더군다나 알선업체를 통한 국제결혼도 결국 돈이 있어야 한다. 

매매혼, 즉 해당 문제가 해결되려면, 80~90년대생들이 결혼적령기가 지나고 
노년층에 접어드는 2040~2050년이 되어야 사회적인 문제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남초인 해당인구가 노년기가 되어서야 성비균형이 이뤄지는 웃지못할 현상을 예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현재의 성비 불균형 문제와 스펙 경쟁 문제는 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이후 세대라고 해서 결혼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당장 성비불균형 출생률만 해도 어느 정도 해결된 건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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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 이외의 국가

사실 출생성비가 파괴된 나라 자체는 몇 개국 안된다. 
2010년 이전의 한국, 중국, 인도, 베트남, 아르메니아, 대만 등 10여개 이하. 
문제는 이들 10여개 이하의 나라가 차지하는 인구 비율이 후덜덜.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흑인들의 경우 상대적으로 남아가 적게 태어난다. 
여초로 태어난다는 말이 아니고 남녀 출생성비가 1:1에 가깝게 되어, 다른 인종에 비해 남아 출생률이 낮은 편.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결혼 지참금의 문제 때문에, 중국에서는 아직도 팽배한 산아제한정책의 여파로 인해 현실진행형의 문제이다. 
이로 인해서 신부 매매는 물론이고 중국에서는 심지어 조혼 풍습까지 부활하고 있다.

다만 인도에서는 이런 문제로 인해 카스트 제도가 약화되는 순기능도 있다고 하며, 
동남아시아에선 극빈층을 중심으로 여아 출산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도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인도의 경우 높은 카스트의 남초가 심하여 
상대적으로 성비가 안정된 낮은 카스트의 연인들과 결혼하게 되면서 생긴 일이며 
동남아의 경우 국제결혼으로 경제적 혜택을 입은 저소득층 가정이 이를 보고 여아 출산을 늘린 것이니 
둘 다 여성을 남자보다 하급 계층으로 고착시키는 것으로 절대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일본도 겉으로는 여초사회이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란 분석이 있다. 
미군정 시기에 실시된 산아제한정책에 의하여 단카이 세대의 남초화와 일본 적군파의 몰락과 함께 
진보 여성계도 동반 몰락하는 상황이 겹치면서 세계에서 여성임원이 되기 가장 어려운 나라로 꼽히고 있으며 
일본에서 나타나는 여성에 대한 적극적인 성 상품화에는 이런 요인도 일정부분 작용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종교, 지역을 넘어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아르메니아,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알바니아에서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은 지정학적, 종교적, 사회적 유사성이 거의 없는 국가인데도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오직 경제가 한창 발전 중인 개발도상국이면 산아제한정책을 실시하고 낙태가 자율적인 것 외에는 없다.

당연히, 이런 현상을 겪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음성적인 성매매의 광범위한 활성화로 에이즈 등의 성병 전파가 증가되는 등 
사회적 문제는 위험수위에까지 이르고 있다. 선진국이라면 성노동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성병검사를 하고 
이것은 잘 지켜지지만 저 문제가 일어나는 곳들이 일본으로 제외하면 대부분 개발도상국이다.


낙태11.jpg



더욱이 놀라운 것은 미국, 캐나다에서도 아시아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캐나다에서 아시아계 이민 1세대의 출산률을 조사한 결과 비정상적인 남초현상이 나타났다는 것.  
이것도 일본계나 필리핀계는 성비 불균형 출산 문제가 없고,중국,한국,인도계가 가장 심하다. 근데 이 셋 중에서도 한국이 제일 심하다. 

또한 미국에서도 아시아 이민자들을 중심으로한 태아성감별 낙태가 나타나 
오바마 행정부도 성감별 이후 낙태를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였으나 
진보단체와 아시아계를 중심으로 한 여성단체의 반발로 의회에서 부결된 사례가 있다. 
다만 하원에선 20주 이상 태아 낙태금지 법안이 통과된 상태이며 일부 주에서도 낙태 규제를 강화하는 상황이다. 
최근에 일어난 텍사스 주의회 필리버스터로 낙태법안을 무산 시킨 사건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출처 : mirror.enha.kr/wiki/80-90%EB%85%84%EB%8C%80%EC%9D%98%20%EC%97%AC%EC%95%84%EB%82%99%ED%83%9C%20%EB%AC%B8%EC%A0%9C



12개의 댓글

2015.05.30
어느 동물의 세계에서든 여자가 많아야 안정됨.

그렇다고 여자들이 꼴페미가 되면 노답이겠지만...
0
2015.05.30
@혼세마왕
보통 생물들 세계에서는 자연적으로 암컷보다 수컷이 더 많다

씨 받는 거 보단 씨 뿌리는게 일단은 유리하거든
0
2015.05.31
@머라이어게이
포유류는 수컷 사망율이 더 높아서 번식연령쯤 되면 성비 맞춰지거나 여초화됨
0
2015.05.31
@저런저런
남성호르몬의 위엄인듯.....
0
2015.05.31
@혼세마왕
여자가 많으면 꼴페미가 될래야 못됨.
여자가 아쉬워지지 남자는 아쉬울게 없어짐
0
2015.05.30
특히 1990년은 '백말띠의 해' 라 하여 이때 태어나는 여아는 팔자가 드세다는 근거없는 속설이 나돌고 있었기 때문에 116.5:100 라는 기록적인 성비를 기록했다. ....

이런 슬픈 현실이..
0
2015.06.01
@Penta
하.. 나도 백말띠남잔데.... 어쩐지 초등학교때 여자애들이 그렇게 없더라니;ㅠㅠ 남자 20명정도에 여자 15명 정도로 기억하는데..
결혼 못하겠네 ㅅㅂ
0
2015.06.01
@호도
그래도 89년생엔 여자많더라 ㅠ
0
2015.05.30
너도 나무위키 써..
0
2015.05.30
@반대론자
구글 검색으로 상단에 뜨는 걸 쓸 뿐이지 안 쓰는 건 아님ㅎㅎ
0
2015.05.30
아기학살자들
0
2015.05.31
개드립에서 쓰루디에이지스 카드를 볼줄이야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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