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근 출간된 하루키 소설 1Q84를 읽으며 나는 다시 한 번 그의 글에 감탄했다. 어느 작품이건 그의 글에는 정보와 개연성은 있지만 현실감이 없다. 사실이지만 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 그만의 독특하지만 매우 구체적인 상황 묘사로 인해 사실이 된다. 또한 하루키 소설은 대부분 대사에서 묘사를 하고 묘사에서 대사가 파생된다. 지문과 대화의 구분이 명확치 않게 뭉뚱그렸다. 여기서 하루키만의 독특함이 일부분 파생된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리고 파괴성 또한 생겨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분명히 보통 파괴적인 것에는 무릇 현실성이 지나치게 개입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의 글에는 그것이 없다. 지나치게 없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존재하지 않는다. 삭제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없는 것뿐이다. 사실이라는 것이 분명 존재하여 그것이 와 닿지만, 분명히 현실에 개입되지는 않는다. 그러한 파괴성이란 현실을 파괴하지 않는다. 사실이지만 현실이지 못한 생각, 사상을 파괴한다. 겉으로 보기엔 유하지만 실제로는 극단적인 파괴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나인인치네일스’의 음악과 그 성격이 비슷하다. 하지만 다른 점은, 이 음악은 그저 공격할 뿐이라는 것이다. 파괴하지 않는다. 오로지 공격. 그로 인해 붕괴되지 않고 그것을 받아낼 뿐이지만, 하루키의 글은 분명 다르다. 공격적이지는 않다. 아니,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파괴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해체하게 만든다. 그것은 시가 가지는 속성과도 비슷하지만, 훨씬 강하게 와 닿는다. 유하게 읽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하루키의 소설 중 가장 유명한 ‘노르웨이의 숲’보다 다른 작품들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이 속성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작품에서 정점을 찍는다. 사실이지만 현실이 못되는, 두 세계가 맞물려 위의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내어 와 닿는다. 그로 인해 내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루키의 책들은 다 읽고 난 뒤 뭔가 남는 것이 없다, 아니 그래 보인다. 그저 해체되고 다시 구축되고를 반복 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강력한 상징적 행위이다. 고도의 자아성찰을 가능케 하는 행위인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파괴성에 거북함을 느끼거나, 그 자체를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이것은 분명 잘못되거나 틀린 것이 아니다. 현실이 아닌 것을 받아들이지 못함에 그러한 것들이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전에 볼 수 없었던 파괴성, 그로 인해오는 무력함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 이다.
1Q84 나오자마자 읽어보고 썼던 글인거 같은데 지금 보니까 횡설수설하네 쩝쩝
쮸뿌쮸쀼
오니지랄
갱까돌이
그리고 뭔가 불편한 기분이 들면서 계속 하루키책을 찾아 읽었다.
그러면서 그시절 연애의 실패, 앞날에 불안함, 입대등과 맞물려 무기력하고 염세적인 기분을 많이 느꼈다.
그후에 군대에 가서도 계속 하루키책이 나올때 마다 읽었는데,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면서 조금 다른 느낌을 받았다.
무기력하고 염세적인 글에서 무언가 희망을 느꼈다고 해야하나?
암튼 난 그랬던거 같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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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부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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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날 불륜 근친 붕가
관능소설의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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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ㄴㅇㄹ
드립은내가친다
이과
하루키의 문장은 매력적이지만
저 두 가지 만으로 모두 무용지물이 되버림.
..나도 하루키는 별로더라
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