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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의 개전

 

햘마르 샤흐트는 전시체제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결국은 생산성의 저하와 경제력의 약화를 야기하며 군비는 순수한 지출이라는 것을 내세워 히틀러의 전쟁야욕을 비판했다. 이 일로 히틀러의 노여움을 사 그는 1939년 이후 실질적인 권한을 모두 잃게 되었다. 반대파를 억누른 히틀러는 193991일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영국과 프랑스가 대독(對獨) 선전포고를 결의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본래 히틀러는 일생동안 가장 감격적이었던 순간 - ‘위대한 조국'독일 제국이 적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던 그 순간을 재현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이었으므로 이것은 그의 집권 당시부터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고 하겠다.

 

이탈리아의 지도자이자 파시즘의 사상적 아버지 무솔리니는 이미 위대한 로마 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기치 아래 대전의 발발 이전부터 아프리카 등지에서 침략전쟁을 벌여오던 판국이었다. 1940년 프랑스 전역 참가, 그리스 침공, 북아프리카 침공 등을 자행했으며 1941년에는 독일의 대소(對蘇)전이 개시된 6일차부터 소련 전역에 이탈리아군을 파병하였다. 루마니아의 친독 독재정권을 이끌던 이온 안토네스쿠 역시 루마니아군을 소련 전역에 파병하여 독일 동맹군의 중핵이 되었다.

 

한편 독일과 이탈리아, 루마니아나 헝가리가 파시즘 사상을 기반으로 서유럽 자본주의 국가를 위협하는 세계 공산주의의 본산 소련을 격파하여 공산세력을 말소하겠다는 일념으로 소련 전역을 개시한 것과는 달리 일본은 소련 전역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독일은 방공 협정을 체결한 일본이 연합군의 구호물자가 하역되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동시베리아를 공격하기를 바랐으나 일본은 1941127일 진주만을 공습하고 대미(對美) 선전포고를 통해 태평양 전쟁을 개시했다.

 

2차 세계대전의 자세한 사항은 이미 다루어진 것이 많고, 본 연작은 파시즘이라는 사상에 집중하기 위하여 개전 이후의 경과에 대하여는 더 다루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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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세계대전의 개전. 수많은 인명이 살상된 인류 최악의 전쟁이었다.>

 

종전 후의 파시즘

 

2차 세계대전의 종전, 특히 파시즘을 주요한 정치철학으로 채택하였던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 등 추축국의 패전은 파시즘이라는 사상의 향방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 추축국이 대전 기에 자행한 전쟁범죄가 파시즘 체제 때문이었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파시즘 자체가 금기시되었으며, 누가 보아도 파시즘 이론을 계승한 정책이라고 할지라도 파시즘과는 다르다고 주장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1945년 이후의 정치철학사() 연구에 있어서 파시즘에 관한 논의는 매우 중구난방으로 진행되었는데, 파시즘이라는 단어의 오용과 남발, 파시즘에 대한 배척과 부정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더욱 알기 힘들게 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세계 각지에서 영향력을 키워나갔으며, 세계 역사의 발전에 좋던 나쁘던 빠질 수 없는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이에 다음 문단부터는 1940년대 이후 세계의 파시즘 역사를 다루고자 하며, 아직도 많은 역사의 논쟁과 과제를 남겨둔 영역이므로 필자의 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 보다는 독자 여러분의 역사와 정치철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는 양분으로써 삼아 주십사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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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전범 재판.>


 

전후(戰後) 일본에서의 파시즘

 

전후 햘마르 샤흐트가 남긴 파시즘적 국가금융정책의 유산을 가장 빨리,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흡수한 국가는 일본이었다. 과거 라이히스방크에서 연수하며 직접 파시즘적 관치금융이 국부를 증진시키고 산업을 활성화시키는 것을 목격한 일본인 이치마다 히사토(一萬田尙登)는 샤흐트가 분석한 공황의 원인이 일본 경제가 실패하고 있는 원인과 동일하다고 생각했으며, 이에 샤흐트의 정책을 배워 일본에 적용시키고자 했다. 열렬한 샤흐트 숭배자였던 이치마다는 전후에 일본은행 총재가 되어 1950~1960년대의 일본경제재건과 부흥을 주도했다.

 

파시즘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는 긍정하지만(이것이 공산주의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모두 사회주의 사상이지만, 공산주의가 인민을 자본가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양분하고 양자 간 갈등을 필연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반면 파시즘은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모든 계급이 협력하여 국체의 보위를 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필요한 자원의 낭비를 막고 계급 간 분열과 갈등의 조장, 금권을 이용한 국가권위의 침탈 시도 등을 완전히 배제하기 위해 기업과 금융 전반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상정한다. 이것은 샤흐트가 추진한 개혁과 일맥상통하는데, 이치마다가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치마다는 경제 재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본의 기업을 국가가 주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국가가 기술개발과 상품의 경쟁력 향상을 직접 돕는 기업 친화적 정책을 시행하는 단계를 넘어서, 아예 국가가 기업을 강력히 쥐고 통제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치마다는 샤흐트의 방식을 고수하여, 기업의 자금줄인 시중은행을 통제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라이히스방크에서의 연수 동안 샤흐트가 시중은행을 어떻게 통솔하는지 지켜보았던 그는 시중은행에 대하여 정부채권 매입을 강요하였으며, 자본의 융자처와 대금액을 모두 일본 대장성(大蔵省)이 결정하고 시중은행은 이것을 반강제적으로 따르게 함으로써 자본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이에 따라 자연히 기업의 자본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장성에 국가예산을 총괄하고 재정 및 금융정책 전반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가장 막강한 행정기관이 되었으며, 일본은행은 막후에서 이를 돕는다는 일본 특유의 국가통제 관치금융 체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체제는 완전히 잿더미에 나앉았던 일본 경제를 불과 수십 년 만에 미국을 추월할 가능성까지 점치게 할 정도로 성장시키는 것에 성공함으로써 그 저력을 세계에 과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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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마다 히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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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재판에 출석한 햘마르 샤흐트.>



동아시아에서의 파시즘

 

일본 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네 마리 용, 곧 홍콩, 싱가포르, 대만, 그리고 우리나라가 고도의 성장을 이룩했다. 특히 홍콩, 싱가포르, 대만, 대한민국은 과거 일본과 같은 제국주의 열강도 아니었고, 피지배 국가로 착취당하여 일본만큼의 기술적·인적 자원조차 없는 백지 상태에서 출발하여 일본을 거의 따라잡는 성장을 이룩했다는 점에서 학계에 충격을 주었다.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공통적으로 노정(露呈)하는 경제와 정치의 특질은 동아시아 발전모델이라고 불린다. 동아시아에서의 경제발전이 단지 자유로운 시장경제 체제를 유지하여 기업이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한계가 있었기에, 일본의 경제를 연구했던 경제학자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자본주의 발전국가론을 도입하여 동아시아 발전모델을 설명하고자 시도했다.

 

헝가리의 경제학자 벨라 발라싸(Bella Balassa)는 동아시아 발전모델에서 국가가 저율의 물가상승을 유지하고 경제적 안정을 추구하며, 인적 자원의 양성, 효율적이고 국가가 강한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금융체제의 달성, 가격 왜곡의 제한, 외국 기술에 대한 습득을 위해 노력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분석했다(The Newly Industrializing Countries in the World Economy, Elsevier Science & Technology Books, 1981).

 

MIT대학의 교수이자 경제학자로서의 식견도 높이 인정받는 앨리스 암스덴(Alice Amsden)은 국가가 경제에 개입하여 강력한 권위를 통해 환율, 금리, 물가의 삼위(三位)를 통제하고 투자 순위를 효율적으로 지정하여 기업을 강제적으로라도 참여시킨 것이 동아시아 발전모델, 특히 대한민국의 성공의 요인이었다고 주장한다(Asia's Next Giant: South Korea and Late Industrializ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발전국가론의 창시자 찰머스 존슨은 동아시아 발전모델의 성공 원인을 기업에 친화적이면서도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기업보다 상위를 점하고 자율성을 유지하는 국가나 관료기구가, 자원의 배분 및 투자 순위의 결정에 관한 성공적인 산업정책을 실시한 것에서 찾는다(MITI and the Japanese Miracle : The Growth of Industrial Policy 1925-75,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2).

 

즉 강력한 권위를 지닌 국가가 수출주도형 산업화와 공업 육성에 대한 국가계획의 실시, 해외기술의 습득 지원(국비 유학생을 파견하거나 기업의 연수를 지원하는 등), 인적 자원의 육성(국민교육과 대학에 대한 지원 등), 국가 자원의 효율적 배분과 자본 투자의 우선순위 결정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것이 동아시아 발전모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라고 분석하는 것이다. 명칭과 실행주체는 상이할 지라도 동아시아 발전모델은 궁극적으로 파시즘적 경제개조에 기반을 둠이 부각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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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네 마리 용. 지금은...?>


 

파시즘의 좌익적 색채

 

파시즘은 금융 및 재계 전반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 강화를 주장할 뿐 아니라, 발생한 국부의 분배에 관한 것 역시 규정한다(많은 이들이 모르고 있는 부분이다.). 파시즘이 국가의 위에는 아무 것도, 국가의 아래에는 모든 것이라는 문구로 요약될 정도로 국가에 강력한 권위를 부여하는 까닭은 어떠한 사회·경제적 주체도 국가권력을 좌지우지하거나 왜곡시키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파시즘이 19세기 후반, 거대 자본가들이 국가의 권위보다 강대해진 금권을 악용해 경찰이나 군, 정계와 결탁하여 노동자를 착취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에 대한 개조를 외치며 처음 등장한 사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파시즘에서 국가권력의 강화와 절대적 권위의 부여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며, 당연하게도 발생시킨 국부를 사회에 분배하는 일까지도 규정하는 것이다.

 

파시즘은 국가의 발전과 국부의 창출을 위해 계급투쟁을 부정한다. 대신 계급 간의 갈등과 투쟁은 불필요한 사회적 낭비를 초래하므로, 모든 계급이 국가의 지휘 아래 하나의 국체로 협동을 추구해야 한다는 협동주의를 주창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각 계급이 같은 국가에 소속된 같은 국민이라는 동질감을 느끼는 것이 필요하며,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나 상류층의 사유화 현상은 이를 심각하게 저해하기 때문에 파시즘에서의 부의 분배는 이러한 현상이 발생할 가능성을 최대한 배제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우선적으로 파시즘은 노사 관계에 있어서, 노동자가 사용자(자본가)보다 태생적으로 불리한 위치임을 인정한다. 협동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권위를 지녀야 한다는 믿음 아래 파시즘은 노동자의 권위를 인위적으로 사용자와 같은 수준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자 하는데, 이것은 노동조합의 창설 지원, 노동조합의 운영에 대한 지원과 사측의 농간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철저한 국가의 감시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파시즘은 좌익적 색채도 짙게 드러내는데, 이를 일컬어 좌경화된 파시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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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와 자본가의 불균형한 관계. 파시즘에서 국가는 강력한 권위를 활용하여 이것을 교정하는 의무를 지닌다.>


 

아르헨티나의 파시즘

 

동아시아 발전모델에서는 국가가 강력한 통제력을 지닌 한편 기업에 친화적인 정책을 펼치는 우경화된 파시즘이 큰 영향을 미쳤다면 남아메리카, 특히 아르헨티나에서는 좌경화된 파시즘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43년 군부 쿠데타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on)은 노동부 장관이 되었다가 곧 대중적인 지지를 기반으로 1946년에 대통령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가 제시한 정책은 획기적인 것이었고, 그가 주창한 사상은 페론주의라고 불리며 지금까지도 아르헨티나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페론주의의 내용을 뜯어보면 좌경화된 파시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즘 연구자인 카우프만과 스톨링은 페론의 정책이 조직화된 노동자와 중산층을 지지기반으로 삼는 것, 국내 산업자본에 우호적인 정책을 취하는 것,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독점을 바탕으로 영향력이 비대해진 거대 국내기업에 대한 견제와 해외 산업자본 유입의 규제(페론은 이를 경제침탈로 규정하고 방어하고자 했는데, 당시에는 페론만이 아니라 남미와 중동의 각국이 해외 산업자본을 경계하고 자국의 산업을 육성하고자 했다. 저 유명한 칠레의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이 추진했던 개혁도 이것에 방점을 두었다.)를 실시하는 것, 지주와 지방유지의 정권 개입을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경제정책으로써 국내수요 촉진을 위한 국가재정 지출, 임금을 인상하는 한편 물가상승을 막기 위한 가격통제 정책의 실시,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외환 통제 및 환율 조정을 제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The Political Economy of Latin American Populism, Robert R. Kaufman and Barbara Stalling,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1).

 

페론은 뿐만 아니라 빈민과 노동자 계급을 정치·사회적으로 성장시키고 계급투쟁을 종식시키는 것에 주력했다. 페론은 노동조합의 창설을 지원하는 한편 모든 노동조합을 국가의 관리와 보호 하에 두어 관제화 시켰다. 이를 위해 CGT(Confederación General del Trabajo, General Confederation of Labour)가 소속된 노동조합들의 의견을 사측에 전달하고 교섭을 중개하였다. CGT는 페론의 명령에 따라 노동자들이 파업 같은 행위에 돌입하더라도 그 기간 동안의 임금을 지급하거나 혹은 이후의 해고로 인한 실업 급여의 지급하는 것으로 노동자를 지원하는 의무와 권환을 부여받았다. 페론은 그러나 반공적 정책을 펼쳤기에 CGT는 한편 조합비 일괄공제와 같은 혜택제공을 통해 모든 노동조합을 관제화 시키고, 마르크스주의 노동조합을 고사시켰다. 페론의 이 같은 사상은 CGT가 창설 이후 처음으로 발간한 기관지에 실린 그의 발언에서 드러난다.

 

나는 내 가슴 속의 강렬한 소망을 지니고 우리 조국에 대해 기대를 걸고 있다. 그것은 계급들 사이의 투쟁이 조화를 통해 종식될 수 있다는 소망이다. ··· 아르헨티나의 부가 신장되면 그것을 모든 국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할 수 있다. ··· 그러나 사유재산은 국가로부터 명확하게 보호받을 것이며, 공산주의는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아르헨티나에서 페론주의는 127%GNP 성장률, 230%1인 소득 성장률을 기록했다. 또한 산업화를 진행시켰고, 남미의 고질적 문제인 빈곤층 문제를 해결하여 빈곤층을 성공적으로 중산층으로 자활시키는 것에 성공했으며 빈곤층 비율을 6%까지 감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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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파의 쿠데타로 축출되어 폄훼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추앙받는, 오히려 근래에 다시 고평가를 받고 있는 페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