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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 중에서 가장 관심이 적은 부분은 어디일까?


고조선, 부여 등등 많지만 동시대에 존재했던 3국의 위용에 묻혀 존재하였음에도 없는 취급 당하는 가야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특히 건국 신화는 매우 유명한 편이라 대부분 알 것이다. ‘구지가’, 배타고 건너온 황후나 석탈해와의 둔갑대결 장면을 기억 할 수 도 있다.


그렇다면 가야의 건국 세력들에 대해 추론을 해보자. 절대적 진실은 아니며 추론이다.









1)김수로 도래 이전의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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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에 들어 본적 있을것이다.


모든 건국신화나 건국왕의 신화는 대부분 진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데 구지가를 포함한 가야 건국설화 또한 그러하다.


기본적으로는 외부에서 오는 수로왕 집단을 왕으로 받아들였다는 내용이다.


수로왕 이전에는 단순한 씨족 중심의 사회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라고 답할 수 있다.


가락국기라는 책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지금은 삼국유사에 인용되어 일부만 남아있다.


그런대 이 내용중 일부가 수로왕릉에 있는 비석에 적어 놓았었고 이 비석의 내용을 받아 적어서 김해 김씨 족보에 수록 되어 있다.


그 내용으로는


‘태초가 비로소 열리니 이안이 처음으로 밝아졌다. 인륜은 비록 생겼지만 군위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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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보면 창세기 같은 느낌도 들지만 어쨋든 인륜은 원래 있었단다.


즉 이 지역에 이미 왕의 형태는 아니라도 적절한 사회가 형성되어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지도자들은 누구였을까? 다음 문장이 이를 설명한다.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천간, 오천간, 신귀간. 9간이 있었으니, 이들은 추장으로써 백성들을 이끌었으며,

모두 1000호에 7만 5000명이었다.’


이글에 따르면 수로왕이 오기 전에도 9간의 지배하에 100호 75000명이 사회를 이루어 살았다는 것이다.


이게 실제 인구를 나타낸다고 볼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 고대 사회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대부분 성인 남성만을 인구조사에 포함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실제 인구는 대략 2~3배 정도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00호 역시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호일리는 없다.


한, 수, 당, 명, 청 때는 1호당 보통 4~6명을 나타내는 단위였는데 도무지 계산이 맞지 않는다.


사료가 없으므로 세세한 정황을 알 수는 없지만, 큰 마을 단위가 100여개 정도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나 싶다.


100여개의 마을과 수십만의 사람들과 9간끼리 모여서 나름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9간은 수백년~천년 가량 유지하던 제도를 무엇 때문에 9간에서 6왕으로 혁신적인 체제변화를 선택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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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철기문명의 확산이다.


오리엔트 지역에 기원전 15세기경에 개발된 철기문명은 동쪽으로 계속 이동해 기원전 9세기경에는 중국까지 도착했었다.


하지만 이 시기 이후에도 가야는 아직 철기를 받아 들이지 못 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가야지방은 오리엔트 지역에서 가장 먼 동쪽에 위치해서 들어 오는 과정도 매우 오래걸렸을 것이다.


둘째로 중간에 있는 고대조선의 위용에 눌려 중국과 원활한 교역이 불가능 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철기 문명의 기술은 아직 들어 오지 않았고 주변 선진국들과 교류도 원활하지 않지만,


철기라는 혁신적 기술의 존재는 알고 있었던 가야 토착 세력으로서는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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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민족대이동이다.


기원전 3세기 이후 유목국가와 농경국가의 대충돌을 계기로 밀려난 세력들은 생존을 위해 철기 기술을 가지고 이동 했다.


고조선이 굳건하던 체계라도 사실 예전의 행정력으로는 그 방대한 영역을 세세히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


그나마도 고조선에서 부여로 넘어가는 과정이라 북방세력의 위협에 직접적인 노출에 직면 하기 쉬운 상황이 되버린 것이다.


이런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가야의 9간들은 먼저 외부세력에 손내밀기로 결정을 내린것이다.


수로왕은 중앙집권적 왕국이 아닌 6가야의 가야 동맹체로 나라를 제편했다.


가야는 여타의 다른 외부세력이 토착세력과 연합한 나라 치고는 별 충돌없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단군신화 처럼 대강이라도 경쟁하는 세력의 존재가 암시 될 만도 한데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9간이 9국이 아니라 9간이 6국이 된것으로 보아 김수로를 중심으로 하는 외부세력이 월등한 힘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몇가지 더 예를 들자면 김수로의 국혼, 즉 결혼 과정에서 9간의 의견이 묵살 된 적도 있고,


9간의 이름 촌스럽고 비웃음거리가 될것 같다며 이름을 바꾼적도 있다.


이렇듯 토착세력은 자신들의 홈그라운드에서 다 내주는 협상을 한 셈인데 도대체 어떤 집단이길래 이런 농락을 허용할 수 밖에 없었을까?









2)김수로는 어디서 왔나?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고 확정된 진실은 아니지만 재미있는 생각이라고 보아 소개한다.


그러기 위해 잠시 중국 역사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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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아저씨들 흉노다. 그 중에서도 바로 이사람 왕망이다.



한나라 무제 시절 한나라에 붙잡혀 귀순한 흉노족 김일제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의 후손 중 왕망이 있고,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우고 광무제에 의해 자기 나라도 망해본 파란 만장한 사람이다.


물론 사료 속에는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 정황상 추론 할 수는 있다.



첫째로 한무제 이후로 한나라의 실세는 곽거병 가문과 김일제 가문이었는데. 뜬금없이 외척으로 왕씨가 등장했다.


거기다 곽씨는 한선제 때 쿠테타를 일으키다 멸문을 당해 김일제의 후손이 한나라를 장악했다.


“원후(효원황후)의 부친과 형제들이 원제(기원전 49~33), 선제(기원전 33~7) 때 모두 제후에 봉해지고 요직을 차지하고 국정을 보좌했다.”


이것은 이상하다.


바로 그 시절은 김씨 천하이기 때문이다.


김씨 원톱의 사회에서 갑자기 왕씨가 등장해서 나라를 무너뜨리고 세울정도의 힘을 가진다. 이는 상식밖이다.




둘째로 왕망은 김일제 가문의 후사를 걱정했다.


김일제는 투후라는 지위를 대대로 직계들이 계승했는데 그 직계가 왕망 때 끊어진것이다.


왕망은 김당과 김흠으로 하여금 그 지위를 잇도록 한 바있다.


이밖에도 왕망은 김씨 가문을 많이 밀어준다.


도저히 김씨 천하를 끝내고 왕씨의 세상을 연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다.



셋째로 왕망과 김씨가문은 같이 사라진다.


신나라 멸망 23년 즉 가야 건국 19년 전에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설령 왕망이 김씨 가문, 즉 흉노가 아닐지라도 둘은 정치적으로 한 몸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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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영역은 마음에 안들지만 신나라는 개혁 정책을 펼치던 나라였다.


이를 못 따라간 국가나 귀족, 농민들의 반란에 휘둘려 금세 망한다.


붉은 부분은 적미, 녹림 난군의 활동범위이다.




어쨋든 망해버린 신나라의 주축세력인 김일제의 후손들은 국가를 운영할 역량을 갖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 중 김수로가 섞여 있었던거 같다는 점이다.


신라의 김씨들은 자신들의 중간시조를 ‘투후 제천의 후손’ 즉 김일제의 후손으로 본다.


삼국사기에서 가야의 왕족 출신인 김유신도 신라 김씨와 자신의 조상인 김수로의 혈통이 같다고 보았다. 다른 장면에서도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여 휘(이름)를 수로라 하였다.’


즉 김수로는 가야에 와서 수로라는 이름을 만들었을뿐 어째서인지 김씨는 원래 가지고 있었다.


당시 김씨라는 성을 쓰던 집단은 김일제의 후손들 뿐이다.


신나라 23년에 멸망하고 42년 가야가 건립 되었는데 시기적으로 절묘해 그럴듯한 부분이다.


사실이라면 가야의 토착세력은 알아서 복종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정도의 격차를 제대로 보고 받아들였다고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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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제국주의 시기에 아프리카 쪽 정벌인데 이정도 격차는 아니라도 가야인은 정말 많이 놀랐을 것이다.


실제로 그냥 덮어놓고 싸웠으면 학살 당했을 것이다.








3) 석탈해 집단의 등장



우여곡절 끝에 가야로 와 건국 후 2년 임시궁궐 남쪽에 신도시를 세우고 성을 쌓았다.


이런시기에 석탈해가 등장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설명하는 석탈해를 대강 묘사하면  


‘탈해는 본래 용성국 사람이다. 왜국 동북으로 1천리에 있고 다른 나라 왕비를 부인으로 삼았더니 알을 낳았고 외국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두 기록에서 국가명은 다양하게 나오지만 일관되게 왜국 동북 1천리를 주장하는 것을 보면 '확신이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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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김화경이라는 역사인류학자는 캄차카 반도설을 낸다.


물론 실제 거리는 훨씬멀지만 사실 옛기록은 적당히 크면 천이나 만 붙이고 마는 경우가 많기에 1천리가 정확할리는 없다.


실제로 캄차카 반도에는 난생설화가 존재하며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집을 떠나는 설화도 존재한다.


이동이 힘든것은 분명하나 우리나라에는 이런 벽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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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인데 통통배를 타고 고래를 잡으러 간 청동기 시절 암각화이다. (신석기라는 설도 있다.)


불가능은 아니라는 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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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님 고래 잡이 상상도 인데 패기 봐라.


캄차크든 아니든 석탈해는 바다를 건너 가야를 찾아갔다.


석탈해에 대한 초기대응으로 삼국사기는 견제 및 무시, 삼국유사는 환영으로 묘사한다.


양쪽을 모두와 결말을 생각해보면 어느정도 후한 대접을 받다 쫓겨났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마지막에 500척을 동원했다는 것을 보면 상당한 선박을 가진 해양집단이었을 것이다.


석탈해가 김수로에게 왕위를 요청하는 장면이 가락국기에 나오는데 그 이후 장면이 둔갑술 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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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앞부분이 장정과 기술자들을 소집하여 성곽, 궁궐, 가옥, 관청, 무기고, 곡창 등을 3년 2월까지 건설했다는 부분이 구체적으로 나온다.


이런 사실적 서술 후에 신화적 서술은 아마도 새로이 찾아온 외부세력을 비교하는 토착민들의 심리에 대한 묘사일 것이다.


김수로는 석탈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김수로는 토착민의 석탈해를 향한 관심이 신경쓰였을 것이지만 당장 석탈해 집단을 내쫓기에는 명분이 부족했을 것이다.


둔갑술 대결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밀어내기 위한 사전작업, 기싸움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결과는 김수로의 승리였고 밀려난 석탈해집단을 김수로는 이제는 물리력으로 몰아내었다.


석탈해는 신라로 들어가 박, 석, 김 중 하나로 자리잡고 신라와 가야의 적대관계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가야에세 이동한 김알지 신라에 받아주었고 자리잡도록 도와주었다.


결과적으로는 가야가 신라의 왕이 된 셈이다.


여기에서 알수있는 다른 포인트는 김수로가 이미 500척이라는 숫자로 표현될 대 선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인데.


김씨 일가는 산동지방의 영향력이 강했고 신나라가 멸망하기 전 해군력을 확충해 멸망 후 광무제를 피해 낙동강 하구 쪽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이를 보면 수백척의 함선, 철기문영, 동아시아의 지배자 였던 신나라의 통치일가. 9간의 무조건 항복이 이해가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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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입니다. 항복."








4) 허황옥 일행의 도래


마지막으로 합류한 일행이 있다. 허황옥 일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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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배우다. 서지혜


허황옥은 스스로를 아유타국의 공주라 소개했다.


7월 말에 도착했고 5월에 결혼을 위해 출발했던 것으로 보아 가야에서 2~3개월거리 일것이다.


허황옥의 출신 후보지로 아요디아라는 곳이 있다.


그 증거로는 쌍어문이 있다.


수로왕릉에 입구에 가면 볼 수 있으며 수천년간 이어진 보수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쌍어문은 현재 인도,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며 가야에 이 무늬를 가져온 사람도 허황옥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재밌는 사실은 고대 드라비다어에 ‘가야, 가라’는 물고기를 의미하는데 쌍어문이 국호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불교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고대 드라비다어는 한국어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이런점 등으로 볼때 일단 허황옥은 인도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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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인도에서 출발한것은 시기상 맞지 않다.


게다가 허황옥을 보주태후라 부른 점으로 보아 허씨들은 인도는 아닐것이다.


아요디아에서 기원전 1세기 경 이민족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중국으로 피신했다고 보는 것이 알맞을 것이다.


실제로 보주는 존재하며 허씨들은 보주, 현재의 안악현으로 피난 갔으리라 예상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있다.


허씨 집성촌 중 하나인 서운향의 우물 앞에는 신정을 표시하는 암벽이 있고 쌍어문이 그려져있다.


유래를 설명하는 글에 후한 초 허씨의 딸 황옥이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가 뛰어났다는 내용이 있는데 허황옥과 매우 흡사하다.


중국 서남부의 보주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무한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었다.


무한은 양자강변의 도시로 허황옥의 이동경로를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둘은 어떻게 만났을까?


아마 두 집단 모두 신나라 멸망 후 후한에 대한 반체제 활동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김수로는 물론이고 강제로 이주 당한 허황옥도 정부 측이라 보긴 어렵다.








5)마무리


가야는 이후 신라를 거의 복속시키거나 일본으로 진출 하는 등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낸다.


하지만 역시 동맹 국가이기 때문에 주변의 중앙집중국에 비해 의사결정 속도 등에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백제의 꼭두각시가 되었다가, 고구려에 밟히고, 결국 신라에게 통합되어버리고 4국이 아닌 3국시대가 되어 버린다.


매력있는 역사를 가졌지만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는 나라인 가야를 조금이나마 소개 해보고 싶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주류 역사계도 좋아하지만 이런 제야 사학계도 좋아해 책을 읽어보는데 이런 책들도 재밌다. 시간 나면 추천한다.


진지빨고 환빠니 뭐니 싸우지 말고 적당히 듣고 싶은 부분만 듣고 저런 의견도 있구나 싶었으면 한다.


내가 쓴 글의 대부분 95%이상은 ‘철의 제국 가야’라는 책에서 그대로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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