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시베리아 내전과 연해주 4월 참변: 일본군의 살육(1/2)

1. 러시아 혁명

1905년에 러일전쟁이 끝나고 한국은 일본에게 을사늑약을 강요받아 지배를 받게 됐다. 1910년 한국은 일본에게 강제로 병합됐다.

1911년 6월 1일 일본은 제정 러시아와 '러˙일 범인인도조약'을 하였다. 이 조약엔 정치범을 인도하는 것도 규정하였는데 비밀선언으로 넣은 내용이었다. 자기네 '정치범'이 상대국으로 몸을 피하면 상대국은 그 사람을 잡아서 해당 국가에 인도할 수 있다. 이런 엄격한 규정이 생기자 러시아에선 한인들이 항일운동을 하기 힘들게 됐다.

원래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에선 항일세력이 항일운동을 하거나 항일전투를 준비했다. 예로 1908년 7월에 의병전투가 일어났다. 최재형을 중심으로 연해주 이주한인사회 항일운동가들과 이범윤을 중심으로하여 연해주로 망명한 항일운동가들이 협력해서 1908년에 연해주에서 의병을 편성했다. 전제익(全濟益), 안중근(安 重根), 엄인섭(嚴仁燮) 같은 사람들이 200명의 의병을 인솔하며 두만강 대안에 대기했다. 그러다 7월 7일에 강을 건너고 경흥군 홍의동(洪儀洞)으로 나아가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안중근 장군은 최재형 선생에게 지원을 받으며 연해주에서 항일운동하다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치하였다. 러시아의 시베리아와 연해주는 항일운동가들이 활동하던 지역이기도 했다.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1905~1922」,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 15~18쪽; 박환, 최재형 시베리아 한인민족운동의 대부, 역사공간, 2008, 101~128쪽; 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19쪽~20쪽) 그러나 제정 러시아와 일본 제국이 그 조약을 맺자 더 이상 드러내놓고 항일운동을 하지 못했다. 실제로 러시아는 그런 한인들을 추방할 수 있게 법으로 정하기도 했다.

다만 러시아가 일본제국이 요구하던 걸 그대로 들어준 건 아니다. 일본제국은 조선사람이 다른 나라에 귀화하는 것을 용납해주지 않았고 다른나라로 귀화한 조선사람조차 일본제국의 국민이라고 어거지를 부렸다. 그건 러시아에 귀화한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제정러시아는 그런 어거지는 거부했다. 일본제국은 시베리아 연해주의 한인들을 자기들이 원하는대로 통제하지는 못 했다.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1905~1922」,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 15~18쪽)

그러다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바뀌었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났다. 1917년 2월(3월 8일) 제정러시아 수도인 뻬뜨로그라드를 시작으로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났다. 1917년 10월(11월 7일)엔 뻬뜨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가 내란을 일으켜 10월 혁명을 일으켰다. 그 뒤 하얀군대는 붉은군대에 반대하며 다시 내란을 일으켰고 러시아엔 내전이 일어났다. 하얀군대가 붉은군대를 반대하며 봉기를 일으킨 곳은 크게 3곳으로 나눌 수 있다. 유럽러시아에선 무르만스크를 중심으로 유데니치 진영 봉기했다. 볼가강 유역인 남부러시아에선 데니낀이 진영이 봉기했다. 그리고 시베리아에선 꼴차크 진영이 붉은군대에 반대하며 봉기했다. 일본제국이 깊게 개입한 것도 시베리아 내전이며 한국 근대사의 항일전쟁과 관련이 큰 것도 시베리아 내전이다.(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30쪽)

2. 시베리아 내전

10월 혁명이 일어나자 시베리아 중심부 톰스크에 봉기가 일어났다. 뽀따닌 진영이 시베리아 지방의 독립과 자치를를 위해 내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이 봉기는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제국군은 시베리아 내전에 개입을 하려했다.

일제는 1916년 6월 러일동맹을 맺은 뒤 중국을 분리지배를 꾀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서 제정 러시아가 무너진 것이다. 또한 혁명의 영향이 조선과 중국까지 끼치는 게 거슬렸다.(후지와라 아키라 저, 서영식 역, 일본군사사 상, 제이앤씨, 2013, 201)

1918년 1월 12일, 일본제국은 군함 이와미를 블라디보스톡에 파병했따. 뒤이어서 순양함 아사히를 보냈다. 1918년 4월 5일밤. 일본제국군은 기어이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했다.  (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36) 1918년 5월에는 육군이 주도해서 중국과 중일공동방적군사협정(일화공동방적군사협정)을 맺는다. 시베리아 내전에 개입할 준비를 했다.(후지와라 아키라 저, 서영식 역, 일본군사사 상, 제이앤씨, 2013, 201)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군인집단들이 움직였다. 체코군대였다. 체코는 16세기 초 오스트리아에 병합됐고 제1차 세계대전에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동맹군이 되서 참가했다. 이중에선 러시아군에게 포로로 잡힌 병사들이 있다. 이 병사들은 연합국측에 가담해서 오스트리와 전쟁을 하려 했다. 독립을 얻겠다는 것이 이유다. 그런 이유로 의용군을 편성했다. 여기에는 이전에 러시아에서 거주하던 체코인들도 가담했다. 그 병력은 5만에 이뤘고 1개 군단을 창설해 끼에프 부근에 모였다. 그러다 1918년 2월, 레닌 정부는 브레스트에서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조약을 맺는다. 러시아에선 더 이상 독일과 오스트리와 전투를 할 수가 없게 됐다. 그러자 체코군단은 파리에 있던 체코임시정부로 이동한 뒤 독일군과 싸우려했다. 3월 프랑스 정부가 주선해서 러시아정부에게 승인을 얻었다. 

체코군은 이동로는 유럽쪽 국경이 아니라 우회로였다. 시베리와 러시아극동지역을 경유해서 가는 길이다. 1918년 4월 1일, 체코군은  끼에프애서 출발했다. 체코군단은 부대를 60여개 정도로 나누고 시베리아 열차를 타서 블라디보스톡으로 갔다. 수송은 오래걸렸다. 원래는 5월 중순까지 완료하기로 예정했으나 수송이 힘들어서 6월 초순까지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사람수는 1만 4천명뿐이다.  1918년 5월 당시 5만여 병력은 뺀자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시베리아 철도 선로를 따라 쭉 늘어선 형태가 됐다. 중심지는 옴스크와 첼랴빈스크 였다. 소비에트 정부는 수송이 어려우니 체코군에게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체코군단은 여기에 반대했다. 볼가강 중류와 시베리에 수용소에서 체코군은 봉기했다. 봉기하여 일정지역을 점령한 뒤 자신을 연합국의 일원이라 말하며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은 소비에트 붉은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6월 4일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 외교대표드은 성명을 발표했다. 체코군단은 연합군의 일원이며 연합군이 지키고 있다고 밝혔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체코군도 봉기했다. 이 집단은 원래 7월 1일에 유럽으로 호송될 예정이나 동료들의 봉기 소식을 둘었다. 6월 29일  봉기를 일으켜서 블라디보스톡 소비에트를 무너트렸다,  
(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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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군

http://www.historyplace.com/worldhistory/firstworldwar/rus-czech-troop-train.htm


미국은 원래 일본제국의 야심때문에 일본제국군의 간섭을 경계했다. 체코군이 봉기하자 미국을 체코군을 구원하고자 했다. 7월 8일 미국은 일본에게 함께 출병하자고 제안했다. 일본은 내각회의를 소집한 뒤 미국의 제안에 찬성했다. 8월 2일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했다. 마귝을 8월 3일에 시베리아 전쟁에 참가한다고 공식으로 발표했다. 일본군은 미군이 들어오기전부터에 블라디보스톡에 병력 약 2만 8천명을 배치했다. 미군은 8월 16일에 블라디보스톡에 상륙했다. 영국은 8월 3일 블라디보스톡에 증원군을 상륙시켰다. 그 뒤로 캐나다군 6000명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8월 10일에는 프랑스군이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다. 

원래 일본은 미국과 협정을 맺어 각각 1만 2천명을 파병하기로 했다. 다른 군대들은 이보다도 적게 파병했다. 그런데 일본은 협정맺은 규모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파병했다. 일제군은 잇달아 시베리아와 연해주에 군대를 보냈다. 일본제국이 시베리아와 연해주로 보낸 병력수는 무려 약 6-7만명정도였다. 시베리아 내전에 간섭한 외국군의 대부분이 일본제국군이다. 그 뒤 두 차례에 걸쳐서 파견부대가 바꼈으나 지휘계통을 변하지 않았고 병력수는 대체로 6만~8만명을 유지했다. 시베리아 전쟁에서 가장 오랫동안 파견하고 가장 많은 병력을 파견한 외국군은 일본군이였다.(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36~41쪽) 

시베리아 하얀군대는 일제군에게 지원받으며 볼셰비키를 몰아내고 흰색 정부를 수립했다.

일본군이 상륙하자 시베리아 연해주 에선 많은 한인들이 항일세력을 이루었다. 그중에선 붉은군대로 들어가 싸우기도 했지만 자신들끼리 빨치산을 만들어 일제군에게 저항하기도 했다.

또한 군인출신들이 항일빨치산을 조직해서 지휘하거나 붉은군대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 군인출신에는 대한제국군 출신이 있고, 1차 세계대전 때 제정러시아군에 장교나 사병으로 참전한 군인도 있다. 1차세계대전 참전자 출신에서 붉은군대 장교로 활약한 사람에는 이위종(李瑋鍾) 선생이 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출신으로 항일빨치산을 조직하거나 지휘하거나 참가한 사람에는 한창걸, 최 니꼴라이. 박 그리고리, 오하묵, 채동순 같은 선생들이 있다. 일본육군군사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참령을 하였다 항일운동을 뛰어든 유동열 같은 선생이 있다. 또한 서간도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이 연해주, 시베리아 연해주로 건너오기도 했다.(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59~60, 66, 63~64)

(러 일 전쟁 당시 러시아 군으로 들어가 일본군과 싸운 사람들은 당시 항일군에서 별로 비중이 없다는 의견이 있다. 또한 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군인 출신들 중에선 항일 활동을 거부하고 하얀군대 측에 선 사람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항일진영이 하얀군대 측에 들어가 항일군을 만들려는 시도가 보이자 한인장교들이 거부한 경우도 있다. 장교만 따지면 오히려 붉은군대편이나 빨치산에 들어가 항일활동을 하던 한인이 소수였으며 항일활동을 거부하고 하얀군대편에 들어간 사람이 다수였다는 의견이 있다.)(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ㅡ 59~60. 71~78)

당시 항일빨치산 활동을 하거나 붉은군대에 들어가서 활동한 조선사람들은 군사활동에 굉장히 적극이었고 의욕이 넘쳤다. 이런 점은 붉은군대 측 뿐만 아니라 하얀군대 측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붉은군대 측에선 이렇게 증언한다.
「조선인부대는 규율과 성실과 그들의 대의에 대한 헌신에서 훌륭한 예를 보여주었다.…조선인들 중에서 추태는 말할 것도 없고 명령 불복종이나 과업미완수의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이 모든점에서 그들은 모법적 공산주의자의 전사들이다.」
N.II'iukhov and M. Titov, Partizanskoe dvizhenie v Primor'e, 1918-1920 gg. (Lenungrad, 1928), 82, 84쪽.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1905~1922」,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 27쪽에서 재인용
(이 증언에선 조선인 부대를 공산주의 전사라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소비에트 문학에서는 빨치산운동에 대한 공산주의의 영향이 과도하게 평가되었다. 빨치산운동은 무엇보다 일본이 선두에 선 간섭군에 반대하는 민중운동"이라고 분석한다. 엔.아. 부쩨닌 저, 엔.데. 부쩨닌 저,  알틴벡 쿠르만바예프 번역, 러시아 내전에서의 한인들의 참전, 역사문화연구 24, 2006, 96쪽)

「플로로프카라는 촌락에서 조선인 빨치산 부대는 러시아부대보다 더 충실하게 의무를 수행했다.」
Iaremenko, "Dvenik kommunista", 262쪽,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1905~1922」,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 27쪽에서 재인용

하얀군대 측에선 이렇게 증언한다.
「한인들은 적군의 제일 믿음직한 부분이었고(저자는 적군과 빨치산을 구분하지않았다 - 필자), 규율이 제일 엄격했는데, 그것은 강력한 ‘민족적 항일선전’으로 설명된다」
( Гутман А.Я. Указ. Соч. С.121, 엔.아. 부쩨닌 저, 엔.데. 부쩨닌 저,  알틴벡 쿠르만바예프 번역, 러시아 내전에서의 한인들의 참전, 역사문화연구 24, 2006, 98쪽에서 재인용)

그뿐 아니라 한인사회에서도 항일분위기가 흘렀고 많은 사람들이 항일운동에 참여하거나 동조했다. 일본제국은 한인사회를 통제하려 했지만 하지 못 했다. 

1918년 가을, 일본 총영사 기로 키쿠치(Kikuchi Giro)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신한촌을 시찰했다. 이 총영상은 한인학교에 200루블을 기증했다. 여자 교사는 그 돈을 받자 찢어버리고 불속으로 던져버렸다. 그 뒤로 서울 총독부의 고위관리인 지사쿠 시노다가 시찰하러 왔다. 지사쿠는 1919년 3월 1일에 학교를 방문했고 이틀 후에는 대한국민의회 블라디보스콕 지부 의장인 한용헌을 만났다. 한용헌은 지사쿠에게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일본 제국주의자가 아시아의 평화를 돕지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한민족은 일본에 폭력을 쓰지않으면서도 줄기차게 저항할 것이라 밝혔다. 지사쿠는 1919년 3월 4일에 다시 학교를 방문했다. (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1905~1922」,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 24~25쪽) 그 뒤 참모부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신한촌은 지금 러시아당국의 통제 밖에 있으며, 안드레이 한과 그의 추종자들 밑에서 완전 통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주의자이며 극단적 반일주의자인 그는 자신의 생각을 널리 선전하고 있다. 이들을 무마하고 제국의 통치 아래로 끌어들이는 것은 긴급하게 필요하나 쉽지 않은 일임을 확신한다. 」
시노다, "블라디보스토크 신간선 시찰 보고",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1905~1922」,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 25쪽에서 재인용

1919년 3월, 한반도에서 3.1 독립항쟁이 일어났다. 조선사람들은 일본제국의 지배에 종속되면서 지배자들에게 접근을 차단을 당했고(서발턴) 그 때문에 쌓였던 분노를 3.1 독립항쟁에서 터트렸다. 이건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 사는 한인들도 마찬가지였다. 

1919년 3월 11일 일본 총영사 기로 키쿠치는 블라디보스톡 요새 사령관과 연해주의 콜차크정부위원에게 요구했다. 시위를 엄격하게 통제하라는 것이다. 하얀군대 당국은 이 요청에 곧바로 동의했다.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에 손상을 끼칠지도 모르는 어떠한 행위」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대한민국의회 블라디보스톡 지부는 해산을 명령받았다. 하지만 그런데 한인들은 적극 저항했다.(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1905~1922」,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 26쪽)

야레멘코는 일기에서 이렇게 증언한다.
「3월 17~18일, 블라디보스톡 한인촌은 국기와 붉은기로 장식되었다. 오늘은 조선인들의 축제일, 즉 조선독립을 위한 시위가 있는 날이다. 집회가 열렸다. 조선인들의 시위가 한인촌으로부터 시의 중심으로 옮겨갔다. '대한독립선언문'이라는 제목의 전단이 질주하는 자동차에서 도로에 뿌려졌다.…조선인 특별대표단이 각 국의 영사들에게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조선어로 인쇄된 '선언문'을 전달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조선인들의 가옥을 배회하며 전단을 찢어버리는 등 철저한 감시를 하였다.」
A.N.Iaremenko, "Dnevnik kommunusta", Revoliutsiia na Dal'nem Vostoke (Moscow-Leningrad, 1923),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1905~1922」,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 26쪽에서 재인용

3. 러시아 내전의 끝과 끝나지 않은 시베리아 내전

시베리아 연해주에서 하얀군대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와 체코군과 편을 맺고 연합군한테 지원을 받았다. 더더욱 일제군이 가장 적극으로 하얀군대를 지원하며 시베리아 전쟁을 주도했다. 결국 하얀군대는 붉은군대를 몰아내고 시베리아를 점령했다. 1918년 7월 11일 옴스크에서 시베리아 정부를 수립했다. 이 정부는 집정관 5명으로 체제를 운영하였다. 그해 11월 중순 집정관 중 한명인 육해군장관 꼴차크 중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꼴차크(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лчак)는 해군제독 출신이다. 1894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전쟁과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했고 1916년 7월에는 흑해함대 사령관을 하다가 러시아혁명을 맞았다. 1918년 10월 옴스크에서 시베리아 정부의 육해군 장관이 됐다. 그러다 11월 18일에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는 성공해 정권을 장악했고 군사독재정권을 수립했다. 그렇게하여 서쪽은 레닌의 붉은 군사독재정권, 동쪽은 콜차크의 하얀 군사독재정권이 장악한 정세가 됐다. 
(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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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차크 장군
http://nngan.livejournal.com/758706.html



콜차크의 군사독재정권은 사회혁명당, 멘셰비키, 체코군에게 점점 지지를 잃어갔다.

1919년 4월, 하얀군대는 볼가 강에서 붉은군대와 접전을 벌이다 패배했고, 하얀군대는 점점 무너져갔다. 유럽러시아에서 위력을 떨치던 유데니츠군, 러시아 남서부에서 위력을 떨치던 데니낀군은 1919년 하반기에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런 흐름은 시베리아까지 퍼졌다. 꼴차크의 시베리아 정부는 1919년 11월 14일, 소비에트 붉은 군대에게 옴스크를 내줬다. 꼴차크 부대는 이르쿠츠크로 퇴각했다. 
(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87쪽)

1919년 11월, 체코군은 하얀군대 정권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1919년 11월 17일 밤, 체코군은 흰색정권에 반대하며 봉기했다.(가이다 봉기) 이 때 봉기를 주도했던 사람은 체코군 총사령관 가이다(Radola Gajda)였다. 가이다는 육군 소위로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그러다 제정러시아 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918년 시베리아에서 체코군이 봉기했는데 가이다 장군은 이 때 체코군 총사령관이 됐다. 1920년 기준으로 28세인 젊은 장교였다. (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87~88쪽)

 이 봉기에 항일 빨치산 부대 참가했다. 한창걸 부대였다. 한창걸은 기관포 대장으로 참가했다.(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100쪽)

 봉기는 실패하고 가이다 측은 일본군 하얀군대 진영에게 진압됐다. 진압후 일본군과 하얀군대는 사로 잡은 봉기군 측 군인 400명을 늘어놓았다. 일본군과 하얀군대는 포로들에게 대포와 기관포를 쏘아 처형했다. 

「흰파와 일군들은 미국군대에서 탐조등으로 폭동자를 환하게 비처주워서 대포와 기관포로 100여명을 전방에 총살하고 400여명을 전투 후에 총살하고 포로놈들을 혹독하게 취조하였다」
("힌파와 일軍들은 미국군대에서 탐조등으로 暴動者을 환하게 비처주워서 大砲
와 긔관砲로 100여명을 전방에 총살하고 400餘명을 전투 후에 총살하고 포로者들을 혹
독하게 취조하엿다"(이인섭,수찬지대 빨찌산대 , 이인섭 친필 노트 7권,17-24쪽, 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88쪽에서 재인용)

한창걸 부대도 결국 일제군에게 체포를 당했고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한창걸 선생은 이렇게 증언한다.

「왜 붉은 한인 빨치산부대가 가이다 장군의 부대에 합류했는가? 그것은이 부대가 꼴차크에 반대하기 때문이었다.단지 우리가 미워하는 꼴차크 전복을 지향한다는 것 뿐,우리는 물론 모든 사회당도 미래를 예견할 수 없었다.가이다 봉기는 실패했으며 우리 부대는 모두 포로가 되었다. 나는 한창걸이 아니라 조선신민이라고 가장했다.포로가 된 후 한인 빨치산부대는 일본인들 측으로부터 잔인한 고문을 받았다.이 고문들은 모두에 게 알려져 있다.이렇게 하여 1920년 1월까지 한인 빨치산부대의 활동은 중단되었다.1920년 1월 30일 나는 다른 포로들 틈에 끼어 탈출했다.」
Хан Чан Гер,Там же(한창걸,극동내전에 한인 노동자들의 참여에 대한 회상 ), 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100쪽에서 재인용

가이다 장군도 결국 체포 당했다. 가이다 장군은 체코로 추방을 당했다. (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87쪽) 가이다 장군은 체코로 돌아가면서 상하이에 잠시 머물렀다. 이 때 안창호, 여운형 같은 항일운동가 선생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1905~1922」,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 28쪽) 근데 가이다 장군은 그 뒤 체코로 돌아가서 파시스트 활동을 하였다(?????)

Plukovn_k_Gajda.jpg
체코군 사령관 가이다
http://forum.valka.cz/topic/view/33022/Gajda-Rad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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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빨치산 지도자 한창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55151&cid=51289&categoryId=51289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도 꼴차크정부에게 등을 돌렸다. 꼴차크군은 결국 붉은군대에게 패배해갔다. 꼴차크는 1919년 12월 27일에 체코군 수비병들에게 체포됐다. 그 뒤 혁명위원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0년 2월 총살됐다.(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31쪽 ) 1920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톡 흰색정권이 무너졌다. 볼셰비키, 멘세비키, 사회혁명당은 연합해서 연해주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 뒤 세르게이 라조를 수반으로한 군사 소비에비트가 조직됐다. 블라디보스톡의 실제권력은 볼세비키에게 넘어갔다. 세르게이 게오르기에비치 라조(Сергей Георгиевич Лазо)는 1916년 군대에 징집됐고 모스크바 알렉세에프스크 보병학교를 졸업했다. 그뒤 1916년 12월 장교가 되서 끄라스노야르스크에 배치됐다. 당시 라조는 병사들을 상대로 사회혁명당좌파 사업을 전개했다. 1918년 초 러시아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자바이칼전선군 지휘관이 됐다. 1919년 봄부터 연해주 빨치산 부대를 지휘했고 그해 12월엔 연해주 군사혁명사령군 사령관이 됐다. (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88쪽)


체코군은 유럽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1919년 6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강화조약이 맺어졌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국가가 됐다. 시베리아의 체코군은 1919년 말 고국으로 귀환하라는 통보를 받는다. 연합군은 시베리아 체코군은 원조했다. 1919년 12월 부터 체코군은 철로를 통해 블라디보스톡으로 모여들었다. 1920년 2월부터 9월 사이에 모두 유럽으로 귀환했다. 체코군이 돌아가자 연합국 군인들도 차례로 시베리아에서 떠나갔다. 1920년 1월 16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소비에트러시아에 대한 봉쇄를 해제하며 시베리아에서 자국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미국도 따랐다. 그러나 일본제국군만은 철수하지 않았고 남았다. 당시 일제군은 시베리아 영토에 대한 야심이 있었다. 또한 러시아 혁명 때문에 조선과 중국에 대한 식민지 권력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다른 군인들이 다 떠나는데도 일제군은 철병하지 않았다.  (하라 테루유키,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한인운동 1905~1922」, 『소비에트 한인 백년사』, 태암, 1989, 15~18쪽; 윤상원, 박사학위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2009, 90쪽;후지와라 아키라 저, 서영식 역, 일본군사사 상, 제이앤씨, 2013, 203~204) 일본제국군이라는 존재 하나 때문에 다른 러시아 내전과 다르게 시베리아 전쟁만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한인에 대한 일본제국군의 행동도 바뀌게 된다.

1개의 댓글

2017.04.09
가이다 같은 경우 지나치게 파시즘에 경도된 모습을 보여서 체코 정부로부터 엄청 견제를 받았음 그리고 젊은 전쟁 영웅이라는 이미지는 토마스 마세릭 대통령의 라이벌로 비추기 충분했지 결국 정부의 압박에 못이긴 가이다는 군복을 벗고 국민전선당이라는 체코 파시즘 정당을 세우게 됨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뮌헨 봉기나 검은셔츠의 행군같은 쿠데타를 부르노에서 일으키려다가 실패하게 됨 그 후 정계 입성해서 반 독일과 파시즘적인 정권을 세우다가 독일 침공 후 저항군을 이끌게 되지 그러나 2차대전 이후 파시즘적 행보때문에 소련군에게 가혹한 조사를 받고 나오고 49년에 생을 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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