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봉오동 전투와 일본군의 학살

1.

1920년 6월 2일. 만주에 있던 항일군대 60여명은 국내로 들어왔다. 그리고 오후 4시 30분에 종성군 풍곡면 동포 경찰주재소 남쪽 6.000m지점으로 내려왔다. 항일군인들은 일제군경과 총격전을 벌여서 경찰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러자 일제는 종성에서부터 경찰 14명과 헌병 3명을 보내올렸다. 
(박창욱,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한국사연구 (111), 2000, 104)

6월 3일. 신민단원 약 30여명이 두만강 북안의 삼둔자 마을에 머물렀다. 지휘자는 박승길이다. 항일군인들은 온성군 남양동 상류의 강양동대안에서 두만강을 건너 온성과 종성일대로 나아갈 예정이다. 

다음 날  오전 5시. 온성군 남양의 두만강 상류에 약 15 지점인 강양도에서 였다. 일제군인들은 주변을 수색하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두만강남안에 쪽배 2척이 있던 것이다. 이걸보자 일제군경들은 항일부대원들이 올 것을 느꼈다. 부근을 수색했다. 그러던 차에 삼둔자 마을에서 약 17~18명이 두만강을 건너오는 걸 발견했다. 일제군경들은 바로 총을 쏘기 시작했다. 신민단 부대는 건너는 걸 중지하고 삼둔자 부근 두만강 북안에 있는 버들방천에 은폐하였다. 그리고 일제군경을 대응사격을 하였다. 총격전은 얼마지나지 않아 끝났다. 신민단 병사들은 삼둔자 상촌(삼둔자 마을은 상 중 하촌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8호였다.)에서 큰 기와집인 김명오 노인집에 들어가 쉬기로 했다.
(박창욱, 107-108)

일제 군경부대인 남양수비대(남양수비대 10명, 헌병 경찰 7명 합계 17명)는 추격대를 조직했다. 신미(新美 일본어 이름은 니이미로 추정)중위는 추격대를 인솔해서 오전 11시경에 두만강을 건너갔다. 화룡현 삼둔자로 침공했다. 항일군대를 추격하려고 중국 영토를 침범한 것이다. 
(박창욱, 110) (신효승, 석사학위논문 - 한말 일제초 홍범도 의병의 활동과 전략 변화,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2012, 65)

당시 일제는 항일군("불령선인")이 있을 장소라 생각하면 들어가기전에 총을 쏘며 '위력수색'을 했다. 일본군은 이걸 '암탐사격'이라 했다. 의심이 되는 인원이 있으면 무조건 쏘고봤다. 그러다 민간인들이 놀라 도주를 하면 그 사람들 체포해 심문하려했고 여의치 않다고 생각하면 현장에서 바로 사살했다. 말이 통하지 않을경우도 쉽게 처리하기 위해 그대로 사살해버렸다. 일제군경은 이런 방식을 당연히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신효승, 35)

일제군인들이 침공한 삼둔자는 한인 농민들이 정착하면서 만든 마을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남양수비대는 이곳을 주요 독립군 근거지라 판단했다. 일본군은 그 마을 수색하면서 무차별로 발포하며 민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이 마을주민들을 독립군의 주요 지원세력이 생각했고, 또한 항일군과 지역주민들은 어차피 구별할 수 없을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근거로하여 무차별 사살을 당연하게 저질렀다. 
(신효승, 66)

남양수비대는 그런 수색을 하다 한 농민을 정보를 얻었다. 신민단 부대원들이 쉬고있던 집이 어딘가하는 내용이다. 남양수비대는 삼둔자 서쪽 산기슭을 따라 전진하면서 김명오 노인의 집으로 다가갔다. 포위해서 공격하려 하였다. 신민단원들은 일본군경들이 온 것을 눈치챘다. 얼른 집에서 빠져나와 서남쪽 마패방향으로 후퇴했다.(박창욱, 108)  남양수비대는 포위하면서 집을 공격했다. 김명오 노인의 아내와 장남은 그자리에서 즉사하고 노인 아들인 김종식의 아내와 손자는 중상을 입고 결국 사망했다.
(박창욱, 110)

날이 저물자 남양수비대는 부근 산중에 야영하며 상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박창욱, 108)

일본군은 적은 병력으로는 항일군("불령선인")을 토벌할 수 없다고 판단해 병력을 증원했다. 일제군경들은 야스카와 추격대대(월강 추격대대)를 편성해서 6월 7일 새벽에 후안산쪽으로 침공했다. 추격대는 길 안내자 찾기위해 병사 1명을 보냈다. 당시 후안산에선 신민단 부대원들 14~15명이 최진포라는 사람 집에서 쉬고있었다. 최진포의 아내와 형수는 불을 켜놓고 식사준비했다. 마침 그 집이 일제 병사의 눈에 띄었다. 일제병사는 그 집으로 들어갔다 뭔가 의심이 들었다. 함부로 남의 집 방문을 열었다.

누워있는 신민단원이 보였다.

신민단원 1명은 그자리에 바로 총을 쏘아 일제병사를 쓰러트렸다. 신만단원들은 바로 뒷문으로 빠져나가 봉오동으로 후퇴했다. 항일군과 일제군은 갑작스런 상황에 맞닥뜨렸다. 둘은 제대로 준비못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양쪽 다 피해는 거의없었다. 그러나 민간인이 희생됐다. 최진삼의 아내(최진포의 형수)는 집으로 돌아가기위해 집밖으로 나왔다가 일본군에게 사살당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무고한 민가인 6명을 체포했다.(박창욱, 110~111)(신효승, 66)


2
홍범도 부대(大韓北路督軍府대한북로독군부 800~900여명)는 일제추격대가 오는 걸 알게됐다. 추격대를 격퇴할 준비를 하였다.

당시 봉오동은 분지(산지역으로 둘러싸였고 지역 안은 평평한 지역)형태였고 입구에서 안쪽까지는 골짜기가 25리정도 형성되어있다. 골짜기 안에는 마을 세개가 있다. 홍범도 부대는 지형을 고려해서 4개 중대로 편성했고 각 중대를 포위하는 형태로 갈라놓아 배치하였다.(신효승, 66)

당시 홍범도 부대들은 신식 총기로 무장했지만 기관총 같은 무기를 가졌던 일본군과 비교하면 화력이 딸렸다. 거기다 일본군은 포병을 지원부대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가 대기하고 있던 장소는 기관총을 쓰기 어려운 장소다. 또한 매복을 할 경우 피아구별이 힘들어서 일제군이 포병을 쓰기 힘들다. 홍범도는 의병시절 부족한 화력을 극복했던 방법을 봉오동에도 그대로 적용했다.(68) 그리고 일제군을 기다렸다. 

대기하던 남양수비대는 야스카와 추격대대가 오자 그쪽으로 합류했다. 추격대는 8시 30분경부터 봉오동 하촌에서 집집마다 수색하였다. 그러다 자기네들이 보기에 의심되는 민간인이 있으면 바로 사살했다. ("한민들 촌이면 집집마다 수색하고 사격하여 한민 남녀 17명을 살해하였다"- 서육린의 보고)
(박창욱, 114, 116)

조선인 민간인들을 집을 빠져나와 피난을 갔다. 많은 집들은 사람이 없어 비워있었다. 석현주재 중국인 순경들은 순찰하다 일제추격대를 발견했다. 중국인 경찰들은 일제추격대에게 자신들 땅으로 돌아가라고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제추격대는 중국 경찰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더욱 침입하였다.
(박창욱, 114)

추격대는 늦은 아침을 지어먹고는 한 농민에게 가서 수레에 기관총을 실으라 요구했다. 수색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다 다시 마을주민들을 발견했다. 추격대는 그 마을을 향해 "암탐사격"을 하며 무차별로 쏴갈겼다. 피난가지 못한 한인 민간인들은 기관총에 살해됐다.
(박창욱, 114) 



오후 1시 경 추격대 척후병이 매복지점으로 다가갔다. 항일군인들은 그 척후병을 그대로 보내줬고 추격대 본대를 기다렸다. 추격대 본대는 그 장소에 들어기전에 다시한번 '암탐사격'(위력수색)을 했다. 여러 곳에 무차별 사격을 했다. 그러나 홍범도 부대는 대응하지 않았다. 일제군 내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추격대는 행군종대 대형이었다. 추격대는 홍범도 부대가 매복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매복 성공 여부가 아니다. 병사들이 홍범도의 사격 통제를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홍범도 부대는 짧은 기간에 모집해서 편성한 부대였으나 훈련은 제대로 받은 부대였다.
(신효승, 69~70)

추격대가 매복장소로 다가왔다. 홍범도가 하늘을 향해 총을 쐈다. 동서남북에 매복하던 항일군이 사격을 퍼부었다. 일제군인들은 화력이 우세했으나 지형문제 때문에 그 화력을 제대로 쓰지 못 해고 제대로 반격도 못 하고 퇴각했다. 항일군은 그런 도주하는 일제군인들을 계속 추격하며 사격했다. 그러다 오후 4시 20분경 하늘에서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렸다. 폭우가 쏟아졌다. 항일군 지휘부에서 파란 손깃발을 흔들었다. 항일군인들은 물러났다. 일제군인들은 6월 7일 밤 함북 온성 유원진 건너편까지 철수했고 사단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다시 철수했다.
(신효승, 67)(박창욱, 114~115)

홍범도 부대는 일제 추격대를 격퇴했다.

3. 
일제군은 "20여명을 죽이고 1명이 죽었다"고 주장했다. '간도' 국자가에 있는 일본 영사분관에 소속된 와구의 경부가 이 사건을 조사했는데, 결과는 약간 달랐다. 와구의 경부가 조사한 '복명서'에 따르면 "아군(일제군-글쓴이)의 전사 병졸 1명, 부상 5명. 7명 또는 10여명이라고 하는 자도 있다"고 한다. 6월 22일 상하이 '독립신문'에 따르면 "적 사상병 12명. 아군의 손해는 미상하나 시체 24 그 외에도 상당한 사상자가 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이것을 교차 검증하면 일제군은 사상자 10명 안팎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그러면 일제가 죽였다고 주장하는 "20여명", 그리고 독립신문에 나온 "시체 24"는 뭘까? 그 인원의 대다수는 민간인 사망자였다. 당시 항일군들은 전투를 벌인 뒤에 마을을 정리했는데 마을에서는 "남동의 남녀노소 24명의 시체를 처리하고 부상자 2명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무차별 사격을 하며 죽인 민간인들이다. 또한 서육린은 "무릇 한민들 촌이면 집집마다 수색하고 사격하여 한민 남녀 17명을 살해하였다."는 증언을 했다. 일본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죽였다는 보고한 전과의 대부분은 무고한 민간인들이다. (박창욱, 115~117)

추격대는 항일군인들은 잡지도 못하고 엉뚱하게 민간인만 학살하다가 10명 안 팎이 다치거나 죽는 뻘짓을 한 것이다.

4.
그런데 봉오동 전투 전과가 갑자기 올라가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은 임시정부 국무원이 통신을 받고 공포한 '호외'에 근거해서 "적 120명을 설멸하였다"고 보도했다. 6월 24일 독립신문에서는 "적의 사자 60, 부상자 50이고 아군은 부상자 2명"이며 "촌민의 사상자는 9명"이라고 보도했다. 6월 10일 간도국민회 제1남부지방회의 '호외'에서는 "적 전진부대 150명을 설멸하고 아군사망자는 근근히 3명"이라고 보도했다. 6월 13일 간도국민회 제2지방회의 '공보'에서는 "1. 적의 대대장, 중대장, 준사관 각기 1명. 병졸 49명이 즉사. "라고 보도했다. 

이런 것들은 상당수가 오보거나 과장이다. 연변대 역사학 교수 박창욱 선생의 논문을 인용한다.

『제2북부 지방회의 통보에서 대대장 1명이 죽었다는 것은 오보이다.
대대장 이라면 안천(야스카와 - 글쓴이)소좌를 말하는데 안천은 그 후 돌아가서 전투 상황을 보고했다. 거기다 같은해 10월 21일 청산리전역('청산리전투'-글쓴이)에서는 백운평 전투에서 선봉추격대 90명을 거느리고 직소에서 북로군정서의 교성대와 싸웠다. 어떤 자료에서는 안천소좌가 거느린 1개 대대병력이 참가하였다고 나오는데 과장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평시 편제에 근거하면 보병 1개 대대는 600~700명의 병력이다. 이런 과정으로 하여 전과에서도 "120명 또는 150명을 섬멸"하였다고 하는데 실제에 부합되지 않는다.』(박창욱, 117)

100명을 사살했다는 물론 사상자가 그정도라는 건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했거나 과장이다.

5.
참고문헌:
박창욱,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연구, 한국사연구 (111), 2000
황민호 黃敏湖, 홍선표 洪善杓, 제22권 3·1운동 직후 무장투쟁과 외교활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8
반병률 潘炳律, 제49권 1920년대 전반 만주·러시아지역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2009
신효승, 석사학위논문 - 한말 일제초 홍범도 의병의 활동과 전략 변화,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2012
박찬승, 한국독립운동사 - 해방과 건국을 향한 투쟁, 역사비평사, 2014

당연하지만 이글도 내가 쓴 것임. 위키백과던 나무위키던 네이버 사전이던 이런 정보들이 제대로 없거나 부족해서 제가 따로 글로 써봄

10개의 댓글

2017.02.21
글 잘 쓴다ㅊㅊ
0
2017.02.21
말 많은 청산리 대첩도 정리해주라
0
2017.02.21
실례지만 근대사, 독립운동사 관련해 잘 안다면 관동대지진 학살 관련해서도 설명해줄 수 있움?
막연히 조선인이 6000명 가량 학살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몇 년 전에 당시 관동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인구가 1만 ~ 1만5천여 가량에
방학으로 유학생들이 대거 빠져나가서 그 수치가 나올 수 없다는 글을 읽었었거든. 조사 방법도 문제가 많았고.
0
2017.02.21
불쌍한 민간인들만 존나게 죽엿네 쪽바리새끼들
0
민간인들만 죽네 시벌
0
2017.02.21
쪽빠리들이 민간인 개잡듯 죽이는 버릇을 일군경 출신 친일파들이 그대로 답습해서 한국전 전후, 4.19, 5.18 때 숱한 민간인들이 죽어나갔지

베트남 가서도 개버릇 못주고 민간인 학살 퍼레이드
0
2017.02.22
@에스파다
이,,,,좌파,,,,빨개이쉐리,,,,
소리듣는다

민간인 학살은 상부에서 지시를 내리지 않았고 양키나 조선군이나 현장에서 노이제로로 학살하는 경우가 다수였지
위에서 공문내려서 죽여라 이런건 아니였음

어제 식량 받아가면서 엄지척 하던 현지인이 갑자기 ak를 들고 튀어나오는 민간인과 적군의 구분이 안되는 상황에서 징집되서 끌려온 노예들은 어찌 생각할까?
지들이라도 살고보자고 다 죽이는거지

아무튼 이런 노예들이 극한의 상황에 몰려서 민간인을 죽일때 베트콩 놈들은 자신들의 이념에 반대하는 민간인 조지는거고 월남새끼들도 비슷하게 돌아가고

시작부터 구리구리한 전쟁이라서 참가한 놈들 모두가 구리구리함
0
2017.02.22
@에스파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로 국뽕 빨려는 새끼있으면
국군 위안부, 보도연맹 학살, 국민 방위군, 몽키하우스, 12.12~5.18 이것만 꺼내줘도 빨던뽕 떨굴듯
0
2017.02.22
@주사랑예수
그런 짓 좀 하면 어떠냐 갱제만 살리면 그만이지~
0
2017.02.22
형님 청산리에서 벌어진 전투를 써주시면안될까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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