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두근두근 문예부 리뷰 (강한 스포일러)

  어지간하면 이런 말은 잘 안 하는데, 강력한 스포일러가 내제되어 있으니 이 작품을 나중에라도 접해볼 생각이라면 뒤로 가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스포일러가 치명적인 작품이거든요. 사실 이 게임을 알고 있는 시점에서 스포일러를 안 당한 사람이 있느냐는 좀 의문이긴 합니다만은.




  This game is not suitable for children or those who are easily disturbed. 

  기껏해야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정도에 굳이 이런 문구를 붙이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겠습니다. 연령이 성인 제한인 것도 아닌데 말이죠. 사실 그렇습니다. 게임의 첫 인상을 볼 때 이건 어디를 봐도 평범한 미연시입니다. 발랄하기 그지없는 분위기의 인터페이스에 흔히 말하는 미소녀 캐릭터가 줄지어져 있죠. 그럼에도 저 문구가 유효한 이유는, 사실 이 게임의 장르 태그 중 하나가 공포이기 때문입니다. 네, 공포요. 씹덕스러운 느낌의 미연시임에도 불구하고 태그는 공포. 그리고 작품에 대한 평가는 압도적인 긍정적이고. ……이거 완전? 슬슬 불안감이 떠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것이 사실입니다.


  첫 인상처럼, 이 게임 역시 일본 서브컬처의, 그러니까 흔히 말해서 씹덕스럽다 할 수 있는 감성을 그대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굳이 덧붙여 말하자면, 과장된 히로인의 캐릭터성 내지 주인공이 해온 것에 비해 과한 호의라던가, 큰 눈에 화려한 머리카락, 뭐 그런 것들. 사실 이런 것들은 장르적으로 암묵적인 룰이니 거기다 대고 정당성이니 타당성이니 논해봐야 별로 의미는 없죠. 헌터물 보면서 굳이 그런 걸 다 따지지 않는 것처럼요. 

  첫 인상에서부터 다른 미연시와 돋보이는 차이가 있다면, 보이스가 없다는 것 정도. 주인공만 없는 게 아니라, 히로인 진영도 보이스가 없습니다. 기술적인 문제인지, 아니면 예산적인 문제였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둘 다 아닐까 싶기는 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그 편이 더 좋기는 했어요. 그런 쪽의 목소리를 별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서. 
  뭐, 돌아가서.


  발단에 해당하는 초반부는 일본 서브컬처의 정석적인 클리셰를 답습합니다. 딱히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정석적이다 못해 진부하고 식상한 클리셰를 따라가는데, 그렇다고 각 캐릭터 간의 만담이 재미있는 것도 아니거든요. 문예부 가입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나오고, 시를 쓰고 돌려보며 시론詩論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 외에 히로인마다 잡다한 이야기나 축제 준비에 관련된 이야기가 조금 더 있기는 한데, 별로 길지도, 중요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렇다고 볼륨이 크지도 않습니다. 

  사실 이 게임이 초반부의 일상 파트에서 재미를 느끼라고 만든 게임은 아니니까 당연하기는 합니다. 이 게임의 진가는, 초회차 갈등의 마지막 구간, 그러니까 주인공의 소꿉친구 히로인이 자살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게임은 배드엔딩을 맞이하고, 플레이어는 어쩔 수 없이 다음 회차로 넘어가게 되죠. 본격적으로 게임이 뒤틀리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세이브데이터가 날아갑니다. 자살한 소꿉친구 히로인은 아예 게임에서 배제되었습니다. 폰트가 종종 깨져 보이고, 이와 마찬가지로 캐릭터의 스프라이트 역시 종종 깨져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떨 때는 캐릭터가 대화창 앞을 가리는 경우도 있고요. 화면에 노이즈가 끼는 것도 예사입니다. 의도된 연출입니다.

  게임이 진행될수록 게임은 이변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합니다. 작중 히로인의 캐릭터성은 극단적인 방향으로 과격하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씹덕식 미소녀 문화의 선입견을 쳐부수듯 험한 언행으로 서로를 공격하고, 기괴하고 섬뜩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서슴없이 내보입니다. 스토리의 큰 줄기는 소꿉친구 히로인이 배제된 것을 제하면 동일하게 가는 듯하다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더 탈선해갑니다. 이전의 전개를 크든 작든 비틀어버리죠. 스토리상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시 역시 이전 회차까지는 어느 정도 절제되어 있었다면, 이번 회차에서는 이전보다 광기를 여과 없이 터뜨립니다. 서로의 캐릭터성은 완전히 붕괴되기에 이르고, 시도 때도 없이 흐름이 부자연스럽게 뚝뚝 끊기거나, 통상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전개와 연출이 거듭해서 반복됩니다. 시스템적으로도 완전히 망가져서 선택지의 선택을 의도적으로 강제하거나 방해합니다. 총체적으로 난장판이 된 게임 속에서, 스토리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다만 그 특유의 기이한 연출만이 남아서 플레이어를 즐겁게 해줍니다.

  이런 과격하고 난폭한 경향은 히로인 하나가 더 자살할 때 정점을 찍습니다. 흥분하면 자해하는 성애자인데, 주인공에게 고백을 받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칼로 자기 배를 찌릅니다. 뭐, 그런데 그런 게 중요한가요.


  사실 이 정도만 됐어도 플레이어의 멘탈을 나가게 하는 데에는 족했을 겁니다. 그런 와중에 이 세상이 게임이라는 걸 알고 있으며, 나머지 히로인 하나도 시스템상에서 지워버리고 플레이어가 더 이상의 진행이 불가능하게끔 한곳에 가둬놓는 흑막의 출현은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아 아무것도 몰랐던 플레이어에게 얼얼한 뒤통수를 선사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보통 게임 내 캐릭터와 플레이어인 자신의 단절은 이미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상식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게임이라는 걸 안다는 메타적인 발언, 게임 시스템을 조작하는 행위를 하고, 주인공이 아닌 플레이어에게 말을 걸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논하는 캐릭터는, 마치 대상 캐릭터가 실제로 존재하고 우리와 진정 소통하고 있다는 착각을 잠깐이나마 불러일으킵니다. 이는 동시에 작품에 대한 몰입감을 높여주죠. 단발성이라 할지라도요.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발성 효과에 불과합니다. 캐릭터는 자신만큼은 자유의지로 그곳이 게임 속 세상임을 인지하고 행동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모순적인 이야기입니다. 여타 캐릭터와 같이 스크립트덩어리로 구성되어 있을뿐더러, 결국에는 마찬가지로 제작자의 의도대로 흘러가는데 말이죠. 근본적으로 정석적이고 제작자 의도대로 흘러가는 캐릭터와 메타적이고 제작자 의도대로 흘러가는 캐릭터가 뭐가 다르냐 하면은, 글쎄요. 나와 작품이 유리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현실이 아님을 깨닫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서 거리감을 유지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만약 가상 속 캐릭터가 현실의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다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면 됩니다. 그럼 더 이상 그것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종류의 생동감은 일시적이고, 이내 부서지게 되어있습니다.

  어쨌든 갇힌 플레이어는 게임을 껐다 켜더라도 같은 광경을 보게 됩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계속해서 그 캐릭터가 기다리고 있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반복적으로 이어하게 되죠. 여기서 더 진행하기 위해서는 해당 캐릭터의 .chr 확장자 파일을 찾아서 지워내야 합니다. 이런 트릭이 아예 처음 나온 것도 아니고, 그나마도 관련해서 힌트를 조금 주기는 하는데, 사실 혼자서 추론하기에는 빡센 조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반전에 충실한 게임입니다. 충실하다 못해 올인 했죠. 파격적이고요. 그러나 그 반대급부로 너무 파격적인 면이 있었기 때문에 필시 유명세를 탈 수밖에 없었고, 그 유명세 때문에 이미 반전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졌다는 건 문제지 싶습니다. 식스센스랑 비슷한 거죠. 당장 저만해도 그랬거든요. 그렇다고 아예 유명세를 안 타자니, 그러면 애시당초 이런 걸 손대는 사람이 국내에서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뭐 그런.

  그나저나 플레이어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시스템을 조작하며 메타적인 발언을 내뱉는다는 점에서는, 언젠가 붐이 일었던 토토노라는 작품을 떠올리게 합니다. 해본 적은 없지만.

14개의 댓글

2018.01.08
사실 뒷 이야기가 더 있는데 생략함. 쓰고도 엉망진창이지 싶다. 쓰다 보면 나아지겠지. ;~;
0
2018.01.08
잘 읽었습니다.
정확한건 아니고 트위치 방송 보다가 누가 말했는데 제작자들이 만들고 나서 이건 심했다 싶은지 수위랑 강도를 좀 많이 낮추었다는 썰이 있었더래요.
그 썰을 믿는건 아닌데 만약 저거보다 더 심하게 나왔으면 어땠을까 기대가 되긴 했어요
0
2018.01.08
@칠삼
그렇게 된다면 연출도 더 막 갈 거고, 빼박 성인 연령일 거에다가. 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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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끼에엑
퍄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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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
2018.01.08
자살씬은 확실히 기분 나쁘게하는데 성공적이였음
0
2018.01.08
@Lv
배에다 칼푹찍 하는 유리 애껴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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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이거 2018년에 나올 같은 제작사 호러게임 홍보용이라고 레딧애들이 분석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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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중갑옷빌런
홍보용 게임 퀄리티 수준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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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끼에엑
게임내 자료에 끼어진 비밀메세지 분석해보면 이건 작중작 느낌으로 진짜 게임이 아니고.

일종의 가상현실임. 작중인물은 스크립트 캐릭터가 아니고 가상현실에 도킹된 인공지능이나 혹은 진짜 사람이고.

인체실험같은 걸 암시하고 있으며 '아마도' 차기작의 메인빌런은 유리. 주인공이나 조력자는 모니카로 추측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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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9
[삭제 되었습니다]
2018.01.09
@pigbug
전자는 그렇다 쳐도, 후자는 제가 봐도 얼척이 없기는 했어. 워낙 캐릭터가 씹창이 되어버려서
사실 걔가 어떻게 갈지 계속적으로 암시해주기는 했는데, 그걸 알고 봐도 퍄- 소리가 절로 나옴. 킹갓 유리니뮤ㅠ
뭐, 저는 이런 자극적인 거 좋아해서 큰 타격은 없긴 했는데. 이런 거에 면역 없는 애들은 진짜 훅 가겠더라 싶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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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9
@끼에엑
그래서 태그에 심히 의심스러운거 걸려있었던거 같았는데.

아무튼 무료게임주제에 대단한 스토리를 가지고있어서 충격먹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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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9
이게 진짜 레딧이나 게임이론에서 말했듯이 올해 나올 공포게임 티져인거면 개소름임...ㄷㄷ

근데 이스터에그가 진짜많아서 나올거같긴함..
0
2018.01.10
처음부터 모니카 캐릭터 삭제하면 우째될까 해봐서 충격먹음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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