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쌀과 인구압의 관계

봉건제와 관료제

어떤 사회나 궁극적으로 그 사회의 발전 정도를 제한하는 것은 그 사회가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다. 전통 농업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 중 하나는 토지였다. 출산에 대한 인위적 조절이 쉽지 않았던 시기에, 사회 발전의 정도는 토지와 인구와의 관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은 거의 완전한 의미에서 폐쇄적 농업 사회였다. 따라서 토지와 인구의 관계는 다른 어떤 사회보다도 강력하게 조선 사회 전체를 규정하였다. 이것과 관련해서 조선은 두 가지 대비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하나는 관료제 사회로서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를 맞이하는 과정에서의 모습이다.

 

지금도 어느 정도 그런 경향이 남아 있지만, 과거에 서구의 봉건제(封建制)와 우리나라·중국의 관료제(官僚制)에 대해서는 거의 정반대로 이해되는 일이 많았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관료제를 사회적 발전 단계에서 유럽 봉건제 이전의 미발달 단계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19세기 이후 서유럽이 먼저 달성한 산업 혁명의 힘을 기반으로 아시아에 제국주의적 팽창을 하면서 생긴 오해였다. 문제는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의 지식인들도 서구 열강의 압도적인 힘에 위축되어서, 스스로의 과거를 제대로 이해할 겨를이 없었다는 것이다. 서구 학자들은 아시아에서 봉건제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시아가 마치 역사 발전의 ‘정당한’ 길을 밟지 않은 증거가 되는 듯이 말하였다. 그에 따라 우리나라나 중국의 학자들은 한국사나 중국사에서도 봉건제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몹시 애를 썼다. 매우 이상한 상황이 빚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중국의 관료제(최소한 송대(宋代) 이후의 중국과 조선시대의 관료제)는 쌀에 의한 더 높은 생산성과 그로 인해 가능하였던 더 많은 인구가 만들어 낸, 봉건제보다 훨씬 앞선 사회의 산물이었다.

 

인류사를 살펴보면 곡물을 주식으로 삼지 않은 문명 사회는 거의 없었다. 어떤 면에서 곡물 경작은 그 자체가 문명의 시작을 뜻하였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전통 시대에 농업은 어떤 생산 활동보다 땅에서 단위 면적당 높은 칼로리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농업은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하였다. 더구나 곡물은 다른 어떤 주요한 식량 형태보다 오랫동안 저장이 가능하였다. 이것은 미래를 계획하고,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대비할 수 있게 하였다. 농업의 이런 측면은 농업과 농업 이외의 생산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양한 곡물 사이에서도 비슷한 대비가 나타났다.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옛날에도 아시아가 주로 벼농사를 지었던 것에 비해서 유럽은 주로 낙농업(酪農業)과 밀농사를 중심으로 하였다. 이런 서로 다른 농업 양상으로 초래된, 아시아와 유럽의 가장 뚜렷이 대비되는 측면은 단위 면적당 인구 부양 능력의 차이였다. 전근대를 통틀어 유럽 전체 인구는 중국 인구의 3분의 2 혹은 절반 이하였다. 인간 노동력이 가장 큰 생산력의 기초였던 전근대 시기에, 인구수는 해당 사회 자체의 발전 정도와 비례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1714년(숙종 40)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 따르면, 18세기 당시 조선에서 가장 비옥한 지역은 지리산 주변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볍씨의 파종 대비 소출 비율은 100배가 넘었다. 이보다는 못하지만 삼남과 경기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30∼40배 정도의 소출은 유지되었다. 이중환은 볍씨 한 말을 뿌려서 60말을 거두면 살기 좋은 곳이고, 40∼50말을 거두는 곳이 그 다음이며, 30말을 거두면 살기 힘든 곳이고, 10말 이하가 되면 살 수 없다고 말하였다. 농사만 지어서는 살 수 없는 경작 한계지의 파종 대비 소출 비율을 10배로 보았던 것이다. 이것에 근거해서 그는 벼슬 없이 경기 지역으로 물러나면 가문을 보존할 수 없어도, 삼남으로 옮기면 가문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즉, 녹봉(祿俸)이 없어도, 높은 농업 생산력이 가문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뒷받침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것에 비해서 전근대 유럽의 농업 상황은 무척 달랐다. 유럽에서 농업상의 획기적인 전기는 대개 18세기 중반 이후 영국의 농업 혁명이었다.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유럽에서는 파종 대비 소출 비율이 다섯 배에 못 미치는 곳이 많았다. 심한 경우 일부 동유럽 지역은 극단적으로 그것이 두 배를 넘지 못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더구나 유럽에서 가장 많이 경작한 밀은 작물 자체의 성분상 필수 아미노산이 부족하여 영양적인 측면에서, 반드시 고기를 함께 먹어야만 하였다.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밀농사가 대개는 낙농업과 짝해서 이루어지는 이유이다. 목축을 위해서는 목초지가 필요하였다. 그런데 목초지에서 곡물과 같은 양의 칼로리를 얻으려면, 목초지 면적은 밀 경작지의 10배 가까운 넓이여야 하였다.

 

18세기 말 영국의 농업 혁명이라는 것도 내용 면에서 살펴보면, 중국의 경우에 12세기, 우리나라의 경우에 15세기에 도달한 농업적 발전에 미치지 못하였다. 영국의 농업 혁명은 봄가을 사이에 순무를 심고, 가을에 보리를 파종할 때 클로버 씨를 뿌려서 겨울에 사료 작물을 재배하였던 것이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이 클로버가 겨울 동안 가축들의 먹이가 되었다. 이것은 유럽적 기준에서 연작(連作) 농업에 성공하였음을 뜻한다. 하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 곡물 중심의 연작 농업은 유럽보다 300∼600년이나 앞서서 이루어졌다. 앞서 살폈던 『농사직설』은 그것을 증명하는 보고서이다. 유럽에서 파종 대비 소출 비율이 비약적으로 증대한 것은 산업 혁명에 의한 화학 비료를 사용하였기에 가능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왜 중국과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 비해서 유럽이 같은 면적 안에 매우 적은 사람들만 살 수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이것이 또한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관료제가 발생하였고, 유럽에서는 봉건제가 성립된 가장 기본적인 이유이다. 유럽은 뒤에 절대주의 왕정 시기에 이르러 어느 정도 인구가 조밀해진 이후에야 관료제가 성립될 수 있었다. 관료제는 일정한 영역의 넓이에 어느 정도 인구가 밀집하고, 그들이 정착해 있으며, 그들의 생산이 규칙성을 가져야 발생할 수 있는 제도였다. 세계사를 살펴볼 때, 유목 민족이나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서 관료제를 찾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쌀과 근대

우리나라나 중국과 같이 전통 시대에 높은 사회적 문화적 수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팽창으로 식민지나 반식민지(半植民地) 상황을 맞이하였던 경우는 흔하지 않다. 서유럽은 18세기까지도 사회적 발전 수준에서 중국을 앞서지 못하였다. 심지어 19세기에 중국이 아편 전쟁에서 패배하였을 때도 근본적으로는 같은 상황이었다. 중국과 우리나라가 전근대 에 높은 사회적·문화적 발전에 도달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생산적 기반은 높은 농업 생산력, 특히 벼농사의 발전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벼농사를 통해 도달한 높은 생산력은 중국과 우리나라가 근대를 맞이하는 데 부정적으로 작용한 측면도 있다.

 

유럽과 우리나라·중국은 토지의 단위 면적당 인구 부양 능력에서 커다란 차이가 났다. 가장 큰 원인은 쌀의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다른 모든 작물에 비해서 월등하였기 때문이었다. 쌀과 밀을 같은 면적에 농사짓는다고 할 때, 쌀은 밀보다 세 배 이상 많은 칼로리를 생산한다. 더구나 쌀에는 다른 작물에 없는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쌀이 대단히 많은 노동력을 흡수할 수 있고, 비례해서 생산량이 늘어난다는 점이다. 실제로 벼농사는 밀농사에 비해서 같은 면적에 대해서 15배 전후의 노동량을 흡수하였다. 이런 쌀의 특성은 농민들이 더 열심히 일하면 더 많은 소출을 올리는 것을 가능케 하였다. 거시적으로 쌀은 조선과 명나라 중앙 정부의 봉쇄적(封鎖的) 외교 정책이 통할 수 있는 물리적 조건을 제공하였다.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 증산이 없이 장기간 유지된 나라는 없다. 쌀의 이런 측면이 13세기 이후 유럽과 중국의 역사적 진로를 다르게 만든 원인 중 하나이다.

 

13세기는 유럽인들에게 대단히 좋았던 시기이다. 10세기 이후 농업의 꾸준한 발전은 13세기에 이르러서 한 정점을 이루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이나 쾰른 대성당 같은 웅장한 고딕 양식의 성당 건축물이 바로 이 시기를 전후로 건축되었다. 높은 농업 생산성이 신을 찬미하는 사원 건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14세기에 들어서자 상황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농업 생산력은 인구압에 빠르게 위축되었고, 그 결과 유럽 인구의 3분의 1 내지 4분의 1을 죽인 페스트가 유행하였다. 페스트는 인구압으로 인해 사람들의 영양 상태가 악화되고, 상대적 과밀 인구가 공공 위생을 악화시킨 결과 나타난 전염병이다. 15세기에 유럽인들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던 것은 바다 넘어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의 항해(1519∼1522)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이 증명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서였다. 유럽인들을 먼 바다로 내몰았던 것은 근본적으로는 농업 생산력의 한계에 따른 생존의 위기였다.

 

반면에 14세기 중후반에 성립된 명나라나 조선은 해금(海禁) 정책을 폈다. 국가 정책으로 백성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막았던 것이다. 명나라 이전 원나라나 조선 이전 고려가 해상 활동과 상업을 활발하게 전개한 왕조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런 전환은 다소 뜻밖이다. 어떤 면에서 당시의 해금 정책은 역사적으로 중대한 국가 정책의 오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명나라나 조선이 이러한 정책을 폈고 또 그것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발전하는 농업 생산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꾸준히 증가하는 인구를 농업 생산력으로 계속해서 부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봉쇄 정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주목할 것은 사회 지배층이 농업과 관계 맺는 방식이다. 유럽의 경우 지배층인 영주(領主)들이 농업을 통해 부양을 받을 수 있는 정도에 한계가 있었다. 농업 생산력이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찍부터 상업과 관계를 맺었다. 반면에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경우에 지배층은 기본적으로 지주(地主)로서 존재하였다. 지식인층 역시 사회 경제적으로는 지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중국은 조선보다 상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상인 계층에서 과거 급제자를 내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마찬가지였다. 그들 모두의 사회 경제적 지위는 지주였다. 벼농사는 이들이 지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였다. 명나라, 청나라와 조선은 이것을 잘 보여 준다.

 

중국 농업 지대는 밭농사 지대와 논농사 지대로 명확히 나뉜다. 화북(華北) 지방이 밭농사 지대라면 화중(華中), 화남(華南) 지방은 논농사 지대이다. 그런데 논농사 지대인 화중, 화남에서만 지주제가 일반적이었을 뿐, 화북 지방의 농업 경영 형태는 소규모 자영농 중심이었다. 이것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에 북부 지방에서 민란이 발생하면 조정 관리들은 북부 지방에 양반이 없다는 것에서 근본적 이유를 찾았다. 양반의 거주와 민란 발생의 관계가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별도로 밝혀야 할 문제이지만, 밭농사 지대인 북부 지방에 당시의 사회적 통념으로 인정되는 양반이 거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논농사가 확대된 삼남 지방에서는 지주제가 지배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지만, 경기 북부 이상의 북부 지방에서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러한 명확한 대비는 논농사보다 생산력이 낮은 밭농사 지대는 지주층을 부양할 만한 생산력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것을 뜻한다.

 

지배층과 땅과의 관계에서 일본은 우리나라나 중국과 다른 측면을 보여 준다. 일본 역시 막부 시기 동안 벼농사가 발달하였던 것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일본은 벼농사에 매우 유리한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1603년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되자, 막부는 전통적 지배층인 무사들이 농촌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무사들이 농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무사들은 막부 명령에 의해서 영주의 성(城) 아래, 즉 후에 도시로 발전하는 곳에 모여 살아야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사회적 존재는 전통적 지배층인 무사에서 영주를 보좌하는 관료로 변해 갔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지배하던 땅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수익을 얻지 못하고, 영주가 주는 빈약한 녹봉에 의존해 살았다. 이것은 중국이나 조선의 지배층이 지주로서 존재하였던 것과 명확한 대비를 이룬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지배층은 일본의 지배층에 비하여 땅과 관련된 사회적 존재 방식이 달랐다. 이러한 차이는 서구가 등장하였을 때, 이에 대한 경각심의 정도나 대응의 신속성에서 극명한 차이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중앙 정부의 정치적 환경은 농촌에 거주하는 지주들의 사회 경제적 환경이나 의식 세계와 거리가 있었다. 다시 말해 농촌에 사는 지배층은 시끄럽고 복잡한 일은 수도(首都)에만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자신들의 물적 기반인 땅에는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아주 오랫동안 그랬던 것도 사실이었다. 바로 이것이 땅을 차지하였던 자들이 보수적인 이유이다. 반면에 자기 소유 땅이 없이 영주가 주는 충분치 않은 녹봉에 의존하였던 일본 하급 무사들은 서구의 등장에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이런 차이는 서구의 침략에 대한 대응 방식에서 우리나라와 중국이 일본과는 다른 길을 가게 만든 한 가지 원인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지배층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서 너무 늦게 반응하였거나 그들과 타협하였다.

 

출처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26_0050_0060_0010

http://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26_0050_0060_0020

 

 

12개의 댓글

2020.11.30

오... 아편전쟁까지도 사회문화, 농업적으로 중국이 서양보다 발달했다는게 신기하네.

 

일본이 서양에 기민하게 대처한 이유가 녹봉이 적은 하급무사 때문이란건 이해가 가면서도 단지 저이유 때문일까 싶기도 한데,, 하긴 배부르고 등따수우면 뭐하로 새로운 것울 받아들이겠엉 ㅋㅋ

2
2020.12.01
@maino

그 부분은 굽시니스트의 본격한중일세계사에 자세하지는 않지만 적절한 정도의 설명이 나옴

0
2020.12.01
@maino

문명 전체를 봐도 아편전쟁이랑 청일전쟁 이전까지 중국 문화권보다 앞선던 나라는 지구상에 이집트 고왕국 시기 말고는 없었을거. 국가 생산력같은거로 보면 우리나라도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나름 강대국이라 할 수 있었을거고

0
2020.11.30

테란 바이오닉으로 3,3업 물량도 많고 배럭도 많아서 남들 메카닉 올릴때 못따라간 느낌도 나네.

3
2020.11.30
@vitadolce

이해가 확되네 ㅋㅋ

0
2020.12.01

안구압으로 읽고 쌀 먹으면 눈에 압력이 오나 이생각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

1
2020.12.01
@스댕리

아니.. 나랑 똑같네

0
2020.12.01

대학때 잠시 맑시즘 사관에 경도되었을땐 왜 한국엔 봉건제가 없었을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봉건제야 말로 미개한 쉑들의 지배체제였음 ㅋㅋㅋ

2
@charlote
[삭제 되었습니다]
2020.12.01
@홍차녹차보이차

미개하지 않아서 자본주의를 할 필요성도 없다능?

0
2020.12.01

쌀문화권과 밀문화권의 차이란 이야기 들어봤는데 역시나.... 결론은 인구밀도구만

쌀문화권의 경우 처음부터 집단으로 생활하고 해야 하다보니 집단주의나 공동체주의적 성격이 강해지고 밀문화권은 상대적으로 인구가 성글어지다보니 개인주의가 발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것 같은데.... 사회 체제 성립이나 상업발달같은 것의 영향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소리라 보인다.

 

그게 지금 코로나 상황에서의 마스크랑 개인정보같은거 처리문제가 동서양이 극명하게 차이나는 부분이라 생각되고

0
KTO
2020.12.02

총균쇠랑 비슷한 내용인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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