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약산 김원봉의 조직적인 대남 테러·파괴·유격전과 전쟁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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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민족주의자 약산 김원봉의 조직적인 대남 테러·파괴·유격전과 전쟁참여


1. 민족주의자 좌파 약산 김원봉의 북한 국가검열상 활동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 6.25전쟁이 터지기전부터 한국정부에 적대적인 세력이 있었다. 적대세력에는 공산주의 세력도 있었지만 비공산주의 세력도 있었다. 그 비공산주의 세력 겸 친공산주의 세력은 ‘민족주의 좌파’였고(좌익 민족주의 성향 자체를 가르키는 건 아니다.), 그 비공산주의 계열의 대표적인 지도자가 약산 김원봉이다.

김원봉은 독립운동가 시절에도 민족주의자로서 활동했고 해당 뒤에도 일관되게 “좌파 민족주의” 로 활동했다.주석1

공산주의자가 아닌 김원봉이 북한에서 활동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정치생활―은퇴하지 않는― 지속을 전제한 상황에서 미군정의 지속적인 체포위협과 탄압 그리고 우익세력의 지속적 테러·살해 위협 주석2

- 김일성―김원봉은 1940년에도 김일성 측을 동경했다― 을 포함한 북한세력에 대한 기대감 주석3

- 월북정치활동 이전부터 북로당 측과 제휴와 북한지역 내 활동 주석4

당시 한국 내 좌익진영의 노선 주석5

김원봉의 월북 정치활동에는 미군정의 탄압과 우익세력의 테러도 주요 이유중 하나였지만 오직 그것만은 이유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1947년 8월 하순 미국은 "남한 단정안의 현실화를 위한 사전 조사 작업의 일환"으로 "미 대통령 특사 웨드마이어 중장"은 "허헌·김원봉과도 만나길 희망"하였으나 김원봉은 “다른 민주지도자들이 체포되어 감옥에 있으며, 자신들에 대한 체포령이 취소되지 않는 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면서 "면담을 거부하였고"  "유엔 감시 하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으로 진전된 1948년 초 ‘한국인의 의견을 청취’하려는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방한"하였고 "제2분과위원회에서는 미군정에 허헌·유영준·백용희·김원봉·허성택과의 면담을 요청하였다" 이에 "미군정 측에서도 이들을 구금 체포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미국 내부 자료로 검증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김원봉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면담 요청을 거부하였다.”주석6

그러니

미군정이 최후까지 약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안전을 보장하는 등 노력을 다했다는 점을 두고 볼 때 테러 위협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주석7

그리고 생명의 위협이 “주요이유”라는 것도 김원봉이 은퇴하지 않고 정치활동을 지속한다는 것을 전제로 쓴 것이다.

『이렇듯 생명의 위협이 월북의 주요 동기가 되었을 개연성은 그에 대한 위협이 극성을 부리던 1947년 8월 말까지 인민공화당이 지방조직 확충을 시도하였던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이는 김원봉이 인민공화당의 조직 확충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강화해 나갔음을 알려준다. 미군정과 우익세력에 의한 신변 위협이 없었더라면 남한 정국에서 독자적인 정치활동을 모색하였으리라는 가정이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 ‘남한만의 단독선거 실시’가 기정사실화되어 가던 상황 또한 북행 결정의 일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명분으로나 실재 현실의 측면에서 선거 참여가 불가능한 그에게 있어서 남한만의 단독선거는 자신의 정치적 토양이 황폐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월북 이외에 선택의 여지가 소멸되어 가고 있었던것이다』주석8

해당 논문에선 정치활동을 지속한다를 전제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생명의 위협이 “주요 이유”는 맞지만 오직 이것때문에 북한에서 정치활동을 한 것은 아니다.

위와 같은 여러 이유로 김원봉은 북한에서 정치활동을 하게되었다. 

1948년 9월 9일 북한정권에서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에 임명됐다. 국가검열상은 내각 서열에서 "수상-부수상-국가계획위원장-민족보위상에 이은 다섯번째"였고 "행정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감사기관"이었다. 북한 측에선 "김원봉의 이력 등에 대한 고심과 배려"로 국가검열상으로 임명한 것이다. 주석9

2. 6.25 한국전쟁 전후 김원봉의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공작활동: 테러·파괴·유격전


“공작원은 단어 그대로 ‘공작’(工作, cover action)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공작’(工作, cover action)이란 개념은 ‘특수 활동(임무)’, ‘특별 활동(임무)’ 등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일례로 1930년대 의열단 김원봉이 운영했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교육 과목 중 하나였던 ‘정보학 개론’에서는(장석광 2017) 정치 공작은 곧 특무(特務) 공작이며 특무를 국문으로 번역하면 ‘특수 사업’, 러시아어로는 ‘비상한 공작’, ‘특별한 공작’, ‘특수한 사업’이라고 밝히고 있다.”주석10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중국 남경 교외의 탕산에 소재했으며, 1932년 10월부터 1935년 10월까지 3기에 걸쳐 총 117명의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이 학교의 주요 교육 내용은 일제에 대한 파괴, 기습, 유격전 등이었고, 특히 특무 활동이 교육 과정의 큰 비중을 차지했다.”주석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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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은 위와 같은 교육기관을 운영했던 관련 분야 경험자였다. 그리고 김원봉은 북한에서 국가검열상이 된 뒤부터 남한을 향해 지속적인 테러·파괴·유격전 수행 공작 활동을 벌였다. 그 수행은 인민공화당을 통해 이루어졌다.

인민공화당이 만들어진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해방 후 1946년에 "김원봉은 조선민족혁명당 조직을 재건하여 이를 기반으로 삼았다. 1946년 3월 16일 밀양극장에서는 500여 명이 참석하여 전국에서 가장 먼저 민족혁명당 지부 결성식이 열렸다." "1947년 5월 11일에는 민족혁명당 대전지부당부 결성대회가 열렸고, 6월 1·2일 개최된 민족혁명당 제10차 전당대표대회에서는 당명을 인민공화당으로 변경하였"다.주석12

“북한 정권 수립 후 평양에 있던 인민공화당 중앙은 남한 내의 당 조직으로부터 당 사업을 보고받는 한편 당 활동 지침을 일일이 내려보냈다.” “알려진 사례 한를 들면 1949년 6월 15일에는 부산시 초량동 이기우의 자택에서 인민공화당 경남도당 조직을 재조직하는 한편 6월 18일에는 도당에서 일반 정세, 조직광작 현황, 투쟁상활, 선전공작 상황, 재정공작 상황 등의 경남도당 활동 보고서를 작성하여 인민공화당 중앙당으로 발송하였다.” “7월 19일에는 중앙당에서 경남도위에 하달하는 지령문을 내렸다.”주석13

김원봉 측의 공작활동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있다. 김용회는 1947년 7월 부산에서 인민공화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는데 이미 1948년 2월 1일 경에 월북, 강동정치학원에 입학”하였다. “강동정치학원은 1947년 9월 평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평남 강동군 승호면 입석리에 일제시대의 탄광 사무소와 합숙소를 개수하여 만들었는데 초기에는 남로당 도당 부위원장과 부장, 군당위원장, 부위원장급 등을 입교시켜 3개월 정도의 강습과 훈련을 실시하고 다시 남파하였다. 그러다가 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와 같은 해 8월 20일 해주에서 열린 인민대표자회의에 참가하였던 남로당과 그 우당(근로인민당·인공당 등) 및 각 사회단체 간부들이 대거 월북하게 되자 이 단체의 구성원도 받아들여 교육하였다.”(“50년 초에는 해산”) 김용회는 강동정치학원에서 “같은 해 4월 23일 졸업, 월남하였”고 “후일 경남도당 선전책으로 임명되었다.”주석14

“이만식은 1948년 6월 경남도당 간부 김진달과 신남근, 구중복, 문관홍, 안수열과 함께 상경하여 17일 개성에 도착, 송악산을 거쳐 월북하여 같은 달 28일 평양을 경우, 강동정치학원에 입학한 뒤 철학, 조선역사, 소련혁명사, 신민주주의 정치기구, 해방 후의 조선 등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그런 뒤 1948년 10월 20일 경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주석15

“졸업한 이튿날인 21일 이만식은 평양에서 있던 인민공화당 사무소에서 당수인 약산을 만났다.”주석16

김원봉은 인민공화당 사무소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약산은 이들에게 (1)당의 핵심이 될 것 (2)당 재건운동을 전개할 것 (3) 청년으로서 당 사업에 열렬히 투쟁할 것 (4)대한민국정부를 파괴 전복시키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도록 투쟁할 것을 지시하였다.』주석17

“이만식은 남파되어 후일 인민공화당 경남도당 책임자를 맡았다.”주석18

“송삼훈의 경우” “그는 1948년 8월 2일 진주에서 인민공화당에 입당하고 같은 달 10일 경에 월북, 강동정치학원에 입학, 같은 해 11월 10일경에 졸업하여 월남하였다.”주석19

“남한의 인민공화당원들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끊임없이 당 조직 복원운동을 전개하였다. 당 조직은 경남, 충청도, 서울에서 한국전쟁 때까지 유지되었다. 특히 경남은 A 지구 부산, B지구 마산·창원·통영·함안, C지구 진주·의령·사천·합천 등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만큼 경남일대에 세력이 강했음을 보여준다.”주석20

그리고

『당은 조직 복원운동을 전개하면서 북한에 수립된 인민공화국이 한반도의 유일 합법 정부라는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인민공화국은 합법 정부이며 노동자·농민은 인민공화국을 받들어야만 착취를 당하지 않고 자유스럽고 행복스러운 생활을 할 수 있다” 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고 “미군은 즉시 철퇴하라” “인민공화국 만세” “남조선 단독 괴뢰 정부를 타도하자” “유엔한국위원단 물러가라””인민공화국 만세”등의 벽보를 전신주에 따위에 붙이거나 이러한 내용을 벽에 낙서하였으며 인민공화당 및 민전 호소문 등을 가옥에 투입하거나 각 기관에 우송하였다. 』주석21

“당 활동이 활발하였던 경남지역에서는 무장운동까지 전개되었다. 1949년 7월 19일 인민공화당 중앙당에서 경상남도위원회에 하달한 지령문에서는 이만식을 유격대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있으며 1949년 7월 30일 C지구에서 경남도당에 보낸 보고서에는 35명으로 야산대원을 조직하고 있으며 야산대원에게 교양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또 당이 독자적으로 유격대 조직을 시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로당이 전개하고 있던 무장운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주석22

“이같은 당의 활동이야말로 평양에서의 약산의 권위를 지키게 하는 하나의 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 내에서의 운동은 우당이었던 남로당과 상호 협조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그러는 가운데서도 인민공화당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 하였다. 예를 들면 진주의 당 간부는 당원들을 교양하면서 약산의 항일 투쟁을 담은 『약산과 의열단』을 매입하여 탐독할 것을 지시하였다. 또 당의 노선인 ‘4대 자유’에 대한 학습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약산은 당원들에게 중앙당 지령 또는 약산 자신의 지령문을 통해 평양에서 남한 내의 당 활동을 지도하였던 것이다.”주석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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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의 테러·파괴·유격전에 대한 지도활동은 공개적으로도 이루어졌고 이 점은 『로동신문』을 통해 알 수 있다.

1950년 4월 27일에 인민공화당 위원장으로서 “애국역량을 총집중하여 망국단선을 파탄시키자”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하루바삐 완성하기 위하여 거족적 투쟁을 조직 전개하여야 할 것”이라 말했고 5월 19일엔 “5·30망국선거도 멸망에 직면한 이승만도당의 잔명을 구원할 수 없다” “미제의 침략정책을 파탄시키며 유엔조선위원단을 우리 강토에서 몰아내고 만고역적 이승만 망국도배를 박멸 소탕함으로써 조국의 통일 독립을 쟁취하는 길만이 우리들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한다고 선동하였다.주석24

5월 20일에는 조선중앙방송국 라디오를 통해 인민공화당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동하였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하여 적의 선거기관과 선거장소를 파괴 습격하며 선거를 거부함으로써 선거를 완전히 파탄시키라! 인민유격대의 무장투쟁을 백방으로 원호하며 광범한 농민봉기를 일층 맹렬히 전개하라! 이승만 매국역도들을 타도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방책을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실시하라! …… 조국의 영예와 당의 영예를 위하여 자기의 피와 생명을 아끼지 말고 원쑤들을 소탕하는 길에 용감히 전진하라!”

1950년 5월 20일에 조선중앙방송국 라디오를 통해 인민공화당 당원들을 대상으로 한 선동주석25

선거기관과 선거장소를 파괴 습격하고 유격대의 무장투쟁을 원호하고 봉기활동을 선동하며 소탕활동을 하라면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방책"(?)을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실시하라"고 말하고 있다.

김원봉은 남한지역으로 대상에서 지속적이고 조직적으로 테러·파괴·유격전이라는 공작활동을 벌였다. 북한의 침략으로 6.25 전쟁이 터진 뒤에는 죄없는 가족들이 한국 측에 보복으로 학살당했다. “약산의 형제 가운데 춘봉, 작은봉, 구봉 등 4명은 밤에 들어닥친 군경의 차에 실려가 돌아오지 못하고 학살당하였”고 “약산의 아버지 김주익 노인은 사람들의 경원 속에 한적한 곳에 유폐되어 거의 굶어 죽었으며 사촌들도 체포디어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겪어야 하였다.”주석26

김원봉의 공작활동은 북한군의 침략에 따른 6.25 전쟁이 터진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

경향신문이 1954년 1월 26일에 보도한 기사에는 "간첩 김춘옥(金春玉) 외 4명을 체포한" 사실이 나와있다. 해당 간첩들은 “김원봉의 직접 지휘하에 활동 중, 6·25 당시 서울에 침입하여 9·28에 평양에 다시 돌아가, 또다시 작년 6월에는 괴뢰집단의 밀령을 받고남하”하여 “남한의 경제를 혼란시키고 선거방해 그리고 모 정당의 和解(화해)공작등을 감행하”는 공작활동을 수행했다.주석27

3. 6.25 한국전쟁 당시 활동

북한은 1950년 6월 25일에 남한을 침공·침략하여 한국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김원봉 측은 다음과 같은 활동으로 전쟁 수행에 참여하였다.

“과거 남한에서 활동하였던 상당수의 인민공화당 사람들이 북에서 내려왔는데 월북 이전 인민공화당 서울시 지부장이었던 한지성은 남하하여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위원장은 남로당의 이승엽)이 되었다.”주석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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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장 한지성

 

한지성의 활동은 다음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의 증언:
『지생의 손위 막내누이 금생은 충칭에서 한국청년회 부회장을 맡았으며 광복군의 인면(印緬-인도·버마)특파대 대장을 지낸 한지성과 결혼했다. 한지성은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서울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충칭 시절 그가 한국청년회장으로 있을 때 내 아버지(김의한)는 그 회의 고문으로 있었다. 6·25 발발 직후 서울시민은 대부분 먹을거리가 없어 9·28 수복 때까지 어려운 3개월을 지냈는데, 한지성이 우리 집에 쌀 한 말과 팥 한 되를 보내온 일이 있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13767.html#csidx4e8280fbcea540b81d31f9ad41660d4 

“공산권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북한총람』에 의하면 약산은 전쟁 기간에 남한에 있던 인민공화당 당원을 모아 월북시켰다고 한다.”주석29

김원봉의 활동은 "한국전쟁 발발 초기 이른바 ‘모시기 공작’과 납북 후 관련인물들의 동향, 대남 통일전선사업 부문에서"도 "일부 확인된다."“ ‘모시기 공작’이란 남측 정치요인들을 연행·체포하는 작전명이었다. 궁극적으로 남측 요인들을 북측의 동반자·협력자로 만들려는 목적이었다.”주석30

남침 직후 김원봉은 박헌영·이승엽·홍명희·이만규·정노식·홍증식 등 남한 출신 유력인물들과 서울에 파견되어 임정요인과 저명인사들을 ‘8·15 해방 기념연회’에 초청하는 등, 북한체제 선전과 북한군 지지 및 월북 권유 등의 활동을 벌였다.” “임정요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과 남한사회 저명인사들을 전향시켜 대남 통일전선공작에 활용하려는 목적이었다.”주석31

“7월 14일, 조선최고인민위원회는 공화국 남반부 해방지구의 군·면·리(동) 인민위원회 선거 실시에 관하여 를 발표하여,

남한 점령지역에 정권기관 구성 방침을 밝혔다. 당시 조국전선 중앙상무위원 및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었던 김원봉은 ‘모시기 공작’의 실무책임자인 김응기·방학세 등과 남한 내 각지에 인민위원회 조직을 통해 북한정권 기관을 구축하는 작업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는 국가검열상 직에 있었던 만큼 남한 체류기간은 길지 않았을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그의 남한 방문 개연성은 ‘한국전쟁 시 그가 고향인 밀양을 방문했었다’는 증언으로도 뒷받침된다.” 주석32

“임정요인 및 저명인사들”은 “‘모시기 공작’ 계획에 의거하여, 7월 20일경부터 8월 중순까지 네 차례에 걸쳐” “북으로 끌려갔다. 전체적인 상황이 알려지는 4차 납북의 경우, 8월 중순 이광수·정인보·최린·현상윤·최규동·명제세·백관수 등이 평양 서쪽지역의 외진 곳에 수용되었을 때, 김원봉이 홍명희·이만규·홍증식 등과 방문하여, 전향을 거부하는 이들을 설득 회유하였다”주석33

"1952년 2월 16~17일 열린 국가검열성 검열사업 총화회의에서 김원봉 국가검열상"은 “국가기관 각 부문들과 각 공장, 기업소 및 협동단체들에서 국가의 법령, 결정, 지시들을 정확히 실시하도록 방조” “하여 인민정권의 공고 발전과 전쟁 승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말하며 “향후 과제로는 전시 노동규율 강화, 노력 조직의 합리화,생산능률의 제고 및 생산품의 질적 제고를 보장하기 위한 검열사업 강화 등을 제기하였다”주석34

"1952년 3월 22일자 중화인민공화국 국영통신사"("新華社의 平壤發")의 "전문"에 따르면 "국가검열상 김원봉"은 "노동훈장을 수여"받았다. “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조국 통일·독립의 조국해방전쟁중 전방과 후방을 공고히 함에 있어서, 특수한 공훈을 세웠다” "는 것이 훈장수여의 배경 내지는 사유로 내세워진 점으로 미루어 보면, 한국전쟁 수행 과정에서의 기여도 등을 토대로 한 사기 진작 및 독려 차원에서 수상이 이루어진것으로 짐작된다."주석35

『로동신문』에 따르면 김원봉이 수여받은 건 정확히 “노력훈장”이다. "1952년 3월 19일에 김원봉"은 “조국의 통일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미제의 약탈자들과 그 주구들을 반대하는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에서 공훈”이 있다며 “노력훈장을 받았다”. “북한에서 노력훈장은 정치, 경제, 문화 발전에서 특출한 공훈을 세운 일군 또는 단체를 국가적으로 표창하기 위한 것이다.”주석36

4. 6·25 전쟁당시 미국에 대한 비하·비난·모함 활동과 허위선동

김원봉은 6.25 전쟁 당시 미국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비하와 비난과 모함을 하기도 하였다.

“1952년 6월 12일, 김원봉은 인민공화당 위원장”으로서 “미제 침략자들이 조선에서 감행하고 있는 만행의 어느 한가지나 국제법규와 인류도덕의 란포하고 철저한 유린행위 아닌 것이 없지마는 우리 측 포로들에 대한 그들의 날로 악랄해 가는 만행은 실로 우리들의 화산 같은 분노를 불러 일으킨다”,

“미제 침략자들의 야수적 발악은 반드시 더욱 큰 재난과 파산과 보복을 면치 못할 것이며 전체 조선 인민들은 불구 대천의 원쑤들을 전쟁 범죄자들의 이름 밑에 준엄히 처단함으로써 원쑤들의 총검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어간 우리의 아들 딸의 원한에 사무친 원쑤를 갚을 것이다.”주석37

고 공개적으로 선동하였다.

김원봉은 "전쟁 발발 2개년을 넘기며" 다음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 기간에 포악한 원쑤와의 가열처절한 투쟁을 통하여 조선 인민은 일체 물질적 정신적 면에 있어 불패의 역량을 검열 시위하였다. 조선 인민은 숭고한 애국주의와 대중적 영웅주의를 발휘하여 자기 조국의 독립과 영예를 완강히 수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피압박 예속 국가 인민들에게 해방투쟁의 모범을 보여 주었으며 세계 평화 유지에 막대한 기여를 하였다”주석38

고 선동을 하였다. 

남한지역을 침략·침공해서 전쟁을 일으킨건 북한인데 북한의 전쟁행위에 참여하는 행위가 “숭고한 애국주의와 대중적 영웅주의를 발휘하여 자기 조국의 독립과 영예를 완강히 수호”한 행동이라 평가 하며 한국에서 전쟁을 일으킨 집단의 전쟁행위에 참여하는 행위가 “피압박 예속 국가 인민들에게 해방투쟁의 모범”이라 미화하며며“세계 평화 유지에 막대한 기여”하는 행위라 주장했다.

5. 관련분야 전문가들의 학술서에엔 6.25 침공행위에 대해 김원봉이 무슨 견해를 보였는지 언급이 없다

증거없는 견해에 따르면 ‘김원봉은 전쟁에 반대’했다고 한다.

증거없는 견해는 다음과 같다.

“김일성에게 김원봉은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언을 하였다고 합니다.”

https://www.rfa.org/korean/weekly_program/ae40c528c77cac00c758-c228aca8c9c4-c9c4c2e4/hiddentruth-07102018112040.html

“전쟁 전에는 6.25 전쟁에 반대했으나 막상 개전 이후로는 적극 협력”

https://www.fmkorea.com/best/2854400767

그러나 김원봉에 대해 연구한 관련분야 전문가들의 학술서엔 그런 언급이 전혀 없다. 김원봉이 6.25 침공에 대해 찬성이나 반대를 했는지 혹은 둘중 하나를 하였는지에 대해 언급이 전혀 없다.주석39

6.마무리

관련분야 전문가들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김원봉은 6.25 전쟁부터 남한을 향해 지속적인 테러·파괴·유격전이란 공작활동을 벌였으며 북한의 침략으로 6.25 전쟁이 터진 뒤엔 전쟁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와 별개로 김원봉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니 김원봉을 ‘공산주의’라 비난하는 건 사실관계가 틀렸다.

그러나 ‘좌파 민족주의’ 라 호칭하며 비난하는 건 사실관계에 아무런 오류가 없다. (비난하는 행위에 대한 가치평가는 다를 수 있어도 사실관계 부분에선 오류는 아니다.)

김원봉을 비난할 때 ‘공산주의자’가 아닌 ‘좌파 민족주의’라 호칭하면 다음 책과 같은 김원봉 변호는 근거가 상실된다.

"해방조국에서 북으로 갔다는 사실 때문에 공산주의자로 몰렸고, 우리 현대사에서 폐족이 되어버렸다."

(김하늘, 역사 인물 소설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 북로그컴퍼니, 2019, 6쪽)

김원봉을 “공산주의”라 비난할 때는 저런지적이 옳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아니라 “좌파 민족주의”라 비난하면 해당되지 않는다.(다만 좌익 민족주의자 자체를 가르키는 건 아니니 혼동주의)

7. 주석

주석1

“약산은 개화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신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이 과저에서 민족주의자들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었”고 “약산 사상의 밑바탕에는 항상 민족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민족주의가 흘렀”다.(염인호, 1992, 404) 독립운동가 시절에도 일관되게 “민족주의”성향으로 활동하였다.(염인호, 1992, 404~410) 김원봉·의열단·민혁당과 적대적인 다른“민족주의자”들은 “의열단·민혁당=사회주의 단체”라 주장하였으나 “중국공산당과 혈투를 벌이고 있던 국민당은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단지 조선인들은 단결심이 약해 서로 헐뜯기 좋아한다는 정도로 치부하였”다.(염인호, 1992, 408) “의열단·민혁당은 사회주의 단체이기보다는 민족주의 단체임이 분명하며, 약산 역시 민족주의자의 한 사람이었다” 약산 김원봉 진영은 사회주의는 아니고 다만 “사회주의자들과의 연합에 의해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그리고 민족주의 계열중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이었다.(염인호, 1992, 409~410) 김원봉은 해방 뒤에도 일관되게 공산주의 계열과 구분되는 민족주의 세력이라 구분됐고 학계 전문가들한테도 그렇게 평가받는다. 해방 후를 기준으로 하여도 약산 김원봉은 “민족주의”, “진보적 민족주의”

염인호, 1994, 413~415

"민족주의 좌파세력", "임정 군무부장 겸 광복군 부사령 출신의 좌파 민족주의자", "좌파 민족주의자", "민족주의 좌파세력", "민족주의자"[미군정], "친공산주의 활동"[미군정], 

"비공산주의계열의 좌익 지도자인 김원봉"[미군정], 

" ‘비공산주의자인 좌익 지도자’로 분류되었던 그였지만, 어느새 두 발은 공산주의 진영 깊숙이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며 

한상도, 2018, 122·130·133·149~150·157

“김원봉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남한에 있어 보아야 정치윁으로 큰 무엇이 없겠고, 지난날 관계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이북에 있고 하니, 이북으로 갔을”인물[정화암]

"초대 국가검열상"에 "‘남한 출신’ 및 ‘비공산주의’의 지분으로 입각", " ‘남한 출신’ 및 ‘비공산주의’에 대한 배려 원칙이 적용", "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먼’ "

"남한 출신의 비공산주의자들", " ‘비공산주의자’, ‘비남로당’으로 분류되는 민전 의장 "

한상도, 2019, 219·224의 주석 67·225·227·242

"민족주의 성향"

김광운, 2019, 276

등 당시기준으로 하던 학계 전문가를 기준으로 하던 약산 김원봉은 좌파 민족주의로 분류된다.

주석2

염인호, 1992, 358~359·363·365~366

한상도, 2018, 142~143·150·155~156

한상도, 2019, 216~219

주석3

한상도, 2019, 219~221

주석4

한상도, 2018, 152

한상도, 2019, 221~222

주석5

염인호, 1992, 379~380·413~414

한상도, 2018, 157

주석6

한상도, 2018, 157

주석7

염인호, 1992, 413

주석8

한상도, 2019, 218~219

주석9

한상도, 2019, 223~224

김광운 박사의 논문에서도 "국가검열상은 내각 서열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요직"이라 설명한다. 김광운, 2019, 282

주석10

이관형, 2020, 306. 해당 사실을 해방 후 김원봉의 남파간첩과 연결시키는 건 독자해석이 아니라 해당 논문을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해당 논문 306쪽 주석 16에선 “김원봉은 월북 이후 남파 간첩들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1954/01/26, 2”며 해당 주제를 김원봉의 남파 간첩 활동과 연결하고 있다.

주석11

이관형, 2020, 306 주석17

주석12

한상도, 2018,145~146

다음 논문에서도 "김원봉은 1947년 6월 1~2일 열린 조선민족혁명당 제10차 전당대표대회에서 당명을 조선인민공화당으로 변경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김광운, 2019, 278

주석13

염인호, 1992, 384·384의 주석 47

주석14

염인호, 1992, 384·384의 주석 48

주석15

염인호, 1992, 384~385

주석16

염인호, 1992, 385

주석17

염인호, 1992, 385)

주석18

염인호, 1992, 385)

주석19

(염인호, 1992, 385

주석20

(염인호, 1992, 385

주석21

(염인호, 1992, 385)

주석22

염인호, 1992, 386)

주석23

염인호, 1992, 386

주석24

김광운, 2019, 284~285

주석25

김광운, 2019, 285

주석26

염인호, 1992, 387

주석27

한상도, 2019, 229

주석28

염인호, 1992, 387

주석29

염인호, 1992, 387. 1992년에 나온 해당 학술서에선 그 뒤 “그러나 약산이 직접 남한에 왔다는 기록은 없다.”는 내용을 덧붙이고 있다. 염인호, 같은책

주석30

한상도, 2019, 227·227의 주석 76

주석31

한상도, 2019, 227

주석32

한상도, 2019, 228·228의 주석 80

주석33

한상도, 2019, 228

주석34

김광운, 2019, 286

주석35

한상도, 2019, 229

주석36

김광운, 2019, 287·287의 주석 135

주석37

김광운, 2019, 288

주석38

김광운, 2019, 288~289

주석39

염인호, 1992; 한상도 2018; 한상도 2019; 김광운, 2019

8. 주석에서 인용한 자료

염인호, 『김원봉 연구: 의열단, 민족혁명당 40년사』, 창작과 비평사, 1993

한상도, 『해방정국기 김원봉의 정치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No.64, 2018

한상도, 『김원봉의 월북 배경과 이후 정치활동 궤적』, 한국 근현대사 연구, No.88, 2019

김광운, 『김원봉의 1945년 광복 이후 정치 행적과 성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No.68, 2019

이관형, 『북한 공작원 연구: 전직 공작원들과의 인터뷰』, 한국군사학논집 Vol.76 No.1, 2020

9. 사진출처

김원봉 사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937607&cid=43667&categoryId=43667

약산과 의열단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8409080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장 한지성
https://www.ktv.go.kr/content/view?content_id=559007
 

 

10. 기타

북한의 6.25 침공 당시 북한측에서 내려온 한지성과 광복군 한지성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은 네이버에서 'Simone Weil'란 분이 알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14개의 댓글

2021.03.22

항상 잘 읽고 갑니다.

공동의 적을 향하던 칼날이 나를 겨눈다고 생각하니 무서움 배신감 그 이상의 감정이 느껴지네요.

0
2021.03.26
@꼬부덜덜

저도 비슷한 감정이 드네요.

0

알던 것보다 더한데 ㄷ

4
2021.03.22

잘읽고 갑니다.

0
2021.03.22

이모양인데 왜 민주좌파진영에선 추앙하죠?

5
2021.03.24
@Johannnn

주체사상 공부하던 인간들이니깐

0
2021.03.22

김원봉 월북을 어떻게든 막았어야 했는데 너무 안타깝다.

 

0
2021.03.22
@카세켐위

ㄹㅇ 비운의 명장.. 단순 업적 비교도 안되는 김일성한테 숙청 당할 때 어떤 생각 하고 자살했을까.. 북한에서도 팽 당하고 대한민국에서도 개새끼로 낙인 찍히고 안타까운 사람임..

2
2021.03.22
@케틀햇

근데 김일성 측근에서 봤을텐데 싸한 느낌은 없었으려나?

0
2021.03.22
@Zetpack

애초에 핵심 권력에 다가갈 수 없는 한직 위주로 굴렸다고 했을 걸 본인 자부심도 있고 설마 날? 이런 시선으로 보지 않았을까 싶음

0
2021.03.22

그냥 욕먹고 월북했다가 암것도 못하고 손절당한 양반인줄 알았는데 625때 저지랄하신거보니 좀 그렇긴하네

1
SGT
2021.03.23
@NMNSe

욕먹고 월북한게 아니라 극렬하게 신탁통치 찬성하고 임정에 아예 등돌리고 따로 행동한 양반임. 저 양반을 건국훈장에 추서하자는 말이 개소리인게 헌법에도 명시되어있듯 임정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정부가 임정을 부정한 양반에게 뭔 명분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다고 추서할까... 항일운동은 했으나 대한민국 건국에는 눈꼽만큼도 기여하지 않았고 도리어 부정한 양반을...

1
2021.03.23
@SGT

와 씨발 파면 팔수록 존나 심각한 양반이네 좋은이야기 ㄱㅅ

0
2021.03.22

월북 막았어야 했는데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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