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여말선초의 정치세력에 대한 논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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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 썼던 독후감에 이어서 이번 글에서는 주로 고려-조선 교체기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알아보겠음.

 

https://www.youtube.com/watch?v=vpIp3pioFwY

1960년대 이후 한국사학계: 식민사관 극복을 위한 노력

 

1960년대 이후, 한국사학계에서는 일제가 조선의 정체성(停滯性)을 강조하며 식민지배를 합리화했던 것을 반박하기 위하여 조선시대의 역동성과 변화를 강조하는 학설들이 발표되기 시작했음.

 

 

이런 흐름에 따라서 여말선초 왕조 교체기를 새로운 시각에서 논한 학설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1964년에 발표된 이우성의 논문이 그 시초격이라고 할 수 있음. 이우성은 이 논문에서 향촌에서 세를 키운 지방 향리층(능문능리의 신관료층->사대부)이 새롭게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왕조교체의 주역이 되었다는 주장을 펼침. (신진사대부)

(「高麗朝의吏에對하여」, 『歷史學報』 1964.)

 

 

여기에 더해 민현구는 무신집권기~원간섭기의 집권가문들을 추적하여 권문세족(權門世(勢)族)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고는 권문세족vs신진사대부 구도를 제시함. 또, 권문세족은 기회주의적이고 친원적 성향을 보이며 음서로 관직에 진출한 반면에 사대부들은 조국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나라와 결별하여야만 한다는 자주적 성향과 능문능리적 소양을 통해 과거로 떳떳하게 관직에 진출한다는 추가적 설명을 덧붙임.

 

거칠게 일반화해보면, 권문세족은 대체로 학문과는 거리가 먼 빡대가리 새끼들이었고, 조상빨로 관직을 낼름 쳐먹었으며, 오랑캐들한테 나라까지 팔아먹은데다가, 그 대가로 거대한 토지를 겸병하기까지 했고, 사대부들은 그에 따른 사회정치적 폐단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개혁 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는..

(閔賢九, 「高麗後期權門勢族의成立」, 『湖南文化硏究』 1974)

 

 

이태진은 나아가 '중소지주층으로서의 사림' 개념을 제시했음. 여말선초 전함품관·유향품관의 중소지주들이 유향소를 설치해서 본인들을 향리들과 차별화 시켰고, 사창과 향약같은 성리학적인 질서를 사회에 보급하며 지방에서 주도권을 잡았다는 주장임. 이후 이들이 사림(경상도 지역의 중소지주)으로 변신해서 중앙의 훈구(대지주)와 대립하였다는 전통적 훈구-사림 대립론의 기틀이 이를 통해 마련되었음. 

 

 

대충 위의 학설들이 이후 한국사학계의 소위 말하는 통설이 되고, 교과서 서술도 대체로 위의 학설들을 토대로 만들어지게 됨.

 

 

위 학설들의 특징은, 특정한 사건들(왕조 교체나 사화같은 것들)을 중심으로 시기에 따라 다른 집권세력을 별개의 용어를 통해 사회적, 경제적 변화와 연관지어 설명하려 했다는 것이고, 역동적이고 구체적인 변화를 충실히 연구해냈다는 것임.

 

 

통설에 대한 반박들

 

 

그러나 위와 같은 통설은 여러가지 부분에서 비판할 점이 많고, 국내 사학계 내부에서도 자체적으로 이러한 통설의 세부적 부분들에 대한 반박이 이루어졌음.

 

 

당장 권문세족의 개념부터가 모호함. 권문세족은 두가지 부류를 강제로 하나로 합쳐버린 개념인데, 바로 충선왕이 복위 교서에서 왕실과 결혼 가능한 재상지종(宰相之宗)이라고 언급했던 고려최고 세레브한 핏줄들과 갑자기 천출로서 원나라 끈 잘잡고 중앙에 벼락출세한 통역가, 매잡는 사람(응방鷹坊) , 환관들을 동시에 일컫는 말이기 때문임. 당연히 이 두 부류는 달라도 너무 달랐음. 

 

 

그래서 김광철은 권문세족(權門世族)이라는 용어를 권문(權門)과 세족(世族)으로 분리하고는 권문에서의 권權은 그냥 개인의 정치적 파워를 의미하는 용어(우리가 흔히 쓰는 권신權臣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울 것임. 권權은 강력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기회주의적이라는 뜻도 될 수 있다고 함.), 세족은 뜻 그대로 대대로(世世) 잘나가는 집안을 말하는 용어였다고 주장함. 그리고 세족이라고 해서 음서로만 꿀 빤게 아니고, 오히려 후대에 갈수록 이들도 과거에 목숨걸고 점차 과거급제 출신 관인 비율이 늘어남을 지적함. 

(金光哲, 『高麗後期世族層硏究』,동아대학교출판부, 1991.)

 

게다가 위에서 언급했던 벼락출세했던 애들때문에 세족 입장에서도 먹고 살기가 점점 팍팍해졌는데, 국왕이 아첨하는 천출 출신들을 파격등용해서 호위로 쓰는 폐행(嬖行)정치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임. 그리고 세족들은 당연히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친원을 하기도, 나중엔 친명을 하기도 했음. 

 

 

여담으로 폐행은 대충 이런것.

 

최충헌의 여종 동화(桐花)는 얼굴이 예뻐 동네 사람들과 많이 사통했으며, 최충헌과도 사통했다. 하루는 최충헌이 희롱삼아, “너는 누구를 남편으로 삼겠느냐?”고 묻자 동화가 흥해(興海)의 공생(貢生)으로 있는 최준문(崔俊文)의 이름을 대었다. 최충헌이 즉시 최준문을 불러 자기 집의 가노로 삼았다가 뒤에 대정(隊正) 벼슬을 주었으며 나중에는 대장군 벼슬까지 주어 날로 총애와 신임을 더하자, 최충헌에게 청탁을 넣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아부했다.
(국역 고려사: 열전, 2006. 11.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또, 김당택은 사족士族출신으로 관직에 진출한 사대부들이 이런 폐행을 통해서라던지, 원나라 후광얻어서 벼락출세한 천출들을 극도로 혐오했으며, 여기에서의 사족은 이전부터 관료에 진출할 수 있었던 가문 출신이었고, 권문세족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의 가문들도 사실상 사대부 가문과 구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음. 요컨대 고려의 세족世族= 여말선초의 사족士族이었단 거임. 

 

 

(마르티나 도이힐러도 여기서 좀 더 나아가서 신라 골품 귀족이 고려 세족世族(문벌귀족)으로 편입되었고, 다시 왕조가 조선으로 교체된 이후에도 사족士族으로 이어졌다고 보았음.)

 

 

 

에드워드 와그너

Edward Willett Wagner 1924~2001

그런데, 이미 오래전부터 국내 사학계의 통설과 배치되는 주장을 해왔던 한 외국인 학자가 있었음.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illett Wagner) 하버드 대학 교수.

 

 

와그너 교수는 평생동안 연구실에서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는 동료 학자의 평이 있을만큼, 한국학 연구에 일평생을 바쳐 헌신한 위대한 역사학자임.

 

 

이 분은 한국사학계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기존 통설에 대한 반박이 나오기도 훨씬 전부터 이미 독자적으로 한국학을 개척했고, 북미 한국사 연구의 초석을 다졌으며,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지금도 사학과 개론서로 많이 읽힘)을 영문으로 번역하기도 했음. 존 던컨, 마크 피터슨,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마르티나 도이힐러 같은 한국학 교수들도 전부 에드워드 와그너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그리고 국내 사학계에는 정두희 교수님이 와그너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다고 알고 있음.)

 

 

그가 60년대부터 독자적으로 한국의 역사를 연구하며 내놓았던 학설들도 당시의 국내사학계 통설과는 1만광년 떨어진 것이었는데,,,

 

 

무오사화~기묘사화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사화士禍들을 기나긴 조선왕조 당쟁사의 시작이 아닌 제도발전의 시작점으로 본다던지,

(와그너 “당쟁과 사화가 조선왕조 존속에 기여했다”)

 

사화士禍의 원인도 훈구-사림 갈등에 의해 벌어진게 아니라 삼사(三司)의 영향력 강화로 정부 내 권력구조에 불균형이 초래돼서 그게 터지느라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한더던지,

 

당쟁이란 것도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유별나거나 특이한 현상이 아닌 권력배분과 정치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보편적 성격을 지닌 것이었고 마침내 간쟁제도를 통해서 조선왕조의 영속이 가능해졌다고 주장한다던지,

 

『문화류씨세보(文化柳氏世譜)』 가정본(嘉靖本)을 분석해서 성종~중종 연간의 문과 급제자들 중 70퍼센트, 현량과 합격자 28명 중 26명이 세보에 들어가 있다는 것을 가지고 기존의 한국사학계에서 정설로 여겨졌던 '15~16세기 훈구 사림 대립론'을 비판한다던지,,,,

 

하는 여러 설득력 있는 주장들을 펼침.

 

도이힐러 또한 이러한 와그너의 연구성과에 영향을 받아, "한국 사회의 지배계층이 거의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거대하고 급진적이었던 유교적 개혁들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가?" 라는 물음으로 나아가게 되고,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 을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음.

 

또, 한국사학계가 족보를 그다지 역사적 사료로서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와그너는 족보를 적극활용해서 한국 친족을 연구하고, 한국 씨족의 특성을 밝히고자 하였음.  그동안 일상적, 반복적= 비역사적 이라는 이미지가 있어서 변화와 발전을 강조하던 학계의 논의 대상에서 벗어나있던 친족에 대해서도 새롭게 주목해서 이를 정치, 권력, 신분과의 관계 속에서 논하고자 하는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도 함.

 

 

이러한 연구 과정에서 와그너는 사료 연구를 위해 만났던 어느 족보 연구 스페셜리스트 한국인 학자와 평생토록 함께 사학계에 길이 길이 남을 전설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와그너·송준호 조선문과방목’프로젝트

*방목(榜目):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적은 명부

 

두 사람은 ‘와그너·송 조선문과방목’을 조선시대 문과급제자에 관한 한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정보를 수록한 자료로 만들겠다는 계획 아래 각 급제 자마다 급제년 및 급제시험명, 급제 전력前歷, 생졸년, 사조四祖, 처부, 출계出系 여부, 직력職歷, 본관, 거주지(묘소), 자字, 호號 또는 시호諡號 등을 포함하여 급제자의 개명改名, 이명異名, 삭과削科, 복과復科, 재등과再登科 여부 그리고 급제자의 일정 범위 내에서 배출된 문과급제자, 급제자와 급제자 집안에 대한 정보 등 50여 개의 항목을 설정하고 그에 관한 정보를 기존의 방목은 물론이요, 족보, 『조선왕조실록』, 『국조인물지』, 『동국여지승람』, 각종 문집, 읍지 등 무릇 문과급제자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자료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뒤지며 관련 정보를 모았다.

 

송만오 (2010). 조선 지배층 추적에 이정표를 세운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와 송준호 교수의 공동연구. 한국사 시민강좌 

 

 

 

도이힐러의 이 책에서도 곳곳에서 인용되고 있는 와그너·송 프로젝트.

 

마침 와그너 송 프로젝트에 대한 도이힐러의 기고문을 누가 번역해주신게 있길래 인용.

 

와그너 송 : 문과방목 프로젝트의 가치
Martina Deuchler(SOAS)
“Wagner-Song 문과 프로젝트”는 하버드 대학교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Wagner) 교수님과 전북대학교의 송준호 교수님의 공동 연구 사업으로써 1960년에 시작되었다.
그들의 연구는 문과 급제자 14,600명 가량의 사회적, 정치적 배경을 분석함으로써 조선시대 (1392-1910) 집권층을 분석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는 과거급제자 명단, 즉 방목 에 포함되어 있는 귀중한 정보를 학문적으로 연구 가능하도록 만든 최초의 종합적 시도였다.
불행히도 두 학자가 고인이 된 후에도 프로젝트는 여전히 미완성인체로 남아있었다.
프로젝트 준비과정에서 꽤 긴 시간을 할애해야 했는데, 그 주요한 이유 중 하나는 기술적 문제, 즉 와그너 수님과 송교수님이 프로젝트를 착상했을 때만하더라도 컴퓨터 기술이 여전히 초기 단계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자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나는 와그너 교수님이 한자 한글자를 입력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펀치카드(punch card)를 필요로 했는지 기억하고 있다.
요컨대, 이 프로젝트는 시대를 앞서나갔으며 당시에 직면한 기술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 인터넷 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데이터 베이스를 사용해본 사람이라면 문과 급제자의 이름을 검색하고, 이 사람이 합격한 시험정보, 가문, 직책 등과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찾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절약 할 수 있는지 알 것이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이렇게 찾은 정보는 그 자체만으로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지 못하는 미가공 데이터다.
그러므로 두 교수님은 합격자 각각의 이름에 족보, 문집,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찾은 자세한 정보를 입력시키려고 했다.
이 같은 노력을 “Wagner-Song 문과 프로젝트”의 완성을 위해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해해주었으면 하고 희망한다.
Martina Deuchler(한국사, SOAS)
출처: https://famtree.tistory.com/44 [famtree - Korea Genealogy (대한민국 계보학)]

 

 

 

1967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조선왕조 전시기, 748회의 과거에 걸친 문과시험 합격자 총 1만 4,607명을 포함한 혼맥지도를 구축하고, 문과뿐만 아니라 생원, 진사시험 합격자+친인척까지 10만여 명에 이르는 인물들의 출생연도, 사망연도, 친가, 외가, 처가 기록, 급제자의 자字, 호號, 본관, 친인척의 최고관직, 거주지, 씨족 등을 포함한 지배 엘리트 전체의 인명록 완성을 목표로 와그너, 송준호 두 학자가 평생을 매달려 온 과업이었음. 

 

 

그들은 본래 20년 정도의 기한을 잡고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안그래도 방대한 논제를 계속해서 확장해 나갔기 때문에 연구해야할 양은 계속해서 늘어만 갔고,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거의 일평생을 이 프로젝트에 헌신하셨음. (원래는 문과 급제자 14,607명에 한정되어 이었으나 점차, 생원진사시 합격자 연구, 과거제도 운영에 대한 연구, 문과급제자 가계 연구, 무과급제자 연구, 잡과 및 중인계층에 관한 연구, 씨족제도에 대한 연구, 향촌사회 연구, 지방관 연구 등등으로 확장됨.)

 

 

문과 급제자의 수만 자그마치 14,600여명, 생원진사시는 46,000여명, 그들 가족까지하면 20만명에 달하는 이 방대한 분량은 도저히 일생동안에 끝날만한 일이 아니었고, 위의 기고문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컴퓨터 기술도 조잡했기에 결국 와그너 교수는 2001년에, 송준호 교수는 2003년에 타계하시면서 프로젝트는 미완으로 남게 되어버림. (와그너 교수님이 먼저 돌아가신 후, 송준호 교수님은 반드시 프로젝트를 완수하겠다는 일념하에 연구실까지 따로 얻으셔서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하기까지 하며 연구활동에 전념하셨지만 결국 무리한 연구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다고함.)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전주 모처에 연구실을 따로 얻고 그곳에서 숙식도 해결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송 교수는 건강을 크게 해치게 되었으며 2003년 11월 중순에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송만오 (2010)

 

 

 

(최근에는 송준호 교수의 아드님이신 송만오 교수님이 유업을 잇기 위해 노력하고 계신다고 함. 아래는 그 결과물로서 나온 책들. 두 학자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를 이어서 결실을 맺고 있다.)

 

‘와그너·송 조선문과방목’뿐만 아니라 와그너 교수와 송 교수가 지난 1967년부터 헌신의 노력을 기울여 연구해왔던 모든 것들은 여전히 미완으로 남아 있었다. [중략] 필자가 두 사람의 연구를 지속시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그저 자식된 입장에서 아버님의 유업을 완성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에서였을 뿐이다. - 송만오 (2010)

 

조선시대 문과백서 上

 

조선시대 문과백서 中

 

 

그런데 과거, 이러한 방대한 연구결과들로 거의 사실이었음이 입증된 와그너의 고려-조선의 소수 지배 엘리트 가문의 지속성과 동질성을 강조한 학설들(대충 고려의 세족이든 신진사대부든, 사육신이든 훈구든, 훈구파든 사림파든 높으신 분들은 다 혼맥으로 이어져있었고 끼리끼리였다라는 주장)은 안타깝게도 국내 학계에 의해 수용되거나 비판되지도 못하고, 그저 무시당했던 적이 있었음. 사림-훈구라는 대립구도를 전제하는 가설들도 꾸역꾸역 그대로 생명력을 유지했고.

 

 

(훈구-사림 대립론에 대한 국내 사학계의 비판은 비교적 최근에서야 이루어진걸로 보임. 유승원은 훈구파를 사림파에 의해 공격받은 집단을 기계적으로 이어놓은 것에 불과하며 가문이나 지역적 배경, 개혁적 성향같은 것들에 있어서 훈구-사림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없다고 주장함. 「조선시대‘양반’계급의탄생에대한시론」, 『역사비평』 79, 2007, 203~206쪽을 참조.)

 

 

거기다가 국내 사학계 일각에서는 와그너 류의 가설에 대해서 "한국사를 편협하고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본다"라던지, 심지어는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론을 부정하고 일제의 식민사학을 추종한다"는, 그야말로 폭언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어 대기도 하였음. 

 

 

그러나 도리어 과거, 한국 사학계의 소위 말하는 통설이란 것은 무너져 내린 민족자존심의 회복이란 명분아래 서구의 발전유형에 연구성과들을 무리하게 끼워맞추려 한 것이 아니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음.(물론 이 과정에서 거시적 담론 이외에 세부적인 부분에서 있었던 국내 사학계의 수많은 연구성과를 평가절하해버리는 것은 당연 부당할 것임.)

 

 

대신 와그너와 같은 서구의 학자들은 어떠한 부채의식도 가지지 않을 수 있었고, 무리하게 발전유형을 찾아내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한국사를 한국사 그 자체로 보려고 노력했으며, 그것이 이후 미국의 한국학 연구 초석이 될 수 있었음.

 

 

이후, 당연하게도 국내 사학계가 외국의 사학계에 대해 언제까지고 배척, 무시일변도의 태도만을 보이지는 않았으며, 특히 최근 10년이 넘는 기간동안 권문세족-신흥사대부 대립론과 훈구-사림 대립론은 계속해서 비판받아 오고 있고, 아직까지도 조선건국세력의 실체와 이후 지배 세력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에 대한 문제는 조선전기 정치사 분야에 있어서 가장 뜨거운 감자임.

 

와그너의 가설을 계승한 일련의 학설들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비판하거나

 

최이돈 (1994). 朝鮮中期士林政治構造硏究. 일조각

미야지마 히로시 (2008). 와그너 조선사 연구의 문제성. 플랫폼

 

대체로 수용, 계승하는 논문과 저서들이 국내 사학계에서도 계속해서 나오고 있음.

 

정두희 (1994). 朝鮮時代의臺諫硏究.일조각)

김당택 (1998). 원 간섭하의 고려정치사. 일조각)

김범 (2003). 조선 전기 훈구・사림세력 연구의 재검토. 『한국사학보』 15, 고려사학회.

송웅섭 (2011). 조선 성종대 公論政治의 형성」.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등등등등...

 

(말고도 이성계, 反이성계 파 구도로 분석한 김윤주의 논문이라던지 여러가지 참신한 시각의 해석들이 많음.)

 

와그너 비판

마지막으로 간략하게 와그너의 학설에 대한 비판을 조금만 언급하고 글을 마치겠음. 비판 중에서는 미야지마 히로시의 와그너 비판은 이번에 나온 도이힐러의 책(생각해보니까 원래 이 글은 도이힐러 독후감쓰려고 시작한건데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에도 어느정도 시사하는 바가 있는 것 같고,

 

미야지마의 비판은 특히 내가 이전에 썼던 글들에 다음과 같이 댓글달았던 사람들의 의문제기와도 통하는 지점이 있음.

 

"그런데 유럽도 따지고 보면 봉건제 시작하기 전에부터 그놈이 그놈 아님? 봉건제도 그 지방 유력자들 봉건화시킨거고..."

"한국뿐만 아니라 국가가 아예 외세침략으로 갈려버리는거 아니면 대부분 다 그놈에서 그놈인 귀족들이 해먹은거 아님? 그걸 깨버린게 프랑스 혁명이고..."

 

 

미야지마의 「와그너 조선사 연구의 문제성」 이라는 논문의 일부를 보면,

 

 

"...예를 들어 와그너는 조선전기에 만들어진 『안동권씨성화보』(1476)와 『문화유씨가정보』(1565)에 의거하여 두 족보에 문과 합격자의 80% 이상이 등장한다고 지적했고,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지배계층이 좁은 범위에서 배출되었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이 지점이다. 지배계층이 상호 혼인을 통해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현상은 다른 시간대의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에 그러한 경향이 유별나게 두드러졌다는 식의 설명이 도출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과의 비교가 절실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런 종류의 비교는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문과 급제자를 소수 씨족이 독점했다는 지적의 경우만 하더라도 와그너 본인이 중국과 조선을 엄밀히 비교해서 그런 결론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지배계층의 성격 규명을 동시대 중국이나 일본, 영국, 프랑스 등과 비교하는 작업은 와그너 문제의식의 검토에 있어 중요한 실마리가 될 것이다."

 

 

라며, 조선시대 지배 엘리트 연구에 있어서 비교사적 접근의 필요성을 주장함.

 

 

이 밖에도 미야지마는 조선 시대의 성관 집단을 일컫는 데에 있어서 씨족(clan, 계보 관계가 불확실한 사람을 시조로 삼아 형성되는 집단)이나 혈족(lineage, 계보관계가 분명한 사람을 시조로 삼아 형성되는 집단) 둘 중의 한 용어를 택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함.(와그너는 씨족clan, 최근의 미국 역사학계는 혈족lineage를 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함.)

 

 

한국의 성관 집단은 확고부동한 형태(구조)로 장기지속해온 개념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인위성을 지닌 채, 어떤 경우에는 씨족clan처럼 불분명하기도, 또 다른 경우에는 혈족lineage처럼 확고하기도 했으며 조선시대 내내 서서히 형성된 개념이기 때문에 와그너 류의 학설은 어느정도 검토, 수정되어야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임.

 

 

끝.

 

다음 독후감은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으로 해야겠음. 옛날에 사두고서는 한번 슥 읽고 덮어서 다 까먹어버림...

 

 

 

***

관련해서 더 알아보고 싶으신 분들은 다음을 참고하세요

서울대학교 역사연구소, 『역사용어사전』,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권문세족 항목.

미야지마 히로시 (2008). 와그너 조선사 연구의 문제성. 플랫폼, 34-37

송만오 (2010). 조선 지배층 추적에 이정표를 세운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와 송준호 교수 의 공동연구. 한국사 시민강좌, 46, 217-232

송웅섭 (2017). 고려 말~조선 전기 정치 세력의 이해 다시 보기. 역사비평, 12-39

이훈상 (2002). 특집 미국의 한국사 연구-에드워드 와그너의 조선시대 연구와 이를 둘러싼 논점들. 역사비평, 99-125

장지연 (2018). 고려 말 조선 초 수도의 이전과 건설. 역사비평, 186-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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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개의 댓글

2021.04.19

이래서 역사가 재미있단 말이야

1
2021.04.20
@년째 숙성주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

0
2021.04.20

실학도 만들어낸? 개념이란거 듣고 충격이었는데 어쨌든 다양한 시각을 교류하면 좋을듯 좋은 글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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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회오리코요테

역사학은 너무 어려운거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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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너무좋아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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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doovy

저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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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재밌게 읽었어. 대학에 있을 때 연구자들을 많이 만날 일이 있었는데 특히 사학과 연구자들이 이런 민족주의적 관점이나 자장에 비판적이면서도 완전히 벗어나기는 버거워하던 게 기억나네. 내 전공이었던 국문학연구자들도 식민지문학사에서 굉장히 곤란해했었는데. ㅠ 기존에 세워진 권위와 민족감정이 결합한다는 게 민족의식을 고취할진 몰라도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가와는 거리가 먼데 말이지 ㅠ 좋은글 잘읽었어. 근데 중간중간 소개된 연구자들의 책은 아마추어가 읽을만해? 아니면 조금 까다로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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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엘리어트

그렇군요..입문으로 읽기에는 조금 어려울거같아요. 아 마지막에 언급한 양반이란 책은 괜찮을거같아요. 읽기는 쉬운데도 내용이 가볍지 않았던걸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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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존 던컨, 마르티나 도이힐러, 미야지마 히로시 책 집에 사놓고 몇년에 한번씩 들춰보는데 최근에 존 던컨책 다시 읽어보니 한국사가 정체의 역사라는게 식민사관만은 아니고 아예 틀린 얘기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음. 조선시대 사람도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해먹는 집안이 계속 해먹는다고 인정했더만 ㅋㅋㅋ 외침을 받아도 지배층이 싹 갈려나가지 않고 땅이 좁아서 지방세력이 들고 일어나 정권교체하기도 불가능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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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charlote

맞아요. 다만 정체일변도로 이야기하기 보다는 어디가 변하고 변하지 않는지는 다층적이고 비교사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게 더 이치에 맞는 설명을 끌어낼 수 있을거같아요. 분명 변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지적은 해야할것같습니다.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는 전혀 다른 나라처럼 달라 보이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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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식별불해

조선전후기가 이데올로기나 정책적으로 뭐가 바뀌고 뭐가 바뀌었다고 말은 하는데 잘 실감이 안나요. 양란이라도 없었으면 계속 그렇게 갔을 것 같은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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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형 조선사 전공자야? 연구사정리 깔끔하다~ 갓 대학원 갔는데 이정도면 실력 좋다 진짜ㅋㅋ 내 석사 후배들 보여주고싶음...

 

다만 족보랑 호적 연구가 들어갈거였으면 단성호적 연구 얘기도 필요하다고 봐. 직역 연구가 유생 연구에서는 빠질 수 없는 부분이고 그 파트의 핵심자료는 단성호적이니깐!

 

글고 양반 다 읽고나면 지주제도 해줘!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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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세기노비

그렇군요,,감사합니다 안그래도 손병규 교수님의 호적이라는 책을 사놓고 안읽고 있는데 조만간 읽어봐야겠습니다. 대학원생은 아니고 그냥 취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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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식별불해

취미가 이정도라니ㄷㄷ 단성호적은 송양섭 선생님 논문도 괜찮아~ 책은 바로 기억이 안나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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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정말 양질의 글이다. 이런 분석을 입문자 수준으로 쉽게 정리한 전공자의 글을 돈안내고 읽을수 있는게 정말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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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0
@BigJay

위에 보니깐 전공자아니래ㅋㅋㅋㅋ 입문수준에서 이정도라니... 내 석사 후배들 반성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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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음.

 

"조선시대에 그러한 경향이 유별나게 두드러졌다" 애초에 이런 주장을 와그너랑 그 일련의 학풍을 따르는 학자들이 주장한적이 있나? 이건 아무리 봐도 애초에 관련 연구자들은 아무도 이걸 '정체성론'으로 연결시키려고 하지않았는데 국내 학자들이 오히려 먼저 제발저려서 주장하지도 않은 관점에 대고 셰도복싱하는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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