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대의 연호, 현대의 연호 이야기.

고대 농경 국가에서 농사는 생업이자 국가의 근간이었습니다

때문에 국가의 통치자는 농업을 중심으로 천하를 통치했죠.

황제의 다른 말이 천자라는 것은 하늘의 아들이란 뜻으로 

즉 농사의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기후, 계절 변화를 담당하는 하늘의 대리자란 뜻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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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 무려 고구려의 천문지식을 바탕으로 만든 천문지도.)

 

그 농사에 가장 중요한 것이 달력입니다.

지금이야 달력은 은행에서 새해가 되면 공짜로 나눠주는 흔한 것이지만

고대에는 천문을 공부하고 하늘의 이치를 아는 지식인들만 만들 수 있는 고급 정보였고

이런 지식인들을 모아서 달력을 만드는 것은 오직 통치자만 할 수 있는 권력이었죠

때문에 하늘의 대리자인 천자의 가장 큰 역할은 이런 천문의 지식을 정리하고 

농사에 적합한 달력을 만들어 전국에 나눠주는 일이었습니다.

천문역법을 정비하는 복잡한 작업은 오직 황제만이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그것을 하기에 황제가 되는 것이죠

  

중국이 오랜 전쟁을 끝내고 천하가 통일 되었을 때

진시황도 과거의 복잡한 역법을 정비해 전욱력이란 달력을 배포했지만

그닥 정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후 진나라는 곧 멸망해 다시 초한쟁패 전쟁이 지속 되었고

한나라가 다시 통일을 했지만 나라는 여전히 전란으로 쑥대밭이었죠

때문에 한문제, 한 경제와 같은 황제들은 무위치지란 이름으로 천하를 쉬게하였고 

조용히 평화를 유지하고 농사와 내정을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한무제 통치시대 이르게 되면 전란으로 피폐해진 국토가 복구되고

중국의 국력이 절정에 오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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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제국의 국력을 절정에서 과시한 한 무제)

 

한나라 무제는 흉노를 정벌한 것으로 유명하죠  

진정한 천자이자 황제임을 선포하며 절대권력을 누린 한나라 무제는

태산에 올라 과거 전설에 나오는 천자만이 할 수 있다는 하늘에 올리는 제사인 봉선의식을 거행했고

천자의 지위로 당당하게 천문역법을 새롭게 정비해 만들었습니다.

이때 한무제가 만든 역법을 태초력이라 부릅니다. 즉 새롭게 만든 정확한 달력이죠.

동시대 서양의 로마에서 율리우스력을 만들었듯

동양의 한나라에서도 새로운 달력인 태초력을 만든 것이죠  

그리고 새 역법을 만든 한무제가 그 해의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으니

 

제목에서 말한 이후 동양의 국가들이 쓰는

연호가 이때부터 최초로 사용됩니다.

 

중국 역사에서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황제의 상징이 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죠

천하에 달력인 역법을 배포하고 알려주는 존재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 즉 황제만이 하는 일이고

그런 황제가 달력을 매년 나눠주기 때문에 그 해의 이름을 붙힌 연호를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연호를 사용하는 것이 천하의 농사를 주관하는 곧 황제임이 증명하는게 됩니다. 

이것이 시간이 지나게 되면 연호라는 것은 단순히 천문역법의 의미를 넘어서

정통성과 황제임을 선포하는 의미로 발전하게 됩니다

건원칭제라고 하죠.즉 연호를 세우고 황제라 칭한다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동양역사에서 연호라는건 다양한 정치적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나라를 찬탈한 신나라 왕망의 경우 연호를

시건국(始建國)이라 합니다. 나라이름이 신(新)나라이듯 새롭게 나라를 세운단 뜻이죠

이런 왕망을 몰아내고 다시 한나라을 재선포 한 경시제의 연호는 경시(更始)입니다

한나라를 다시 시작한다는 뜻이죠

5호16국의 혼란 속에서 황제가 된 전연의 모용준은

자신이 전국옥새를 손에 넣었다고 구라를 치며 옥새를 얻었단 의미로 연호를 원새(元璽)라 했죠

심지어 주술적인 이유 개인적인 기분을 이유로 연호의 이름을 바꿨습니다

당장 최초로 연호를 사용한 한무제의 경우 연호만 11번을 교체하였고

후한 말기 시절에 보면 소제가 즉위할 때 에구 기쁘다 '광희'

십상시 난으로 죽을 뻔하다 동탁만나서 살아 돌아오니 에구구 살았다 '소녕' 

다시 한나라야 죽지마 영원해라 '영한'

소제 죽이고 헌제 즉위하니 소제 시절 연호가 복잡하냐 전부 '중평'으로 통일하자

난 새로 즉위했으니 '초평' 나중에 제발 전쟁 좀 끝나고 안전하게 살자 '건안'으로 바꾸는 등

당나라 송나라로 이어지며 말 그대로 황제가 지 꼴리는데로

또는 상황에 따라 주술적, 정치적, 기분전환으로 연호가 바뀌는 지경에 이르게 되죠.

 

이런 복잡한 연호 개명을 막고 황제 1명당 1개의 연호만 쓰자고 규칙을 정한게 명나라 시절입니다.

명나라 건국한 주원장을 홍무제라 부르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한 만력제라 부르는게

그 황제가 정한 연호가 홍무, 만력이기 때문이죠.

주나라 이래 이전의 통치자는 시호를 통해 그 치세를 평가했으나 

진나라 이후 감히 평가질을 담은 시호가 아니라 황제만 할 수 있는 태묘에 제사를 하니 

그 왕조의 정통성을 나타내는 묘호로 황제를 지칭하는게 더 보편화 되었습니다.  

조선이 태조 태종 세종 등 묘호로 부른 것도 황제의 예법입니다

고려시대 부터 이어진 내왕외제 전통의 흔적이죠

그러던 것이 명나라 이후 아예 연호로 이전 황제를 지칭하며 부르게 된 것이죠. 

이는 이후 일본도 메이지 유신 이후 따라해서 사용했고

한국도 대한제국 선포 이후 따라해서

고종황제. 순종황제를 다른 명칭으로 광무황제, 융희황제라 부르는게 이 때문입니다.

 

한국의 경우 고대국가에서 연호를 사용한 나라는

고구려, 신라, 발해, 고려 등 입니다. 전부 외왕내제를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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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연호인 '영락' 이 확인 된 광개토대왕비) 

 

고구려의 경우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광개토대왕의 연호 영락, 그 아들 장수왕의 연호 연가,연수, 건흥 등이 확인되고

다양한 유물에서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되는 명문이 새겨진 유물이 발굴 중이라 장기간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신라의 경우 아예 삼국사기에 기록으로 남아 

건원(建元)→개국(開國)→대창(大昌)→홍제(鴻濟)→건복(建福)→인평(仁平)→태화(太和) 로

연호를 바꾸며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죠.  

 

논란이 되는게 바로 백제입니다. 이는 단순히 백제가 연호를 썼다 안썼다 문제를 넘어

한국과 일본의 역사 논쟁으로 비화된 적도 있습니다 

 

칠지도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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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현존하여 전해지는 칠지도)

 

 

앞면: 泰○四年十○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銕)七支刀(出)辟百兵(宜)供供候王○○○○作
뒷면: 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태○ 4년 1○월 16일 병오정양에 백 번이나 단련된 철로 된 칠지도를 만들었다.

모든 병해를 피할 수 있으니 마땅히 공손한 후왕에게 줄 만하다. ○○○○이 만들었다.
선세 이래 이러한 칼이 없었으니 백제 왕세자 기생성음이 고로 왜왕 지(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라.

 

이 칠지도의 명문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있는데 논하면 한참 길어지고

주의해서 봐야 하는게 바로 연호입니다.

 

태X 년에 만들었다고 하는 부분에 나오는 연호의 정체 때문입니다

이것이 백제의 독자적 연호인가? 중국 동진의 연호 '태화'인가? 를 두고 한참 말이 많습니다.

 

백제의 연호라는 측의 주장을 요약하면

 

1. 메이지시대 근대에 고의적으로 태X의 뒷 부분을 훼손한 흔적이 보인다 임나일본부를 주장하며

가장 큰 반증이 될 유물을 훼손한 것이다 (일종의 음모론으로 이를 주제로 무려 김진명은 소설까지 써서 알렸죠)

2. 중국 동진의 연호 태화는 太를 사용하고 칠지도의 '태' 자는 '泰'자를 쓴다 엄연히 다른 글자다.

금속에 명문을 하며 더 복잡한 한자를 일부러 사용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전혀 다른 연호다.

3. 동진의 연호 태화라면 그 태화 연간에 병오일이 존재하지 않아 기년이 맞지 않는다.

 

동진의 연호라는 측의 주장을 요약하면

 

1. 유물 훼손설은 음모론으로 근거가 없는 추측일 뿐이니다.

2. 太와 泰 자는 같은 태자로 같은 의미를 가지기에 두 글자를 혼용하여 사용한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3. 그런 해석은 틀렸다 같은 이유로 칠지도는 단련하여 만든게 아니라 주조하여 만든 칼임에도 문구에 단련했다고 적었다

이는 좋은 칼이란 뜻으로 좋은날 노력을 들인 방식으로 주조했단 미사어구의 의미로 적은 것이지 특정 날짜를 의미하는게 아니다.  

 

백제의 연호를 사용했다는 것은 곧 당시 일본이 빼박 백제의 속국이란 뜻이 됩니다

그럼 칠지도는 이를 증명하는 유물이 출토된 것이 되기에

백제 역사를 높게 평가하는 민족주의 역사 측에서 지금도 꾸준히 주장하는 내용이죠

 

하지만 백제의 연호가 아니라는 결정적 반증이 한국에 있습니다

바로 대한민국 백제 고분 중에 가장 유명한 무령왕릉입니다.

무령왕릉이 중요한 이유는 도굴을 안당하고 온전히 발견된 유일무이한 백제왕릉이기 때문이죠

그 무령왕릉에서 다른 고분에서 출토가 안된 묘지석이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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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묘지석)

 

묘지석은 왕릉을 만들며 땅의 신에게 그 토지를 매입한다는 문서입니다

백제 무령왕릉 묘지석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는 계묘년 5월 7일 임진날에 돌아가셔서, 을사년 8월 12일 갑신날에 이르러 대묘에 예를 갖추어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 돈 1만닙, 다음의 건. 을사년 8월 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앞에 든 돈으로 토지신 토왕, 토백, 토부모, 연봉 2000석 이상의 여러 관료에게 나아가서 서쪽 땅을 사들여 묘를 만들었으니 문서를 만들어 남긴다. 현 율령에 따르지 않는다.]

 

네 그렇습니다. 백제시대 제작한 금석문으로 무려 백제왕을 매장한 지석에 조차

백제는 연호를 적은게 아니라 60갑자 기년을 썼을 뿐이죠.

심지어 백제왕의 죽음을 황제만 쓸 수 있는 '붕어'라고 표현하여 백제왕이 곧 황제임을 표기하면서

그럼에도 독자적인 백제의 연호를 안적고 있죠 즉 백제는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반론은 여전히 있습니다. 

이웃나라인 고구려, 신라가 모두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데 백제만 안쓰는게 논리적으로 안맞다

신라가 당나라와 외교하며 연호 사용을 잠시 중지 하였듯 백제도 중국 남조와 외교를 하며

무령왕만 연호를 잠시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등의 반론도 있지만

그 주장을 입증하기 위는 가장 큰 단서인 백제 연호의 존재를 증명한 유물과 기록이 현재 없음으로

백제가 연호를 사용했단 주장에는 증거가 없는 상태입니다.  

 

역사학계는 백제와 일본의 관계를 무슨 일본은 백제의 속국이다! 이런류의 과도한 주장이 아니라

고구려와의 극심한 전쟁과정에서 백제가 일본에 문화 문물을 전수해 주고

그 댓가로 일본의 인력을 제공받는 매우 우호적인 상호 협력관계였다라고 평가하는게 일반적입니다.

 

그럼 유일하게 한반도에서 연호를 안쓴 조선의 경우 어떨까요?

사대외교를 하였기에 스스로 제후국으로 여겨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황제만 쓰는 묘호를 독자적으로 쓰고 세종대왕 시절에는 독자적인 천문역법도 만들었죠

 

그리고 흥미로운 기록이 하나있습니다.

 

이에 앞서 김약행(金若行)이 올린 상소에 이르기를,

"숭정 갑신년139) 의 뒤로는 천하에 임금다운 임금이 없었고,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모두 우리 동방에 있으니, 청컨대 교체(郊禘)의 예를 행하고 태묘에는 구헌(九獻)과 팔일(八佾)의 의절을 행하소서. 그리고 인조(仁祖) 이하 오묘(五廟)에 휘호(徽號)를 소급해 올리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크게 놀랐다.

 

【태백산사고본】 74책 110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288면.

 

1) 숭정 :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

2) 교체의 예 : 황제가 도성 남쪽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예법

3) 구헌 : 황제가 술을 아홉번 올리는 황제의 예법

4) 팔일 : 팔일무, 문묘제례에서 오직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예법

 

조선시대 영조 임금 제위기간 유생 김약행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청나라는 오랑케의 나라이고 명나라는 망해서

중화의 황제가 사라졌으니 유일하게 남은 중화의 임금 조선의 왕이 마땅히 황제가 되어 칭제하라고 요구하는 상소죠.

물론 영조 임금은 현명한 군주였기에 그냥 미친놈으로 취급했습니다.

 

소중화 사상의 끝판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조선이 유일한 중화의 계승자라는 의식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정말 흥미로운 것은 상소문에서 칭제를 비롯해 다양한 황제의 예법을 쓰라고 하는데

정작 중요한 연호를 새로 제정하란 말이 없습니다

왜냐고요? 그 이유를 첫 문장에 쓰고 있죠 '숭정'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를 그대로 씁니다.

상소에서 말하는 칭제는 명나라의 계승자로써 황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동시대 일본에서도 비슷한 소중화사상이 나타나면서

명나라는 망하고 조선은 개와 양 같은 여진 오랑케에게 굴복했으니

일본 덴노가 유일한 황제다 뭐 이런 사상이 태동해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움직임이 나옵니다

이런 사상은 더욱 발전해 나중에 메이지 유신까지 이어지게 되었죠

그와 비슷한 시기 조선은 비슷한 내용의 소중화를 주장 하면서

여전히 명나라의 굴레를 아직 간직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서인에서 주장한 대명의리론이 붕당 투쟁에서 승리를 하며 조선후기 국가이념이 되었죠. 

어쩌면 작지만 매우 큰 차이가 아닌가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모든 연호 전통은

당연하게도 현대 민주주의 체제가 도입되면서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현재 일본이 유일하게 사용하는 상황이고 그와 비슷한 연호 체제를 대만과 북한이 쓰고 있습니다

 

일본의 경우 이번에 덴노가 교체되면서 연호를 바꿨습니다.

앞서 말했던 명나라때 만들어진 연호 사용 전통인 1황제 1연호 규칙에 따라 연호를 바꾼 것이죠

이번에 사용하는 연호의 이름이 레이와`(령화令和) 라고 하죠

이전에 중국식 연호를 사용하던 전통을 탈피하여 보다 자주적인 일본문화를 알리고자

중국고전을 철저히 배제하고 일본 고유 문학에서 그 명칭을 찾았다고 합니다.

만요슈라는 일본 전통 시가집에 나와있는 구절이라고 하네요

 

'초춘영월 기숙풍화'(初春令月 氣淑風和)초봄의 좋은 달 공기가 맑고 바람이 좋네

 

근데 알고 보니 만요슈의 이 구절은 중국의 싯구를 따라한 것입니다.

'중춘영월 시화기청'(仲春令月 時和氣淸) 를 배낀거라네요 여기도 레이와(령화 令和)가 나오죠..

 

중국 후한의 문인 장형의 귀전부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합니다.

레이와를 처음 제시한 교수 역시 만요슈 자체가 중국문학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고 인텨뷰를 했다 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한문학은 모두 중국의 영향이니 고전을 뒤져봐야 의미 없죠 

 

대만의 경우 신해혁명이 일어난 해를 중화민국이라 연호로 지정하여

민국기년이란 이름으로 민국 ~~년 으로 지금까지 활발하게 사용중입니다.

 

 

 

 

 

민국 104년 이런식으로 서력이 아니라 '민국'이란 연호를 일상에서도 쓰는 것이죠.

 

북한의 경우 김일성이 태어난 1912년 해를 주체기년으로 삼아 연호로 지정해

민국기년과 같이 주체 ~~년 이런식으로 사용중입니다. 2020년 올해는 주체 109년이 되는 것이죠.

정녕 미친 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짓이죠.

 

대한민국의 경우 단기라는 것을 한동안 잠시 쓴 적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제헌의회가 성립되며 제헌의회에서

개천절인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기원전 2333년을 기년으로 삼아

단기 4281년으로(1948년) 정한 바 있습니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들은 3.1운동으로 성립한 임시정부 수립 1919년을 민국기년으로 삼아야 한다

실제로 임시정부 시절에도 이런 기년을 사용하였기에 잠시 논란이 있었습니다 

건국 초기 정부는 단기를 사용하고 국회는 민국을 쓴 적이 잠시 있지만 결국 단기로 통일되었습니다.

실제 신문이나 건물명문, 출판물에도 이런 단기를 사용했죠

1962년 박정희가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정권을 잡으며

단기가 사용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단기를 폐기하고

서력 기원을 통일되게 사용하게 하여 지금에 이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지금 일상에서 쓰는 서력기원

2020년이라는 것도 특이한 일종의 서양식 연호의 한 사례입니다.

예수의 탄생을 기준으로 만든 연호일 뿐이니까요

다만 영미권과 서구가 세계의 중요국가로 자리를잡았고

많은 국가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서력기원을 사용하는 중이니

이들과 교류하는 우리가 이에 맞춰 연호를 사용하는 것 뿐이죠

 

과거 명나라가 세계의 전부이던 시절

명나라 연호를 사용하던 조선시대 사람들이 느끼던 것이나

과거 왕조의 통치자가 만든 연호를 쓰던 일상도

사실은 익숙해지냐의 차이만 있지 이와 비슷했으리라 봅니다

 

 

끝.

 

4개의 댓글

2020.09.13

재밌다 재밌어 꿀잼이야 더써줭

0
2020.09.13

이승만은 교회다니는데 단기를 사용했고

프레지던트 팍은 불교신자인데 서기를 사용한게 흥미롭더라구여

0
2020.09.13

재밌당

0
2020.09.14

헤즈라 연호도 있지 않나요? 이슬람권에서 쓰는거.... 무하마드가 메카를 탈출했던 년도를 시기로 잡고 순수 태음력으로 세서 매년 라마단이 꼬이게 만든다는 그 원흉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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