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똑똑한 사람들은 다 죽였어요"

  KBS에서 2005년 8월쯤에 방영했던 특집 4부작? 다큐 '8.15의 기억'이 있었는데, 아래 인터뷰는 그 다큐를 만들려고 방송국에서 인터뷰한 내용들을 엮어 만든 동명의 회고담에서 발췌한 증언입니다.

 

  올해도 4월 3일이 돌아왔습니다. 아래 인터뷰는 4·3사건 당시 남편을 학살로 잃고, 아들과 시어머니를 그 혼란의 와중에 또 잃은 피해자분의 이야기입니다.

 

  공산 빨치산들과 군경 및 서청의 사이에 끼어 무더기로 변을 당했던 안타까운 분들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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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대체 누가 잘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어요. 이 세상이 뭐가 잘못되고 법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학생이었던 남편은 정말 착했어요

 

 

  나는 북제주군 애월읍 하귀리에서 제주시 도두 1동으로 시집을 왔습니다. 당시 우리 집은 부모님이 포목장사에 생필품 장사를 했기 때문에 형편이 괜찮았어요. 그래서 부모님은 많이 배운 사람이나 집안 출신이 좋은 남자를 사위로 삼고 싶어 했어요. 물론 나는 그런 사람과 결혼했지. 남편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사람이었고 시댁도 잘살았어요. 시아버지도 아버지처럼 마을 동장을 지낼 정도로 마을에서는 나름대로 힘이 있는 분이었어요.

 

  나는 결혼 전에 남편 얼굴 제대로 한 번 보지도 못한 채 가마 타고 시집왔어요. 남편은 방학 중에 잠깐 들어와 결혼식을 올리고, 3일 만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지요. 2년 후에는 나도 일본으로 가게 됐지만, 그 전에는 친정에서 엄마와 함께 살았어요. 시댁도 일본에 있었기 때문이죠.

 

  잘생겼고 인상이 좋은 남편과는 사진 한 장 제대로 남긴게 없어요. 당시 학생이 결혼하면 퇴학을 당했거든요. 아무래도 조심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남편은 공부만 해서 세상물정에 어두운 편이었어요. 그러고 무엇보다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었죠. 남에게 화낼 줄도 욕 한 마디도 할 줄도 몰랐지. 또 일본에서 오래 생활해서인지 우리말이 서툴렀어요. 상스러운 욕을 해대며 사람들이 싸워도 무슨 일로 저러느냐며 물을 정도였죠. 나중에 4·3사건이 터졌을 때조차 도대체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죽었어요.

 

  남편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할게요. 남편은 언제나 자상했습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첫 애를 가졌을 때 정성껏 보살폈고 세심하게 신경도 써주었어요. 나쁜 음식은 못 먹게 했고 나쁜 길로도 못 다니게 했어요. 냉장고도 없었던 시절이니 음식이 쉽게 상할 거 아닌게? 그러면 남편은 조금이라도 맛이 간 음식은 일절 못 먹게 했어요. 밥먹을 때도 할상 아기를 자기가 안고 나는 편안히 밥 먹으라고 했어요. 정말 착한 사람이지.

 

  남편과는 특별히 어디 놀러가 본 기억도 없네요. 학생이었고 돈도 없었기에 항상 부모에게 타 썼으니까. 언제나 남편은 날이 밝으면 학교에 나갔고, 나는 시부모가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을 거들었어요. 곤약을 작은 상자에 가지런히 포장하는 일이었지요. 주문량이 많을 때는 정신없이 바빴어요.

 

 

 

  모든 걸 태워버리는 무서운 소이탄

 

 

 

  해방 소식은 한국에 와서 들었어요. 전쟁 막바지에 이르자 일본 본토에 무자비한 폭격(소이탄)이 가해지고 사람들이 죽는 걸 보니 더는 못 살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일본을 떠나기로 했던 거죠. 우리는 이까이노 고구메에 살았는데, 집 근처에 화장터가 있었어요. 그곳에 일본군들이 매일 죽은 시체를 싣고 와서 태우는데 처참했어요. 소이탄이 떨어지는 걸 직접 보기도 했어요. 소이탄은 도시나 군사시설을 불태우기 위한 폭탄인데, 터졌다 하면 2,000도 이상의 고열을 내기 때문에 한 발로 엄청난 면적을 태울 수 있었어요. 하늘에서 소이탄이 죽죽 내려오면 물을 흠뻑 적신 거적때기를 준비했다가 얼른 덮어야 불길을 그나마 잡을 수 있었어요.

 

  집에 떨어지면 집이 홀랑 다 타버려요. 일본에 있을때 서구 오사까 전체가 타버린 걸 봤어요. 사람한테 붙으면 말할 것도 없죠. 불에 그슬린 돼지처럼 피부가 새카맣게 변해요. 남편은 학교 다닌다는 이유로 군대도 끌려가지 않아도 됐어요. 영장조차 안 나왔죠.

 

  어쨌든 시부모는 일본에 남고 우리만 우선 나왔던 겁니다. 고깃배 같은 작은 배를 타고 큰 바다로는 못 가고 섬트멍으로만 왔어요. 이 구비 저 구비 산트멍으로만 돌아오다보니 바다에서 보름 동안 살았던 거죠.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배에 조금 있던 대죽쌀을 군용 반합에 넣고 밥을 지어 먹었어요. 그런데 짠 바닷물을 사용했으니 밥은 소금이나 마찬가지지. 그렇게 고생한 끝에 제주도 한림포구에 도착했어요. 낳은지 8개월 된 아들 창남이와 함께. 그때가 1945년 5월이었죠.

 

  해방 소식은 따로 들은 건 없어요. 그저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만세를 불렀어요. 남편도 좋아했지. 일제 치하에 얼마나 못살았는지 해방이 됐으니 이제 좀 편히 살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일본에서 돌아온지 2년 만에 4·3사건이 터진 겁니다. 남편은 영어도 잘했고 일본말이나 글에도 능했어요. 동네에서 남편만큼 공부한 사람은 없었죠. 그런데 그때 사건이 나고 교장을 비롯해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요. 일자무식에 농사나 짓는 가난한 사람들은 살았고요.

 

  일본에서 공부만 한 남편이 해방 후에 할 일이란 많지 않았어요. 더구나 우리말이 서툴렀기 때문에 마땅히 취직할 때도 없었어요.  물론 일할 곳이 많았던 시절도 아니죠. 또 어수선한 정국에 흔히 좀 배운 사람들은 정치에도 참여했다지만 이 양반은 그러지도 못했어요. 동네 사람들이 와서 부탁했지만 나가지 않았죠. 착하기만 한 사람이었지 천성이 숫기가 없었어요.

 

  일본에서 뒤늦게 들어온 시부모들도 난리를 피해 간신히 몸만 빠져나온 터라 공장을 경영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산 한푼 없었어요. 그러니 내가 물질을 해서 남편과 시부모를 먹여살리고 봉양해야 했습니다. 남편은 항상 내게 죄스러워했고 고마워했지요.

 

  나는 매일 바다에 나가 물질을 했어요. 열다섯 열아홉 때부터 한 일이었지만 일본에서 돌아온 후에는 딱히 먹고 살 방법이 없어 다시 시작했던 겁니다. 그 후 50년 가까이를 그렇게 해녀로 살았어요. 물질이야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죠. 소싯적부터 물속에 들어가 헤엄치며 돌멩이도 줍고 놀았으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일이에요. 제주도 여자들은 보통 7, 8세부터 헤엄치는 연습을 시작해 15, 16세에 독립된 해녀가 되고 40세 전후에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합니다. 물론 팔십까지 해녀 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요.

 

  어쨌든 ‘테왁’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빗창이나 정게호미를 들고 얕게는 수심 5미터에서 깊게는 20미터까지 내려가 일을 해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어요. 그래도 제주도 여자들은 그 일을 해서 아들 딸 키우고 학교 보내고 했잖아요. 쉴새없이 물질을 해도 생활고는 여전히 어려웠어요.

 

  주로 미역이나 소라, 전복을 땄어요. ‘듬북’이라는 풀도 거두어 밭거름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아무튼 전복이 제일 비쌌지. 요즘도 킬로그램당 15~18만 원 정도 하잖아요. 옛날에는 해조류가 많아 소라나 전복, 문어들의 먹이가 풍부했는데, 요즘은 물이 많이 오염돼 전복 따기도 쉽지 않아요. 그때는 물질해봐야 얼마 벌지도 못했어요. 소라의 경우 잘하면 10전, 5전했으니 하루에 돈 천원 벌면 많이 번다고 했어요.

 

  남편도 스물여섯 나이에 일찍 죽었고, 시부모들도 남긴 재산도 업싱 30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러니 지금껏 혼자 힘으로 벌어먹고 살았던 겁니다.

 

 

 

  한 번은 산사람, 한 번은 군인들이 왔어요

 

 

 

  해방되고 동네 남자들이 정치한다고 모이고 한 것도 몰랐어요. 봤으면 모르지만 아예 보지를 못했으니까 인민위원회라는 말도 못 들었지. 남편은 주로 집에만 있었어요. 아는 사람이나 친구가 별로 없었죠. 그래서 동네에 공산당이 언제 나타났는지 정확히 모르겠어요. 다만 어느 날 우리 사는 도두 마을에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대통에 기름을 담아와서는 집집마다 불을 질렀어요. 집이 한 채도 안 남고 다 타버렸지요. 그때 나는 산사람들을 처음 본 거예요.

 

  어깨에 총을 메고 군복도 아닌 평상복 차림의 남자들이 마을 동쪽에서부터 불을 붙여왔어요. 그리고 반대편 학교까지 불이 붙었을 때는 날이 밝았죠. 사람들은 그들을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어요. 까딱 잘못하면 그 자리에서 총을 갈겨댈 텐데, 모두 달아나고 숨기만 했어요. 어떻게 말리겠어요? 몇몇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는데. 자기들과 함께 산에 안 간다고, 또 협력 안 한다고 죽창으로 찔렀어요. 직접 본 건 아니지만 얘기를 들었어요.

 

  산사람들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산으로 데려갔어요. 거부하면 쏴죽이겠다고 협박하니까 안 올라갈 수가 없었죠. 그런데 막상 올라가 보니까 솔나무 밭에 돌로 만들어놓고 사람 하나씩 살라고 해서 하룻밤 자고 나니 힘들어서 다 내려가고 했어요.

 

   그때 군인들이 포위를 해왔던 겁니다. 산사람들은 우리를 못 내려가게 막지도 못하고 포위망을 피해 도망가기에 바빴어요. 군인들은 산 아래서 총을 쏘면서 올라왔어요.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고 인근의 어느 학교로 데려갔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쪽으로 간 사람들은 많이 살았어요. 산에서 내려와 집에 가만히 있었던 사람은 많이 죽었고.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온 뒤 20일쯤 지나자 이번에는 군인들이 찾아왔어요. 군인이나 경찰들이 사람을 많이 죽인다는 소리를 얼핏 듣긴 했어요. 밤낮 총소리가 멈추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하루는 아침도 먹기 전에 집집마다 들이닥쳐서 사람들을 전부 내쳤어요. 나도 남편과 애기랑 있는데 문을 쾅 차고 들어오더니 총부리를 겨누며 빨리 나오라고 했어요. 엉겁결에 웃옷만 걸치고 나갔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조리 큰 마당 한가운데에 마을 사람들을 집결시켜 놓았더라고요. 모두 눈을 감게 했어요. 나는 궁금해서 아이를 업은 채 실눈을 뜨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래 봤어요. 그런데 마을에 순경이 하나 있었는데, 그놈이 글세 손가락으로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 중 누구누구를 지목하니까 군인들이 끌어내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졌어요. 아홉 명이 끌려나갔는데 그 중에 남편도 있었어요. 그놈들은 밭으로 곧장 끌고가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주저없이 총살시켰어요. 죽은 사람들은 학교장을 비롯해 모두 배우고 똑똑한 사람들이었어요.

 

  그 순경이란 놈은 그런 짓으로 인해 결국 마을에서 쫓겨났어요. 나중에 폐병에 걸려 죽었고요.

 

  그런데 남편이 죽은 후 산사람들이 다시 와서는, 이를테면 복수를 한 거예요. 우선 그놈들은 경찰 가족들을 잡아 죽였어요. 내 사촌 하나도 경찰이었는데, 당시 어디 가서 죽었는지 시체도 못 찾았어요. 사촌이 남편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그럴 상황이 되지 못했어요. 사촌은 도두에서도 한참 먼 화북이란 마을에 살고 있어서 왔다갔다할 수가 없었죠. 그때 성을 이만큼 쌓아 문을 딱 걸어 닫고 사람을 일정 통과시키지 않았어요. 그러니 부모가 죽어도 말리지 못했어요. 그때는 왜 죽이느냐고 말 한 마디 못했지.

 

  남편이 죽고 며칠 있다가 군인들이 또 찾아왔어요. 밤에 와서는 머리맡에 총을 탁 대고 남편을 내놓으라고 하더군요. 죽었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나를 나오라고 하더니 바다로 끌고 갔어요. 다른 사람도 올테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가버렸어요.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판인데 누가 그 말을 믿겠어요. 나는 바로 도망쳤어요. 밭으로 산으로 그냥 눈이 벌겋토록 도망쳐서 살 수 있었어요. 총살시키려고 바다로 데리고 갔던 겁니다.

 

 

 

  남편 죽고 아들 죽고, 이 억울한 세상

 

 

 

  그 일이 얼마나 끔찍하고 충격이 컸던지 그 후 꿈에 몇 번이나 그런 장면이 나타났어요. 100여명의 사람들을 큰 구덩이 속으로 발가벗긴 채 몰아넣고는 총살시킨 다음 그대로 파묻었어요.

 

  나는 도대체 누가 잘못한 것인지 알 수 없었어요. 이 세상이 뭐가 잘못되고 법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죠. 대통령인지 누군지 몰라도 분명히 위에서 계엄령을 내렸으니까 다 죽인 게 아니겠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죽고 다섯 살 된 아들 창남이마저 열병에 걸렸어요. 강냉이알 만한 반점이 얼굴과 몸 전체에 퍼졌던 겁니다. 호열자와 흡사한 전염병인 것 같으넫 그 당시 동네에 병이 돌았던 겁니다. 특히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이 많이 죽었어요.

 

  마을에서는 전염을 막기 위해 가시 돋친 철조망으로 환자가 있는 구역에 울타리를 만들어 격리시켰어요. 그리고 소독약을 뿌리고 물가지 더다 주고는 아예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경고했지요. 그러니 주사 한 대도 못 놓고 약도 못 지어다 먹였던 겁니다. 그냥 죽으라고 내버려둔 거나 마찬가지죠.

 

  아들은 아픈 몸이지만 정신은 말짱해 말을 곧잘 했어요. 내 등에 업혀 아빠 죽는 광경을 그대로 본 이후로는 가끔 “아빠, 총 맞아 죽었다!”는 말을 하곤 했어요. 뭘 알고 그러는지…… 돌아서서 남편 생각에 눈물을 흘릴 때면 이런 말도 했어요.

 

  “엄마, 엄마! 내가 이다음에 어른이 되면 돈 많이 벌어서 엄마 행복하게 해줄게.”

 

  그러다가 끝내 약 한번 쓰지도 못하고 열흘 정도 앓다가 죽었어요.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엄마, 물 주세요, 물 주세요!”

 

  정말 가슴에 사무칩니다.

 

  죽은 아들이 꿈에도 참 많이 나타났어요. 창남이는 아빠 닮아 영리하고 얼굴도 잘생겼어요. 2대 독자니 집안에서도 귀여워했습니다. 그런데 아들 죽고 손주 죽고 하니까 시어머니마저 화병에 그만 식음을 전폐하더니 얼마 안 돼 돌아가셨어요. 그러니 내 팔자가 오죽했겠어요. 남편과 어린 아들, 시어머니까지 보냈으니 말이야. 창남이는 꿈에 늘 아빠와 함께 있었어요. 죽었으니 말이야 없지만 나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허둥대다가 깨어나면 늘 꿈이었어요. 세월이 한 50년 지나니 나아졌지만 처음 몇 년은 미친 사람 같았어요. 잠들기 전에도 밥을 먹을 때도 한시라도 잊은 날이 없습니다. 살아보지도 못하고 너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으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심정이에요. 지금껏 자식도 남편도 없이 혼자 사니까 몸 아플때가 제일 서럽고 생각납니다.

 

  재가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어요. 내가 어디에다 이 귀신들을 맡긴단 말입니까? 누가 돌볼 사람이 있겠어요? 이 집안을 떠나면 내가 벌 받지. 스물여섯 청춘에 죽은 신랑도 있는데 살아서  이 정도라도 좋은 세상 봤으면 행복한 거 아닌가요? 이제 나도 더 오래 살고 싶지 않아요. 가야지, 이제는 가야지요.

 

 

 

 

 

 

양자생  1924년 제주에서 태어났다. 4·3사건으로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었다. 80세까지 해녀로 있다가 지금은 물질을 그만 두고 손녀와 살고 있다.

 

27개의 댓글

2020.04.03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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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욕은 못하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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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우당탕탕몽실이

본문 보면 빨치산들이 양민 죽이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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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b

본문에는 나오지.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들은 그런 내막도 모르고 모 올그떠가 미쳐서 제주도민 싹 다 죽인걸로 알고있어서 답답해서 하는말임. 빨치산들이 양민들 선동하고 내란 일으켜서 국군과 내전중에 억울한 양민들이 많이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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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b

당장 내 밑에 걔만 봐도 그런말이 나오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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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우당탕탕몽실이

한줌 빨치산 잡겠다고 군경과 서청이 대대적으로 무슨 짓거리를 저질렀는지 생각해보면 초대 옳그떠에 대한 비난도 당연한거임. 그 사람은 최고 권력자였으면서 도를 넘은 강경진압을 저지른 사람들을 비호하고 옹호했음. 단순히 아랫것들이 너무 오바했다고 런할 자리가 아님.

 

모든 현대국가는 잘나가는 선진국들도 피비린내나는 부정한 희생 위에 올라선 나라들이지만 그 나라들은 나중에 적어도 자국민이 피해봤던 일에 대해서는 국가의 책임이 있는 부분에서 그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와 보상이 따라오거든.

 

근데 우리나라는 그 청산이 안되니까 아직도 4.3가지고 빨갱이들 죽이다보면 그럴수도 있지~ 하는 치들이 나오고 그에 대한 반발이 생기는거다.

 

그래서 난 아래 댓글 충분히 공감한다. 반정부세력이 나타났으면 정부는 그걸 진압해야하는건 맞지. 근데, 국민을 지키기 위한다는 국민의 군대가 국민을 빨치산으로 부터 지켜야 할 판에

 

보호해야할 국민을 덮어놓고 적과 부역자로 규정해서 재판도 조사도 법적근거도 없이 쳐죽여댄 일들이 제주도 전역에서 벌어졌던건 부정할수 없는 사실임. 여기에 국가의 책임을 묻는건 당연한거다.

 

빨갱이가 양민 죽인 책임을 국가에 물을수 없듯이, 국가가 양민 죽인 책임도 빨갱이에게 물을수는 없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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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b

흠... 과잉진압을 할수밖에 없었던 난세라 생각해

 

지금 시대랑은 다르잖아 불과 몇년전에 전쟁 치뤘고

 

당시 인식은 요즘과 달라서 정말 말그대로 휴전이어서

 

언제 다시 전쟁이 터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팽배했잖아

 

지금처럼 관대하게 진압할수 없었던 시대상의 한계라 생각해

 

그땐 정말 까딱 잘못했으면 적화통일로 이어지는 길이었어

 

너의말대로 당연히 국가와 국군이 국민들을 보호해야하지

 

하비만 앞서 말했듯 시대상의 한계라 생각한다

 

한줌이라 말하지만 그 한줌 세력이 나라를 전복시킨건

 

역사상에서도 많았고 말이야 (나치, 베트남)

 

당시 세계적으로도 내전이 끝나고 잔전세력 숙청할땐

 

억울한 사람들이 항상 많이 죽었지 세계적으론 현재진행 중이고

 

당시엔 과잉진압을 할수밖에 없었다 생각한다

 

과잉진압응 했던것도 군인들의 의식도 지금과는 정말 달랐어

 

당장 전쟁으로 군인들 자기 부모형제 친구들도 많이 죽었고

 

관대하게 진압하기 힘들었지.

 

당시엔 동네에서 빨갱이로 몰리거나 정말 빨갱이었으면

 

동네 주민들이 몽둥이로 때려죽였던 시대야

 

 

 

 

양민들이 억울하게 많이 죽은건 안타깝지만

 

그 시대의 한계라 생각한다

 

지금의 시대상으로 잣대를 들이대면 안된다 생각해

 

모든 사람에겐 공과 사가 있지

 

그래도 초대 올그떠가 스타트는 정말 잘했다 생각한다. 그 시절 원자력 발전소 첫삽 뜬것도 초대였으니 말이야.

 

그리고 개붕이가 과거청산 이야기도 했는데

 

당시엔 정말 인재가 없었어 얼마나 인재가 없었냐면

 

초대가 미국에 보낼 공문까지 직접 타자기치는게 현실이지

 

친일세력중 지식인들이 대다수였던건 너도 알고있지?

 

그 세력들의 도움을 받아 국정운영을 할수밖에 없었어

 

전선에선 용감했지만 일자무식인 독립군 장군들도 한자리

줘야했으니 말이야.

 

현시대의 잣대로 과거를 이해하려고하면 안댐

 

여튼 정성들인 댓글 고마워. 모바일이라 글쓰기 힘들어

 

두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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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우당탕탕몽실이

그시대의 한계 좋아하네 ㅋㅋㅋㅋ 너 사건 수사록은 읽어보고 말하냐? 3살짜리 갓난애기를 뒤에서 칼로 찔러서 죽인 내용도 나온다.

 

어설프게 알면서 그 시대적 배경상 어쩔 수 없었어~ 이따위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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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우당탕탕몽실이

10세 이하 어린애가 814명이나 희생됐어 걔네도 빨갱이라고 생각하고 죽였다고? 진짜 말같지도 않은 소리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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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츠량유엔

내가 언제 잘죽었다고 했냐?? 당시 국군들도 전쟁통에 가족 친구들 잃어서 빨갱이에대한 분노로 광기에 미친 사람도 많았을거임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단 사람이 많다고 쉬발ㅋㅋㅋ 전세계 어느 독재자도 10세 이하 학살하란 명령은 안내려 멍청아 넌 진심 초대가 10세이하도 학살하라고 명령했을거라 생각함? 쪼다색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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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우당탕탕몽실이

?? 보도연맹 학살사건도 모르나 ㅋㅋㅋㅋ 진짜 이정도면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이 무지한 수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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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우당탕탕몽실이

그새끼들이 어떤 짓을 했냐면 민가에 쳐들어가서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칼로 갓난애기 등을 찌르고 깔깔 쳐웃었다는 기록도 있다. 뭐 분노에 광기가 들어서 그랬다고? ㅋㅋㅋㅋ 얼탱이가 없네 난 너같이 얄팍하게 알면서 자꾸 사건의 경중을 낮추는 언행을 서슴치 않게 해대는 애들이 너무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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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우당탕탕몽실이

그리고 그런 일들을 정말 용납하지 못했으면 대체 왜 그 시절에 진상규명이 안된거야? 왜 30-40년간 쉬쉬하며 묵인해온건데? 말이 됨? 앞뒤가 안 맞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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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츠량유엔

니가 더 무지한거야 ㅋㅋ 내가 언급 안했다고 무지한걸로 취급해버리네 ㅋㅋㅋㅋㅋ 진짜 개노답일세 내가 보도연맹 그런 사건들 모를거같았냐? 집단적 광기로 사람들이 미쳐버리면 어떤 사건이 일어날지 모르는거야 알간?

전쟁끝난지 1년도 안지났는데 그땐 군내에서즉결처형도 빈번했어 휴전이랑 보도연맹 사건이 같은 년도에 일어났어 색갸 저 시대는 당장 신고다닐 신발도 없어서 빌빌대는데 무슨 한사람 한사람 취조하면서 재판을 정식으로 할수있겠냐? 휴전하고 몇개월 안지나서 빨갱이들이 선동 내란 하는데 당시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라도 누구나 다 미칠사람 많았다 동네에서 빨갱이로 몰리면 주민들한데ㅡ돌에 맞아죽고 원한품은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서 죽이던 시절이야 당시 시대적 한계를 봐야지 미친놈이 내가 무슨 사건을 옹호하고 경중을 낮춰? 대가리 깨버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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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우당탕탕몽실이

ㅋㅋㅋㅋ 얼탱이가 없네 그래서 당시 제주도민 몇만명을 학살한다고? 그게 말이됨?? 단순히 광기에 미친 시대라고? 그럼 왜 전후 시대가 안정 됐을때는 조사에 착수하지 않은거임? 미친새끼인가 옹호할게 있지 하여튼 너같은 새끼들이 자꾸 과거의 악행에 대해 너무나도 쉽게 면죄부를 주려는 움직임 때문에 이나라에 역사적 갈등이 아물지가 않는거야 미친새끼야 ㅋㅋㅋㅋ 민간인 학살도 정당화 되면 대체 못할 게 뭐냐? 시대적 한계 좋아하네 서울시민 몇십만명 학살한 적 있나? 부마항쟁때 부산 시민들 다 때려죽임? 말같지도 않은 소리하고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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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엔츠량유엔

댓글 달지말고 정신승리나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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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6
@우당탕탕몽실이

4.3 사건 언제 일어났는지는 고등학교때 안배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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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7
@우당탕탕몽실이

옳그떠 옹호하려고 역사도 바꾸는 모지리를 보소 ㅋ 이런애들 덕분에 진보장사가 먹힘 보수애들의 븅신같은 역사관을 보면 일반인들은 저 치들이랑 어울리고 싶지가 않거든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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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8
@우당탕탕몽실이

그릇된 행위를 방지하지 못하고 후일에도 처단하지 못한게 시대의 한계지

 

그릇된 행위 자체에 시대적 한계라는 말을 붙이는게 아님

 

그건 악행이 아니었는데 불가항력으로 악행이 되었다는 의미니까 븅신아

 

집단 광기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임

 

특정한 순간, 개개인의 행동에는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4.3 총평을 한계와 광기로 정리하는건 대가리 터진 소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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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우당탕탕몽실이

어... 4.3사건은 1948년에 있었던 일임. 6.25 전쟁 2년 전에 터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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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이런 비극적 사건조차도 정치적 이익에 따라 처참히 짓밟히고 희화화 되는게 병신같은 대한민국의 현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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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티엔츠량유엔

갓난아기부터 성인까지 싸그리 다 죽였는데, 빨갱이가 있어서 어쩔수 없었다는 사람은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난 모르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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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희대의 민간인 학살 트롤사건인데 빨갱이 운운하는 아가리 정치꾼새끼들을 전부 쏴죽여야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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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킹김갓보로

빨갱이 운운은 할 수 있지. 걔네가 숨어들면서 문제가 터진거니까. 빨갱이가 일으키고 정부가 확산시켜 무고한 희생자를 낳은 사건이지.

3
2020.04.04
@킹김갓보로

빨갱이가 죽었다 (x)

빨갱이가 죽였다 (o)

 

보도연맹을 보면 당시 정부 수준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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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4
@킹김갓보로

빨갱이 탓은 맞지, 다만 진압과정에서 서북청년단이랑 과격한 진압이 문제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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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05

학살은 일단 시작하면 피로 피를 씻느라 당초 목적이고 뭐고 잊게 됨.

유명한 베지에 시 십자군 학살 있잖아. 이교도 못 찾으니 주교가 도시 하나 거주민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면서 그랬지.

"모두 죽여라. 신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알아보시니"

 

그냥 고기 먹는 동물로 태어나서 그래. 그러면 안 되니까 문명이란 게 있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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