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그동안 쓴 글 모음 1

그동안 작성했던 여러 짧은 글들을 모아서 수정하여 사진과 함께 읽을거리판에 올려보고자 합니다. 각 글들의 주제가 통일된 것이 아니기에 다소 중구난방일 수 있습니다.

 

 

 

 

1. 깃발 절도 사건

 

나치 독일이 수립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35년, 히틀러 유겐트에 소속된 청소년 몇 명이 이른바 '깃발 절도 사건'을 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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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유겐트에 소속된 청소년 대원들. 출세에 욕심이 있는 많은 야심가 청소년들이 히틀러 유겐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친위대에 들어가는 길을 택했다.>

 

 

그 깃발은 바로 '가톨릭 청년단' 회관에 걸려있던 깃발을 말합니다. 그들은 "가톨릭 청년단이 지닌 구시대적 종교관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늦은 밤 어둠을 틈타 가톨릭 청년단의 중앙회관 건물 옥상을 올라가서 가톨릭 청년단 깃발을 걷어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깃발을 광장에서 불태웠는데, 어이없게도 바로 그 앞에 경찰서가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모두 체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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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대회에 각 단체를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입장하는 여러 가톨릭 청소년 단체들. 독일에는 유서 깊은 가톨릭 청소년 단체들이 많았지만, 이들은 나치 정부로부터 계속 불이익을 받은 끝에 1938~1939년 즈음에는 자취를 감췄다. 소련만큼 종교를 탄압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치의 국가사회주의 역시 기본적으로는 사회주의 사상의 분파였기 때문에 결코 종교에 고운 시선을 보내지는 않았다.>

 

 

처음에 독일 법원은 이 행위를 '주거침입을 수반한 절도(절도 물품의 명목은 '포목 한 장')'라는 중범죄로 규정하였으나, 결국에는 형법 제242조에 명시된 단순절도죄로 처벌하였습니다.

 

이 판결은 당시 독일 법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키일 학파의 법학자들에게 강한 비판을 받았는데, 우선 행위의 동기가 선하고 둘째로 행위가 사회 공익에 크게 기여했으므로 범죄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던 것입니다.

 

* 키일 학파의 학설을 더 알고 싶다면? https://www.dogdrip.net/220522816 와 https://www.dogdrip.net/220522980 를 참고하세요!

 

 

 

 

2. 게슈타포가 처벌된 사건

 

비밀국가경찰(Geheime Staatspolizei)은 나치 시대 내내 강한 권력을 자랑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약칭인 '게슈타포(Gestapo)'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있죠. 그 수장이었던 제국경찰장관 하인리히 히믈러는 자신들을 가리켜 공공연히 "법의 흠결을 메꾸는 존재"라고 불렀습니다. 한마디로 법 위에 있던 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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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사를 잘 모르더라도 게슈타포만큼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린 인물이라 할지라도 게슈타포는 언제든지 그를 검문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필요하다면 '보호검속(Schutzhaft)' 역시 할 수 있었는데 이는 유치장에 가두어 둔 채로 조사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과 달리 게슈타포가 어떠한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만은 아닙니다. 독일 사법성은 게슈타포를 엄중히 감시 및 견제하는 역할을 했고, 게슈타포가 행하는 검문의 목적이 공익에 부합하는지ㆍ피검문자에게 중대한 신체적 위하를 가하지는 않는지ㆍ즉결처분이라는 명목의 사법살인이 발생하지는 않는지를 따졌습니다. 그리고 이를 어긴다면 게슈타포라 할지라도 처벌받을 수 있었죠.

 

일례로 1934년에는 게슈타포가 집단수용소에 갇힌 피검문자를 구타한 사건에 대하여, 슈테틴 지방법원(LG)은 "법질서가 승인하지 않는 가학적인 학대"라며 해당 범죄를 저지른 게슈타포 대원을 엄벌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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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 슈테틴(Stettin). 원래 독일의 영토였으나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고 승전국이 영토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폴란드에게 배상으로 주어졌다. 그래서 현재는 폴란드 영토이며 이름도 폴란드식인 슈체친(Szczecin)으로 불린다. 꽤 널리 알려진 역사적인 도시라 처칠의 유명한 연설, "발트 해의 슈테틴으로부터 아드리아 해의 트리에스테까지 '철의 장막'이 유럽 대륙을 가로질러 드리워져 있습니다."라는 연설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3. 로디지아 재판 사건

 

로디지아(Rhodesia)는 오늘날의 짐바브웨 지역에 있던 나라입니다. 19세기 중반 영국이 이곳을 석권하고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영국령 로디지아라고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영국령 로디지아는 광업이 발달하여 아주 부유하고 풍요로운 지역이었으나, 이 풍요는 백인에게만 허락된 것이었습니다. 로디지아의 사회 저변을 이루는 대다수 흑인들은 굶주리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있었죠. 로디지아의 영국인들은 강력한 탄압을 통해 흑인들의 불만을 억누르고 로디지아 사회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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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국인 영국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계속 로디지아를 통치하고 있었으나, 거세지는 국제사회의 압력 속에서 로디지아 관리에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거기다 소련과 중국이 아프리카에서 세력을 확장하면서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을 부추겼고, 이에 따라 흑인들의 게릴라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영국 정부는 로디지아의 영국인들에게 흑인들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등의 유화정책을 실시하라고 요구했지만 로디지아의 영국인들은 본국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죠.

 

이안 스미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결집한 로디지아의 영국인들은 본국과 대립한 끝에 1965년 11월 11일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 날은 바로 제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날이기도 한데, 굳이 이 날을 택해 독립을 선언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과거 제 1차 세계대전때 본국을 열심히 도왔는데 그걸 잊고 자신들을 배신한 것이냐는 항의의 표시였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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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한 이안 스미스. 로디지아 출신의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본국인 영국이나 다른 백인들로부터 배신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 사건을 "대배신(The Great Betrayal)"이라고 부른다. 이는 이안 스미스의 회고록 제목이기도 하다.>

 

 

영국 정부는 로디지아의 독립 선언은 무효라고 선언하며 로디지아는 여전히 영국의 정당한 영토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안 스미스가 이끄는 독립국 로디지아는 국제를 공화정으로 전환한 뒤 국민개병제를 실시하는 한편, 전세계의 용병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원체 부유한 나라인지라 높은 급여를 불렀고, 베트남전 이후 방황하던 베테랑 군인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을 기반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갖추게 된 로디지아군은 민족주의 독립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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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지아군. 참고로 이들이 기대어 서있는 전차는 원래 로디지아군의 전차가 아니었다! 사진의 전차는 소련제 T-55 전차인데, 앞서 말했던 아프리카에서의 소련의 세력확장 시도 중 하나로써 소련이 앙골라의 친소련 게릴라에게 제공하려던 것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화물선째로 나포하여 로디지아군에게 준 것이다. 한편 전쟁 끝에 로디지아 공화국이 무너지자 아프리카에 마지막 남은 '백인들의 나라'가 된 남아공으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남아공은 이들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강력한 군대를 육성하여 국경에서 전투를 벌였다. 국경분쟁은 남아공 현대사의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며, 국경분쟁을 소재로 한 아프리칸스어 문학이 크게 발전하여 국경 문학이라는 한 갈래를 이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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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지아군으로 복무 중인 베트남전 참전용사. 이미 산전수전 다 겪고 돌아온 이들로 구성된 로디지아군은 그야말로 일당백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가장 유명한 권총 사격술 중 하나인 '모잠비크 드릴'도 로디지아 전쟁 당시에 로디지아군이 개발했다.>

 

 

한편, 아직 로디지아가 독립을 선포하기 전이었던 1965년 초에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지지했던 흑인 다니엘 마드짐바무토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령 로디지아 자치정부는 영국인의 기득권과 치안 유지를 위해 "공공안전에 위협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을 체포 및 감금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고, 이 법에 따라 마드짐바무토를 감금했던 것입니다. 이 법의 시효는 1966년까지였는데 로디지아가 독립한 후 로디지아 공화국의 법무부 장관 데스몬드 라드너-버크가 이 법을 연장시키기로 결정하면서 마드짐바무토는 여전히 갇혀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니엘 마드짐바무토의 아내 스텔라 마드짐바무토가 이에 대해 소를 제기하면서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마드짐바무토 대 라드너-버크 재판으로 알려진 이 재판에서, 로디지아 법원은 라드너-버크의 구금명령을 합법적인 것으로 판결했지만 본국이었던 영국 법원은 다르게 판결했습니다. 영국 법원은 1965년의 로디지아 독립 선언은 불법이었으며, 그 이후로도 로디지아는 영국령이기 때문에 로디지아 공화국 정부가 연장하기로 결정한 법률은 법적 정당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거죠.

 

다만 판결과정에서 영국 법원은 현재의 로디지아 공화국 정부가 로디지아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정부로써 기능하고 있음은 사실이라며 인정했고, 재판부에 속해있던 피어스 경은 비록 불법으로 수립된 정부지만 로디지아 공화국 정부의 해당 행위는 영국령 로디지아의 질서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는 행위였기 때문에 합법적인 것이라는 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은 어찌보면 재미있는 사건입니다.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공해서 식민통치 해놓고는 이번에는 자신들끼리 갈라져서 누가 불법 정권인지를 놓고 싸우는 일만큼 웃기는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3개의 댓글

2020.03.27

잘봣당! 궁금한게 게슈타포도 정보기관이고 그 독일국방군 정보기관하고 협력기관인거야 아님 서로 견제하는 사이인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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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7
@월터

기본적으로는 협력기관이당.

 

게슈타포는 주로 국내의 공산주의자나 반정부단체를 색출하는 임무를 맡았고, 국방군 방첩청은 스파이를 잡거나 해외에 간첩을 파견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겹치는 부분은 크게 없었으므로 서로 견제할 계제가 별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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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27
@월터

독일 사법성이 게슈타포를 견제한 까닭은 법률과 정의에 입각해서 였을 수도 있지만 권력투쟁의 성격이 크다고 봐야겠지.

 

국방군 방첩청의 경우 맡은 임무가 다르니 게슈타포가 힘이 세져도 큰 상관이 없지만, 사법성의 경우 게슈타포로 대표되는 경찰력이 상승하면 반대급부로 사법부의 권력이 하강하니까 견제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어.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검ㆍ경간 갈등을 생각해보면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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