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레닌의 민주주의 파괴 공범, 아나키스트

1918년 1월 레닌과 볼셰비키 세력이 의회민주주의를 해산했고 러시아의 민주주의는 파괴됐다. 이 때 벌어진 의회민주주의 파괴엔 아나키스트 세력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대중 아나키스트 책들을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 이런 사실을 알려면 학술책이나 논문을 읽어야한다. 학술책이나 논문을 읽으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내용인데 이상하게 인터넷에 알려지있지 않다.


1. 10월 봉기 당시 까지 아나키스트의 레닌 지지와 협력

 

10월 봉기 당시까지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레닌을 지지하고 협력했다.

아나키스트들은 레닌에게 “자신들과 공토된 주의를 발견”했다. “레닌을 향해 수년 동안 품어왔던 극심한 적대감은 1917년이 지나면서 급속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레닌이 러시아에 돌아온 이래 행해온 일련의 초급진적 발언에 자극받은 많은 아니키스트들(그러나 모두를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은 볼셰비키 지도자가 자신들의 이념과 매우 비슷한 새로운 혁명이론을 위해 마르크스주의의 속박을 벗었다고 믿게 되었다.”1


그리고 “1917년 두 번의 혁명을 치렀던 팔 개월 동안 아나키스트와 볼셰비키는 임시정부 타도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노력을 기울”었다. “양편 모두 어느 정도의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한 주도적 아나키스트가 기록한 바에 의하면 대개의 중요한 문제”에서 두 집단은 “완전한 유사”를 보였다. “때때로” 그 둘의 “슬로건이 일치되기도 했으며 심지어 오랜 반목을 유지했던 양편 사이에 일종의 우애, 공동의 목표가 만들어내는 동지적인 우애가 발생하기까지 했다. 10월 그들은 역사의 기관차를 새로운 철로로 돌려놓기 위해 손을 맞잡고 일하게 되었다.”2

 

또한  두르노보의 별장 점거 당시 크론슈타트의 아나키스트 수병들과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은 “친 볼셰비키 시위(‘6월 시위’)”와 연결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3

 

또한 5월과 10월 사이에 있던 노동자 회의에서 볼셰비키와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대표단 모두 공장위원회와 노동자의 통제에 지지표를 던지며 협력하기도 했는데 노동운동에서 그 두 집단에게 최대의 적은 멘셰비키였다.  멘셰비키는 노동자위원회를 노동조합에 종속시키려했다. 멘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해서 “현 시점에서 기업을 인민의 손 안에 넘기는 작업은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자본주의의 골격 안에서 경제적 상황을 개선시키는 노동조합에 의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볼셰비키와 아나키스트” 두 집단은 멘셰비키의 그런 시도를 “저지”하였다. 아나키스트는 그 당시에 “사방에서 솟아오르고 있던 세력이 멘셰비키가 아닌 볼셰비키”인데 볼셰비키는 “자신들 사도의 고전적 교의를 내던져 버리고 혁명적, 말하자면 반마르크스적 관점”을 골랐다고 생각하였다.4

 

10월 25일엔 볼셰비키 세력이 봉기해 임시정부를 무너트리고 10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 때 크론슈타드 해군병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봉기 당시 비중이 컸다. 5 크론슈타트 해군은 아나키스트 집단이 세력을 확보한 집단이였다. 6

 

일반적 아나키스트들이 볼셰비키에게 반대하기 시작한건 소비에트 정부가 생겨난 뒤부터였다. 그 후부터는 볼셰비키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볼셰비키 독재에 저항하였다.. 7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뜻을 같이했던 게 있으니 제헌의회 해산이다. 다시 말해 의회민주주의 파괴였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라고 인식하는 그 형태다.

 

2. 레닌·볼셰비키와 뜻을 같이 한 민주주의 파괴

 

1_러시아 혁명 이전, 의회와 선거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혐오

 

일반적 아나키스트들이 볼셰비키와 뜻이 같던 부분은 바로 의회민주주의 파괴였다.

러시아 혁명를 떠나서 아나키스트들은 의회와 투표를 혐오했다.

 

『분명히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는 선거권을 최고의 기만으로 간주했다. 바쿠닌은 보통선거권의 문제가 “사회주의 혁명가들, 급진적 공화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교조적이고 독선적인 사회주의 분파를 갈라놓는 주요하고 결정적인 지점”이라고 말한다. 프랑스의 아나키스트 장 그라브는 프랑스 내에서 혁명가들의 분열을 야기한 것이 다름 아닌 선거권의 행사였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절대 자유자유주의자가 ‘아나키스트들임을 입증한 것’은 1879년에 중앙의회에 대한 선거를 거부하면서이다. 모든 종류의 권력이 그것을 행사하는 자를 타락시킨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우리는 아나키스트들이 정치권과 의회의 놀음에 노동자들이 동참하게 되는 것을 얼마만큼 두려워했는가를 알 수 있다. 바쿠닌도 노동자들의 의회진출을 우려했다.』8

 

 

『아나키스트드이 선거권을 거부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엘리제 르클뤼는 ‘투표는 곧 포기’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투표의 실시는 선출된 사람이 유권자의 의사를 위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게되거나 또는 그가 사적인 이익만을 고려할 경우에는 자신의 직무를 포기하게 되는, 둘 주 하나의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한편 장 그라브는 의회민주주의가 ‘무능하고 빈약한 통치’가 아니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미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유권자들은 정치적으로도 착취당하게 마련이다. 바쿠닌은 “유권자들은 시민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충분히 인식하고 자유롭게 행사하기 위해 요구되는 교육도, 여가도, (경제적) 자립도 갖추지 못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나키스트들이 무엇보다 반대하는 것은 다수결의 원칙이다. 이는 대다수의 아나키스트 이론가들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대중을 불신하고 때때로 경멸하기까지하면서 소수만을 신회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다. 크로포트킨은 “혁명이 늘 소수에 의해 수행된다는 점을 잊지 말자. 대중은 언제나 중산층, 아니 그보다도 더 하층인 계급을 대표하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듯이 앞으로도 혁명을 구속하는 장애물이 될 것이다”고 쓰고 있다.』9

 

 

이 점은 이탈리아 아나키스트이자 유럽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중 하나인 에리코 말라테스타가 1913년에 쓴 글을 봐도 알 수 있다.10

『조르조: 사실 나는 항상 인민의 의지가 아니라 인류앤의 의지에 관해 말해왔어요. 내가 인민의 의지라고 말했다면 그건 하나의 어법이고 언어를 정확지 않게 사용한 겁니다.(...)이건 단지 단어의 문제가 아니예요. 이건 내용의 문제이지요. 인민의 정부를 뜻하는 민주주의와, 정부가 아니라 각자와 모두를 위한 자유를 뜻하는 아나키즘의 차이 말이죠.

인민은 분명 인간애로 구성되고 각각의인민이 선택하는 독립적이고 의시적인 하나의 결합체이지만 각자는 상황에 따라 서로의 힘을 강화시키거나 무효화하는, 차례로 서로를 강화시키거나 중화시키는 각자의 감성과 이해관계, 열망, 특수의지를 갖잖아요! 

한 개인이나 집단이나 계급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잘 무장된 의지는 자신의 의지를 전체의 의지인 것처럼 지배하고 강요하고 관철시키는 데 성공할 수 있어요. 인민의 의지 자체라고 불리는 현실은 지배하는 자의 의지, 또는 어느 누군가의 의지에 정확하게 일치하지도 않고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산술적인 계산들의 기묘한 결과물입니다.
그 자신의 주장에서도 민주주의자들, 즉 공화주의자들(이들이야말로 참된 민주주의자이기 때문에)은 소위 인민의 정부가 대표들을 통해 의지가 드러내고 집행하는 다수의 정부일 뿐이라고 이미 인정했어요. 따라서 소수의 '주권'은 실행에 옮길 수 없는 단지 명목적인 권리입니다. 종종 국민 중 가장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이자 '소수'인 이들은 이해관계나 이념의 공동체로 단합될 경우 산술적인 다수가 될 수도 있고 한 명의 지도자에게 복종하면서 많은 다른 파벌들가 대립하기도 합니다.

이런데도 그 후보들은 당선시켜서 다수의 이름으로 지배하는 정당은 실제로 다수의 의지를 표현하는 정부일까요?(...)
정치제도들, 사회의 통제기관들, 헌법의 승인을 받은 개인권과 집단의 권리들은 당신의 공화국에서도 똑같이 존재할 겁니다.

결과들이 나쁘거나 주로 매우 부정적으로 변하는 이유는 뭘까요? 당신네 공화국에서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내가 이유를 말해줄까요? 그 공화국에서도 인민의 경제적인 조건은 실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에요. 기득권층과 노동계급으로 분열된 사회가 변하지 않아서 실질적인 지배권은,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권리를 가지지 못한 대다수 대중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 손에 있는 거죠.(...)
혁명적인 방식으로 자본가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그들의 힘을 파괴하는 공화주의 혁명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처음 만들어진 공화주의 [제헌]의회는 자본과들과 어울릴 겁니다. 제헌의회가 아니라도 분명히 그다음 의회는 자본가들이 바라는 대로 움직일 겁니다. 혁명이 그저 우연히 만들 수 있었던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파괴할 겁니다.』11

 


심지어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민주주의와 아나키스트는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2_ 제헌의회 전후, 아나키스트의 의회 민주주의 거부와 파괴

 

 

당연히 러시아 아나키스트 역시 제헌의회와 의회민주주의를 혐오했다. 러시아 아나키스트에겐 의회 존제 = 볼셰비키 독재 였다.그러므로 볼셰비키 독재처럼 의회 역시 적극적이고 폭력적으로 파괴해야 대상이라 생각했다.

 

아나키스트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만큼이나 혐오스러웠던 대상은 러시아의회에 대한 전망이었다. 그들의 눈엔, 투표란 단지 개인이 스스로를 자주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도구로 보일 뿐이었다.  막스 슈티르너의 선언에 부응하여 1917년 10월, 로스토프의 한 아나키스트는 이렇게 공표했다. “나는 한 개인이며 나 ‘자신’보다 더 높은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이와 유사하게 프루동은 보통 선거권은 바로 ‘반혁명’이라고 가르쳤다.) 1906년, 제국의회 선거가 있었을 때, 아나키스트들은 이를 욕설과 비난의 과녁으로 삼았었다. 그리고 1917년, 바로 코앞에 닥친 제헌의회에 대한 그들의 태도도 여전히 경멸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감상은 의회를 지지했고, 볼셰비키들―결코 의회민주주의를 동결할 것 같지 않아 보였던―마저도 의회에 대해 좋은 평을 하는 것이 신중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개인적으로 레닌은 제헌의회를 경멸했으나 그의 이 같은 견해는 혁명이 지난 몇 년 뒤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그러나 완곡한 말투라고는 사용해본 적이 없는 아나키스트들은 곧 구성될 의회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기극이라고 비난했다. 

학자적 기질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였던 아폴론 카렐린의 펜끝에서 대의정체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비판이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널리 읽혀졌다. 카렐린에 의하면, 민주주의란 실제적으로는 ‘금권정치’에 상당하는 것이다. 그는, 설사 노동자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정당들은 계속해서 의회에 적합한 후보들을 지명할 것이며, 정당 지도자들은 상공인, 전문직 종사자, 그리고 공장 밖의 더 푸른 목장을 동경하는 교육받은 노동자들만을 뽑을 것이기 때문에 평범한 육체 노동자들은 의회제도 안에서는 결코 자신들의 대표를 갖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어떤 경우든, 개인에게서 자유의지를 행사할 권리를 박탈하는 대의정부는 필연적으로 권위주의적인 것이 되리라고 주장했다.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대회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두명의 아나키스트 노동자는 유사한 취지로 의회민주주의를 거부했다. 첫 연설자는 ‘사제들과 지주들’에 의해 지배될 것이 확실한 제헌의회를 지지한다는 이유로 볼셰비키를 비난했다. 그는 오직 순수한 노동자들의 조직과 공장위원회, 그리고 소비에트를 통해서만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동료도 그의 주장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며 뒤를 이었다. 그는, 노동자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은 제헌의회 후보자 명단을 보면, 의회는 ‘자본가와 지식인’에 의해 독점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지식인들이란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없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손가락만으로도 우리를 쥐어짤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언젠가는 배신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는 오로지 ‘직접적인 투쟁’만이 노동자계급에 승리를 안겨줄 수 있다고 장담했다. “노동자를 해방시키는 것은 노동자들 스스로의 임무이다!”

9, 10월 간. 제헌의회를 위한 선거가 임박해 옴에 따라 아나키스트 대변인들은 의원내각제를 향해 비난의 홍수를 퍼부어댔다.  샤피로는 ‘Golos Truda’에, 어떤 국회도 자유로 가는 길을 막을 수는 없으며 이상적인 사회는 오직 혁명적 창조력을 방해하고 질식시킬뿐인 모든 권력의 궤멸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러시아 민중이 자각해야만 한다고 썼다.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며칠전, 빌 샤토프는 범러시아 공장위원회 대회에서 그의 타고난 웅변가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이 논지를 한층 발전시켰다. 어떤 형태든 정치권력이란 “썩은 달걀만한 가치도 없는 것”이라고 그는 서두를 꺼냈다. 러시아 혁명은 대립하고 있는 정당 간의 주도권 싸움이 아니라 산업, 농업에 있어서 누가 ‘주체’가 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한 경제적 갈등이다. 자본가가 공장들을 소유하고 있는 한, 노동자들은 의회공화정이 수립된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의 노예로 남아 있게 될 것이라고 그는 열변을 토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데, 정치권력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고 그는 선언했다. 제헌의회를 위한 준비는 귀중한 정력의 낭비일 뿐이며, 노동자들을 정치적 파벌로 분열시키는 것은 그들의 계급적 결속력을 파괴할 뿐이다. 대신 노동자들은 공장을 인수할 준비를, 농민들은 토지를 인수할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는 경제적 기구를 조직해야만 한다. 다음날 곧바로 전 산업을 가동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만 한다.”』12

 

 

 

『아폴로 카렐린은 ‘burevestnik’에, 자본주의적 체제가 존속되는 한, 노동자는 노동자요 사장은 사장일 뿐이며 생산을 관리하고 노동시간을 줄이는 따위의 상징적인 미봉책이 주종관계라는 근본적인 구조를 바꾸어놓지 못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기고했다. 보다더 극단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burevestnik’지는 선언했다. 부르조아 세계는 완전히 붕괴되어야 하며 “노예상태가 아닌, 자유에 기초한”, 전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노동을 정착시켜야 한다. 노동대중은 아나키즘의 검은 깃발을 펼치고 ‘식인종’의 새로운 정부에 대항해 바리케이트를 쳐야만 한다. “제헌의회의 거짓과 ‘생산 통제’의 넌센스, 그리고 국가적 중앙집중의 위험과 해독을 폭로하라”‘burevestnik’지는 외쳤다. “그리고 모든 억압받는 이들을 사회주의혁명 아래 모으라!”』13

 

 

 

『당신들은 다른 계급의 복지를 위해 봉기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당신의 적―자본가―에게 속해 있는 생산을 통제하기 위해서 봉기했을 따름이다. 만약 그런 의도가 아니라면, 당신들은 경비견에 불과한 것 아닌가?
모든 생산을 노동자에게!
사회주의 통제 타도!
제헌의회 타도!
모든 권위 타도!
사유재산 타도!
평화, 자유, 평등, 그리고 우애가 넘치는 아나키스트 코뮨 만세!』
- 20세기 초 아나키스트 폭력의 중심지였던 에카테리노슬라브에서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들이 도시의 공장 노동자들에게 돌린 선언문 14

 

 

『수도 부근의 다양한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써클과 클럽을 연결한 페트로그라드 아나키스트 연합은 1917년 러시아에 등장한 가장 중요한 도시 조직이었다. 연합이 창설된 지 칠 개월 후이 12월, 연합 일간지 ‘burevestnik’릐 재포 부수는 이만 오천을 넘어섰으며 이것은 주로 크론스타드의 뷔보르그 지역과 오부호보와 콜피노의 노동계층이 거주하는 변두리에 유포되었다. ‘burevestnik’지는 Kommuan’와 ‘Svobodnaia’가 제시한 정책을 발전시키면서 집 없고 가난한 자들에게 개인주택을 탈취하라고 선동했으며 사유재산의 전반적인 몰수를 촉구했다.(N. 솔른체프라는 필명을 사용한 블레이크만은 끊임없이 집과 공장의 몰수를 주장했다.) 그 편집자들은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았을 때도 ‘사회 혁명’에 대한 열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과거 임시정부를 대체할 이상적인 사회 형태로 부각되었던 파리코뮨을 여전히 레닌의 독재정권에 대한 대응책으로 여겼다. 그들은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들을 향해 “인민위원들의 말이나 명령, 훈계를 거부하라”고 권고했으며 또한 1871년의 모델을 따라 그들 나름의 자유 공동체를 건설하기를 촉구했다. 동시에 그 일간지는 카데트와 SR, 멘셰비키의 ‘의회 숭배’를 조롱했으며 1918년 1월의 제헌의회 해체야말로 아나키스트 황금시대를 향한 거대한 진척이라고 환영했다.』15

 


레닌과 볼셰비키들이 의회해산이라는 민주주의 파괴를 벌일 때 아나키스트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_레닌과 볼셰비키의 제헌의회 강제해산에 적극 참여

 

 

10월 혁명 후 레닌은 의회민주주의를 싫어했지만 선거는 치루게 하였다. 그러자 레닌과 볼셰비키는 그 선거에서 사회주의혁명가당에게 패배한다.

 

 

『레닌은 의회란 자본가 계급이 국가 기구를 통제하는 것을 위장하는 역할을 할뿐이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의 직접 선거에 기반을 두고 있는 소비에트 권력이 의회 민주주의보다 더 우월하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볼셰비키는 헌법제정회의 선거를 치르기로 결정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4.840만 유효표 가운데 사회주의자혁명가당이 1,910만표, 볼셰비키가 1,090만표, 입헌민주당이 220만 표, 멘셰비키가 150만 표를 얻었다. 비러시아계 사회주의 정당들―대개 사회주의자혁명가당에게 동조했다.―은 우크라이나의 표 2/3를 포함해서 700만 표 이상을 얻었다. 이렇듯 사회주의자혁명가당이 명백한 승자였으며, 농촌에서 몰표를 얻었다. 볼셰비키는 5,500만 병사표의 42퍼센트와 함께 노동자표의 과반수를 얻었지만 헌법제정회의에서 과반수를 차지하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다.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이 득표수는 대중의 볼셰비키당 지지의 최고점이었다. 그 뒤로 볼셰비키는 병사들이 고향마을로 돌아가고 노동자의 불만이 커지면서 지지를 잃었다.』16


1918년 1월 5일에 제헌의회 현장에 제헌의회를 옹호하는 시위대가 있었다. 붉은 근위대는 그런시위대에게 총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제헌의회를 강제해산시켰다.

 

 

『헌법제정회의는 1월 5일에 헌법제정회의를 옹호하는 시위대가 붉은 근위대의 총격을 받은 직후에 암담한 상황 속에서 열렸다. 볼셰비키는 헌법제정회의 대의원들이 소비에트 권력을 기성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대의원들은 체르노프를 의장으로 삼아서 사회주의자혁명가당이 제출한 의사일정을 논의하기로 했다. 회기가 단 한 차례 열린 뒤 볼셰비키 병사들이 헌법제정회의를 폐쇄했다.』17

 


『페트로그라드는 제헌의회의 개원일인 1월 5일 봉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볼셰비키는 대중의 회합을 금지했고 시내를 군대로 가득 채웠다. 이 군대는 ‘제헌의회 사수를 위한 연합’이 조직한 5만 명의 시위자 무리를 향해 발포했다. 최소한 10명이 죽고 수십명이 부상을 입었다. 정부군이 비무장 상태의 군중에게 발포한 것은 2월 이후로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후 4시 제헌의회가 소집되고 있었던 타우리드 궁전의 예카테리나 홀의 분위기는 긴박했다. 대의원의 수만큼이나 많은 군 병력이 들어차 있었다. 군인들은 홀의 뒤편에 서 있거나, 보드카를 마시거나 사회주의자혁명당 의원들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면서 화랑에 앉아 있었다. 레닌은 과거 차르 정부의 대신들이 두마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앉아서 관전했던 옛 정권의 특별석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레닌의 얼굴은 중대한 결전이 시작되기 전의 장군의 표정과 같았다.

체르노프가 의장을 보는 가운데 사회주의혁명당은 토의를 시작했다. 사회주의혁망당원들은 입법 문제는 뒤로 미룬 채 토지와 강화에 대한 법령을 신속히 통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군인들의 야유밖에는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볼셰비키는 제헌의회가 “반혁명분자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선언하고는 회의장을 박차고 나갔고, 좌파 사회주의혁명당원들이 뒤따라 나갔다. 그리고 새벽 4시, ‘붉은 근위대’가 회의 자체를 끝내버렸다. 그들 중 한 명인 한 수병이 연단 위로 기어 올라간 다음 체르노프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근위대가 지쳐 있기 때문에” 모두 회의장에 나가야 한다고 선포했다. 체르노프는 몇 분만 더 회의를 계속하고자 했으나, 근위대가 위협을 가하자 마침내 휴정하기로 합의했다. 대의원들이 줄을 지어 나간 다음 타우리드 궁전의 문은 자물쇠로 잠겼고, 그렇게 하여 러시아 민주주의 성채의 12년간에 걸친 역사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이듣날 대의원들이 궁전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출입을 제지당했고, ‘제헌의회’해산에 대한 인민위원회의 결의를 전달받았다.』18

 


이 사건 뒤로 러시아는 70년동안 민주주의를 성립하지 못 했다.

 

『헌법제정회의 대의원의 약 85퍼센트가 사회주의자였으며―사회주의자혁명가당 대의원 200명이 수감과 징역으로 보낸 시간은 모두 합쳐서 1,000년이었다.―, 평화와 토지라는 핵심 쟁점에서 사회주의자혁명가당의 입장은 볼셰비키에 더 가깝게 바뀌었다. 그러나 대의원들은 볼셰비키에게는 핵심이 되는 쟁점에서는 양보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 쟁점이란 소비에트에 기초를 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위해 의회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볼셰비키는 헌법제정회의를 폐쇄함으로써 착취 계급만이 아니라 사회주의진영에 맞서서도 자기들의 정권을 지키는 전쟁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렸다. 헌법제정회의의 해산으로 러시아에 민주주의가 성립할 가망이 70년 동안 사라졌다.』19

 

 

이 때 붉은 근위대를 지도했던 인물이 바로 아나키스트 인 아나톨리 젤레즈니아코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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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리 젤레즈니아코프라는 이름의 사나운 크론스타트 수병(…) 다음해[1918년] 1월 그는 볼셰비키가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파견한 무장분견대의 지도자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20

 

 

『1918년 1월, 의원내각제에 대한 강렬한 적의로 무장한 아나키스트들이 전투분견대를 이끌고 제헌의회를 해체시켜 버림으로써 단 하루만에 그 생명을 끊어버린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일이었다. 볼셰비키 신정부의 명령에 따라 타우리제궁서의 수비대장으로서 새로 임명되어, 크론스타트 해군기지로부터 온 수병 젤레즈니아코프는 위협적인 코멘트와 함께 빅토르 체르노프를 해임했다. “당신은 너무 지쳤소.”[원판을 못 봐서 왜 이렇게 번역된건지 모름]』21


『"근위대는 지쳤다." 1918년 1월 5일 밤에 아나톨리 그리고리예비치 젤레즈니아코프라는 젊은 아나키스트 수병은 이 말과 함께 제헌의회를 해산하고 러시아 혁명사의 틈새에 자신을 새겨넣었다.』22


『10월 혁명 후 젤레즈니아코프는 타우리제 궁을 지키는 수비대장―한 목격자의 설명에 따르면 “어깨를 가로질러 딴띠를 요염하게 걸치고 벨트에는 수류탄을 눈에 띄게 매달고 있던―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는 (볼셰비키의 명령에 따라) 제헌의회의 수명을 끝장냈다. 이 모든 게 그의 능력이었다.

아나키스트가 이 역할을 맡았던 건 적절해 보인다. 아나키스트들은 모든 정부의 반대자로서 짜르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거부했던 것만큼 열렬하게 대의민주주의도 대체로 거부했기 때문이다. 프루동이 말했듯이 보통선거권은 반혁명이고 의회는 기만과 타협의 소굴이며 중·상류계급이 노동자와 농민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소수의 예외(그 중 한 명이 크로포트킨)가 있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이 다른 혁명집단의 “의회물신주의”라고 부르던 입장을 비난했고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제헌의회를 비판했다.』23


이후  아나톨리 젤레즈니아코프는 붉은 군대 지휘관으로 활동했고 끝까지 아나키즘 성향을 유지한 채로 하얀 군대와 전투를 하다 사망했다. 24

 

 

이 아나톨리 젤레즈니아코프 라는 인물은 러시아 혁명의 아나키스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중 하나이다. 그런데 한국의 대중 아나키즘 책에는 전혀 알려져있지 않다. 이 내용을 알려면 굳이 학술책을 읽어봐야만 한다. 미국 역사학자 폴 애브리치는 분명 『Anarchist portraits』에서  아나톨리 젤레즈니아코프를 대표적인 러시아 아나키스트중 하나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아나키스트는 러시아 제헌의회 해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것 일반적인 민주주의 관점에서 옹호하기 힘든 일인데 역시 알려져있지 않다. 이 사실 역시 미국 역사학자 폴 애브리치의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Anarchist portraits』에 명백히 서술되어 있으나 한국 아나키즘 대중운동에서는 알려져있지 않다.

 

 

폴 애브리치의 권위없는 학자가 아니다. 오히려 아나키즘 역사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다.


분명 2004년에 나온 갈무리 출판사의 번역판 책에 있는 인물소개란에는
“폴 애브리치는 뉴욕시립대학의 퀸스 컬리지와 대학원에서 러시아 역사를 가르친다. 그는 미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연구자로 『러시아 아나키스트들』(1967)『1921년 크론슈타트』(1970)『1600~1800 러시아의 반란자들』(1972)『러시아 혁명 속의 아나키스트들』(1973)『미국인 아나키스트, 볼테린느 드 클레이르의 삶』(1978)『근대학교운동 : 미국 내의 아나키즘과 교육』(1980)『헤이마켓의 비극』(1984)『아나키스트의 초상』(1988)『사코와 반체티』(1991)『아나키스트의 목소리 : 미국의 아나키즘 구술사』(1995)를 썼다. ”
고 나오며 책 뒷면엔 “제임스 졸, 뉴욕 타임즈 서평”, “콜만 맥카씨, 워싱턴 포스트 서평”, “게리 컨, 워싱턴 타임즈”, “로버트 잘러, 필라델피아 인콰이러”같은 여러 서평들이 나와있다.

 

 

폴 애브리치가 얼마나 이 분야의 전문가인지는 이 기사에도 볼 수 있다.
https://www.theguardian.com/news/2006/apr/10/guardianobituaries.obituaries
https://www.nytimes.com/2006/02/24/nyregion/paul-avrich-74-a-historian-of-anarchism-is-dead.html

그러나 한국에는―폴 애브리치의 책에 대표적인 러시아 아나키스트로 소개된― 아나톨리 젤레즈니아코프가 알려져있지 않고 역시 한국엔 아나키스트들의 의회해산 사실이 알려져이지 않다.
심지어는 그걸 알고 있을 게 명백한 사람의 책에서도 말이다. 25

 


추신_1917년 크론슈타트 수병들과 1921년 크론슈타트 봉기의 수병들은 다르다. “1917년 크론슈타트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아나키스트들은 그 사 년 후에 와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26

(취소선 처리 시간: 2020년 3월 5일 오전 9시 19분: 해당 서술의 근거의 출처는 1989년에 번역됐지만 원판은 1973년에 출간됐는데 1973년 당시 연구의 오류이거나 학계에 논쟁이 있는 영역으로 보인다. 해당 서술이 확실히 오류인지 아닌지 여부에 대한 학계 논쟁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4. 주석

 

1.

 

폴 애브리치 지음, 예문 편집부 옮김, 1989,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도서출판 예문, 18쪽. 그 예가 4월 3일이다. 그 날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레닌은 자신을 환영화러 나온 사람들에게 러시아에서, 새로운 시대, 즉 새로 등장한 ‘부르조아’정부가 노동자 소비에트들의 공화정으로 대체되는 동시에, 인민의용군이 군과 경찰을 대신하는 시대를 곧 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여기에는 거의 모든 아나키스트들이 반대하지 못할 강령의 핵심이 있었다. 더구나 아나키스트들은 레닌이 제헌의회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원용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찬성의 뜻을 표”했으며 “다음날 타우리제궁에서 사회민주당원들을 모아놓고 발표한 ‘4월 테제’에서 레닌은, 러시아에서 역사 발전단계 중 일부를 면제시키는, 즉 마르크스에 따르자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반드시 선행되어야하는 ‘부르조아 민주주의’ 단계를 면제시키는 비정통적 정책을 지시”했다. 이 선언은 “온건한 사회민주당원들에게 청천병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레닌이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사회주의 혁명에 반드시 선행돼야 하는 자본주의의 시기를 부인함으로써 자신의 스승의 역사법칙을 노골적으로 방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품게 되었”다. “보다 정통적인 사회주의자”들에 레닌은 “분명히” “길고 괴로운 망명생활 동안 정신이 나가버렸거나 아니면 아나키스트가 돼버”린 인간으로 보였다. 폴 애브리치, 1989, 18~20쪽

베테랑 마르크스주의자였던 I.P. 골덴베르그는 “레닌은 이제 삼십 년 간 자리가 비어 있던 유럽의 권좌, 즉 바쿠닌의 권좌에 스스로를 올려놓으려 하고 있다! 레닌의 새로운 언급은 어떤 낡은 것, 즉 원시적 아나키즘의 쇠퇴해버린 진신을 반향하고 있다”고 하였다. 폴 애브리치, 1989, 20쪽

“좌익 멘셰비키 혁명 기록자” 수하노프는 “볼셰비키의 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먼지를 털어낸 것”
이라고 기록했다.폴 애브리치, 1989, 20쪽

“많은” 레닌의 “동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레닌에게 실망했으나 아나키스트는 레닌의 모습에 긍정했다.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그의 견해에서, 협오체제의 기반으로서 자신들의 견해와 충분히 조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때까지 레닌에게 품어왔던 의심이 무엇이건 간에 잠시 제쳐놓게 되었”으며 “1917년 여름 페트로그라드로 귀환한 한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지도자는 레닌이 국가를 접수하는 순간” “완전히 말라비틀어지게” 해서 “아나키즘을 시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폴 애브리치, 1989, 21쪽.

 

2.

 

폴 애브리치, 1989, 22쪽

 

3.

 

폴 애브리치, 1989, 25~26쪽. “호전적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그룹들은 페트로그라드, 모스크바, 그리고 그 밖의 도시들에서 상당수의 개인주택을 대상으로 ‘몰수’를 감행했다. 그 가장 중요한 사례로는 P.P 두르노보의 별장 사건을 들 수 있다. (...) 아나키스트들과 그 밖의 좌익 노동자들은 두르노보의 별장을 점거해서 그곳을 독서와 토론 그리고 오락을 위한 방을 갖춘 ‘휴식소’로 개조했으며, 정원은 자기 아이들의 놀이터로 만들었다. (...)점거자들은 6월 5일 별장에 주둔했던 일단의 아나키스트들이 ‘부르조아 신문, ‘Russkaua Volia(Russian Liberty)’인쇄소의 ‘징발’을 시도 할 때 까지는 아무런 장해없이 머물러 있었다.몇 시간 동안 인쇄소 시설을 점거했던 공격자들은 임시정부가 파견한 군대에 의해 축출당했다. (...) 6월 7일 법무장관 이던 P.N. 페레베르제프는 아나키스트들에게 이십사 시간 내에 두르노보의 별장으로부터 철수할 것을 명했다. 다음날 별장을 방어하기 위해 크론스타드로부터 오십 명의 수병들이 왔으며 뷔보르그 구역의 노동자들도 공장을 이탈해 축출 명령에 대항하는 시위를 꾀했다. 
(...)”“아나키스트들은 별장에 참호를 파고 임시정부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 대항”하며 “여러 날 동안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으며 “친 볼셰비키 시위(‘6월 시위’)”와 연결하기도 하였다.  그 상태에서 “뷔보르그 구역의 형무소로 침투해 일곱명의 죄수들”을 풀어주었는데  “그들 중  셋은 일반범”이고 “뮐러라는 이름의 독일인 간첩”까지 풀어줬다. 법무장관은 “별장 공격명령을 내렸”다. “아스닌이라는 노동자와 아나톨리 젤레즈니아코프라는 이름의 사나운 크론스타트 수병” 이 둘은 “저항할 것을 제안”했고 임시정부를 상대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아스닌은 유탄으로 치명적인 부상을 당했”고 “젤레즈니아코프는 생포되어 여러 발의 폭탄을 압수당했다. 전부 합해서 육십 명의 수병과 노동자들이 체포되어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병사”들에게 “감금당했”다. “발틱 수병들”은 “젤레즈니아코프 석방 탄원”을 했으나 “임시정부”는 “탄원을 무시”하고 젤레즈니아코프에게 “십 사 년의 강제노동을 선고”했다. (“그러나 몇 주일 후” 젤레즈니아코프는 “감옥에서 탈옥했다.” 폴 애브리치, 1989, 25~26쪽.

 

4.

 

폴 애브리치, 1989, 45~47쪽

 

5.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지음, 류한수 번역, 2008, 『혁명의 시간,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 교양인  460~461, 465~467쪽) (폴 애브리치, 1989, 68쪽

 

6.

 

『러시아의 도시들에 아나키스트 그룹들이 다시 활발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도시 북쪽에 위치한 뷔보르그 지역, 그리고 아나키스트 노동자들이 상당수의 발틱함대 수병들과 연계를 맺고 있던, 핀란드만에 위치한 크론스타트섬의 항만과 해군기지에서 가장 집중적인 세력을 확보했다.』폴 애브리치 지음, 예문 편집부 옮김, 1989,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도서출판 예문, 15쪽.

 

7.

 

폴 애브리치, 1989, 68~84

 

8.

 

장 프레포지에 지음, 이소희·이지선·김지은 옮김, 2003, 『아나키즘의 역사』, 이룸, 56~57쪽

 

9.

 

장 프레포지에, 2003, 57~58. 이런 아나키스트의 행동에 대해 장 프레포지에는 비판하는데 “선거 중심주의를 지지할 만한 결정적인 논증”은 “기권은 극우 세력의 농간에 넘어가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며 “아나키스트들은 이러한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고 비판하다. 장 프레포지에, 2003, 58

 

10.

 

에리코 말라테스타가 어떤 인물인지는 장 프레포지에, 2003, 307~328 참고.

 

11.

 

에리코 말라테스타 지음, 하승우 옮김, 2014, 『국가 없는 사회』, 포토밭출판사, 117~121쪽.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1897년 3월부터 가상의 대화를 썼다. 1899년에 10화로 이 글을 중단하다 14년이 지난 1913년에 다시 가상의 대화 글을 썼다.  이 글은 "열세 번째 대화"이다. 이 대화문에서 조르조가 "말라테스타의 분신인 아나키스트"이다.
폴 너시 브레이, 「23년에 걸친 대화로 완성한 위대한 팸플릿」, 에리코 말라테스타 지음, 하승우 옮김, 2014, 『국가 없는 사회』, 포토밭출판사, 5~10쪽

 

12.

 

폴 애브리치, 1989, 62~65

 

13.

 

폴 애브리치, 1989, 77

 

14.

 

폴 애브리치, 1989, 77~78

 

15.

 

폴 애브리치, 1989, 90~91

 

16.

 

스티븐 A 스미스 지음, 류한수 옮김, 2007, 『러시아 혁명 : 1917년에서 네프까지』, 박종철 출판사, 60 쪽

 

17.

 

스티븐 A 스미스, 2007, 60

 

18.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재 옮김, 2017, 『혁명의 러시아 1891~1991』,어크로스,
152~153

 

19.

 

스티븐 A 스미스, 2007, 60~61

 

20.

 

폴 애브리치, 1989, 25~26

 

21.

 

폴 애브리치, 1989, 65

 

22.

 

『“THE GUARD IS TIRED.” With these words, uttered on the night of January 5, 1918, a young anarchist sailor named Anatoli Grigorievich Zhelezniakov dispersed the Constituent Assembly and carved a niche for himself in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Paul Avrich, 1988, 『Anarchist portrait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07쪽.

 

23.

 

폴 애브리치 지음, 하승우 옮김, 2004,『아나키스트의 초상』,도서출판 갈무리, 188~189,  『After the October Revolution, Zhelezniakov was named as commander of the detachment guarding the Tauride Palace—“bandoleers of cartridges draped coquettishly across their shoulders and grenades hanging obtrusively from their belts,” in the description of an eyewitness; and it was in this capacity that he carried out (on Bolshevik orders) his historic mission of suppressing the Constituent Assembly, ending its life of a single day.

It seems fitting that an anarchist should have played this role. For the anarchists, as opponents of all government, rejected representative democracy almost as vehemently as they rejected the tsarist and proletarian dictatorships. Universal suffrage was counterrevolution, as Proudhon had said, and parliament a nest of fraud and compromise, an instrument of the upper and middle classes to dominate the workers and peasants. With few exceptions (Kropotkin among them) the anarchists scorned what they called the “parliamentary fetishism” of the other revolutionary groups and openly denounced the Constituent Assembly from the first.』Paul Avrich, 1988, 『Anarchist portraits』, Princeton University Press, 108~109쪽.

 

24.

 

『During the Civil War that followed, Zhelezniakov fought in the Red Army as commander of a flotilla and later of an armored train. He took part in crucial campaigns against the Don Cossacks led by Ataman Kaledin and against generals Krasnov and Denikin. When Trotsky reorganized the Red Army, putting tsarist officers in positions of high authority and abolishing the system of self-government among the rank and file, Zhelezniakov protested vigorously, as did many other revolutionaries who opposed any return to old military methods. For this the Bolsheviks outlawed him, as they outlawed the anarchist Black Guards in Moscow and Nestor Makhno in the Ukraine.
Zhelezniakov, however, returned to Moscow illegally and discussed the matter with Sverdlov, chairman of the Soviet Executive Committee, who assured him that there had been a misunderstanding and offered him a high military position. Zhelezniakov declined and left for Odessa, where he resumed his activities against the Whites. But he was too effective a warrior to be let go so easily, and the following year, 1919, the Bolsheviks repeated their overtures. This time Zhelezniakov accepted, and he was appointed as commander of the armored train campaign against Denikin, who placed a reward of 400,000 rubles on his head.8 Zhelezniakov fought bravely without injury until July 26, 1919, when he was killed near Ekaterinoslav by a shell of Denikin's artillery. He was twenty-four years old.
The Soviet government, though it had outlawed Zhelezniakov and declared him a traitor, now embraced him as one of its heroes. His body was brought to Moscow and buried with speeches and pomp. A statue of Zhelezniakov stands today in the city of Kronstadt-erected by the Bolsheviks in tribute to his role in the October Revolution and the Civil War. Poems and songs have been composed in his honor by Soviet writers and are recited and sung to this day (“Beneath the earth, overgrown with weeds, lies the sailor Zhelezniak, partisan”), but without any hint that Zhelezniakov was an anarchist. On the contrary, the Communists claim him as one of their own and avoid mentioning his anarchist affiliations, calling him only a “revolutionary,” a “hero,” and a “martyr for the people.” Soviet sources, in fact, say that he joined the Bolshevik party, but this is untrue. Though he participated in the October Revolution and fought in the Red Army, Zhelezniakov remained an anarchist to the last. As he told his comrade Volin: “Whatever may happen to me, and whatever they may say of me, know well that I am an anarchist, that I fight as one, and that whatever my fate, I will die an anarchist.'10
For all his revolutionary zealotry, Zhelezniakov had a gentler side. Hot-headed, militant, impulsive, he was also literate, idealistic, even aesthetic. During the summer of 1917, while imprisoned by the Provisional Government after the Durnovo villa affair, he wrote a remarkable poem, the only one of his that survives. First published in 1923 in the journal Krasnyi Flot (Red Fleet), it was reprinted in the 1970 edition of the annual Soviet literary anthology, Den' poezii (Poetry Day).11 It is a moving poem, the quality of which my unrhymed literal translation can barely approximate:

“Falcon, falcon, Do not laugh at me now, That I should find my destiny in jail. I was higher than you in the heavens, above the earth, I was higher than you and the eagle. I saw many celestial bodies unknown to you, I learned many great secrets; I often spoke with the stars, I flew as high as the bright sun. But the day quickly passed and the next one came, And I burned with a rebellious flame. I was pursued by the enemies of freedom, My brothers were the wind and thunder. But once in the dark night of the steppe During a fatal storm I became weak And since then here I sit like a thief in his chains, Like an unfaithful and captured slave. Falcon, falcon, when you chance to fly Into the limitless and mountainous spaceDon't forget to give the clouds my greetings, Tell all that I shall break my chains, That my life in jail is only a twilight nap, Only a spectral daydream.』Paul Avrich, 1988, 109~110. 편하게 한국어로 번역된 내용은 2004년에 나온 하승우 번역판의 189~192 참고.

물론 붉은군대와 적대한 아나키스트들도 많았다. 모스크바에는 아나키스트들이 소총, 권총,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전투 분견대 ‘검은 수호대’를 조직했다.(그런데 수호대의 아나키스트들은 지도자가 허락없이 그리고 마구 몰수하고 약탈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자 지도자들은 모든 수호대원들에게 세명의 간부진이 서명한 명령장 없이, 또 간부 한 사람을 동반하지 않고 임무에 착수하는 것을 규제하는 금지령을 내렸다. 폴 애브리치 지음, 예문 편집부 옮김, 1989,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도서출판 예문, 104~105)

남부 지역에서도 적극적인 반볼셰비키 아나키스트들이 있었는데 이 집단들은 ‘허리케인’이나 죽임’이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했다. 아나코 미래주의자들이라고 알려진 카르코프의 한 그룹은 “세계 문명에 죽음을!”이라고 선언하고 “도끼를 들고 눈에 띄는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을 촉구했다. 로스토프, 에카테리노슬라브, 브리안스크의 아나키스들은 시형무소를 부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그 집단의 목적은 “백계 러시아인이건 볼셰비키건, 또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건 브레스트 리토브스크 조약을 수행하는 독일 군대이건 간에 장차 반혁명세력이 될 모든 집단을 전멸시키는 것”이었고 남부의 아나키스트들은 ‘몰수’와 폭발을 일으켰다. 폴 애브리치, 1989, 108~110

9월 25일에는 모스크바 공산당 위원회의 전원출석 회의가 열리는 레온티에프가 본부를 폭발시키도 하였다. 이 일로 체카에 추적당하자 사살당하기도 하고 자신들이 ‘징발했던’ 별장에서 자폭하기도 하였다. 폴 애브리치, 1989, 111

그러나 붉은군대에 진영에서 일한 아나키스트도 적지 않았다.

『볼셰비키에 대한 적극적 저항에서 수동적 중립성 또는 열렬한 참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속출했다. 심지어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결국에는 다수의 아나키스트가 백군에 포위당한 볼셰비키 정권에 다양한 지지를 보냈다.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은 대부분 공식적으로 볼셰비키와 제휴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비판했던 사람들은 적극적인 비난을 삼가고 우익의 해악성이 제거될 때가지 ‘제3의 혁명’을 연기했다. 심지어는 가장 호전적인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들중에서도 다수의 사람들이 레닌의 당과 운명을 같이했다. 그러나 여전히 반대자들이 더욱 많았으며 마지못해 비우호적 중립을 지키는 분파가 있었고, 더 심한 경우 몇몇의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그룹은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서도 볼셰비키를 인정하지 않은 채 ‘사회적 흡협귀’를 즉각 전복할 것을 호소했으며 (브리안스크 연합처럼), 또는 지하 아나키스트들의 경우처럼 공산당 관리들에 대한 테러리즘 운동을 벌이는 아나키스트들도 있었다.』폴 애브리치, 1989, 120

실제로 붉은군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아나키스트들도 많았다.

『빌 샤토프가 그 점에 있어서 가장 뚜렷한 인물이었다. 내란이 벌어지는 동안 샤토포는 10월 봉기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의원으로 보여주었던 것과 똑같은 열성으로 레닌 정부에 봉사했다. 1919년 가을, 적국[붉은군대] 제10사단의 장교로서 그는 이우데니치 장군의 침입에 대항하여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0년 그는 아나키스트와 친밀한 급진주의자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슈체코프에 의해 치타로 소환되어 극동공화국의 운송상이 되었다.
[중간생략]
샤토프 외에도 많은 유명한 아나키스트들이 적군[붉은군대]에 복무했다. 테러와 반란의 경력으로 유명했던 위스틴 주크와 아나톨리 젤레즈니아코프를 포함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투에서 죽었다. 군수품 수송대의 지휘관인 젤레즈니아코프는 1915년 7월[1915년은 편집자 오타임] 데니킨 포병대의 포화에 의해 에카테리노슬라브 근방에서 살해되었다. 소비에트 중앙 집행위원회의 알렉산드르 게는 Cheka의 고급 간부로 일하던 코카서스에서 백군의 군도에 찔려 죽었다.』폴 애브리치, 1989, 121~123. 다만 폴 애브리치가 말하듯이 볼셰비키와 협력하는 것을 반대하는 아나키스트가 더 많았다.

 

 

25.

 

 

위의 폴 애브리치 책을 번역한 건 하승우 라는 분인데 그 사람은 2008년에 아나키즘 대중 책을 썼는데 러시아 혁명 당시 부분을 이렇게 쓰고 있다.

『대부분 유럽에서 등장한 근대 서구의 사상들은 농업 사회에서 대량 생산의 산업 사회로 전환하는 것을 진보라고 믿었다. 자본주의에 맞섰던 사회주의 역시 이것을 발전이라 믿었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이 전환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전통적인 농업 공동체의 붕괴를 막으려 했다. 유럽 사회의 진보를 바라보는 시각이 달랐던 것이다.
유럽과 달리 농민 공동체가 많이 남아 있던 러시아는 아나키즘이 퍼지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크로포트킨을 비롯한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은 이런 공동체를 지키고 농민들이 자신과 마을의 일을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돕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비밀 경찰이나 군대처럼 폭력적인 힘으로 러시아를 지배하던 억압적인 군주 체제를 무너뜨리고 작은 농민 공동체들에게 권력을 돌려주면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런 믿음을 배신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차르라 불리던 억압적인 군주만이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 세력도 유럽을 따라가는 급속한 산업화 정책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차르 체제를 무너뜨린 1905년의 혁명이나 레닌으로 대표되는 볼셰비키가 파가 권력을 장아한 1917년의 혁명 모두 산업화를 기본 정책으로 채택했다.
레닌과 볼셰비키파는 산업화를 순조롭게 진행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농민과 노동자의 삶을 엄격하게 통제하려 했다. 그리고 산업화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당시 1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일과 강화 조약을 맺었다. 반혁명 세력을 탄압한다는 명분으로 국가의 권력을 다시 강력해졌다. 과거 프랑스 혁명 때에 그랬듯이 새로운 시도보다 질서가 강조되었고 그 질서를 해치는 사람들이 아나키스트라 불렸다.
혁명이 이루어지면 빵과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농민들으 믿음은 배신을 당했다. 볼셰비키 혁명은 국가를 해체하기는커녕 국가 권력을 강화했다. 농민들은 자신이 농사지은 곡물을 가지려 했지만 사회주의 국가는 계획 경제를 위해 그 곡물을 관리하여 했다. 이런 충돌 속에서 국가가 농민 공동체를 무너뜨렸고, 아나키스트들은 이 흐름에 저항했다.』하승우, 2008, 비타 악티바 02 『아나키즘』, 책세상, 45~48쪽


위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출처를 알 수 없는 이상한 내용으로 되어있는데 더욱이 차르 체제를 무너트린 1917년 2월 혁명을 1905년 혁명이라 쓰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 내전의 이유나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의 이유가 산업화 때문이라는 근거를 알 수 없는 서술이 나와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나오지 않는 게 의회해산이다. 분명히 아나키스트는 제헌의회 해산을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 사실을 빼고 있다. 이건 러시아 혁명과 내전에 절대 작은 사건이 아니다.

그리고 하승우 씨는 분명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폴 애브리치 지음, 예문 편집부 옮김, 1989,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도서출판 예문)를 읽었다고 밝히고 있다.

『내가 애브리치의 글을 처음 접한 건 [정치내용이라 검열] 나는 학교 앞 사회과학서점에서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폴 애브리치 지음, 편집부 옮김, 1989,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도서출판 예문)이라는 낯선(!) 책을 만났다. 표지에는 낡은 세계를 힘차게 쟁기질하는 젊은 농부를 그린 판화와 그 위에 ‘권위와 자본주의를 갈아엎는 농민’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단순하고 검은 표지가 까닭 없이 유혹했지만 조금은 식상한 문구 때문에 난 책을 둔 채 서점을 나섰다. 나중에 형의 책장에서 우연히 그 책을 다시 발견하고 나는 책에, 아니 그 속에 담긴 아나키스트들의 삶에 매료되었다.”하승우, 「옮긴이 후기 유령처럼 나를 깨우는 아나키스트의 초상들」, 폴 애브리치 지음, 하승우 옮김, 2004,『아나키스트의 초상』,도서출판 갈무리, 462쪽

거기도 분명히 아나키스트들이 의회 해산을 적극 주장하고 참여한 사실이 나온다.

이건 지나가기엔 대단히 중요한 내용인데 이 중요한 내용을 하승우 씨를 책에서 빼고 있다. 

 

 

26.

폴 애브리치, 1989, 170

 

 

5. 참고문헌

 


Paul Avrich, 1988, 『Anarchist portraits』, Princeton University Press,

폴 애브리치 지음, 예문 편집부 옮김, 1989, 『러시아 아나키스트 1917』, 도서출판 예문

폴 애브리치 지음, 하승우 옮김, 2004,『아나키스트의 초상』,도서출판 갈무리, 188~189: (『Anarchist portraits』의 번역판) 아나키스트를 아는데 공부 혹은 재미 둘중 하나만 따지는 게 아니라 학술 겸 흥미나 몰입까지 따지면 입문용으로 매우 추천할만 책이라 생각합니다.

알렉산더 라비노비치 지음, 류한수 번역, 2008, 『혁명의 시간, 러시아 혁명 120일 결단의 순간들』, 교양인

장 프레포지에 지음, 이소희·이지선·김지은 옮김, 2003, 『아나키즘의 역사』

스티븐 A 스미스 지음, 류한수 옮김, 2007, 『러시아 혁명 : 1917년에서 네프까지』, 박종철 출판사

올랜도 파이지스 지음, 조준재 옮김, 2017, 『혁명의 러시아 1891~1991』,어크로스

에리코 말라테스타 지음, 하승우 옮김, 2014, 『국가 없는 사회』, 포토밭출판사

하승우, 2008, 비타 악티바 02 『아나키즘』, 책세상


6. 사진출처

 

https://w.histrf.ru/articles/article/show/zhieliezniako_v_anatolii_grigorievich

https://zen.yandex.ru/media/voennyj_klondajk/chto-sluchilos-s-matrosom-jelezniakom-5d3448fa520a9b00aee4d413

http://back-in-ussr.com/2018/11/kak-matros-i-anarhist-anatoliy-zheleznyakov-stal-geroem-revolyucii.html

https://ru.wikipedia.org/wiki/Железняков,_Анатолий_Григорьевич

http://divergences.be/spip.php?article49

8개의 댓글

레닌추

0

아나키스트에 대한 재미있는 모순점은 아나키들이 무정부를 위해 스스로 조직을 구성한다면 그건 또 다른 정부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냐는게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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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4

닉이 눈에 익은걸 보면 병신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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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4
@dasbootz

무슨말임?뜬금없다

0
2020.03.04

당연한 소리아니냐? 민주주의도 지배체제중 하나일뿐임.

오히려 웃기는건 티샤쓰에 붉은장미 체게바라 아나키문양 세기고 민주주주의 타령 하는 애들이지.

0
2020.03.05

아나키즘도 분파가 여러 갈래로 나뉨

0
2020.03.05
@Quissont

그거야 당연하고. 본문에도 소수의 예외가 있다는 내용 인용했다. ("소수의 예외(그 중 한 명이 크로포트킨)가 있지만 아나키스트들은 자신들이 다른 혁명집단의 “의회물신주의”라고 부르던 입장을 비난했고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제헌의회를 비판했다.』23")

0
2020.03.09

님 근데 진짜 궁금한데 님 걍 일반인임? 학계사람 아니고?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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