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고려사 한 걸음 - 골품제도의 동요

신라에서 고려로의 교체와 호족

 

1. 골품제도의 동요

 

신라는 골품제의 동요로 인해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고, 신라 멸망의 큰 원인 중 하나로 보았다. 먼저 골품제의 동요로 인해 신라가 쇠퇴하기 시작한 그 이유는 크게 2가지이다. 첫 번째는 진골의 분열이고 두 번째로는 6두품의 도전입니다. 

 

신라 하대 왕 계보.jpg

1). 진골의 분열

 

진골의 분열 과정은 사례를 들며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통일신라 왕권의 전제주의 타도 운동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던 경덕왕 당시 왕이었던 경덕왕은 이런 움직임을 억제하기 위해 한화정책[(漢化政策)한화정책이란 중국식 제도를 도입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 세력을 억압하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이런 시도는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로 저지되었습니다]이라는 정치개혁을 실시했지만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다음 대인 혜공왕 시대에 반란으로 폭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혜공왕 4(768)에 일어난 대공의 난은 96각간(角干) 96족장이 서로 싸우면서 반란이 대란으로 확대되고, 이 반란은 3년 동안 지속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덕왕 한화정책의 실패와 96족장의 반란은 중대적인(중대적인 것은 무열왕 왕조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상대는 내물왕 왕조, 하대는 귀족시대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것을 부정하고 나선 첫 봉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신라 왕조의 중앙집권적인 것을 약화시키고 귀족 중심의 사회로 점차 나아가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있었지만 아직은 귀족들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지는 못했습니다만, 혜공왕 10(774) 귀족파인 김양상이 상대등에 취임하여 정권의 실권을 장악하자 일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정권의 실권이 귀족파인 김양상이 장악함에 따라 왕권의 힘이 약해지는 건 당연하게 볼 수밖에 없었고, 귀족파는 지속적으로 왕권의 힘을 약화하고 귀족의 힘을 키우려고 계속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그 기회를 잡음으로써 귀족의 힘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왕권파인 김지정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혜공왕 16780) 왕권의 회복과 귀족파의 힘을 다시 약화하기 위함이었지만 김경신과 김양상에 의해 반란은 진압되어버립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와중에 혜공왕이 살해당하면서 왕좌가 공석이 되지만 무열왕의 후손이 아닌 귀족이었던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신라의 중대가 종말을 고하고 하대로 진입하게 되고, 귀족연립적인 정치형태를 시작합니다.

 

이런 정치적 변혁과 왕계의 변화는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지기 시작합니다. 그동안 내물왕계로 왕위를 물려받다가 무열왕의 즉위 이후에는 무열왕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하지만 혜공왕이 살해당한 이후에 왕으로 즉위한 선덕왕(김양상)과 선덕왕 다음으로 왕위를 이은 원성왕(김경신)은 각각 내물왕 10세손, 12세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의 전개는 부활 내물왕계와 무열왕계가 왕좌를 가지고 지속적인 문제가 생길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위에 말한 것처럼 부활 내물왕계와 무열왕계가 왕좌를 가지고 지속적인 문제를 암시했습니다. 이 문제는 얼마 가지 않고 헌덕왕 14(822)에 김헌창의 난이 일어나게 됩니다. 김헌창의 아버지였던 김주원은 무열왕의 후손으로 선덕왕의 죽음 이후에 왕좌가 공석이 되자 자연스럽게 김헌창의 아버지였던 김주원이 왕위에 올랐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이 김주원이 왕위에 앉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이때 추후 원성왕이 된 김경신이 정변을 일으켜 김주원을 몰아내고 스스로 원성왕으로 왕위에 앉게 되면서 김헌창은 불만을 쌓게 된 것입니다.

 

잠시 궁금해하실만한 부분이 있어서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그 부분은 바로 귀족들의 김주원이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한 반발인데, 원래 김주원은 귀족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김경신이 정변을 일으켜 김주원을 왕위에서 몰아내고 귀족들에게 자신의 지지를 부탁하게 되면서 귀족들이 김주원을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김헌창은 원성왕(김경신)과 귀족들의 반대로 인해 자신의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품고 옹주(지금의 공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김헌창의 난은 귀족연립적인 조류에 대한 반동이 왕계의 변동과 복합되어 발생한 사건입니다. 이 난은 중앙 귀족들의 연합세력에 의하여 실패로 돌아가고 그 뒤 김헌창의 아들인 범문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만, 진압을 당하게 됩니다.

 

김헌창의 난은 전제적인 왕권을 타도하는 데에 성공한 귀족들의 상호 간에 정권을 탈취하기 위한 싸움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여기서 귀족들은 경제력을 이용하여 사병을 양성하고 무력항쟁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왕위는 진골 귀족들 내에서의 일이긴 하지만 혈통에 의하여 왕위를 물려받는 게 아니라 정치적 실력과 무장력의 우열로 결정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당시 혼란스러웠던 왕위 계승은 다음과 같이 너무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쓰고 1). 진골귀족의 분열은 마무리하겠습니다.

 

흥덕왕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종제로서 상대등의 자리에 있던 균정이 궁성으로 들어가 왕이 되었으나, 균정의 질인 제륭은 실력으로 그를 내쫓고 즉위하여 희강왕이 되었다. 그러나 희강왕도 6촌 형제인 김명 등의 핍박을 받아 궁중에서 자살하고 그뒤를 이어 김명이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민애왕이다. 이때 균정의 아들 우징은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군사를 빌어가지고 서울로 쳐들어와 민애왕을 축출하고 스스로 왕위에 앉아 신무왕이 되었다.”

 

2. 6두품의 도전

골품제.jpg

골품제도는 6두품들의 도전을 받아 다시 한 번 시련을 겪게 됩니다. 진골귀족 사이에 정권 다툼이 계속되는 동안 그 바로 밑층의 6두품 세력들이 성장하여 골품체제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6두품은 진골 다음가는 귀족 신분이었지만 관등과 관직 등에서 많은 제약을 받고 있었습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들은 17관등 중에서 제 6위인 아찬까지밖에는 오를 수가 없었고, 그에 따라 왕은 말할 것 없고 상대등 중시 및 각 부() - ()의 영()(장관) 등 고위 관직과 당 정의 지휘관인 장군에도 취임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가 진골의 독차지였던 것이었고, 이와 같은 제약 속에서 진골 귀족에 대한 반감과 골품체제 자체에 대한 불만이 6두품 계층 사이에서 싹트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왕권이 강하고 사회가 안정되어 있었을 때는 주어진 한계 안에서 일정한 지위를 누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대에 들어와 상황이 바뀌게 됩니다(진골 귀족의 왕권쟁탈싸움으로 인한 사회와 중앙정치의 혼란기). 이제 6두품들은 상황이 바뀜에 따라 골품제도를 타파하려는 움직임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계열은 족강(族降)된 무열왕계와 김유신계 추가로 도당유학생들에게서 뚜렷이 보입니다.

 

특히 도당유학생들을 숙위학생이라 하는 데 이들 가운데는 관비유학생이거나 사비유학생을 막론하고 정권에서 소외된 6두품계열의 자제들이 많았습니다. 국가에서는 문화 수입의 이유 이외에도 방계귀족에 대한 반추방 반회유의 목적도 곁들여 있어서 그들의 도당유학을 장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들 학생은 체질상으로 골품체제에 순응하기 어려운 점이 많았으며, 또 그들이 당에서 수학한 교육내용도 반골품제적이었습니다. 유학하면서 배웠던 것은 과거제에 입각한 능력 본위의 인재 등용과 유교적인 정치이념이 그들이 당에서 배운 교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 중 가장 뛰어난 이로는 최치원과 최승우 최언위 등 3최로 불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중 최치원은 귀국하여 한때 한림학사의 관직을 지내고 10조의 시무책을 건의하여 과거제에 의한 인재의 등요 유교적인 정치이념의 실천 등 혁신정책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유랑생활로 일생을 마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학자들도 반신라적이었는 데, 최승우는 후백제에서 벼슬을 하고, 최언위는 고려의 신하가 된 사실에서 이점은 6두품 귀족들이 골품체제에 대한 반감, 진골 귀족에 대한 반항심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골품제도의 동요는 가속화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신라에서 고려로의 교체가 이루어질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지적 및 질문환영하며, 글을 더 나은 방향으로 쓰기 위한 충고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7개의 댓글

2020.01.18

로얄패밀리는 지들끼리 싸우고 임원급이 회사를 먹으려 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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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오스만유머

유독 신라 하대에 들어서는 지방과 다른 귀족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않고 당장 눈앞의 왕위와 권력에 대해서만 엄청나게 싸웠던 것 같습니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버려가면서요. 그러다가 항상 마지막에는 스스로 자살하거나 사촌에게 죽임을 당하곤 합니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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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키시구루

그르믄 권력다툼이 지방과 괴리된 채 경주와 그 근방에서만 일어난 건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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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오스만유머

아니요. 추후에 다루겠지만 대표적으로 청해진 장보고의 병사를 이용하여 왕위에 앉고자 기존 왕을 축출한 것을 보면 지방에서 유력한 가문 특히 무력을 이용하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으로 보여서 중앙 권력다툼에서 지방과 괴리되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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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오스만유머

더불어서 무력이 약한 사람이 왕위를 가지기 위해서 무력이 강한 세력을 찾아가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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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 되었습니다]
2020.01.18
@커뮤과몰입금지

이미지 2개는 간혹 물어보시는 분들이 계셔서 일부러 넣어보았습니다. 실제로 주변인들에게 먼저 자문을 구하고 해봤는데도 이렇게 말이 나오는 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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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신라의 녹읍제 부활이 후한 말 주목을 설치한 것 처럼 반란의 도화선이 된 건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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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오향왕족발

첫 굵게 나오는 반란의 도화선은 왕위 계승 때문이라고 보고있습니다. 제일 굵은 김헌창의 난은 반란을 일으키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고, 이 원인은 무열왕계의 종식이라고 생각하시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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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개인적으로 이 시기 가장 의문스러운것이 무엇이 급격하게 신라 중대의 왕권을 무너뜨렸냐? 입니다

신라 중대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한 성덕대왕(그 공덕을 기리며 사람까지 바쳐 만들었단 전설이 있는

에밀레종 주인공이고 그 종은 혜공왕때 완성되죠)이 정전제를 시행할 정도 위세를 떨치던 시기를 지나

그가 죽고 고작 30년도 안된 시점에서 혜공왕은 진골의 반란과 신대 중대를 이끈 무열왕통의 종말을 경험합니다

어린나이에 즉위했단 이유도 똑같이 신문왕의 경우 어린나이에 즉위했음에도 신라통일전쟁의 전공을 세운 공신들과

무관 진골들의 반란을 평정하며 왕권을 강화한 것에 비해 무기력하다 싶이 무너진 경우죠.

심지어 아버지 경덕왕의 경우도 왕권이 강력하여 본문처럼 한화정책을 실시했죠.

동시에 녹읍제 부활이란 조치를 두고 모순되기에 한화정책이 실패했단 학계 의견과 재정난을 타계를 위핸 방편으로

왕권약화가 아니라는 의견이 대립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찌하였건 신라 중대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한 성덕대왕 그리고 왕권강화책을 실시한 경덕왕을 지나

혜공왕이 즉위하자 신대 중대의 왕권은 대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왕조국가에서 일어나기 가장 어렵다는 최악의 상황인 왕의 혈통까지 단절되죠.

골품제상에서 무열왕계에 큰 결함이 있어서 부정된게 아님은 김헌창의 난과 그것이 진압된 이후에도

그 방계가 명주에서 호족으로 기득권을 인정받았음 봐도 무열왕계에 대한 존중은 분명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이 고작 30년 만에 이 모든게 송두리째 변했습니다.

혜공왕 시기에 대체 무슨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미스테리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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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오향왕족발

혜공왕시기에 대해서는 저도 상당히 궁금한 것이 많긴합니다.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에게 혜공왕이 암살당한 것과 왕권의 추락의 이유에 대해서는 혜공왕이 어렸을 때부터 흥청망청 노는 것과 술과 향락을 즐겼다는 것을 중점으로 두고 쓰고 있다는 것만 기억에 남네요. 그 이외의 이유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게 없어서 저도 많이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서 설명되어있는 논문이라던가 글이 발견이된다면 좋을텐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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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키시구루

이것에 대한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신문왕이 다른 진골(이미 신문왕때 왕족은 진골이니 성골로불러야할지애매하지만)견제하려고 키워놓은6두품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한계가있는것에 불만이 계속쌓여서왕족들권력분쟁에 편승해서 신라자체를전복해버리려는생각이 강해졌고 자기나라를 전복시키는데 필요한명분축적을위해서신최고위 통치자가 썩었다고기록한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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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닉네임은2

그럴 수 있다라는 생각도 드네요. 근데 삼국시대에 관한 기록이 거의 삼국사기를 읽고 공부하다보니까 유교의 입장에서 혜공왕을 시작으로 신라왕조가 썩었다고 만들어버리기 위해 이렇게 쓴 게 아닐지 라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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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키시구루

이게 더맞는해석같기도 하네... 어차피 나는비전공자 취미수준레밸이라 잘해봐야 그런방향으로볼수도있지정도니...

그리고 진골이 기존의 성골을 대체한 뒤로도 계속 진골이라고 하는거임??나는성골이라는게 신라왕족을 말하는거라고 생각해서 이게 좀햇갈리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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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닉네임은2

성골은 김씨 성 중에서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이들을 성골이라고 불렀고, 진골은 왕족이나 왕위에 앉을 수 없는 계열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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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키시구루

박석김로테로왕하다가 광개토때 김씨왕위세습으로로 고정되면서성골진골이 갈린거지 위로 올라가다보면 비슷비슷한거였네??ㅇㅋㅇ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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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닉네임은2

넹 그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근데 성골 진골을 나뉘게 된 이유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나오지 않았기에 그저 공통적으로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를 알려드린 것이라서 더 많은 것이 궁금하시다면 직접 찾아보시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제가 신라는 진흥왕의 영토확장 부분만 공부를 조금 했었어서 다른 부분은 많이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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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키시구루

고대사도좋지만 개인적으로는 독립운동사부터는진짜 국뽕 뽕맛오지게 맛볼수있어서전공자가 좀풀어줬으면하긴하는데 이정도시기역사를풀면 옳그떠경계에걸릴수있어서 내키면 한번풀어주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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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닉네임은2

지금 1년동안 잡고 고려사를 하고 있기에 만약에 고려사가 올해 9월 안으로 끝나면 제가 지금 전공하려고 하는 일제강점기 중추원을 풀어볼까 합니다. 독립운동사는 제가 조금 더 알아봐야하고 공부해야할게 많기에 섣부르게 손을 대었다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아 조심스럽습니다. 일단 고려사가 끝나는 대로 조금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아니면 특집으로라도 고려사를 잠깐 한달쉬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만 미친듯이 파고들어서 글을 한 번 써보겠습니다. 다만 제가 복무를 하고 있어서 6월 이후에나 가능할것같아 이점은 많이 죄송스럽습니다. 그전에도 시간이 생긴다면 정사판에 글을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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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키시구루

고려사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조선사 삼국시대에 비해 인기도 지식도 많이 없어서 알려드리고자 쓰고 있어요! 한 70부작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줄어들 수도 있고 늘어날 수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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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난신라후대는그게 제일웃기더라김헌창아빠 김주원이 비때문에 다리못건너서 즉위식못했다고 왕취소되고

왕될수있었는데 우천취소당한거라빡칠수있긴한데 그래도 무슨코메디도아니고 비왔으니 너 왕 ㄴㄴ 이러고

그원한이 거의3대걸처내려오는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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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닉네임은2

아무래도 부모가 왕이었다면 자신들도 그대로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었다는 것 때문에 문제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게다가 그의 아들이었던 김헌창은 자신의 아버지인 김주원이 왕위를 빼앗긴 이후에도 중앙정치에서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을 하다가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었습니다.

 

김주원이 상당한 불우했던 사람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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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9
@닉네임은2

그건 우회해서 쓴 것이고 실제로는 권력투쟁에서 밀렸다고 보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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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골품제의 유래는 뭡니까? 이런 제도가 세계적으로 자주 또는 종종 보이나요? 얼핏 듣기로 신라 외 고구려 백제 등에서도 골품제라는 이름만 없지 유사한 제도들이 있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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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남자간호사

제가 자세히는 알지 못해 말씀을 바로 드리지 못하는 이점 죄송하다고 먼저 말씀드립니다.

세계적으로는 이렇게 신분을 차별하는 것은 있었지만 완전히 제도화를 했던 곳은 제가 알기로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점은 자세하지 않아 제가 아는 한에서 말씀드립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분의 차별은 있었지만 똑같이 신라와 비슷하게 골품제 제도를 체계적으로 운영했다라는 것에 대한 기록이 없어 이렇다고 확실히 말씀은 못드리겠으나 그저 일개 저의 시각으로는 백제 및 고구려도 신라와 비슷하게 운영하지 않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백제의 대성8족의 존재 때문에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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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0
@남자간호사

고구려 제가회의가 국가정치회의에 낄수있는5개가문회의인5가회의에서 바뀐거고 그5가들중에서도 왕족왕비족이런식으로급이 나눠저있으니 비슷한거겠지... 백제도 유력가문으로8대성씨던가있었던걸로암...그리고 골품제생긴이유는 군장국가때 서로어는정도 세력차이는있었어도 서로어쩻든군장이었으니 맞먹었는데 실질적으로 약간약한세력군장이 쎈군장밑으로 복속하는과저에서 생긴게 골품제라고 보는걸로암니다. 좀세력이 많이큰놈은6두품많이약한놈은3두품이런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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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0
@닉네임은2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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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요즘 한능검 준비하는데 이부분이 제일 재밌떠라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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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8
@개나리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지만 한능검은 한달도 못가 준비하면 따는 자격증이라 관심이 사라질까 두렵습니다 흐그극

앞으로도 재밌는 게 많으니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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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9

골품제는 사실 가장 신뢰도 높은 추측으론 "인도"에서 들어왔다는 설이 있다

바르나(우리한테 익숙한 유럽식 표현으론 카스트)를 말하는 건데

 

농업혁명이 완벽하게 정착된 청동기시대 이후로 세계 그 어느 곳이나 계급제가 없던 곳은 없지만

그 중 가장 완벽한 신분계급제가 최초로 시행된 곳은 인도다

인도의 바르나는 수십개 "인종"의 혼합을 전부 일일이 다른 계급으로 지정한

상상못할 방대함을 이미 부처(고타마 싯다르타)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니고 있다

 

인도유럽어의 전파가 곧 코카소이드 인종의 전파와 동일한 경로임을 고려하면

이집트에서 시작된 (기원 전 6천년 전) 전파는 아랍을 거쳐 반으로 나뉘어 반은 서쪽, 반은 동쪽으로 갔고

동으로 간 이들이 바로 아리아인이라는 이름으로, 인도에 선주해 있던 수십가지 종족 (대체로 오스트로네시아 계열)을

찍어누르고 정복하는(기원 전 천몇백년 이전부터 기원전 몇십년까지 약 천몇백년에 걸쳐)

장대한 정벌전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아리아인종을 최상위 브라만에 놓고, 선주민들을 수드라와 바이샤에 놓고

복종하였거나 아리아와 혼혈을 거친 인종을 크샤트리아에 놓고

그 안에서 세부적으로 어느 부족 어느 성씨 어느 마을은 무슨 계급 하는 식으로 아주 촘촘하고 방대한 계급을 짜넣었다

 

이 계급은 곧 종교적인 탈을 뒤집어 써

수드라들은 전생에 좆같은 놈이어서 수드라로 태어난 거고, 수드라로서 멸시와 모욕을 견뎌내고 잘 복종하면 한 계급쯤 올라갈 수 있다

는 식의 적절한 희망고문을 섞은 윤회사상이라는 고삐를 부여했다

 

 

그리고, 모두 다 알다시피

한반도 남부는 한반도 전역에서 가장 먼저 인도와 교류가 "역사적으로 기록된" 지역이다

뭐, 허황옥이 진짜 인도인이 아니라는 추측은 우리나라 학계에선 정설에 가까운 반면

인도에선 오히려 기원전 3백년 전부터 기원 후 백년쯤 까지 한반도와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게 정설에 가깝다

어느나라가 더 역사적으로 옳다라는 말은 내가 할 말은 아니고

단지 한반도의 고대사는 유물로나 사서로나 남은게 없다보니

비교적 남은 게 많은 인도사 쪽이 좀 더 신뢰가 가는 게 사람 마음

 

하여튼 인도에선

지구과학적인 접근법(해류의 역사적 변화에 따르면 당시엔 동인도양 해류가 인도네시아반도를 관통해 한반도까지 올라왔단다)

유물적 접근법(인도 동부에는 한반도의 고대 유물과 비슷한 양식이 좀 있다. 우리나라엔 인도께 많이 안남았지만)

언어적 접근법(필수어휘, 즉 손 발, 숫자 처럼 절대 변하기 힘든 어휘가 아니라 전혀 쓰잘데없어 보이는 어휘에서 유사점이 있다)

등을 통해 고대 한반도가 특정 기간, 즉 해류와 인도네시아 중국의 국가사정으로 인해 물길이 열려있는 동안은

적절한 교류를 거쳤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는 인도와 지배과정이 흡사하다

북쪽에서 내려와 신라의 지배자가 된 김씨, 김알지는 아주 높은 확률로 유목민 출신인데

일본에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석씨나 한반도 토착 지배자인 박씨를 이기고 신라의 성골이 된 과정을 보면

 

금나라라서 김씨다 알타이라서 알이고 그게 김이다 소호금천이라 김이다 등등 여러 학설이 분분하지만

공통된 것은 모두 유목민이 뿌리라는 것을 반쯤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쪽에서 내려온 이민족 침입자가

남쪽에 살던 선주민족을 수백년에 걸쳐 야금야금 탄압하는 과정은

인도의 역사적 흐름과 아주 동일한 과정을 갖고 있다

 

인도와의 교류가 있던 없던

역사에선 대체로 환경과 배경이 비슷하면 결말도 비슷하게 가는 경향이 있다

인간 머리는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인데

반도라는 특성, 선주민이 수가 많고 강대하다는 특성, 북쪽에 길이 막혀 서로 도주가 안되고 끝을 봐야한다는 특성이 결합되면

대체로 비슷하게 치밀한 카스트와 종교적인 결합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신라 골품제의 탑이 성골聖骨인 것도 이러한 종교적 결합의 흔적이다

신라 왕은 대대로 왕王이라는 단어보다 다른 토착어휘를 써왔음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그 토착어휘가 대체로 족장의 느낌보단 대주술사의 냄새를 풍긴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성골이 뜻하는 바는 종교적 우수성을 뜻하는 단어가 된다

 

인도의 브라만 역시 실질적 무력과 실질적 권력은 대체로 크샤트리아에게 이양하고

명예로운 부분만을 브라만이 독점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신라 왕도 상대에는 대대로 권력이 쥐똥만했던 점을 고려해본다면 아주 비슷하다

신라의 왕권이 강해지는 건 마립간 칭호를 떼고 왕이 되면서부터로 보는데

그 쯤 부터 성골의 필요성이 감소되는 것이다

즉 종교적 지배력은 불교라는 국교에 미뤄주고, 실질적 지배력을 갖춘 자가 왕이 되는게 합당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뀐지 고작 8대만에 성골은 사멸하고 진골이 왕이 되게 되는 것

 

하지만 신라에서 불교를 국교로 채택한 이유에 대해서도 잘 이해를 해야 하는데

한반도의 불교는 윤회사상을 적극적으로 채용한 일파라는 점이다

신라의 입장에선 1,2,3품에게 여전히 "니들이 나중에 성골 진골로 태어나려면 노예생활을 잘해야 한다"고 가르칠 수 있다

다른 종교, 불교에서도 윤회를 최소한만 인정하는 다른 분파였다면 아마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와 백제가 불교 수입에 큰 거부감이 없던 것과 반대로

신라에선 이차돈이라는 걸출한 인재가 "내 목을 쳐서 흰 피가" 어쩌구 소리를 할 정도로 불교 인정에 소극적이었다

 

그 이유가 바로 골품제를 종교적으로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인데

이차돈이 바로 그 영감을 준 것이다

이차돈의 유언은 "내 목을 쳐서 흰 피가 뿜어지면 불교를 수용하시오"까지는 유명하지만 그 다음은 유명하지 않은데

그 다음 멘트가 바로 "내가 다시 태어나 불교를 숭양하는 새로운 신라의 승려가 될 것"이다

그 부분이 바로 결정적인 것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윤회가 되고 골품제를 그대로 밀고나갈 수 있기 때문에 불교를 적극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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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9
@살랑꼬리박이

굉장히 긴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중간에 성골이 8대 왕만에 성골이 사멸했다는 의견은 조금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사실상 성골 진골을 나눈 계기중 하나가 김씨 혈통의 왕위 세습인것도 하나의 관점인지라 성골의 종식이 내물왕이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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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9
@키시구루

시작기준이 너랑 나랑 다른가본데.....

내가 말한 카운트 기준은 굉장히 노멀하고 교과서적으로

 

지증왕부터 세서 8대만인 무열왕까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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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9
@살랑꼬리박이

ㅇㅎ 그렇군요. 이 글 혹시 어디 책에서 나온건지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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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9
@키시구루

1파트 바르나에 대한 이야기는 영국에서 출판된 노예사에 관한 책이랑 인도에서 출판된 고대사 책에서 본 기억이 있고

2파트 한반도와 인도의 고대교류사에 대한 이야기는 인도에서 출판된 고대의 불교 전파에 대한 논문 구글에 치면 무료로 풀린거 있고

4파트 이차돈에 대한 이야긴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하여튼 머리속에 남아있다

 

3파트는 내 평소의 역사에 대한 견해니 넘어가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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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9

골품제 나누기 시작한 게, 왕이 아들이 없어서 자기 딸 여왕 만들려고 우리 집안은 부처의 피가 흐르는 성골이다 주입시켜서 자기 딸을 최초로 여왕 만든거라고 들은 적이 있는데 이건 뭔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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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9
@깨우치다

현재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것에 있어서는 거의 추측 밖에 없습니다 확실한 기록이 없어서요. 그 말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진평왕에서 자식이 아들이 없어서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나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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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0

신라사에 있어 6두품이 확실한 인물은, 경덕왕대 작성된 백지묵서화엄경사경 발문의 동지 대사 1인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근래에는 낭혜화상비의 득난 조차도 6두품이 아니라, 진골과 6두품 사이의 새로운 골품이라는 견해가 나오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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