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독일 근현대 산책] 10. 1848년 「2월 혁명」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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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프랑스의 1848년 2월 혁명을 간략히 소개하고 독일의 1848년 3월 혁명으로 넘어가려 했으나 분량조절의 실패로 프랑스 2월 혁명이 이렇듯 길어지게 되었네요.

 

 

 

 

이렇듯 7월 왕정은 삐거덕 거렸지만, 프랑스의 산업은 차츰 발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노르망디를 비롯한 북프랑스 지방, 리옹·루아르를 비롯한 동프랑스 지방에서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습니다. 루아르의 주도 생테티엔은 1831년에 고작 16천명이었던 인구가 10년만인 1840년에는 54천명으로 훌쩍 증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7월 왕정이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근대 산업 사회로 이행하는 이 시대를 지탱하기에는 힘에 부쳤습니다. 전술했듯이 산업 자본가들은 7월 왕정이 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 수립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점차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또 굶주림과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노동 계급 역시 7월 왕정에 깊은 불신과 실망을 갖게 되었죠. 이러한 불만은 점차 쌓이고 쌓여, 7월 왕정의 토대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18311121일에는 리옹 지방에서 대대적인 노동자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산업 규모에 비하여 터무니없이 적은 임금을 받던 리옹의 노동자들이 자본가들과 민주적·평화적으로 합의하여 최저임금을 책정했으나, 일부 악덕 자본가들이 합의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7월 왕정리옹 사건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 문제를 공정히 해결하지 않고 군대를 동원한 무자비한 진압으로 해결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겪으면서 상처를 입은 노동 계급은, 18326월 봉기가 실패하면서 대신 신문·잡지를 이용한 선전과 선동으로 방향을 선회한 공화파의 영향을 받으면서 반정부 성향을 띠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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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옹 사건의 무자비한 진압을 묘사한 그림.>

 

 

 

 

이렇게 반정부 운동이 활력을 얻어가자 위협을 느낀 7월 왕정18344월 초,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을 선포했습니다. 이에 공화파의 영향을 받은 리옹의 노동자들이 분노하면서 492차 노동자 봉기를 일으켰고, 여기에 감명을 받은 파리 시민들도 413일에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습니다. 특히 파리에서의 봉기는 진압을 이끌던 육군 대위가 어딘가에서 날아온 총탄에 부상을 당하자 진압군에 의해 잔인한 복수극이 벌어지면서 다수의 사망자와 강간 피해자를 낳았습니다. 특히 봉기에 참여한 사람들 뿐 아니라 봉기와 전혀 관련이 없던 주변 거주민까지 살해당한 1834414일의 이 비극을 트랑스노냉 가의 학살(Le Massacre de la rue Transnonain)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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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랑스노냉 가의 학살 사건을 묘사한 오노레 도미에의 그림. 오노레 도미에는 고통받고 소외당한 민중의 삶을 묘사하는데 진력했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 각기 다른 이유로 7월 왕정에 실망한 산업 자본가들과 노동 계급은 젊은 정치인 아돌프 티에르(1797~1877)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특히 티에르는 선거권의 확대를 주장해 소외받은 노동 계급의 지지를 이끌어 냈으며, 대외적으로는 일찍 산업화를 시작한 영국에 맞서 프랑스 산업 자본가를 보호하기 위한 외교 정책을 펼침으로써 산업 자본가들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티에르의 너무 강경한 외교 정책은 여러모로 당시 프랑스의 사정에는 무리인 것이었고, 내부적으로는 노동 계급과 산업 자본가의 성장을 경계한 대지주들과 보수 세력의 공격을 받으면서 티에르는 두 번이나 내각을 꾸렸지만 전부 몇 개월 만에 실각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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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티에르. 이 시기에는 아직 큰 힘을 얻지 못한 정치인이었지만, 결국 프랑스 제 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까지 되었다.>

 

 

 

 

티에르가 실각하고 뒤를 이은 루이-마티외 몰레 백작(1781~1855)의 내각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낸 정치인은 프랑수아 기조(1787~1874)였습니다. 명문 소르본 대학의 역사학 교수였던 기조는, 본래 샤를 10세의 전제 왕정에 대항하던 사람이었으나 7월 왕정이 수립되자 철저한 보수파로 돌아선 바 있습니다. 기조는 전제 정치를 실현하려는 시도만큼이나 혁명을 통해 공화국을 건설하려는 시도 역시 혐오하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기조는 피와 화약 냄새로 물든 혁명보다는 입헌 군주제 하에서 질서가 유지되고 평화로운 상태가 계속되기를 바랐습니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대외 정책에서도 드러나는데, 그는 최대한 전쟁이나 외국과의 분쟁을 피하고 유화적인 외교를 펼치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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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마티외 몰레 백작. 기조와 정치적 파트너로 출발했으나 나중에는 극심한 의견 대립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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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기조.>

 

 

 

 

18401117일에 행해진 기조의 연설은 그의 성향이 어떠한지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우리나라가 영토를 정복해야 한다던가,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던가, 대담한 보복을 가해야 한다던가하는 말 따위는 하지 맙시다. 프랑스가 번영하고, 계속해서 자유롭고 부유하고 평화롭고 현명하면 그만이지 불평할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프랑스가 기조의 말마따나 정말로 번영하고, 자유롭고, 부유하고, 평화롭고, 현명한 나라였다면 기조처럼 현상을 유지하려는 것이 옳은 정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의 프랑스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죠.

 

 

 

 

1847918일 마침내 기조 내각이 성립되었을 때, 프랑스 사회의 가장 큰 화두는 선거권 확대의 문제였습니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의식적으로 성장한 노동 계급과, 자신들이 소유한 부에 걸맞은 권력을 원했던 산업 자본가들은 대지주의 전유물이었던 선거권이 확대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기조는 선거권의 확대란 곧 사회 혼란의 확대와 마찬가지라고 인식하고 (토지)재산에 근거한 제한 선거제도를 유지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기조는 그의 유명한 발언,

 

노동과 저축을 통해서 부자가 되면 당신도 투표할 수 있다(Enrichissez-vous par le travail et par l'épargne et vous deviendrez électeurs.).

 

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선거권 확대를 통한 사회 개혁을 추구하려 들지 말고, 체제에 순종하고 그 속에서 만족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7개의 댓글

2019.12.29

아조씨 넘모 좋아ㅠㅠ 근데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몰아서 읽을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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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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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9

낙찌 아저씨 고생하네요

힘내시고 나올때마다 계속보고있으니깐 연중ㄴ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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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9

7월 왕정 내부에서도 이뤄지는 정치적인 대립 흥미롭네요. 특히 티에르에 대한 설명은 처음듣다보니 엄청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이런 강경파들의 움직임이 노동자계급을 더욱 활발하게 이끌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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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9

항상 잘보고있습니다. 빠른연재부탁드립니다.

일해라 핫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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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30

프랑스 혁명이후 나폴레옹의 집권, 그리고 보불전쟁 이후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프랑스 제3 공화국 성립 사이에 이런 일들이 있었네요.

관심없으면 몰랐을 역사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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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살짝 프랑스사 산책이 되버렸지만ㅋㅋ수고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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