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국가사회주의 시대의 과학 ①

 

 

 

 

독일은 과학기술 강국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독일은 획기적인 무기를 선보이며 적을 놀라게 했는데, 발전된 과학기술은 독일이 무려 7년 동안 영국·미국·소련에 맞서 싸울 수 있게 한 원동력 중 하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국가사회주의 시대에 독일의 과학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합시다.

 

 

 

 

도이치 물리학의 발호와 몰락

 

1933년 나치는 직업공무원재건법을 도입하고 공직과 대학에서 유대인을 추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수많은 유대계 지식인들이 독일을 등지고 해외로 떠나기 시작했는데, 이를 절호의 기회로 삼아 학계의 주류를 차지하려는 심산을 가진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도이치 물리학의 신봉자들이었습니다.

 

도이치 물리학계는 원래 제 1차 세계대전과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을 겪으면서 영국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된 독일인 물리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습니다. 파스퇴르의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말마따나 민족주의로 무장한 이들은 과학계에서 영어를 퇴출시키고 독일어 사용을 우월시하는(예컨대 이들의 주장에 의해 X선은 뢴트겐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필리프 레나르트.jpg

<도이치 물리학의 아버지 필리프 레나르트. 1905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요하네스 슈타르크.jpg

<현대 물리학 배척의 주동자 요하네스 슈타르크. 191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당시 독일은 비스마르크 시대부터 정교수는 실험물리학자가, 부교수는 이론물리학자가 맡는 것이 관례였고 도이치 물리학계 역시 실험물리학자가 다수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1926년에는 에르빈 슈뢰딩거가 슈뢰딩거 파동방정식을, 그리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와 닐스 보어 등이 코펜하겐 해석을 제창하면서 물리학은 일대 전환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대격변은 에테르 같은 고전 물리학 개념을 퇴색시켰으며 이론물리학이 실험물리학을 밀어내고 물리학을 주도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때문에 실험물리학자들이 주축이 된 도이치 물리학 신봉자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대격변을 이끌어낸 아인슈타인과 슈뢰딩거조차 의문을 가졌던 현대 물리학에 대하여 고전 물리학에 경도된 실험물리학자 출신들이 반감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그리하여 도이치 물리학자들은 현대 물리학을 부정하기 위한 방법을 갈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도입된 것이 바로 직업공무원재건법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현대 물리학을 주도하던 그 이름도 쟁쟁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한스 베테, 리제 마이트너, 에드워드 텔러, 닐스 보어, 에르빈 슈뢰딩거, 볼프강 파울리 등의 과학자들은 유대계였기 때문에 나치 정권 하에서 박해를 받아 이민이나 망명길에 오르던 상황이었습니다. 도이치 물리학자들은 이 틈을 노렸습니다. 그동안 물리학을 주도하던 현대 물리학은 유대인의 물리학이라면서 비난을 가해 반사이익을 누리고자 한 것이죠. 이들의 압력에 의해 독일에서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은 유대 정신에 오염됐다는 오명을 써야 했습니다. 도이치 물리학자들의 공격은 점점 도를 넘어, 이제는 아예 혈통 자체도 상관없이 현대 물리학 연구자는 모두 유대인이라고 몰아가는 웃지 못 할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가장 가관이었던 것은 그야말로 순수 독일인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마저 백색 유대인이라며 비난했던 일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처음에는 도이치 물리학을 반겼던 골수 반유대주의자들인 SS조차도 도이치 물리학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치는 도이치 물리학자들이 행하는 소위 유대 물리학에 대한 공격이 사실은 현대 물리학 전반의 몰락을 목표로 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고, SS의 수장인 힘러가 직접 하이젠베르크를 두둔하며 도이치 물리학을 점차 기피하게 되었습니다. 나치는 유대인의 추방을 원했지만 현대 물리학의 추방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석유 등의 필수 연료가 부족하다 못해 아예 없는 독일의 상황 때문에 나치는 원자력 에너지의 이용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현대 물리학자들은 독일에 꼭 필요한 이들이었습니다. 원자력 에너지 개발을 위한 우란 프로옉트가 가동되면서 나치 정부는 현대 물리학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지지기반을 상실한 도이치 물리학은 학계에서 퇴장해야 했습니다. 이로써 정치와 야합해 진리를 뒤바꾸려던 20세기 과학의 가장 어이없는 촌극은 막을 내렸던 것입니다.

 

한편 이 같은 상황이 비단 과학계에서만 벌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법학계에서는 유대인이었던 한스 켈젠이 제창한 법실증주의에 대한 비난이 이루어졌습니다. 유대인 법학자들이 모두 쫓겨난 키일 대학에서 반대급부로 부상한 재야 법학자들에 의해 형성된 키일 학파는 법실증주의를 멀리하고 건전한 국민감정에 기반한 법철학을 논했습니다. (키일 학파의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 적형법의 사상적 토대로 남아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자세한 것은 이전 글 참조 https://www.dogdrip.net/220522816)

 

같은 시기 소련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농업학자 겸 생물학자인 트로핌 리셴코가 자신의 유전이론에 반대하고 멘델-모건 유전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을 자본주의자로 몰아 숙청한 것입니다. 리셴코의 엉터리 이론으로 농업정책이 실패한 탓에 소련은 8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식량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2개의 댓글

2019.09.19

??: 마인퓌러! 깁미 어 스트렝스으으으으!!

https://youtu.be/eJaWZfReMDQ?t=435

0
2019.09.19
@도희

한국 서버가 없어질 때 피눈물을 흘리면서 접었습니다...

0
2019.09.19

독일이 전시때 핵폭탄 개발할확률 vs 오펜하이머 숙취로시달려서 맨해튼프로젝트 미뤄지기

0
2019.09.19
@Exodus

저는 브란덴부르크가의 기적을 고르겠습니다

0
2019.09.19
@Volksgemeinschaft

Nein nein nein Steiner korps wird kommen

0
2019.09.19
@Exodus

Mit dem Angriff Steiners wird das alles in Ordnung kommen

0
2019.09.20

켈센의 실증주의가 나찌에게 찍혔었다는 건 몰랐음

실증주의가 법과 도덕을 분리시킴에 있어서 전체주의 국가를 가능하게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걍 유태인이라고 멕인건가

여튼 재밌는 글 많이 고마워요

0
2019.09.20
@최**

사실 이 부분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되는데, 형식적 법치주의는 나치 법에서 핵심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나치는 권력을 잡기까지 바이마르 공화국법의 허점을 파고들어 겉으로는 합법적인 과정을 거쳤는데, 이를 두고 '나치의 집권은 형식적 법치주의의 소산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형식적 법치주의는 나치 법의 핵심사상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본문에 제시한 링크는 제가 과거 썼던 글인데 나치 법철학의 기초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치는 법체계 속에 내재된 논리적 완결성의 추구를 통해 모든 것을 법전 위에서 해결코자 한 켈젠학파를 비판하고, 법원으로써 법전보다 상위에 있는 초월적 법감정인 '건전한 국민감정'을 제시해 정의와 법을 합치시키고자 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켈젠은 무조건 법대로 처리하고자 했다면 나치는 사회통념, 양해행동, 양심, 정의를 더 높게 친 것이죠.

0
2019.09.20
@최**

나치 법학자들은 켈젠 학파의 이론을 '유대 정신Jüdischen Geist에 의한 독일 법학의 오염'이라고 불렀는데, 말씀하셨듯이 법과 도덕의 분리를 꾀하는 비열하고 상인적인 유대인의 특성이 드러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켈젠 학파가 죄다 유대인이었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참 웃긴 일이지만 그 시절엔 그랬습니다. 무학한 노동자부터 최고의 지성인들까지도 자기와 반대되는 의견은 덮어놓고 유대적이라고 못박아 비난했으니까요.

0
2019.09.20
@최**

'나치 법의 특징은 형식적 법치주의다'라는 잘못된 주장이 널리 퍼져있기에 찾아보니 고교 교과서에도 그렇게 서술되어 있더군요. 나치 시절 '황제법학자'라고 불렸던 카알 슈미트가 켈젠과 결코 화해할 수 없는 이론을 주장했다는 것만 알아도 그리 말할 수는 없을텐데..

0
2019.09.20
@최**

'그렇다면 왜 도덕과 정의를 중시하는 나치 법 하에서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이 나올 수 있는데, 이건 처음부터 그들이 생각했던 정의와 지금의 정의가 달랐다는 것을 간과해서 생기는 질문입니다. 당대 독일인들에게 있어 '정의로운 세상'은 '유대인을 깨끗이 몰아내고 독일인의 생활공간을 확장할 수 있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치는 어디까지나 정의를 위해 봉사했던 셈이죠. 오늘날이나 그 시대 외국인의 시각으로는 극악무도한 만행일 뿐이었지만 말입니다.

 

한편 나치에 대한 반성으로써 전후 구스타프 라드브루흐가 내놨던 정의와 도덕에 입각해 법을 판단하자는 '라드브루흐 공식' 역시 이처럼 아예 정의나 도덕 자체가 비뚤어졌을 경우에 전혀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바 있습니다. 애초에 정의와 도덕이란게 확실히 정의내릴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0
2019.09.22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lists/?id=nazi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나치 갤러리로 가시는걸 추천드리네요

0
2019.09.22
@lambnatiom

관심 없으면 읽지 말던가 굳이 열심히 글 쓴 사람한테 딴데 가라는건 무슨 심보?

0
2019.09.22
@Volksgemeinschaft

비아냥거리는게 아니라 관심있을거 같아서 추천한거임

0
2019.09.22
@lambnatiom

추천해주신건 고맙지만 디시는 지저분해서 안 가요.

0
2019.09.22

나치를 연구하는건 좋아서 연구하는거? 아니면 일이라서?

여튼 흥미롭게 잘보고있음.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0
2019.09.22
@tdtd

좋아서하는거죠 뭐...원래 이과인데요

0
2019.09.22
@Volksgemeinschaft

한국은 전체주의 국가다 라는 명제는 어떻게생각하심?

0
2019.09.22
@tdtd

한국이란 좌파에게는 극우파쇼국가고 우파에게는 마르크스주의국가인 곳입니다.

0
2019.09.22
@Volksgemeinschaft

사실 전 그런 상대적인 관점은 유희거리이상 되지 못한다 생각함다. 그래도 역사속의 전체주의국가들, 사회주의국가들의 특성을 분석하고 이해하다보면 현대의 국가들이 연합국 형태로써 맹목적으로 증오하는 체제를 보다 명확히 회피하고 역사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거라 봐요

그런점에 있어서 한국정부와 한국사회의 전체주의적인 면모를, 나치나 구 일본제국으로부터 발견하고 발본색원해야한다고 생각함다. 어떠심?

0
2019.09.22
@tdtd

전체주의나 사회주의는 역사의 과오이며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군요. 저는 그동안 읽을거리판에 글을 쓰면서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자'는 생각으로 주관적인 정치관은 배제하려 애썼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섣불리 말씀드리고 싶진 않네요.

 

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그동안 주어진 정보가 너무 적었다는 겁니다. 나치를 반공전체주의의 대명사격으로 들먹이면서도 정작 무슨 정책을 시행했는지, 그 사상적 기반은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죠. 일단 무얼 알아야 우리도 성찰이든 뭐든 하지 않겠나요?

0
2019.09.22
@Volksgemeinschaft

놉놉. 제가 과오라고 정의한건 "현대의 국가들이 연합국 형태로써 맹목적으로 증오하는 체제" 임. 여튼 뭐든간에 알아야 성찰한다는 베이스는 서로 동의하는게 확인된듯...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1208 [역사] 송파장과 가락시장 1 Alcaraz 3 4 시간 전
1207 [역사] 미국인의 시적인 중지 2 K1A1 11 2 일 전
1206 [역사] 역사학자: 드래곤볼은 일본 제국주의사관 만화 16 세기노비추적꾼 13 5 일 전
1205 [역사] 애니메이션 지도로 보는 고려거란전쟁 6 FishAndMaps 6 15 일 전
1204 [역사] [English] 지도로 보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3 FishAndMaps 4 20 일 전
1203 [역사] 지도로 보는 우크라이나 전쟁 2년 동안의 기록 9 FishAndMaps 12 22 일 전
1202 [역사] [2차 고당전쟁] 9. 연개소문 최대의 승첩 (完) 3 bebackin 5 27 일 전
1201 [역사] [2차 고당전쟁] 8. 태산봉선(泰山封禪) 3 bebackin 4 28 일 전
1200 [역사]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이야기 3 에벰베 6 29 일 전
1199 [역사] [2차 고당전쟁] 7. 선택과 집중 bebackin 4 29 일 전
1198 [역사] [2차 고당전쟁] 6. 고구려의 ‘이일대로’ 2 bebackin 4 2024.02.27
1197 [역사] [2차 고당전쟁] 5. 예고된 변곡점 1 bebackin 3 2024.02.26
1196 [역사] [2차 고당전쟁] 4. 침공군의 진격 1 bebackin 3 2024.02.25
1195 [역사] [2차 고당전쟁] 3. 몽골리아의 각축 1 bebackin 5 2024.02.24
1194 [역사] [2차 고당전쟁] 2. 당나라의 ‘수군혁명’ 4 bebackin 9 2024.02.23
1193 [역사] [2차 고당전쟁] 1. 서설 & 참고문헌 목록 2 bebackin 6 2024.02.23
1192 [역사]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 애니메이션 맵 14 FishAndMaps 5 2024.02.16
1191 [역사] 비트코인 화폐론, 나무위키를 곁들인. 23 불타는밀밭 14 2024.02.13
1190 [역사] 역사) 한산, 망국을 막아낸 전투. 5 2NAUwU 7 2024.01.30
1189 [역사]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열전 시리즈 1부 5 식별불해 6 2024.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