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중국의 백년국치에 대한 수정주의적 견해 - 중국판 식근론

송재윤 著 <슬픈 중국: 인민민주독재 1948-1964> (까치글방, 2020년) 제 12장

 

(전략)

 

백년국치란, 제 1차 아편전쟁 이후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의 모든 인민이 1949년 중국공산당에 의해서 해방되기 전까지 겪어야 했던 수치스러운 '굴욕의 역사'를 의미한다. 중국인들은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백년국치의 역사를 듣고 자란다. (...) 중국인들의 현대사는 1840년대의 아편전쟁에서 시작해서 1940년대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나아가는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관료 자본주의 투쟁의 과정이다. 중국공산당은 그 100년의 역사를 제국주의의 도전에 대한 중화민족의 응전이라는 도식으로 간단히 설명한다. 바로 이 역사관이 오늘날 대다수 중국인의 의식을 지배하는 거대서사이다. 

 

(...) 중국은 21세기 현실에서도 여전히 외부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최근까지 인권, 자유, 민주주의 등 이른바 '보편가치'를 들고 나와서 중국식 사회주의를 비판하며, 혼란과 분열을 획책한다. 때문에 모든 중국 인민은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한다. 

 

중화민족주의의 밑바탕에는 이런 반제국주의, 반외세 자주독립의 열망이 깔려 있다. (...)

 

(중략)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청나라의 몰락과 공산당 집권 사이 38년의 세월은 분열, 전쟁, 학살, 부패로 점철된 혼란기로 인식된다. 그런 통념에 도전하면서 디쾨터 교수는 마오가 집권하기 이전인 1900년부터 1949년까지의 중국을 '개방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실제로 그 시기에 중국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해외로 이주했고, 30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중국에 들어와서 살고 있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서구의 선진 국가들을 모델로 삼아서 원초적인 근대 국가의 토대를 닦았다. 정치 면에서는 법치가 도입되고 국민의 기본권이 확장되었다. 중국은 세계로, 세계는 중국으로 연결된 해양 문명의 시대였다. 지식인들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 다양한 사상을 탐구하고 실험하는 지적 자유를 꽤나 누렸다. 아울러 근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기초가 닦이면서 경제는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갔다. (Frank Dikötter, The Age of Openness: China before Mao, Hong Kong University Press, 2008)

 

(중략)

 

아편전쟁 이후 상하이, 톈진, 광저우 등의 외국 조차지는 급속하게 번화한 서구적 근대 도시로 탈바꿈했다. 1930-1940년대쯤이 되면 중국에는 이미 수많은 외국인들이 체류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부동산을 매입할 수 있었고, 청일전쟁 이후에는 사업체를 운영할 수도 있었다. 특히 근대적 하수도, 항만시설 및 통신망을 갖춘 상하이에는 병원, 은행, 학교 등 다양한 기관이 들어서면서 외국인 인구가 급증했다. 외국인의 유입으로 상하이는 물론 베이징, 톈진, 다롄, 광저우 등의 연해 지역과 남방의 대도시들은 점차 국제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갔다. (Frank Dikötter, The Tragedy of LIberation: A History of the Chinese Revolution 1945-1957, Bloomsbury Press, 2013, chapter 6)

 

외국인 인구의 급증을 흔히 일방적인 제국주의적 수탈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19세기 중엽 이후 중국 각 지역의 상인들은 외국인 기업가들을 통해서 톡톡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자유 무역이 중국 상인들에게도 부를 쌓을 기회를 제공했다. 중국인들 역시 외국 자본의 유입을 통해서 새로운 경제성장의 동력을 개발했다. 외국으로 수출하는 품목의 70퍼센트 이상을 중국인 지역의 상인들이 담당했다는 연구도 있다. (Philip Richardson, Economic Change in China, c. 1800-195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chapter 4) (...)

 

(중략)

 

왜, 대체 왜 중공지도부는 그토록 잔인한 방법으로 외국인들을 몰아내려고 했을까? 그 수많은 외국인 인력을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할 수 없었을까? (...)

 

(중략)

 

(...) [마오쩌둥의] 미국관에 해답이 있다. 

 

그래, 미국에는 과학도 있고, 기술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자본가들이 독차지할 뿐 인민의 수중에는 없다. 그들은 과학과 기술을 이용해서 국내의 인민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며,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고 외국 인민들을 학살한다. 미국에는 '민주 정치'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의 민주 정치는 부르주아 독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중략)

고난을 겪는다고 해도 무슨 상관이리요. 봉쇄하라! (...)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 중국인들이 고난을 두려워할 텐가? (...)

(...) 그들은 패배했다. 이제 공격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가 한다. 그들은 이제 모두 끝날 것이다. 그래, 여전히 우리에게는 문제가 남아 있다. 봉쇄, 실업, 기근, 인플레이션 등의 어려움이 놓여 잇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 지난 (...) 고난을 이기며 승리했다. 어째서 우리가 오늘날의 고난을 극복할 수 없겠는가? 어찌 미국 없이 살아갈 수 없겠는가? 

(후략)

 - 마오쩌둥, '떠나라, 스튜어트!', 1949년 8월 18일 -

 

(...) 마오쩌둥은 서구 자본주의 국가, 특히 미국에 대한 증오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국을 보는 시각도 편향적이지만, 미국 문명에 대한 그의 지식은 단편적이고 얄팍해 보인다. (...) 스튜어트는 한평생 중국을 위해서 헌신한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을 '문화 침략의 충실한 대리인'이라며 조롱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미제'에 대한 적개심을 미국인 모두에게 확장시키는 마오쩌둥의 심리는 중요한 탐구 대상이다. (...)

 

(...) 그러나 중국의 현대사는 제국주의 수탈의 관점에서만 해석될 수 없다. 19세기 중엽 이래 중국은 서구의 과학기술과 정치 사상을 흡수하면서 근대문명의 수혜자로 거듭났다. 무술변법의 입헌주의, 신해혁명의 공화주의, 5.4 운동의 자유주의 및 입헌주의는 모두 서구에서 수입된 정치 사상이었다. 근현대 중국의 지식인들은 유럽과 미국의 선진 문명의 신사상을 학습해서 '계몽된 근대인'으로 거듭났다. 단적으로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 역시 19세기 서구에서 만들어진 이념이었다. 서양의 근대문명 없이는 오늘날 사회주의 중국 또한 없다. 

 

(중략)

 

마오쩌둥은 서양 문명에 대해서는 지극히 피상적인 이해밖에 없었는데, 전통의 지혜는 철저히 부정했다. 그런 마오쩌둥이 중국을 지배했기 때문에 대기근과 문화혁명의 폐해가 발생했다. (...) (송재윤, '[원로 철학자를 찾아서] 윌리엄 시어도어 드 바리', 오늘의 동양사상 제 5호 (2001), 70-87쪽)

 

마오쩌둥의 반외세 고립주의 노선으로 중국은 '닫힌 대륙'이 되었다. 반면 대륙으로 가는 육로가 막힌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바다를 타고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열린 섬'의 역사이다. (...) 우리가 계속 살펴볼 '닫힌 대륙'의 역사는 결단코 순탄하지 않았다. 

ㅡㅡㅡㅡ

식근론 관해서 거울치료 좀 받으라고 첨부했더니만 '덜 읽을 거리 판'에 보내버리네. 그런 거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오늘날 중공의 전체주의, 쇼비니즘 까기 좋아하는 개드립 유저들이니 식근론은 저주하더라도 위 내용에는 거부감이 덜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중공의 중화민족주의 사관은 비판하면서 한국의 식민지근대화론을 논리적으로 부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중국판 식근론'은 어그로성 제목이기도 하지만 사실 꽤 정확한 수식어이기도 하다. 식근론은 개드리퍼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시혜론이나 침략 부정론 수준이 아니다. 물론 위안부와 징용공으로 대표되는 인적·물적 강탈이 양적·질적으로 크게 과장되었다는 점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일본 식민지 시기를 단절, 좌절, 저항의 시대가 아니라 전환, 적응, 축적의 시기로 파악하겠다는 인식상의 전환이 식근론의 기저를 이루고 있다. 영어로 말하자면 기존의 negative - '나쁘다'란 뉘앙스보다도 '특징이 부재(不在)하다'는 의미를 담아 - 한 사관에서 그와 반대되는 positive한 사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러면 너는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이 다 옳다는 것이냐! 라고 한다면 그렇지는 않은데, 대개는 엉뚱한 허수아비 치기를 한다는 말이지. 더 자세한 건 '덜 읽을 거리 판'에....

그리고 '덜 읽을 거리 판'이라고 해서 보니 되려 흥미로운 글이 많이 올라와 있더라.
가장 최근에는 '다주택자가 많아져야하는 이유(배아픈게 단점)'( https://www.dogdrip.net/361012377 )가 있고,
작년 의사 파업 관련한 글도 몇 개. ( https://www.dogdrip.net/281772083 , https://www.dogdrip.net/273986268 , https://www.dogdrip.net/273905323 ) 읽을 거리 판에 남아있는 글이랑 별반 다를 바 없는데 어째서 어떤 건 추천을 수십 개씩 받고 어떤 건 내려가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

9개의 댓글

난 요즘들어 마오쩌둥 미국관 첫문장이 맞는말 아닌가 싶은 생각이듦...

0
@응급환자우선입니다

첫 문장의 자본가라는 단어를 공산당으로 치환해도 틀리지 않다는 게 아이러니하지

4
2021.11.16

청이 서양한테 당한건 그냥 양아치가 더 쎈 양아치한테 줘털린거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보임

 

병자호란때 좆같은 핑계로 조선 쳐들어와서 남의나라 왕 무릎꿇린건 괜찮고 아편 팔아먹으려 전쟁한건 안 괜찮냐ㅋㅋ그거나 그거나 쎈놈이 약한놈한테 지랄하는건 도긴개긴인듯

3
2021.11.16

중국이 이 놈 저 놈한테 털리기는 했어도 한국처럼 아예 지들 정부가 없는 형편은 아니었잖아. 당연히 서구와 상호작용하면서 근대화가 된건 맞는데 그걸 '식민지여서'(상해 홍콩 이런건 중국땅에 비하면 새발의 피도 안되고) 근대화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 일본이 만약 조선왕조 살려 놓은 상태에서 조선과 교류(든 교역을 가장한 착취든)하며 조선이 근대화되었어 봐라. 지금처럼 일본 욕만 하진 않을껄?

5
2021.11.16

한국이랑은 상황이 다른 것 같은데

0
2021.11.16

거울요법은 잘 받았고 침략부정론 수준이 아니라는 식근론과 대중의 오해가 어디서 비롯됐는지에 대한 생각도 써보면 좋을듯

1
@오늘저녁

여기랑 다른 곳에 또 같이 올렸을 때 반응으로 미뤄보면, 한국 대중이 맹아/수탈론 vs. 시혜론의 흑백논리 프레임 안에서 민족적 자존심과 을 보존하기 위해 온갖 논리적, 수사적 기교를 부리는 수준에서 머무르는 이상 해법은 없어 보임.

0

한국은 식민지로써 식민정부의 주도로 근대적 행정체계와 자본이 이식되었지만, 중국은 온갖 불평등조약과 차관으로 인한 외세의 경제자주권에 대한 심각한 간섭이 있었어도 중화민국이라는 자신들의 국가와 정부의 주도로 근대화가 이루어졌음. 그래서 한국과 중국을 같은선상에 놓을 수 없음.

3
2021.11.18

피잘 ㅎㅇ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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