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스라엘이 기원하기 직전 고대 근동 세계에 관하여

이스라엘의 역사가 태동했던 시기는 인류의 역사에서는 그리 초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다. 이미 기원전 8천년대의 경우 기초적인 정착 사회가 시작되고 있었으며, 기원전 4~3천년대에 이르러서는 도시와 문명이 화려하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아브라함이 탄생하기 수천년 전부터 이미 성경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마을이나 도시가 형성되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기원전 2천년대 전반. 아브라함이 역사에 출현했을 것이라고 알려진 이 때를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원한 시대로 볼 수 있다. 

 

반유목민족들의 팔레스타인 이주 사건이 이 무렵 발생했고 아브라함의 무리도 이중에 끼어 있었을 것이라 예측할 수 있다. 그가 정확히 아브라함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정확한건 이스라엘의 선조의 이동이 있었다는건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를 민족의 역사의 시작이라고는 볼 수 없다. 이스라엘이 민족적 정체성을 띄고서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3세기에 이르러서야 이스라엘이라 불렸던 한 민족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는 고고학적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대 오리엔트>   

기원전 2000~ 1750의 고대 오리엔트

 

  이 시기는 메소포타미아 평원의 대부분을 우르 제 3왕조가 평정하고서 찬란한 수메르 문명을 부흥시켰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왕조도 오래 가지 못하고서 멸망한다. 그 이후 이렇다할 강자의 출현은 없었고 각 지방 세력의 피튀기는 각축전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우르의 권력은 중앙집권화된적이 없었는데 이는 각 지방의 군주들은 도시에 대하여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르 제 3왕조의 마지막 왕인 Ibbi-sin은 힘을 대부분 상실하게 된다. 

 기원전 1950년경 동부의 엘람인들이 우르를 점령하고 입비신왕을 끌고감으로써 우르 제 3왕조는 끝났고 이후 우르는 두번다시 강대국으로 부상하지 못하게된다. 

 

 우르 제 3왕조가 망하고서 군소국가들이 범람한다. 하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신과 라르사가 가장 세력이 강했으며, 전자는 이쉬비 이라에 의해 후자는 나플라눔이란 사람에 의해 창건되었다. 두 도시의 지도자는 구약에서 말하는 ‘아모리족’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신과 라르사의 경쟁이 과열됨에 따라 주변 국가들은 힘을 기를 수 있었고, 그중에는 ‘바빌로니아’라는 국가도 소속해있었다. 바빌로니아 제1왕조는 기원전 1830년경 수무 아붐이란 인물을 따라 아모리족에 의한 국가로 탄생했다. 이들은 이신과 간헐적인 충돌이 있었다. 

 

 이 시기에 두개의 법전이 탄생했는데 하나는 기원전 1870년경 수메르어로되어 이신의 리피트 이쉬타르에 의해 공포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카드어로 되어 에쉬눈나 왕국에서 등장했다. 이 두법전은 시기적으로 함무라비 법전보다 앞서있으며, 우르남무 또는 우르의 법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 범률 전승에 의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무라비 법전과 마찬가지로 이 두 법전은 성경의 언약 법전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이스라엘 법률 전승의 배경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상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유프라테스강 중류에 위치한 마리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기원전 2000년대에는 이스라엘 선조들과 동일한 서북 셈족(아모리족)이 그 주요한 주민들이었다.

 티그리스강 상류에는 앗슈르라는 도시의 이름을 딴 앗시리아는 당시까지만해도 아모리족 군주들에게 통치 받지 않던 몇 안되는 국가중 하나였다. 앗시리아의 언어와 문화 그리고 종교는 아카드적이었지만 그 혈통은 혼혈 곧 아카드족과 후리, 서북 셈족 등의 결합에서 기원한듯 했다. 

 가장 초기 앗시리아의 왕들은 “장막 거주자들” 즉 반유목민들이었고 서북 셈족이었다. 하지만 기원전 2000년대 초 앗시리아 왕들의 이름은 아카드족의 것이었으며, 스스로 수메르-아카드 문화의 진정한 계승자라 자처한다. 그들중 한 왕인 일루슈마가 바빌로니아를 잠깐 침략하였을 때 자신은 아카드인들을 해방하러 왔다고 뽐냈을 정도였다. 

 

 우르 제 3왕조의 몰락 이전부터 기원전 19세기 내내 앗시리아는 북부와 서북부지역에 대하여 활발한 통상 확대 정책을 추구하였다. 

우르 제 3왕조의 몰락에 이은 혼란의 시대에 바벨로니아로부터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거쳐 서북 지방에 이르는 통상적인 길이 유목민의 약탈을 받아 불안해졌을 떄 앗시리아인들은 티그리스강 윗쪽으로 더 북쪽의 길을 통하여 메소포타미아를 횡단했고 헷족의 땅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개척의 기회를 잡았다. 이 개척 사업은 기원전 18세기 초 분명치 않은 몇가지 이유로 중단되었다가 세기 중엽에 다시 추진되었으나 재차 포기되었다. 

 우리는 갑바도기아 문서를 통해 이러한 일들을 알 수 있다. 

 

2. 기원전 2000~1750년경의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메소포타미아의 혼란과는 대조적으로 이 시기 초기의 이집트는 눈에 띄게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 기원전 3천년대 말 제1중간기라 불리는 혼란 속에 고왕조의 세력이 끝나고, 기원전 2000년대가 시작되자 이집트는 중왕조의 파라오들로 인하여 번영의 시대로 들어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제 1중간기가 끝나고 기원전 21세기 중엽 테베 한 가문 출신 ‘멘투호텝’에 의해 이집트는 재통일되며 11왕조의 손에 의해 중왕조 시대가 시작한다. 11왕조의 짧은 통치 이후 이집트는 다시 혼란에 빠졌지만 총리 아메넷헴에게 통치권이 넘어감으로써 제 12왕조가 시작된다. 이 왕조는 수도를 테베에서 멤피스로 옮기고 200년 이상 통치를 계속한다.

 

 이집트는 고왕조의 붕괴와 함께 봉건 귀족의 발행에  이어 사회 구조의 전복을 가져왔으며 새로운 계층 이동이 발생하게한다. 전제정치의 약화는 왕의 대권들의 민주화를 가져왔고 이것을 내세에 대한 신앙 속에서 알 수 있다. 고왕조에서는 내세는 파라오만을 위한 문제였으나 중왕조에서는 귀족들과 장례의식을 치를 돈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오시리스 신 앞에서 의롭다 인정받음을 기대할 수 있게된 것이었다. 

 또한 12왕조의 발흥과 함께 이전엔 알려지지 않았던 아문신이 최고 지위에 올라 아문-레라 불리며 레와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정교한 운하 체계는 파윰 호수를 나일강 홍수를 잡아두는 저수지로 바꾸었고 광활한 땅을 개간할 수 있었다. 교역과 학예 역시 발달했으며 아메넷헴의 교훈 등과 설화들의 자전적 이야기, 네페레후의 예언 들을 비롯한 온갖 문학 작품이 생산된 이집트 문화의 명실상부한 황금기라 할 수 있겠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토착군주가 아닌 이집트에 의해 직접 통치되던 시기도 있었다. 게셀과 므깃도 등에서 발견되는 이집트산의 물건들은 당대의 이집트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카트나와 라스 샴라 등지에서 나온 이집트의 물건 역시 이집트의 외교와 상업적 관심이 수리아까지 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000년대 팔레스타인은 앞서 서술한 격변과 혼란의 시기에서 벗어나 점차 회복하던 시대였다. 기원전 3000년대 후반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목민 침입자로 인해 지역이 붕괴상태에 이르렀는데, 이 때 초기 청동기 문화가 끝장 났으며, 해당 초기 청동기 문화의 생존자들은 오랜 시간 반유목민적 삶을 살다가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작은 촌락들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000년대 말에는 이러한 촌락이 곳곳에 특히 요단강 동부와 네게브에 산개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9세기에 이르러 팔레스타인과 수리아 전역에 파급되던 활기찬 문화적 영향은 이 지역들에게 두드러지는 회복세를 가져온다. 이 시기에 정착 인구가 증가하였으며 수많은 유목민 씨족들이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이주자들 중에서 아모리인 즉 서북 셈족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메넷헴 3세의 치세 이후 중왕조는 약화되어 종말을 맞이한다. 13왕조는 테베 왕조의 전통을 계승하였고, 서부 삼각주의 여러 지방들은 이른바 14왕조의 영도 아래 독립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아시아 민족들이 북부 이집트 전지역에 침투해 기반을 굳혀가며 해당 지역에 대한 파라오의 지배권은 미약해졌고, 이집트는 이방인이 통치하는 암흑기로 접어들게된다. 힉소스적이 대표적인 이방인 통치자가 되겠다. 

 

3.기원전 1750~1550년경의 고대 오리엔트

 이집트의 중왕조가 붕괴할 무렵 메소포타미아 세력다툼이 다시 일어나고 있었고 여기엔 바빌로니아, 라르사, 앗시리아, 마리 등의 국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원전 18세기 중엽 삼시 아닷 1세는 앗시리아를 상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유력한 국가로 만들었으나 수년내에 형세가 역전되어 마리가 그 뒤를 이어 가장 유력한 국가가 된다. 그러나 머지않아 함무라비의 등장으로 세력간의 각축전은 종식된다. 

 

 함무라비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그의 치세 말기에 공표된 그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이다. 그 기원이 기원전 3000년대까지 소급하는 우르남무 법전, 리피트 이쉬타르, 에쉬눈나 법으로 표현되는 법률 전승을 새롭게 체계화했다. 또한 법률 전승을 공식적으로 명문화하여 왕국의 여러 도시와 지방에서 통용되던 법률 전승간의 조율자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18세기 중왕조 세력이 기울었다. 중앙의 권력의 약화에 따라 아시아에서 이집트의 지위는 더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기원전 18세기가 끝나가기전 아시아의 군주들은 이집트 삼각주 지대로 진출하여 기반을 굳히고 하부 이집트로 세력을 뻗히기 시작한다. 

 

 기원전 17세기 중엽 혼성부대로 이뤄진 군사들이 아시아로부터와 세력을 굳히고 이들의 지도자는 15왕조의 창건자들이 된다. 이후 15왕조에 의해 이집트가 지배당한다. 힉소스족은 동북 국경지대 인근의 아바리스를 수도로 삼았고 약 100년간 통치한다. 많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이 시기에 이집트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힉소스가 통치하고 약 한세기 이후 이집트에서는 이방 지배자들로부터 해방 투쟁이 일어난다. 아모시스는 18왕조의 창건자로 여겨지며 아침내 힉소스족을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힉소스의 이집트 침입과 떄를 함께하여 비옥한 초승달 지대는 새로운 민족들이 압박을 가해왔다. 앞서 말한 민족 이동은 왜 함무라비의 원정이 북쪽과 서쪽으로 확대될 수 없었는지를 그리고 그의 제국이 왜 오래 지속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함무라비의 치세동안 카시족이라 불린 민족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들은 이란의 고원지대에서 왔다는 것을 제외하곤 알려진 사실이 없다. 그들은 인도-아리안족에게 쫓겨 구티족과 마찬가지로 산악지대에서 꼳아져 내려와 메소포아미아 인접 평원들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을 팔레스타인도 피해갈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은 힉소스제국의 일부였고 힉소스족은 상당수 팔레스타인과 남부 수리아로 옮겨갔음이 분명하다. 인도-아리안계통의 침입은 팔레스타인까지 미쳤으며 이들은 병거와 복합식 활이라는 당시로서는 최신식의 신무기와 군사기술들을 가지고 왔다. 

 이때쯤 해서 족장을 중심으로한 아모리족의 반유목민적인 소박한 삶은 거의 자취를 감춘다. 도시가 많이 건설되었고 요새화되었다. 사회 구조는 봉건적이었고 부의 분배는 평등하지 않았다. 

 

 

 기원전 1540년경 힉소스를 추방하고 18왕조가 시작되며 이집트의 암흑기는 끝난다. 이후 찬란한 이집트 제국으로의 발돋움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바벨로니아는 운이 좋지 못했는데 그들의 암흑기는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적으로 약화되고 카시족의 침입으로 시달리던 바벨로니아는 기원전 1530년경 멸망한다. 이렇게 바벨로니아 제 1왕조는 종말을 고한다. 이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헷족이 등장하며 바벨론이 점령되고 약탈당한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전역이 헷족에 의해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바벨론을 함락한 무르실리스 1세의 특기는 기습뿐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제국에 유프라테스강 유역을 병합하지 못했다. 무리실리스도 살해되고 헷족의 고왕국은 급속히 쇠퇴하며 바벨로니아는 카시족이 잠시 남부왕조의 왕들과 경쟁하다 지배권을 이어받는다. 카시왕조는 이후 기원전 12세기까지 약 400년간 세력을 잡고 있었다. 이 시대에 메소포타미아는 정치적인 안정을 기대할 수 없었다. 

 

2개의 댓글

2021.09.15

논문 쓰는 사람이야? 지금보니 순식간에 글이 여러개 올라왔네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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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9.15
@사제

아직은 논문을 공부해야하는 사람이야. 빨리 학위 다 마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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