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우익중국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독립운동가

 

 

장지락(김산)1.PNG

 

공훈전자사료관 - 독립유공자 정보 -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장지락"으로 검색 (검색날짜:20210408)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MeritList.do?goTocode=20002

 

장지락(김산)2.jpg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79216

 

장지락은 김산이란 이름으로 알려져있는 인물로 기독교 계통 중학교를 다니다가 3.1 운동을 겪고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삼원보 신흥무관학교를 다니거나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하는 독립운동을 하였다. (공훈전자사료관 - 독립유공자 정보 -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장지락"으로 검색 검색날짜:20210408) 장지락은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으로 유명한 인물이기도 하다.(알라딘)

장지락은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공산당에 참여하였고 그 과정에서 학살을 정당화하거나 선동하였고 소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장지락이 정당화했던 하이루펑(해륙풍) 지역의 학살의 경우 이미 한국에서 연구가 된 분야이다.

1. 독립운동 과정에서 장제스 세력을 타도대상으로 인식

장지락은 중국지역 혁명활동에 참여하였다.

『 중국혁명의 파고는 급속히 높아졌다. 쑨원도 소련공산당의 지침에 따라 국민당을 개조하고 소련과 협약을 맺었다. 비록 쑨원은 1925년 베이징에서 죽었지만 광둥은 새로운 혁명정권의 도시가 되었으며, 이해의 5·30 사건 이후 사태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소련의 군사고문과 정치고문이 광둥에 도착하였고, 황푸 군관학교를 세워 혁명공작을 위한 군 간부를 양성하였으며, 봉건군벌을 타토하기 위한 '북벌' 준비가 진행되었다.

 좌익이건 우익이건 모든 조선인은 중국에서 일어난 이 새로운 물결의 파고가 높아지는 것을 보고, 그것이 조국해방의 첫걸음이라 생각하고는 대단히 기뻐하였다. 모든 경향의 조선인 혁명가들이 혁명에 참가하기 위해 앞장서서 광저우로 달려갔다.』

장지락이 님 웨일즈에게 설명한 이야기.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아리랑』, 동녘, 202-203쪽 (특별한정판 2018년 2월 28일판 기준)

그 과정에서 장지락은 '장제스와 그 세력을 타도 집단'으로 인식했다. 

『불과 6개월 이내에 양쯔 강 유역까지 도달한 북벌군의 승승장구하는 급진격이 한창이엇을 때 모든 혁명가들이 느꼈던 환희와 열광은 지금도 생생히 떠오를 정도로 대단했다. 화베이로! 그리고 조선으로! 우리의 가슴은 미칠 듯이 기뻐 날뛰었던 것이다! "지금 조국과 만주에서 2,000만 조선인들이 전아시아의 자유를 위해 제국주의를 타도하고자 무기를 들고 기다리고 있다"고 우리는 자신 있게 중국인들에게 말하였다.

 그런데 우익의 장제스가 지도하는 반혁명이 일어나 성공을 빤히 눈앞에 둔 승리의 문턱에서 국공분열이 일어났다. 중국이 공식적으로 분열되고 혁명은 좌절되었다.』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아리랑』, 동녘, 217쪽 (특별한정판 2018년 2월 28일판 기준)

『4월 18일, 나는 한 사건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3명의 중국공산청년동맹원이 군중 앞에서 처형된 것이다. 16세 소녀와 21세, 20세 청년이었다. 놈들은 처형장으로 끌고 가기전에 대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세 사람을 꽁꽁 묶은 채 인력거에 태우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인력거 뒤에 400명의 병사들이 따르고 있었다. 나도 그 행렬을 따라갔다.[……]

 수백 명의 군중들이 형장까지 따라갔지만 울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그들을 좇아 거리를 뛰어가는 동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경찰이 나를 동조자로 보고 체포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단지 흥밋거리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 잔혹한 나라에서는 살 수가 없어. 절대로, 절대로. 못 살아. 이들은 사람도 아니야."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인력거가 멈춘 것은 3시였다.[……]

세 사람은 모두 냉정하였다. 총살된 지점에 도착해서 10명의 병사들이 정렬하는 사이에 그들은 구호를 소리 높이 외쳤다.

 "제국주의와 국민당을 때려 부수자! 중국혁명 만세! 때려잡아 장제……."

 마지막 구호를 채 끝마치기도 전에 그들은 1.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나는 시체가 있는 곳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 용감한 젊은이들의 멍한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잠깐 동안 그 곳에서 멈춰서서 그들을 향하여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여러분들의 마지막 말을 끝맺겠소. 때려잡자 장제스!"』

장지락이 님 웨일즈에게 설명한 이야기.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아리랑』, 동녘, 218~220쪽 (특별한정판 2018년 2월 28일판 기준)

타민족의 영토에 와서는 타민족의 지도자를 때려잡을 대상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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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Chiang_Kai-shek

 

장제스: ??????

2. 학살 정당화와 소극적 참여

장지락은 광동 코뮌에 참가하였는데 장지락은 대중들의 학살에 절대 제동을 걸어서는 안 되며 그것을 금지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비판하였다.

광동 코뮌 당시 학살을 거부한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내용

『 코뮌을 겪으면서 나는 당시 절대로 대중운동에 제동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크나큰 교훈을 얻었다. 아무리 희생이 크더라도 대중운동은 반드시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적을 깨부수지 않는다면, 적이 우리를 섬멸할 것이다. 실패는 참가자 모두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코뮌의 실책이었다. 11일 아침, 노동자들에게 시민을 한 사람도 죽이지 말 것이며 반동분자들은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코뮌 전 기간에 혁명구에게 살해된 사람은 100명도채 안 되었다. 가장 악질적인 반동분자 30명만이 혁명위원회 앞으로 보내져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을 뿐이다. 이들은 모두 국민당 간부들이었다. 자기들이 학대했던 노동자들에게 체포되기는 했지만, 상인과 부자들은 한 명도 살해되지 않았다. 시가전 때 세 명의 부인이 죽었을 뿐이다. 그 시체는 신원 확인을 위해 정부사무소로 옮겨졌다. 나는 누더기를 걸친 조그마한 소년이 죽은 여인 중 한 사람의 머리를 돌로 짓이기는 것을 보았다. 그 꼬마는 아마도 하인이고, 그 여자는 잔인한 여주인이었을 것이다. 

 만일 노동자들이 규율을 지키지 않았다면 쉽사리 자기네 적들을 제거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개인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지켰다.이러한 관용과 규율을 3일 후 거의 7,000명 가까이 살해한 반동군이 저지른 야수 같은 대학살과 대조해보라. 혁명군이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전 기간에 도시는 평온하고 조용했다. 』

장지락이 님 웨일즈에게 설명한 이야기.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아리랑』, 동녘, 238-239쪽 (특별한정판 2018년 2월 28일판 기준)

장지락은 "노동자들에게 시민을 한 사람도 죽이지 말 것"이란 "명령"을 비판하며 심지어 "개인적으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명령"을 비판하며 "절대로 대중운동에 제동을 걸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노동자들이 규율을 지키지 않았다면 쉽사리 자기네 적들을 제거해버릴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국민당 간부 학살을 정당화하며 "상인"까지 노동자를 학대하는 세력이라 주장했으며 시체를 돌로 짓이기는 행위를 목격하며 아무 증거 없이 "아마도" 시체는 가해자였을 것이라 주장했다. 장지락 본인테도 증거는 없었다.

장지락은 님 웨일즈에게 설명하며 노동자들이 살인하는 대중운동이 일어날 때 절대 제동을 걸어선 안 된다며 선동하고 있다.

장지락은 이후 펑파이의 하이루펑(해륙풍) 학살에 소극적으로 참여하고 그것을 정당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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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파이 https://en.wikipedia.org/wiki/Peng_Pai

『복수

나는 하이루펑 혁명재판소의 7인위원회에서 일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내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객관적이고 공정하며 지역감정이나 현지의 계급적 증오 따위를 영향을 바지 않고 재판하리라고 여겼기 떄문이다. 그러나 나는 어쩐지 이 일이 마음에 내키지 않아서 경제위원회 쪽으로 빠져나가려 하였다. 그래서 2주일 후에는 그들도 나를 놓아주었다. 재판소에서 일하는 동안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겨우 4명뿐이었지만, 그 체험은 적이 나의 용기를 잃게 하는 것이었다. 그중 한 명은 퍽 총명해보이는 청년이었는데 농부들에게 끌려왔다. 그 청년에게는 불리한 증거가 하나도 없었다.

"저 녀석의 기름진 얼굴이나 미끈한 손만 봐도 영락없습니다. 저 녀석은 반혁명적인 지주의 자식이며 계급의 적입니다."

 나는 명랑하고 순진무구해 보이는 그의 생김새가 마음에 들어서, 내 생각으로는 이 사람한테는 아무 죄도 없으며 필경 자기 아버지에 반대하여 기꺼이 혁명에 참가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펑파이가 빙그레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자네도 저 청년만큼이나 어리고 순진하군. 계급적 정의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전의 필수적인 수단이야. 의심나는 경우에는 보다 적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이 죽여야 해. 자네는 지주들이 지배했던 하이루펑의 실정과 그들이 자행한 잔인한 짓거리를 모르고 있어. 만일 내가 본 것을 자네가 직접 보았더라면 여기에 아무런 의문도 없었을 거야. 농민들의 행위는 지주들이 한 짓거리의 100분의 1도 안 되네. 지주들에 비하면 농민들은 아주 극소수밖에 죽이지 않았지. 자기를 방어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농민들은 알고 있네. 만일 자신들의 계급적 적을 혼쭐내지 않으면 농민들은 사기를 잃을 것이고, 혁명의 성공에도 의심을 품게 될 것이네. 이것은 그들의 의무이자 또한 자네의 의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이 청년이 형장으로 끌려갈 때, 그의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양쪽에서 팔을 붙잡고 함께 걸으며 그를 위로하였다.

 나는 광저우에서 목격한 세 명의 젊은 공산청년동맹원들의 일을 회상하며 논리적으로 확연히 이것이 유일하게 비개인적인 계급적 정의라고 깨달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기독교와 톨스토이의 인도주의적 훈련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매번 나는 침울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내 임무를 착실히 수행하고 개인적 감상주의 나아갈 길을 방해해선 안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나머지 세 명의 경우는 사형선고를 내리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비록 최근에 반혁명적인 언동을 했다는 증거는 없었지만, 이 사람들의 얼굴에 잔혹과 부패의 낙인이 분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잔인한 짓거리를 계속해온 지주들이었다.그중 한 사람은 우리가 행군하고 있을 때 유격대원들에게 붙잡혔는데, 하루속히 그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하여 유격대원들이 그자를 나에게 데려왔다.

 나는 그자의 야들야들한 손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대조적으로 그자를 잡아온 억센 노동으로 주름 잡힌 정직하고 순박한 농부의 얼굴을 물끄러지 바라보고 있었다. 계급적 정의는 너무나 명백하였다. 하지만 나는 즉각 사형을 선고하기가 어려워 "빨리 모여서 유죄인가 무죄인가 다수결로 정하시오"하고 말하였다. 시간이 몇 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유격대원들은 행군을 멈췄다. 그 지주를 체포한 농민들이 경위를 설명하였고 이어서 내가 피고에게 농민들의 고소에 대해 할 말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었다. 회의는 이구동성으로 그자의 유죄를 결정하였다.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어떻게 판결을 할 것인가? 나에게는 매우 난처한 일이었지만 현지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다가 괴롭히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런 일에도 즉결심판과 마찬가지로 시시비비가 분명하였다. 하이루펑에서 몇 개월 있는 동안에 나는 사형수 목록을 여럿 보았다. 명부에 오른 이름들이 펜대 하나로 너무도 간단히 체크되거나 지워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이런 일은 국민당이 훨씬 더 심했고 수법 또한 더 지독했다. 양자의 차이는 국민당이 중국 인민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하고 가장 용감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촉망받는 사람들을 죽이는 데 반하여, 혁명가들은 타락분자와 기생분자, 사회적으로 유해한 자들을 죽인다는 데 있었다.

[……]

 그날 밤 우리는 한 천주교 성당에 머물렀다. 그곳에 책이 몇권 있었다. 아무 할 일이 없어서 나는 성경책을 집어 들고 신약을 읽었다. 예수가 하이루펑에 있다면 정의의 이름으로 무엇을 명령했을까? "나는 눈물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말했으리라 예수는 민중을 갈취하는 지주와 환전상을 미워하였다. 그는 선한 것과 악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악을 멸망시키는 것은 선하다. 악을 권력에 머물러 있게 하여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은 선하지 못 한 것이다.

[……]

그 이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처형되는 것을 보았는데 나는 항상 그 영향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내전에 참가하여 싸우는 사람은 이런 일들을 견뎌낼 수 있도록 각자 자기의 철학을 만들어내야 한다. 나는 남에게 그런 고통을 주기보다는 내가 그런 운명에 떨어지는 쪽이 더 견디지 쉽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반대하지 않는다. 문제는 누가 죽느냐 하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안다. 문제는 누가 죽느냐 하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안다. 지배계급은 학살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수세대에 걸쳐서 살육을 해왔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싸울뿐이다.』

장지락이 님 웨일즈에게 설명한 이야기.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아리랑』, 동녘, 261~267쪽 (특별한정판 2018년 2월 28일판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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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언제???

장지락은 처음 처형여부에 참여했을 때는 망설였지만 펑파이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논리적으로 확연히 이것이 유일하게 비개인적인 계급적 정의"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 최근에 반혁명적인 언동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면서 "이 사람들의 얼굴에 잔혹과 부패의 낙인이 분명하게 찍혀 있었다"며 겉모습을 근거로 판단하며 "그들은 오래 전부터 잔인한 짓거리를 계속해온 지주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잡아온 지주의 "야들야들한 손"과 "그자를 잡아온 억센 노동으로 주름 잡힌 정직하고 순박한 농부의 얼굴"을 근거로 "계급적 정의는 너무나 명백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하이루펑에서 소비에트에서 잡혀간 사람들은 무고한 사람이 아니며

중국 국민당이 학살한 사람들 

"중국 인민 가운데서도 가장 훌륭하고 가장 용감한 사람들, 사회적으로 촉망받는 사람들"

중국 공산당이 학살한 사람들 

"타락분자와 기생분자, 사회적으로 유해한 자들"

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장지락은 그런 학살에 참여하는 행동에 견디기는 힘들어했지만 "여기에 반대하지 않"으며 정당화했다.

그리고 그 학살을 본인이 기독교적 신앙에 근거해 정당해했다.

예수에 따르면 

예수가 하이루펑에 있다면 정의의 이름으로 무엇을 명령했을까? "나는 눈물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말했으리라 예수는 민중을 갈취하는 지주와 환전상을 미워하였다. 그는 선한 것과 악하지 않은 것을 사랑하였다. 그러므로 악을 멸망시키는 것은 선하다. 악을 권력에 머물러 있게 하여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은 선하지 못 한 것이다.

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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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다 이놈아.

3. 펑파이(팽배)가 주도한 하이루펑(해륙풍)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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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파이 https://en.wikipedia.org/wiki/Peng_Pai

그럼 장지락이  정당화하고 소극적으로 참여한 하이루펑(해륙풍) 학살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한국에서 최소 1991년에 그에 대한 논문이 나온 바 있다.

『소비에트 시기는 (1927.5 - 1928.2) 매우 짧았기 때문에 팽배의 농민 운동은 심도있는 내용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지만 중대한 의미를 띠고 있다. 그는 단순히 중공중앙의 노선 변화에 충실히 따랐다고 하기보다는 농민을 중추로 하는 사회주의 혁명을 준비하는 길을 모색하였기 때문이다. 즉 국민혁명 중에서 농민들의 역할과 저력을 높이 평가하였던 팽배[펑파이-인용자]는 장래의 사회주의 혁명에서도 혁명의 주체가 농민임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 것을 가시적으로 소비에트 정권 수립으로 연계시켰던 것이다. 

예를 들어 1)해륙풍공·농·병대표대회에서의 농민비율은 60%에 달했다. 이것은 병사 10%, 노동자 30%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치였다. 2)토지혁명 문제에 있어서도 모든 토지를 완전히 몰수하여 다시 농민에게 재분배하였는데 토지몰수대상에 대지주는 물론 소지주까지 해당되는 것이 특색이다. 3) 반혁명분자를 처단하라는 명령으로 칠살령을 제기하였는데 지주는 물론 농민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처단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으로 미루어보아 팽배는 농민 해방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하였으며 혁명 이후 정권의 담당자 역시 농민이라 보았던 것이다. 』

김문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팽배와 해륙풍 농민운동(1922∼1928)』, 1991, 60~61쪽

『소비에트 시기의 농민운동이 어떤 특징을 띠고 있었는가는 소비에트 정부의 정책적 측면과 무장원쟁의 방법론적 측면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소비에트 정부가 실시한 정책은 반혁명세력에 대한 처단과 토지혁명이 주축을 이룬다. 임시혁명정부가 공포한 7조금령(이른바 칠살령)에 의하면, 1) 지주로서 소작료를 받은자 2) 지주와 은밀히 결탁한 자 3) 토지계약서를 본정부에 제출하지 않은자 4) 지주를 위하여 채무를 징수 한자 5) 토지계약서를 숨긴자 6) 채권자로서 채무자를 재촉한 자, 7) 이미 농민에게서 소작료로 곡식을 받은 경우로서 방출하지 않은 자 등을 들어 모두 죽인다는 것이다. 팽배는 〈해풍현 공농·병대표대회 폐막 식상의 연설〉에서

“현재 각 구, 향의 반역분자는 최소한 4만명에 이르지만 아직까지 3, 4백명 밖에 죽이지 못하고 나머지는 활동중에 있다. 만일 반혁명 군이 도달하면 그들은 군대를 도와 우리를 학살할 것이다. ......"

라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정책 면에서도 반혁명분자를 살해할 경우 적위군을 고무시키기 위하여 사형집행인에게 은2원을 지급할 정도 였다. 이같은 정책은 계급투쟁적 측면이 극한까지 치달은 결과였다. 그러므로 비록 반혁명적 요소를 근절시키려는 요구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개인적 원한이나 금품을 노려서 무고한 사람을 죽일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김문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팽배와 해륙풍 농민운동(1922∼1928)』, 1991, 66~67

펑파이가 주도했던 하이루펑(해륙풍) 지역의 학살은 대지주뿐 아니라 소지주나 지주와 무과한 인물들까지 대상으로 하였으며 오히려 살해행위에 돈을 지급하며 학살을 선동하였다. 그리고 제거할 대상은 4만명으로 설정하며 아직 3~4백명을 죽였다며 학살을 선동하였다.

그런데 장지락은 이런 학살을 예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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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출처: 삽질少年 이용자가 2020.12.11에 제작한 디시콘)

...공포

4. 기타: 중국인과 상반되는 일본인에 대한 평가

장지락은 중국인과 비교해 일본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모든 일본인들은 용기 있는 삶을 찬미하며, 겉으로는 혁명가를 미워한다 할지라도 속으로는 존경한다. 중국인이라면 혁명가를 바보 아니면 돈을 가져다주는 대리인쯤으로 여길 것이다.』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아리랑』, 동녘, 365쪽 (특별한정판 2018년 2월 28일판 기준)

그리고 죽을뻔 한 위기를 겪었을 때를 증언할 때는 조국 조선을 그리워하며 중국은 "은혜를 모르는" "이국땅"이라 평가하였다.(물론 아래 인터뷰할 때는 죽는 순간이 아니었다.)

『나는 아름답고 맑은 조국의 강들을 떠올렸다.

나는 바야흐로 죽음을 앞두고 조국, 그대를―그대의 아름다운 강과 사랑스런 푸른 산을―떠올려 보았다. 그대의 자식은 나약하지만 삼천리 강산은 강하다. 우리가 모두 이국 땅에서 죽더라도 삼천리 강산만은 살아남으리라. 나는 내피를―절망의 독이 스며 있는, 결핵균이 섞인 썩어 문드러진 내 피까지도―가지고 돌아가 내가 태어난 땅을 비옥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대를 위하여, 인류의 자유를 위하여 싸우느라고 내 몸을 망가져버렸다. 은혜를 모르는 낯선 이국 땅에서 한 줌의 비료가 될 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님 웨일즈·김산 지음, 송영인 옮김, 『아리랑』, 동녘, 393쪽 (특별한정판 2018년 2월 28일판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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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en.wikipedia.org/wiki/Chiang_Kai-shek

장제스:??????????

22개의 댓글

2021.04.08

항상 느끼지만 독립운동가들은 각자의 사상에 맞게 독립운동을 했을 뿐이고 그 사상적 기반은 지금으로 보면 비판당할 것이 많아

 

안중근도 대동아공영권의 지지자였고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도 대동아공영권의 이상과 맞지 않은 그의 행동 때문이었던 것이고

 

장제스가 독립에 득이 되었는지 실이 되었는지는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그는 사이비적이라도 자기 사상의 기반에 맞게 독립운동을 한 거라고 생각해. 애초에 동학이나 대종교나 그 시대에 나온 신생종교고 사이비 취급을 받은 것도 사실이야.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장지락의 사상이 지금 기독교에게는 그다지 사이비같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

 

독립운동가는 그 독립운동의 공적으로 평가되어 추앙받는 것이지 개인의 사상이나 흠은 별개의 일이지

2
2021.04.08
@국밥햄

안중근 의사님은 대동아공영권 지지한 적 없다.

(안중근 의사 관련 박사학위 논문 http://www.riss.kr/link?id=T11099654 )

 

있지도 않은 소문 퍼트리는 거 자제 좀. 안중근 의사가 '대동아공영권 지지했다'는 정체불명의 소문이 등장할 줄은 몰랐다.

8
2021.04.08
@안티파굳

난 동양평화론이 대동아공영권을 바탕으로 한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도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혔다는 건데 이런 명분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는 대동아공영권에 대한 이상이 바탕이 되어야한다고 생각해

 

물론 나도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을 명분으로만 내세운 것은 아는데 이후 안중근 의사가 일본인조차 설득이 가능했다는 건 그 기반이 비슷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 하지만 지지자라는 말을 사용한 건 내 실수가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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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8
@국밥햄

안중근 의사 사상이 '대동아공영권을 바탕으로 한 사상'이란 근거없는 소문 자제좀. 박사학위 논문도 갖고왔는데 왜 안중근 의사를 자꾸 '대동아공영권 바탕으로 한 사상'가진 분으로 몰아가려하나...

6
2021.04.08
@안티파굳

글쎄... 그런 건 그저 태권도가 가라데와 상관이 없는 이유를 논문으로 써도 나올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이견이지

 

어디까지나 개인의 생각이지만 난 어느 사상이 갑자기 개인의 생각으로 튀어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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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국밥햄

아시아주의 슬라브주의 같은 것에서 파생된 거지 대동아공영에서부터 파생됐다고 하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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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국밥햄

맞네. 대동아공영은 1940년대나 튀어나온 말이잖아. 아시아주의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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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랩터는이제꿩

아 그러네 그 시절엔 그런 용어가 없었구나

동양평화론 서론이 천황의 발언을 인용했기 때문에 그렇지만 일본의 영향이 없었다고 보지는 않아. 하지만 일본은 어디까지나 명분뿐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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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국밥햄

근대 민족주의가 서구에서 촉발되고 그 영향을 받은 아시아주의 자체가 일본쪽이 원조라는 거 자체는 신경쓰이지 않는데 대동아경영권은 쫌 너무다르자너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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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랩터는이제꿩

아시아주의가 맞는 것 같다

하지만 용어가 없었을 뿐이지 그 명분이 아무 발전도 없이 대동아공영권까지 이어진 건 맞는 것 같은데? 그저 동양평화론을 완성시키지 못한 게 아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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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국밥햄

아잇 걍 아시아주의 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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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국밥햄

읽히기엔 이건 현재 중국이 세계를 잇는 길을 만들겠다면서 일대일로하고 있는 사업과 공정무역을 같은 수준으로 놓는 느낌인데...

세상 모두는 하나, 황인종은 하나 백인종은 하나 등등 어느거나 유사성을 띌 수 있는 부분이야 맞지만 그렇다고 저건 완전히 다른 길로 간 두 개를 동일 선상에 놓은 느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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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번째드립인지

일본이 명분으로만 대동아공영권을 사용해서 그렇지 완전히 다른 길은 아니야.

 

지금 일본은 실제 역사를 잊어버리고 대동아공영권만 기억하고 있어서 아시아를 근대화시키고 서양제국과 맞서싸운 일본으로만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는 반문하는 게 대동아공영권이 뭐가 나쁜데? 이런다고

 

저 천황의 발언을 시작으로 일본인들이 내세운 명분은 계속 일관적이었는데 실제 역사를 지우고 그것만 가르치는 이유는 즉 명분은 좋았다 이거지

 

그래서 현재 일본인의 역사인식에 한국중국은 일본이 자선사업하듯이 근대화하고 같이 힘을 합쳐 미국 영국과 싸웠잖아? 왜 우리를 싫어하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동양평화론은 완성되지 못한 사상이지만 서론을 보면 지금의 일본인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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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국밥햄

근데 정의로운 일본은 아예 존재한 적이 없는데 그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지... 역사적인 결과로 도리어 화전양면 논리에 가깝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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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번째드립인지

내가 말하는 건 명분으로 존재한 그것을 말하는 거야

그렇다면 실제 역사에서 공산주의는 존재했는가?와 비슷하지

 

그래서 공산주의가 무너졌다고 생각하듯 일본 역시 그 사상적 기반에서 완전히 다른 길로 갔기에 아시아의 동의를 얻지 못하고 무너졌다고 생각할 수 있지. 이건 손자병법에도 나오듯이 모든 역사에서 동일해. 명분을 지키지 못하면 결국 패배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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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일 전
@국밥햄

난 "명분"이라는 말이 역사적 분석과 비평에서 그리 좋은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명분'은 짧은 문구과 간략한 논리가 실제와의 괴리감을 설명할때 사용되고는 한다. 그런데, 어느전쟁이든 '정의'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편이 있는가? 그리고 그들의 행위들에서 그러한 주장이 반영되지 않은 부분이 전체를 이루는가? 이런 질문에는 함부로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철학이 아닌 사상은 시대에 따라서 말이 달라진다. 이걸 계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동류라고 규정해버리면, 사실 대동아 공영권, 아시아주의 이런거 이전에, 서양의 근대적 제국주의는 황제 아래에서 통합된 근세 중국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니, 결국에는 서구의 문명과 동양의 문명은 유가를 위시한 고대중국의 사상아래에서 전개되었다고 말해도 무리가 없게 될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인용'이 일본 제국주의의 '대동아공영권'을 긍정한 것이다.-> 천황의 인용은 대동아 공영권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인가? 이 대동아 공영권은 일본 군부의 행동과 이념과 완전 동일한 것인가? 그리고 안중근은 스스로 이 짭짧은 인용이 대동아 공영권을 긍정한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시인했는가? 아니라면 대동아 공영권이 가진 이념적 내용중에 일부를 통해서 이를 추종하는 이들의 불합리함을 역설적으로 비판한것 아닌가?

내 생각에 댓글 쓴이의 주장은, 말하는게 가능할수 있는(might, maybe) 있는 주장이라고 본다. 다만 문제는 이게 말이 가능하다고 해서 많은 이들에게 동의되고 강제될수 있는(must, should)라면, 이건 매우 잘못된 생각인거 같다.

어떤 단서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논리는 강력해보이지만, 그걸 걷어내는 여러 반례들은 은폐하거나 부정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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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일 전
@PGoose

난 명분이란 것이 실제와의 괴리감이 아니라 사람을 행동하게 만드는 정신적인 근거라고 생각해. 전쟁이란 극단적인 폭력은 자신을 정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근거가 없이는 불가능하지

 

그렇기에 명분을 세웠으면 지켜야하고 보통 이 명분들은 전쟁초기에 어느정도 선으로 지켜져. 전쟁이 지속되면서 지키지 못하고 패배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이지. 구소련은 명분이었던 공산낙원을 실현하지 못했기에 사라졌고 일본제국 역시 대동아공영권에 반하는 행동으로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어

 

만약 현재의 일본인이 생각하듯이 실제 그 명분이 지켜졌다면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을 했을까? 다수의 공감을 얻고 논리적으로 발전한 사상이 되어 오히려 아시아의 독립을 방해했을 거야.

 

일본이 장기간의 전쟁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그 사상이 비루해서 명분을 폭력으로 대체했기 때문이지. 패망 후 오히려 미군을 환영할 정도로 행동력을 갉아먹은 거야. 부시의 명분없는 전쟁도 장기적으로 부작용만을 낳은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지. 이런 것들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으로 볼 수 있어

 

때문에 손자병법에서는 명분은 그리 가벼운 개념이 아니야.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1순위 요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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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밥햄

맞는 말이야. 다들 당시의 시대적 한계가 있었고 그들이 가진 사상이 지금 관점에서 다 맞는 것은 아님.

안중근이 대동아 공영권의 지지자였다는 말은 틀린 말이지만 아무튼 이런 식으로 비판하자면 비판할 것이 맞음. 안중근은 동학운동의 비판자였고 실제로 진앞에 앞장섰던 사람이었음. 동학농민운동을 일종의 농민들의 폭동으로 여겼음.

 

김구는 보수적 민족주의자였지만 독립후 일부 친일파, 이승만지지자들이 주장하는 바로는 세상 모르는 이상주의자였고 남한 정부를 세우는 걸림돌이라고 여겨졌음. 80년 후반에 그런 저작이나 컬럼이 실리기도 했었음.

 

각자 자기의 정치적 이해관계로 독립운동가 한명 한명의 오류를 따지자면 끝도 없음. 만주의 독립운동의 한 축은 당시 재만주 동포의 지지로 운영되었는데 일부는 강제로 지원금을 받아가기도 했고 그에 대한 원망이나 비판도 많았음.

 

있는 그대로 독립운동의 실제와 한계를 연구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하지만 자기 관점에서 비난하기 위한 주장은 올바르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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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독립운동가도 신이 아니기에 사회주의 계열이건 민족주의 계열이건 과오가 없는 사람이 별로 없을듯

그래서 이승만, 김구, 김원봉, 박헌영.. 다 까이는 것 같음 우리는 이러한 그들의 과오와 업적을 함께 보면 될 듯

그런점에서 이 글 잘 읽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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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걍 사이코패스 미친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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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일 전

조병옥도 독립운동가이면서 43때 학살지시한 거 모르는 사람 많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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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이 공산주의에 빠지게 된게 김충장 즉 김성숙 선생님이였는데.

. 가는길이 너무 달라지는듯 김산도 사회주의 열광은 햇어도 합치자 주의엿던걸로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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