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망국을 딛고 일어선 군필 여대생 이야기

1868년. 일본은 내전의 불길에 휩싸여 있었음

(우리나라는 고종이 갓 즉위한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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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간 일본을 통치해 온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에 충성하는 영주들과 무사.

그리고 막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일본을 만들고자 하는 영주들과 무사들이 자신들의 신념과 이익을 걸고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었음.

 

이 전쟁은 훗날 보신전쟁, 혹은 무진전쟁 이라고 불리게 됨.

 

전쟁의 결과야 우리가 모두 알듯이 막부에 반대하는 쵸슈, 사쓰마, 토사 번이 주축이 된 신 정부군이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시작하여 기나긴 근대화의 길을 걷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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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이후 메이지 헌법을 발표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전쟁은 교토와 오사카를 점거한 신 막부군측이 우세를 점했지만, 전쟁의 앞날은 순탄치 않아 보였음.

300년간 충성한 막부를 지지하는 관동지방의 웅번 세력은 여전히 건재했고 전투에 투입될 수 있는 인원도 많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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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도바-후시미 동쪽의 지역이 모두 관동지방)

 

그러나 친막부 성향의 많은 영주들은 충성보다 살아남는 것을 선택함.

그들은 신정부군에 공격받는 이웃의 친 막부 영주를 적극적으로 돕지 않았고, 불리해진다 싶으면 막부를 버리고 쉽게 꼬리를 내렸음

유럽에서 수입한 신 정부군의 신식 무기에 압도당하기도 했지만 적극적으로 생사를 걸고 덤빈 영주는 소수였음.

 

그렇게 격렬하게 저항했던 소수의 지방 가운데 하나가 아이즈 번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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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쪽 사진 붉은색 지역이 그 유명한 후쿠시마 현. 이 현의 1/3이 과거 아이즈 번 지역 이었음)

 

이 아이즈 번은 에도막부 말기의 정치적 혼란속에 강제로 끌려들어왔음.

막부의 정치가에 의해 교토 치안을 담당하게 된 마지막 영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본의 아니게 억지로 교토수호직에 취임하게 됨.

 

바람의 검심에서 칼잡이 히무라 켄신이 교토에서 암살자로 이름을 날리던 그 시대임. 바람의 검심 추억편 본 틀딱들은 다 알듯.

이런 반 막부세력 유신지사의 암살, 테러에 대항하기 위해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는 순찰조, 신선조 등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반 막부세력 지사들을 죽이고 체포하여 치안에 공을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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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즈 번의 마지막 영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정치적 혼란 속을 꿰뚫어 나가야 했던 20대의 젊은 영주였음

귀멸의 칼날에 나오는 마츠다이라 카타무리코가 이 인물을 모티브로 했음)

 

그러나 막부의 지원없이 5년간 임무를 수행한 끝에 얻은 것은 휘청거리는 재정과

막부만큼이나 그들을 증오하는 서남지역의 웅번(쵸슈, 사쓰마, 토사 번)이었음.

 

1868년 1월.

쵸슈와 사쓰마번은 비밀리에 군사협정을 맺었고, 이를 모르고 전진한 막부군은 도바-후시미 가도에서 참패를 당함.

 

이는 막부군이 지방 웅번을 더 이상 제압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고 서남 웅번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밀고 올라오기 시작함.

이어서 요도-야마자키 전투에서도 막부군이 패하자, 오사카와 교토 지역를 비롯한 관서지방의 웅번들이 막부를 버리고 서남 웅번 측에 합류하여

전쟁은 관서 vs 관동의 양상으로 흐르기 시작함.

 

군사력의 붕괴, 서구열강의 개입을 우려한 에도막부의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항복을 결정하고

에도성(도쿄)를 무혈입성으로 내어 주었으나 이에 분노한 가신들은 관동지역 영주들과 함께 저항할 것을 결의함.

 

아이즈 번은 무사들을 총동원하여 주작, 청룡, 현무, 백호대 4개 부대 3천여명을 준비했으며

최후의 보루인 수도 와카마쓰성을 지키기 위해 3개의 고개에 부대를 주둔했지만

10월 6일에 시작된 신 정부군의 대포 공격에 고개 방어를 포기하고 수도에서의 농성에 들어가야 했음.

 

이 농성 직전에 성에 들어가지 못한 무사의 가족들 290여명이 집단자결,

성이 함락되었다는 헛소문을 들은 백호대(10대 소년들로 구성) 20명이 집단자결,

또 다른 무사의 부인들 40여명이 장창(나기나타)를 들고 신 정부군에 돌진했으나 모두 전사하는 등 비극적인 일이 발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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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포격으로 파괴된 흔적이 있는 와카마쓰 성)

 

아이즈 번이 최종 항복하는 11월 6일까지 한달 동안의 공성전에 성의 인력이 총동원 되었음.

신 정부군의 암스트롱 대포 수십문이 성을 강타하였고, 아이즈 측에서는 이에 대항하고자 12만발의 종이 탄포를 제작하여 

맹렬한 총격전이 벌어짐.

 

이때 활약한 인물이 니이지마 야에(新島八重)임.

1845년에 태어난 야에는 아이즈번 공성전 당시 23세 였음.

 

그녀의 아버지는 아이즈번 무사들에게 사격술을 가르치는 총포사범이었고, 그녀 역시 친오빠에게 사격술을 배움.

(막부시대 일본에서는 남자의 일, 여자의 일이 확고하게 나누어지지 않았음. 그런 모습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오히려 강해짐)

 

그녀의 동생은 내전 초반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녀는 유품으로 남은 7연발 스펜서 소총을 들고 공성전에 뛰어듬.

사격술을 인정받아 성의 세번째 방어진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야에는 낮에는 하루 2천여발의 총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전투를 치렀고

밤에는 부상자 간호 뿐 아니라 저격에 능한 병사들을 인솔해 성 밖에 나가 적의 중하급 지휘관들을 저격하기도 했음.

 

이 당시 21살에 결혼했던 남편을 잃기도 했지만 그녀는 결코 성벽을 떠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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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성은 11월 6일에 항복하게 되고 아이즈 번의 영주를 제외한 무사들 4700명은 동북지방 끝으로 추방당해

이동하는 길에 수많은 인명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함.

 

그녀는 고향을 등지고 오빠가 있다는 교토에 이주해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 시작함.

영어를 배우고 서양식 복장에 당시에는 드물었던 모자와 구두를 착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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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서구식의 남녀평등의 이상을 가지고 미국으로 대학 유학을 떠났으며 귀국한 이후에는

니이지마 죠(新島襄)와 현재의 도시샤 대학의 전신인 도시샤 영어학교(同志社英學校)를 설립함.

이후 그녀는 업무상 파트너였던 니이지마 죠와 교토에서는 최초로 기독교식 결혼식 올림(재혼).

 

그녀는 남편을 서구 방식인 이름으로 불렀으며 인력거를 탈 때도 ‘레이디 퍼스트’라 서구 방식에 따라 먼저 탔음.

남편인 니이지마 죠 역시 공부를 위해 미국에 밀항한 후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었는데 일본의 구 인습을 타파해야 하겠다는 의지가 강했음.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아내를 존중하는 뜻으로 ‘핸섬 우먼’(ハンサム・ウーマン)이라 부름.

 

당시 기모노를 벗어 던지고 모던한 서구식 여성으로 변한 야에를 향해 당시 보수적인 인사들은

그녀에게 일본 전설속에 나오는 요괴 ‘누에(사람얼굴 사자몸의 요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으나 그녀는 거리낌 없었음.

 

남편이 일찍 세상을 뜨자 일본 적십자사에 들어가 청일, 러일 전쟁 당시 간호사로 종군하였고

그 뒤에도 여러 사회복지 활동에 힘을 기울여 '일본의 나이팅케일’로 불림.

 

또 그 공적을 인정받아 황족 이외의 여성으로는 최초로 훈장을 수여 받기도 함.

만년에는 다도에 열중했던 그녀는 1932년 87세로 도시샤 묘지에 영면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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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혼 이후의 야에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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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야에 여사. 과거 무사 복장으로 사진을 찍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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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NHK 방송에서는 대하드라마 '야에의 벚꽃'을 방영함.

격렬한 삶을 살다 간 야에의 일생을 통해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후쿠시마 현 주민들을 격려하기 위한 프로그램 이었음.

 

나라가 망해도, 시대가 변해도 자신의 길을 걸은 그녀의 인생은 시대와 국가를 넘어 좋은 본보기라고 생각함.

11개의 댓글

2021.03.07

패했는데도 죽이진 않았네. 좋은 글 좋아요 오호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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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7
@냥냥왈왈

중세 이후엔 일본에서도 여자, 아이에 대한 학살은 자제하는 분위기였음. 대신 각 번의 친막부 성향의 무사들은 추방당해 촌구석으로 가다 죽거나 추방전에 줄줄이 처형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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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7

귀칼이 아니라 은혼이야!

개추박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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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7
@밀덕

아 그런가? 감사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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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 게임 하다보니 스펜서 7연발총 볼때마다 화가 치밀음 존나쎄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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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8
@모두예할때아니요함

미국은 건국부터 총기와 함께한 나라니까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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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8
@모두예할때아니요함

겜이름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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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짓폭력배

얼티밋 제너럴 시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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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8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자기인생을 멋지게 개척했네..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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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8
@Zobbaz

어느 시대나 한발짝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는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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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8

이거 재밌었는데 볼방법이 없음 넷플 왓챠도 없고 유플러스에도 없고 토렌트도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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