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 요약 - 2장

2장 환경 차이가 다양화를 빚어낸 모델 폴리네시아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의 잔혹한 충돌

뉴질랜드에서 동쪽으로 800km 정도 떨어진 채텀 제도에서 수세기에 걸쳐 살아오던 모리오리족은 1835년 12월에 갑자기 자유를 잃었다.

그 해 11월 19일 총과 곤봉과 도끼로 무장한 500명의 마오리족이 탄 배가 도착했고 이후 12월 5일에는 400명이 더 왔다.

마오리족은 모리오리족을 자신들의 노예라고 선언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을 죽여버리기 시작했다.

만약 모리오리족이 조직적으로 저항했다면 수적 열세의 마오리족을 물리칠 수 있었겠지만,

모리오리족은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전통이 있었기에 평화롭게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해결책을 전달하기도 전에 마오리족이 공격해왔고, 결국 모리오리족은 거의 대부분 죽거나 노예로 부려지고 죽었다.

 

이러한 결과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이었다.

모리오리족은 채텀 제도에 고립된 소수 수렵채집민이었기에 기술도 무기도 없었다.

그러나 뉴질랜드 북섬에서 온 마오리족은 농경민 사회에 속해 발전된 기술, 무기와 강력한 지도층의 지휘력도 있었다.

그러므로 모리오리족이 마오리족에게 학상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모리오리족의 비극은 현대 세계와 고대 세계를 막론하고 벌어졌던 수많은 비극과 마찬가지였다.

소름끼치는 것은 두 집단 모두 1000년경에 뉴질랜드로 이주했던 폴리네시아 농경민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두 집단은 헤어진 후 몇 세기에 걸쳐 서로 반대방향으로 발전했다.

모리오리는 수렵 채집 사회로 돌아갔고, 마오리족은 농경 사회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것이 결국 그 두 민족의 충돌 결과를 결정했다.

만약 이 두 섬의 사회가 각기 차등적으로 발전한 원인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각 대륙의 발전 양상이 서로 달랐던 이유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모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환경 적응역 연구를 가능하게 한 자연 발생적 실험

201.png

 

두 민족의 역사는 환경이 인간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단기간에 걸친 소규모의 자연 발생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본질적인 부분을 탐구하기에 앞서 독자는 우선 소규모의 실험을 통해 그러한 영향이 정말 의미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한 것으로 폴리네시아 지역을 탐구하는 것은 소규모 실험으로 판단하기에 적절하다.

 

폴리네시아 지역은 각기 그 면적, 고립성, 고도, 기후, 생산성, 지질적 생태적 자원 등이 크게 다르다.

기원전 1200년 경 뉴기니 북쪽 비스마르크 제도 사람들이 일부 섬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들의 후손들이 몇 세기가 지나 약 기원후 500년 경이면 거의 완수되었으며,

기원후 1000년 경 즈음 마지막까지도 무인도였던 곳들도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현대 폴리네시아인들의 궁극적인 조상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문화, 언어, 기술, 가축화 및 작물화된 동식물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폴리네시아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가 인간의 적응력을 연구할 수 있게 해주는 자연 발생적 실험인 셈이다.

게다가 그렇게 폴리네시아인들이 퍼져나간 이후에는 다른 부류의 이주민이 그곳에 밀려온 경우가 없어 변수로 작용하지도 않았다.

모리오리족의 운명은 그보다는 규모가 작은 실험인 셈이다.

 

채텀 제도는 한랭한 기후였기에 농경민이었던 모리오리족은 수렵 채집민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크기도 작아 2000명 가량만 살 수 있었고 근처에 섬이 더 있지도 않았기에 모리오리족은 소규모로 같이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했다.

그래서 모리오리족은 일부 남자 신생아의 성기를 거세하는 등 인구 과잉으로 인한 갈등을 줄였다.

대조적으로 뉴질랜드의 북섬은 기후가 좋아 농업을 하기에 적합했다.

마오리족은 점차 그 수가 늘어 10만에 이르렀고,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잦은 분쟁을 치뤘다.

잉여생산물도 저장할 수 있어 직업이 다양해졌고 정치체계도 고도화되었다.

그래서 모리오리족과 마오리족은 서로 조상이 같았지만 판이하게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가르게 된 셈이다.

 

폴리네시아의 다양한 환경적 변수

폴리네시아 전체로부터 우리는 환경의 영향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

폴리네시아 전체는 훨씬 더 폭넓고 다양한 환경 조건들을 포함하고 있다.

먹거리를 조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수렵 채집 뿐만 아니라 화전민, 집약적 식량 생산 등 매우 다양했다.

그곳의 식량 생산자들은 가축의 생산량도 달랐으며, 대규모 관개 시설을 건설하기도 하고 넓은 양어장을 만들기도 했다.

사회 역시 평등한 촌락사회로부터 계층이 세분화된 축에 드는 사회까지 다양했다.

정치 조직 면에서도 각각의 섬이 여러 개의 독립적 부족, 촌락 단위로 나누어져 있는 경우부터 원시 제국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유형 문화도 개인 용품을 제작하는 수준에서 석조 건축물 건립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러한 차이점들은 섬들 사이에 적어도 여섯 가지 환경 변수가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기후, 지질, 해양자원, 면적, 지형적 분열, 고립성이 그것이다.

그것들의 변동 범위를 검토해보자.

기후의 경우 열대부터 아열대, 온대, 한랭한 아남극성 기후까지 다양하다. 하와이의 경우 고산 기후도 있으며

강우량도 지구상 최고 기록인 지역(뉴질랜드의 피오르드 랜드, 하와이의 카우아이 섬의 알라카이 늪)도 있고 농업 한계선을 벗어날 정도의 건조 기후도 있다.

지질적 유형에는 환초, 융기 석회암, 화산섬, 대륙의 파편 또는 이것들이 혼합된 형태가 있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으로 담수가 많거나 적은 섬들로 나뉘기도 한다.

해양자원 면에서는 대부분 얕은 물과 암초로 둘러싸여 있고 환초 때문에 초호가 형성된 섬도 많다.

이런 곳은 해양자원이 풍부하지만, 이스터섬, 핏케언 섬, 마르키즈 제도 등 해안이 암벽으로 된 곳은 해산물 생산량이 훨씬 부족하다.

면적은 가장 작은 0.4km^2의 아누타 섬부터 27만 km^2의 뉴질랜드(대한민국 남한 지역 10.8만 km^2)도 있다.

같은 섬에서도 지형적인 분열이 있어 마르키즈 제도를 비롯한 일부 섬은

높은 능선과 가파른 절벽 때문에 주거 지역이 여러 개의 골짜기로 분리되어 있으며,

반대로 통가 제도와 이스터 섬은 지형이 완만하여 통행에 장애가 없다.

마지막으로 고립성도 있는데, 이스터 섬이나 채텀 제도는 크기도 작은데 다른 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인간 사회가 구성된 후에는 바깥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상태로 발전했다.

 

환경 요인에 따른 먹거리의 작물화 방법

다양한 환경이 폴리네시아의 여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확인해보자.

먹거리 문제는 다른 측면에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식량 사정부터 살펴보는 것이 편리하다.

폴리네시아인은 어획, 야생 식물, 바닥조개, 갑각류, 육서 조류와 바닷새 수렵, 식량 생산 등이 다양하게 혼합된 형태로 식량을 마련했다.

원래 대부분의 폴리네시아 섬에는 포식자가 없는 상태에서 진화한, 날지 못하는 대형 조류가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모아새와 날지 못하는 거위가 있다.

그러한 새들은 최초 이주민에게 중요한 식량 공급원이었다.

대부분 그러한 새들은 전멸하고 말았다.

바닷새들도 그 수가 급감하기는 했지만 일부 섬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식량 공급원으로 남아 있었다.

해양 자원은 모든 섬에서 중요한 것이었지만 이스터 섬, 핏케언 섬, 마르키즈 제도 등에서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폴리네시아인의 선조들은 돼지, 닭, 개의 세 종의 가축화된 동물을 들여왔지만 폴리네시아 내의 다른 동물을 가축화하지 못했다.

많은 섬들이 그 세 종은 존속시켰지만 고립성이 심한 섬들은 한 종 이상이 없어졌다.

그러나 이 세종의 가축은 간헐적으로 먹거리를 제공할 뿐이었으므로 폴리네시아의 식량생산은 주로 농업에 의존했다.

폴리네시아의 농작물들은 외부에서 처음 작물화되어 이주민들이 가지고 들어온 열대성 작물이었으므로

아남극성 위도에서는 농업이 불가능했다.

그 이외의 섬에서는 건조지 작물, 관개 작물, 과수 작물을 중심으로 농사를 지었다.

각 작물의 생산성과 상대적 중요성은 섬의 환경에 따라 제각기 달랐다.(담수, 기후, 토양의 질 등)

하와이는 부역을 통해 정교한 관계시설을 만들어 많은 양의 식량을 생산하기도 했고 양식업을 활용하였다.

 

인구 밀도가 폴리네시아의 정치, 경제, 사회의 다양화에 미친 영향

이렇게 환경에 따른 먹거리 변동이 심했으므로 인구밀도 역시 폴리네시아 각지에서 크게 달라졌다.

가장 낮은 것은 채텀 제도(1제곱마일 당 5명)와 뉴질랜드 남섬이고, 높은 곳은 1제곱마일 당 120명, 통가 사모아, 소시에테 지역은 210~250명, 하와이는 300명에 달했다.

이러한 인구 밀도는 정치적 단위의 면적 대비 인구 수로 이러한 정치적 면적은 하나의 섬보다 넓을 수도 좁을 수도 있다.

이것은 섬의 면적과 지형적 분열, 고립성에 따라 달라진다.

섬 내부에 강력한 장애물이 없는 고립된 섬의 경우 통상 섬 전체가 정치적 단위가 되었지만

그보다 큰 섬들은 정치적으로 통일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다만 통가, 사모아, 소시에테, 하와이 제도 등은 섬들 사이의 정치적 통일이 가능해 10000명 이상의 정치적 단위가 생겼으며 통가 제도의 경우 인구 40000명을 가느린 다도 제국이 탄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치적 단위의 인구 규모는 폴리네시아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

일반적으로 규모가 크고 밀도가 높을 수록 기술과 조직은 점점 복잡해진다.

규모가 큰 정치적 단위들은 많은 노동력을 동원하여 관개 기설이나 양어장 등을 건설해 식량 생산을 더욱 집약화 할 수 있었다.

 

인구 밀도 및 인구 규모와 관련하여 폴리네시아의 여러 사회에는 다음과 같은 다양성이 생겼다.

경제적 체제가 가장 단순한 섬은 인구 밀도가 낮거나 인수 수가 적거나 둘 다 적었다.

이러한 섬은 필요한 물건은 스스로 만들었으며 경제적 전문화도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전문화의 정도는 넓거나 인구가 밀집될수록 커졌으며, 사모아, 소시에테, 통가, 하와이 제도는 절정에 달했다.

 

사회적 복잡성도 다양했다. 이 점에서 채텀 제도와 환초섬들이 가장 단순하고 평등한 사회였다.

하와이 제도에서 절정에 달했는데 추장 계급도 세분화되어있었으며 추장들은 평민과 섞이지 않았다.

 

정치 조직도 동일한 경향을 띠었다. 채텀 제도와 환초섬은 의사 결정은 모두가 참여하는 토론을 통해 이뤄졌고 토지도 공동체 전체의 것이었다.

그러나 인구가 밀집되고 더 큰 정치적 단위에서는 추장에게 더 많은 권위가 집중되었다.

18세기에 유럽인들이 들어올 무렵 통가의 추장 사회나 국가는 이미 제도와 제도를 연결한 하나의 제국이 되어있었다.

하와이 역시 몇 개의 섬을 포함한 정치적 통일체가 되었지만 몹시 고립된 입지 때문에 하와이 제도에 국한되었다.

유럽인들이 하와이를 '발견'한 1778년 무렵에는 섬마다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있고 섬과 섬 사이의 정치적 통합도 부분적으로 시작된 후였다.

유럽인들이 들어온 이후 하와이 섬의 왕 카메하메하 1세는 각 섬을 빠르게 통합하여 하와이 제도를 통일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도구를 비롯한 유형 문화의 요소이다.

구할 수 있는 재료가 달랐던 점은 명백히 서로 다른 유형 문화를 이루었다.

채텀 제도에서는 수렵할 때 사용하는 곤봉이나 막대기 정도에 그쳤으나, 대부분의 섬은 낚싯바늘, 까뀌 등 여러 물건을 만들었다.

사회가 밀집될 수록 더욱 정교하거나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다.

 

각 대륙의 다양화를 야기한 환경적 차이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 사회는 각기 경제적 전문화, 사회적 복잡성, 정치적 조직, 유형 생산품 등이 크게 달랐다.

이는 인구 규모와 밀도에 관련되어 있었고, 그것은 다시 섬의 면적, 분열, 고립성, 식량 생산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 등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들로 인해 얼마 안되는 지표면적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그 사회의 차이점들이 다양하게 발전했던 것이다.

폴리네시아 내부의 그러한 문화적 차이의 범주들은 본질적으로 세계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나타난 것들과 일치한다.

물론 세계 전역을 놓고 본다면 폴리네시아보다 다양성의 범위가 훨씬 폭넓다.

석기에 의존하는 민족이 있기도 했지만 금속을 다루는 사회도 생겼고 유라시아와 아프리카 인들은 철을 사용하는 수준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폴리네시아에서는 그와 같은 발전이 전혀 없었다.

뉴질랜드를 제외하면 이렇다할 금속 매장량이 없었던 탓이다.

또한 통합된 제국이 출현하지 못했으며(유럽인들 등장 이후 하와이가 겨우 통합 제국을 구성), 고유 문자를 만들지도 못했다.

그러므로 폴리네시아는 전 세계 인류의 사회적 다양성에 대한 작은 한 부분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은 전 세계의 지리적 다양성에서 폴리네시아가 차지하는 부분이 작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일도 아니며,

폴리네시아는 지극히 최근에 이르러서야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므로 발전한 시간이 가장 오래된 사회도 3200년 정도에 불과하다.

만약 몇천 년 정도만 더 있었다면 통가, 하와이도 어엿한 제국 수준으로 발전했을 것이며,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은 금속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폴리네시아는 환경과 관련해서 인간 사회가 다양하게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게되는 것은 폴리네시아가 그랬으므로 그러한 관련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개연성 뿐이다.

과연 다른 대륙에서도 그랬을까? 만약 그렇다면 다른 대륙에서 다양화를 야기시킨 환경적 차이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으며 결과는 어떠했을까?

13개의 댓글

2020.06.10

너는 작성할 떄 사진은 별로 없긴한대 보통 읽판에 글쓰는 애들보면 사진 존나 풍부한데 어디서 가져오는거임?

그냥 머리속에 있는거 그떄 그때 구글링해서 적절한걸 찾아오는거임?

 

아니면 개인 Archive를 통해 보관하는거임?

0
2020.06.10
@뚜루랄

즉각적으로 난 찍어서 올리는건데 아참 사진 올리는거 까먹었다..

0
2020.06.11
@뚜루랄

글쓴이도 아니고, 읽판에 글쓰는 사람도 아니긴 한데 공유해봄. 난 연구원임.

 

윈도우 기준으로 GreenShot이라는 데스크탑 프로그램을 깔아 항상 켜지도록 설정하고, 단축키 시행해서 (나는 Alt + Shift + S) 원하는 부분 이미지 크롭할 때 (바로 복붙할 때를 위해)클립보드 복사 + Dropbox 특정 폴더에 저장하도록 세팅함. 물론 PrintScreen 키 눌러서 전체 화면 저장할때마다 들어가는건 Dropbox에서 기본적으로 특정 폴더에 들어가게 가능.

 

스마트폰, 태블릿의 경우도 사진 폴더를 기본적으로 Dropbox에 그냥 동기화 가능하게 할 수 있음.

 

이렇게 되면 뭔가 찾거나 볼 때마다 필요하다 싶은건 바로바로 단축키 눌러서 컴에서는 이미지 크롭, 나머지 기기에서는 인상깊을 때마다 스크린 화면 저장하게 하면 하루동안 본 모든게 Dropbox에 모이게 됨. 그럼 하루 일과 후 정리할 때 분류하고 싶은 이미지는 분류하고, 아니면 슥 보고 그냥 냅둠.

1
2020.06.11
@elomn

떙스

0
2020.06.11
@뚜루랄

그때 그때 무료 이미지를 쓰기도 하는데

보통 교사나 강사, 어떤 형태로든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들은 따로 보관하는 경우가 많음.

본인이 봤던 자료중에 양질의 자료(영상, 사진, 통계, 픽토그램, 뉴스, 사례, 문서 등등)들을 분류하거나 저장함. 찾기 쉽게 태그달고 저작권/출처 기록하기도 함. 논문 보다가 인용할만한 내용있으면 스크랩하고

그렇게 쌓인 자료들이 나중에 자산이 됨. 책이나 글을 쓸 때, 수업할때 참고자료로 쓰거나 등등

0
2020.06.11
@오징오징

보관하는 방식은 대부분 클라우드나 에버노트 노션 이런건 동일하려나?

0
2020.06.11
@뚜루랄

맘대로 하면 되지

에버노트나 클라우드도 괜찮고 그냥 usb나 외장하드에 폴더이름으로 분류하기도 하던데 돈들여서 나스쓰거나

논문같은경우엔 레퍼런스관리프로그램 쓰면 될거같고

책이랑 문서는 폰으로 스캔하고

웹페이지는 스크랩 프로그램이랑 플러그인도 있고 에버노트로 스크랩하거나

폴더관리프로그램으로 태그나 주석 달 수도 있고

저번에 보니까 야동관리프로그램도 있던데 요령껏하면 될듯

0
2020.06.11

총균쇠 두꺼워서 보다가 잠듬 ㅠㅠ

0
2020.06.11

총균쇠 읽은 후에 호주워홀갔는데

어보리진에대한건 틀렸다고 단언한다

인류라기엔 좀 다름 환경탓아니고 종특임

0
2020.06.11
@밀크씨슬

그 종특이 만들어지는게 수만년에 이르는 자연선택의 결과니까 환경탓 아님?

1
2020.06.11
@밀크씨슬

그 종특 자체가 자연환경 적응을 위해 변화했다는게 저 책의 내용임.

1
2020.06.11
@연구소노예

같은 호모사피언스가 아닌거 같음

0
2020.06.14
@밀크씨슬

-똥양-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1213 [역사] 지도로 보는 정사 삼국지 ver2 5 FishAndMaps 4 9 시간 전
1212 [역사] 군사첩보 실패의 교과서-욤 키푸르(完) 1 綠象 0 1 일 전
1211 [역사] 아편 전쟁 실제 후기의 후기 3 carrera 11 4 일 전
1210 [역사] 미지에의 동경을 그린 만화 8 식별불해 5 7 일 전
1209 [역사] 왜 사형수의 인권을 보장해야만 하는가 72 골방철학가 61 14 일 전
1208 [역사] 세계역사상 환경적으로 제일 해를 끼친 전쟁행위 17 세기노비추적꾼 12 19 일 전
1207 [역사] 송파장과 가락시장 5 Alcaraz 9 21 일 전
1206 [역사] 미국인의 시적인 중지 4 K1A1 17 22 일 전
1205 [역사] 역사학자: 드래곤볼은 일본 제국주의사관 만화 17 세기노비추적꾼 13 26 일 전
1204 [역사] 애니메이션 지도로 보는 고려거란전쟁 6 FishAndMaps 6 2024.03.13
1203 [역사] [English] 지도로 보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3 FishAndMaps 4 2024.03.08
1202 [역사] 지도로 보는 우크라이나 전쟁 2년 동안의 기록 9 FishAndMaps 12 2024.03.06
1201 [역사] [2차 고당전쟁] 9. 연개소문 최대의 승첩 (完) 3 bebackin 5 2024.03.01
1200 [역사] [2차 고당전쟁] 8. 태산봉선(泰山封禪) 3 bebackin 4 2024.02.29
1199 [역사]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이야기 3 에벰베 6 2024.02.28
1198 [역사] [2차 고당전쟁] 7. 선택과 집중 bebackin 4 2024.02.28
1197 [역사] [2차 고당전쟁] 6. 고구려의 ‘이일대로’ 2 bebackin 4 2024.02.27
1196 [역사] [2차 고당전쟁] 5. 예고된 변곡점 1 bebackin 3 2024.02.26
1195 [역사] [2차 고당전쟁] 4. 침공군의 진격 1 bebackin 3 2024.02.25
1194 [역사] [2차 고당전쟁] 3. 몽골리아의 각축 1 bebackin 5 2024.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