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람을 신경써라" : 독일노동전선사

 

 

 

 

1. 노동조합의 해산과 독일노동전선의 설립

 

 

바이마르 공화국의 각 노조들은 1933년 히틀러와 나치당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모든 개인이나 단체는 국가와 민족공동체라는 더 큰 공공이익의 성취를 위해 함께 노력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히틀러는 회사 및 지역별로 노동조합이 난립하고 있는 상황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1933년 5월 1일 노동절 행사가 끝난 직후인 5월 2일, 나치 정부는 독일 전역의 노동조합 사무소를 점거하고 모든 노동조합을 강제해산 시켰습니다. 대신 그들을 대체하기 위해 5월 6일, 로베르트 라이를 수장으로 하여 노사정 대타협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할 단체인 ‘독일노동전선(Deutsche Arbeitsfront, 약칭 DAF)’을 설립했습니다. 이 독일노동전선은 독일의 모든 노동자뿐 아니라 고용주, 기업가 등 계급에 관계없이 모든 국민의 가입을 강제했습니다. 이는 국가사회주의가 주장하는 ‘민족공동체’에서는, 계급간의 갈등과 투쟁보다는 계급을 초월한 협동 관계가 구축되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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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노동전선 설립 기념비.>

 

 

2. 노동자들이 이를 반긴 까닭

 

 

그런데 놀랍게도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강제해산을 당했는데 반발하기는 커녕 나치 정부의 지침을 반겼습니다. 그 까닭은 나치 등장 이전 독일 노동조합의 행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대공황기의 경제불안은 금융질서의 문란을 불러왔습니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고 강력한 금융통제를 실시하기 전까지는 그야말로 전혀 감독이 되지 않는 난장판이었는데, 노동자들의 출자로 이루어지는 노조 자금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노조 운영진들은 이 눈먼 돈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던 겁니다.

 

이러한 일이 만천하에 드러난 발단은 함부르크에서 벌어진 'V.G.G.V.-AG. 스캔들'이었습니다. 이 회사는 무역상사에게 보험을 판매하는 회사였는데, 회사 성격이 성격이니만큼 많은 자본을 운용했고 당연히 노조로 흘러드는 자금도 막대했습니다. 그런데 주 검찰의 수사에 의해, 이 노조의 대표이사가 자기 집을 사기 위해 노조 자금에서 38,467 제국마르크(현재가치 기준 한화 6억 7천만 원)를 횡령했던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이사는 집을 수리하겠다며 11,110 제국마르크(한화 1억 9천만 원)를 횡령했고, 1년 반도 채 지나지 않아 또 수리를 한다며 14,241 제국마르크(한화 2억 5천만 원)를 횡령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노조 경영진은 자기들의 식대 역시 노조 자금에서 충당했는데 저녁 식사 한 번에 704 제국마르크(한화 1200만 원)를 썼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노동자들에게 깊은 배신감을 안겨주었습니다.

 

'V.G.G.V.-AG. 스캔들'에 이어 더 엄청난 일이 브레멘에서 터졌으니, 브레멘 노조연합의 파산 사건이었습니다. 브레멘 노조연합 경영진은 노조 자금을 운용한다는 명목으로 여러 회사에 투자했는데, 문제는 회사의 경영 상태를 전혀 확인하지 않고 친분에 따라 투자했다는 점이었습니다. 브레멘 노조연합은 1927년에 '브레멘 Volkhaus G.m.b.H' 라는 회사에 200,000 제국마르크(한화 34억 8천만 원)를 투자했는데, 이 회사는 온갖 막장운영의 끝을 보여준 뒤 고작 3년만인 1930년에 파산해 버렸습니다. 이런 식으로 다음 해인 1928년부터 1932년까지 브레멘 노조연합이 공중으로 날린 돈은 846,000 제국마르크(한화 147억 2천만 원)에 달했습니다. 결국 브레멘 노조연합은 적자를 이기지 못하고 파산했는데, 이 와중에도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의 노조연합 이사 한 명이 자기 몫으로 98,000 제국마르크(한화 17억 원)를 챙겨서 드레스덴으로 도망쳤다가 체포되는 웃지못할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 손해를 고스란히 브레멘 노동자들이 떠맡아야 했던 것은 물론이구요.

 

1931년 2월 15일에는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인 융, 보프, 괴체, 베르트람의 4명이 베를린 고용사무소의 자금 80,000 제국마르크(한화 13억 9천만 원)를 횡령했다가 체포되는 일이 있었으며, 바로 그 직후에 독일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인 게마이너와 독일 공산당 노동자대표 게르케, 인쇄업자 리크가 서로 짜고 가짜 우표를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22,500 제국마르크(한화 3억 9천만 원)를 벌어들였던 사실이 들통나 체포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노동자들에게 노조에 대한 배신감과 불신, 나아가서는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회의감과 공화국 자체에 대한 염증을 느끼게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독일을 한 번 바꿔보겠다는 히틀러와 나치당에 대한 투표로 이어졌고,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인 신뢰를 스스로 잃어버린 독일의 노조와 공화국 체제는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3. 독일노동전선의 목표

 

 

이러한 노동자들의 변화에 대한 바람을 바탕으로 설립된 독일노동전선의 목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독일노동전선의 목표는 모든 독일인의 진실된 민족공동체와 생산공동체를 만드는 것에 있다. 그것은 모든 개인이 각자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고, 국가에 최대의 기여를 할 수 있을 만한 정신적, 육체적 상태로 국가 경제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ㅡ 1934년 10월 24일 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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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진 중인 독일노동전선.>

 

 

4. 독일노동전선의 성과 : ① 여가활동 제공

 

 

독일노동전선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특히 노동자들에게 여가활동의 기회를 준 것이었습니다.

 

1933년 이전에는 여행이라는 개념이 보편적이지 않았습니다. 재정적인 이유에 의해, 부자들만이 여행을 즐길 수 있었죠. 지멘스社의 베를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 대한 설문조사가 보여주듯이, 많은 노동자들은 여행을 가고 싶어했지만 실제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설문에 참여한 42,000명의 노동자 가운데 28,500명은 단 한 번이라도 휴일에 베를린 밖으로 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여행이 아닌 다른 레저 활동 역시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이랬던 상황 속에서, 독일노동전선이 이끌어낸 유급 휴가의 증대는 점차 새로운 경영 방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독일노동전선의 장악력과 의식있는 기업가들의 양심적 태도가 종종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노동자들의 유급 연차의 최소 보장 일수는 연 3일에서 연 6일로 크게 늘어났습니다. 여기에 젊은 노동자들은 추가로 며칠간의 휴가를 더 얻을 수 있었는데, 이는 나치가 조직한 여가 프로그램에 참가한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기업가들은 새로이 만든 휴가 프로그램을 통해서 자신들이 얼마나 나치 정책에 충성스러운지 증명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지요.

 

휴일의 증대는 또 생산의 증가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습니다. 레저와 레크리에이션 활동은 피곤한 노동자의 정신과 육체가 회복하는 것을 도왔고, 이는 생산능력의 증가로 이어졌습니다. 기업가들에게 이러한 정치적인 요구사항이 그 스스로의 경영 및 경제적 관심까지 만족시켜주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심지어 기업가들 중 나치 정책에 회의적이었던 사람들까지 유급 휴가를 늘려주는 것이 이전처럼 노조와 노동자를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것보다 훨씬 낮은 대가로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독일노동전선의 정책인 ‘즐거움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약칭 KdF)’ 조직의 레저 문화는 나치 정권의 성취를 계속해서, 그리고 분명히 증명해주고 있었습니다. ‘즐거움을 통한 힘’ 조직은 점점 대규모 여행 및 여가 산업까지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로베르트 라이가 나치 최고경제위원회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조직화된 레저 사업은 추가적인 정치 및 교육의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나치 덕분에 레저를 즐긴 노동자들이 더 나치 정부를 지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곧 ‘즐거움을 통한 힘’은 모든 종류의 레저 활동을 관장하게 되었습니다. 정기 무료 교향악단 콘서트로부터 남아메리카로의 유람선 여행까지, ‘화려한 저녁' 야유회로부터 영화관 초대, 스포츠 시설과 공공 해수욕장까지. 이 거대한 조직적 성취는 국민들에게 나치당이 약속했던 ‘삶의 즐거움’을 제공함으로써 사회 경관과 문화를 바꾸어 놓았으며, 무엇보다도 경제까지 활성화 시켰습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휴가를 떠나는 노동자들의 수는 1934년의 230만 명에서 1938년의 103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나치당이 마련한 레크리에이션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의 수는 1934년부터 1938년까지 910만 명에서 5460만 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이 수치는 거의 남녀노소 모두가 참여하고 있었던 것임을 보여줍니다. 1939년에는 ‘즐거움을 통한 힘’ 사업이 가져오는 경제효과가 25억 제국마르크에 도달했습니다. 독일노동전선의 효과와 그 인기는 결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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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정부가 노동자들을 휴가 보내기 위해 건조한 호화 여객선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 이름은 유대인에게 살해당한 스위스 나치당원 빌헬름 구스틀로프에서 따왔다. 이 배는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에 피난민과 부상병들을 싣고 항해하다가 소련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9,000명이 넘는 희생자들과 함께 차가운 발트 해 속으로 사라졌다.>

 

 

 

5. 독일노동전선의 성과 : ② 노동환경의 개선

 

 

독일노동전선은 전국의 산업현장에 나치당의 노동신탁위원을 파견했습니다. 이들은 국가사회주의 정책을 수용하도록 기업가에게 ‘충고’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나치당의 노동신탁위원들은 노동자의 복리후생 증진을 위하여 기업가들이 노동환경과 처우를 개선하도록 요구하고 이를 지원했습니다.

 

‘민족공동체’ 속에서 노동자와 기업가의 공통적인 관심은 노동현장에 형성되었습니다. 독일노동전선은 기업가들에게 노동현장에서 채광과 환기 환경의 개선, 형편없던 사내 식당 식단의 영양 개선, 샤워장, 탈의실과 노동자 라운지의 건설, 노동자용 사택, 체육관, 매점을 건설하는 등의 방법을 권고했습니다. 이외에도 독일노동전선은 공휴일과 법정 유급휴가일을 확대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정책은 여가활동의 증가가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들의 생산성을 끌어올렸기 때문에 기업가들에게는 증가된 그들 자신의 이익과 배당금을, 노동자들에게는 더 높은 수입(인센티브)과 훨씬 나아진 노동 환경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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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노동전선이 파견하는 나치당 노동신탁위원들. 검은 제복에 붉은 나치 완장까지 차고 군화를 신은 이들의 '충고'를 거절하기란 조금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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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노동전선은 노동현장이 너무 어두워 노동자들이 쉽게 피곤해지고 다치기 쉽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에 나치 정부는 효율적인 전구를 개발해 각지에 보급했는데, 밝아진 작업환경이 생산성을 향상시키자 나중에는 기업가들 스스로가 채광을 신경쓰기 시작했다.>

 

 

6. 독일노동전선의 성과 : ③ 사회보장제도

 

 

히틀러는 '민족공동체'의 운영을 위한 사회적 측면에서 기존에 민간과 국가가 제각기 따로 운영하던 난잡하고 비효율적인 사회보장제도를 통합하기를 원했습니다. 나치당이 마련한 새로운 ‘민족공동체 사회보장제도’ 에 따라 1936년 9월부터는 어린이 양육 보조금이 지급되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 12월에는 40세 이하의 모든 독일인이 연금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으며 1941년부터는 연금보험가입자에게 건강보험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이 제도의 실행은 독일노동전선이 맡고 있었지만, 제도가 확장되면서 점차 독일노동전선의 역량을 벗어나게 되자 그 역할은 제국고용노동성으로 넘어갔습니다.

 

 

 

 

7. 독일노동전선의 의의

 

 

이제 기업가들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폭력적인 데모가 없어도, 또 권총을 흔들면서 '충고'하는 나치당의 노동신탁위원이 없어도 자발적으로 노동자들을 훌륭히 대우하는 것이 모두에게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노동조합의 강제해산과 독일노동전선의 설립은 기업가들이 지닌 법적인 의무를 줄여주는 것도 아니었고, 기업가들이 자기 마음대로 노동자들을 착취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대신 그것은 ‘민족공동체’를 위한 봉사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이는 기업가와 노동자 모두가 직접 체감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독일노동전선의 정책은 점점 더 많은 노동현장에서 수용됐습니다. 1936년 말이 되면 19,000 개소, 즉 독일에 있는 모든 회사의 절반 이상이 이 목적으로만 총 2억 제국마르크를 투자했다는 조사로 증명됩니다(오토 마렌바흐 著, ‘승리의 기초, 1933년부터 1940년까지 독일노동전선의 성과’ p.3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출비용의 총합은 기업가들이 얻은 이익에 비하면 훨씬 적었기 때문에 기업가들은 흔쾌히 받아들이는 수준을 넘어 점점 더 많은 비용을 투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세계사에 전례없는 투자자본회수율의 엄청난 증가로 이어졌지요.

 

오늘날은 당시의 기록에 대한 심층적인 조사 없이는, 이러한 정책의 효과를 이해하기란 그리고 따라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입니다.

 

"나는 사회주의자다. 나는 기계를 유지하고 다루는 것에 신경쓰느라 가장 훌륭한 노동의 대표자들, 즉 사람들 스스로를 낭비하는 일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36개의 댓글

2019.10.30

하지만 게르만 민족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혜택들이었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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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오스만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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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저런 정책들 펼쳤으면 동시대의 많은 독일인들이 나치 지지하는 게 당연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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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개드립ㅅㅂ

당장 지금이라도 스트롱맨 리더가 저런 노동복지정책에다가 반이민족 정책 펼치면 지지자들 엄청 많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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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1
@오지조웰

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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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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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글 잘 읽고있습니다. 선생님, 개인적으로 히틀러 자서전인 나의투쟁을 몇번식 읽었는데요. 히틀러가 서술한 사상이 히틀러 개인의 것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였다는게 참 아이러니 합니다. 거기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국가 사회주의는 굳이 히틀러가 아니더라도 독일에서 실현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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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힐과행복을드려요

그 점은 저도 많이 생각해 보았던 부분입니다. 과연 히틀러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나치같은 정당이 등장할 수 있었을지, 또 제 2차 세계대전이 과연 일어났을 것인지....물론 제 개인적인 소견일 뿐입니다만 저는 히틀러가 없었다면 역사의 물줄기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레닌은 오직 생산의 증대만이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이며 그 속에서 공산주의의 승리가 필연적으로 얻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공산주의는 실패했고, 우리는 역사를 이끄는 것은 물질 뿐 아니라 개개인의 의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히틀러가 한 일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부정적인 측면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상기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게 "히틀러가" 한 일이라는 겁니다. 좋든 싫든 그 역사는 히틀러가 써내려갔고, 그 선택은 히틀러의 것이었으며, 그 평가는 히틀러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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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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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히틀러때 복지 좋았다고 하니까 무식한 개붕이들한테 다굴당했는데

근대유럽 사회주의의 교과서가 히틀러라고 해도 아무도 안믿는다. ㅅㅂ

2차대전 끝나고 전세계가 히틀러의 케인즈 따라했다고 말해도 안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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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그래서 히틀러가 타노스처럼 필연적인 존재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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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진짜 악의 제국 그 자체네. 마징가 보면 악당이 직원 복지 잘해주잖아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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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궁금한게 있는데 더이상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합치려고 하지 않나욤?

 

같은민족 같은언어 같은문화인데 다른나라라는게 너무신기해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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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여동생과마구한닷

통일된 독일인의 국가를 만들자는 주장은 나폴레옹 전쟁기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후 '독일인 만으로 이루어진 독일', 즉 소독일주의의 맹주 프로이센(호엔촐레른 왕가)과 '타민족까지 포용하는 독일', 즉 대독일주의의 맹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합스부르크 왕가)이 격돌하면서 보오전쟁이 터지게 됩니다.

 

결국 프로이센이 보오전쟁에서 승리하고 뒤이은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마저 꺾으면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독일이 결집되어 독일 제 2제국이 성립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제 2제국의 건설에 참여하지 않았죠.

 

제 1차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어 오스트리아 내 독일계 지역에서 오스트리아 제 1공화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독일연방의 일원이 되고자 했으나 승전국들의 반대로 홀로 떨어져 나온 공화국이 되어 버렸습니다.

 

"어차피 다른 민족들은 제국 해체와 함께 떨어져 나갔으니 독일과 통일하자"는 주장이 대다수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여론이었지만 오스트리아 정치인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계는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CSP)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로마 가톨릭을 지지기반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은 프로테스탄트 성향이 강했으므로 독일과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기독사회당은 권력을 잃게 될 것이 뻔했습니다. 거기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 해외 세력의 압력까지 있을테니 오스트리아 정치인들로서는 독일과의 통일이 '손해보는 장사'였던 셈이죠.

 

그러나 그것이 한 번 불붙은 통일 여론을 잠재울 수는 없었고,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독일과의 통일을 주장하는 오스트리아 나치당에게 표를 몰아주게 됩니다. 점차 기고만장해진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통일을 반대하는 정치인들에게 테러까지 벌이게 되었죠. 궁지에 몰린 기독사회당 정치인들은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포함한 야당들을 강제해산까지 시키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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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여동생과마구한닷

이즈음 히틀러의 외교적 성과 덕분에 한사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일을 반대했던 이탈리아가 친독 노선으로 갈아탔고, 영국 역시 독일과의 관계개선에 나서면서 통일을 가로막는 해외세력은 일소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고무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또다시 활동을 개시했고 기독사회당은 이번에도 강제로 이를 억누르려고 했습니다. 이에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히틀러에게 구원요청을 타진했고, 히틀러는 독일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로 독일군을 전개했습니다.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독일군의 주둔을 반겼으며 국민투표 결과 97%의 찬성을 얻으면서 독일과 통일, 바야흐로 통일된 독일인의 국가인 '독일 제 3제국'이 탄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또 패전하면서 모든 것은 도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처럼 나라가 쪼개지는 것만은 면하기 위해 재빨리 영구중립국 선언을 했으며, 다시는 독일과 통일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렇게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일과의 통일 의식마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특히 종교의식이 옅어져 독일과의 종교적 차이가 큰 상관이 없어졌고 독일에 붙는 것이 경제적으로 큰 이득이 되기에 다시금 통일론이 고개를 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한편 이탈리아 내의 독일계 지역인 남티롤 지방에서도 같이 통일을 주장하고 나서는데, 2017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이 지방의 독일인들에게 오스트리아 국적을 주겠다고 주장하면서 통일론이 약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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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ksgemeinschaft

그시대에는 종교적인 차이가 있었군뇨.. ㅎㅎ.. 선생님 참 박식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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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여동생과마구한닷

그나마 새로운 지지기반이 될 수 있는 독일내 가톨릭교도와 보수주의자들은 이미 독일 가톨릭중앙당에 몰표를 던지고 있었으니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 입장에서는 통일해봤자 좋을 게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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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ksgemeinschaft

선생님 그러면 주테텐란트같은 독일계 민족이 사는지역은 왜 체코땅이었던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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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과마구한닷

오헝제국에서 떨어져나가면서 체코땅이 된거구나 ㅇ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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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여동생과마구한닷

그것은 동방식민운동의 영향입니다. 신성로마제국 시절부터 독일인들은 동쪽으로 생활 영역을 확장해나가기 시작했고, 때로는 무력으로 때로는 평화적으로 오늘날의 체코ㆍ슬로바키아ㆍ헝가리ㆍ발트 3국ㆍ폴란드, 멀리는 우크라이나ㆍ러시아 지방에 정착하였습니다.

 

이들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계속 독일어를 사용하며 독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마침 히틀러가 독일인의 국가를 만들자는 주장을 내세우자 이에 크게 호응하여 분리독립 운동을 벌였습니다. 이를 진압할라치면 히틀러가 그들을 구해주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버리는 식이었죠.

 

그러나 이들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각국에서 배신자로 단단히 낙인찍혔고, 학살과 약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어떻게든 서쪽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고 이 시기에 총 1,500만 명이 고향을 등지고 현재의 독일 영토로 이주해 왔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빌헬름 구스틀로프 호 역시 이렇게 도망쳐온 독일인들을 실어나르다가 격침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작전명 '한니발' 아래에서 해군원수 카알 되니츠의 지휘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부터 독일의 영토였던 동프로이센 등지에는 여전히 많은 독일인이 남아있었습니다. 하지만 전후 소련이 폴란드 동부 영토를 가져가는 대신 원래 독일 땅인 그 곳을 대신 폴란드에게 주면서 폴란드 국경선은 오더-나이세 강까지 확장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던 독일인은 소련의 강제혼혈정책, 독일어 금지정책 등으로 인하여 지금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한편 서독은 패전으로 다른 나라에서 독일인이 쫓겨난 것은 이해해도 원래 독일 영토인 동프로이센을 폴란드가 가져가버린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발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서독의 교과서나 지도에는 동프로이센이 독일 영토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동프로이센을 포기하고 오더-나이세 강 국경선을 인정하자고 말했다가 매국노로 욕을 얻어먹고 내각 불신임을 당할 뻔하기도 했죠.

 

그러나 이미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소련의 탄압으로 독일인이 모두 소멸한데다 동독과의 통일만이라도 얻어내야 했기에 1990년 동프로이센을 완전히 포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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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ksgemeinschaft

쾨니히스베르크같은곳은 독일에게는 역사깊은 장소지만 지금은 넘의땅이 되버린게 참 안쓰럽네용 선생님 감사합니당 잘읽었어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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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여동생과마구한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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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유대인이랑 러시아만 안 건드렸으면 퓌러소리 죽을때까지 들으면서 약이나 빨았을텐데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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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1
@도희

유대인과 공산당을 적으로 돌려서 지지도를 올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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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아니 슨상님은 전공이 어떻게 되시길래 유럽 이념사를 이렇게 까지 잘 알고 계실까요....... 혹시 철학과 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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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1
@뭘로해야되냐

이과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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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0

낚찌쌤 오랜만이애양 기다렸다퓨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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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조씨 유럽근현대사관련해서 재밌는책 추천해주실수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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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1
@읽을거리판놀이터

「도이치 現代史」 :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전후 독일 현대사를 다루는 책입니다.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2편」 :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18~19세기사에 대하여 맑스와 엥겔스가 직접 쓴 글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저씨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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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ksgemeinschaft

ㅎㅎ 고마워여 옛날얘기해주는 삼촌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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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1

이런거 어떻게 다 아는거야? 이 주제로 논문 썼나;?

그냥 내용만 복붙한게 아니라 글쓴이가 한번 이해하고 소화시켜서 재구성한 티가 나네. 그래서 글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잘 이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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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1
@Awrfs757fswr

이 분야에 관심이 있어서 연구하다보니 여러모로 알게 된 걸 나누어보자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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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31

20세기 초중반 나치 얘기 너무 좋다, 왜냐면 현 시대에도 시사하는 바가 정말 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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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1

독일이 저 시대에도 알앗던 걸 소련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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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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