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사분석]노비에 관한 명나라와 조선의 차이

먼저 조선의 노비제는 16세기에 최대 피크를 찍었다.

또 비슷한 시기 명나라는 어떠했는지 실록과 뉴스기사의 내용을 통해 대강 알아볼 것이다. 

 

 

 

21175536552696500E.png

아래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실록에 기록된 선조의 넋두리다. . 

 

장수에 있어서도 고려 때에 미치지 못한다. 고려 말 홍건적(紅巾賊)의 난 때 정세운(鄭世雲)은 20만의 군사로 천수문(天壽門고려 수도 개경) 밖에 결진하여 포위하고 공격함으로써 끝내 대첩을 거두었다. 우리 나라에서야 어디에서 20만의 군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는 사람의 수효가 전조(고려왕조)보다 부족한 것이 아니라 공사천(公私賤)(공노비와 사노비)은 날로 번성하는데 반해 군졸의 액수는 날로 감축되기 때문이니, 호령과 군정 또한 전조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사의(私意)로 헤아려 보건대 송(宋)나라 조정과 너무도 비슷하다

 

선조 실록 191권, 선조 38년 9월 28일 기해 1번째 기사

 

물론 원균을 1등 공신이라고 어거지를 쓴 선조답게 그의 개인적인 송나라에 대한 해석은 약간 틀린 부분이 있다. 

 

 


조선인의 명나라 노비제 기사 

출처 https://news.joins.com/article/22515256

 

중국에서는 이미 송나라 때부터 신분 차별이 크게 완화되기 시작했다. 북송(960-1126) 시대 초기부터 과거 시험에 누구나 응시할 수 있게 했다. 신분보다 실력을 중시한 획기적 조치였다. 중국의 앞선 문물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요즘의 시진핑 정권이 보여주는 시대착오적 독재 행태와 착각해서는 안 된다. 15세기 명나라 때는 지배계층인 ‘신사(紳士)’의 각종 특권도 제한했다. 과거 급제자 본인 1세대에 한해서만 면세특권 등을 허용했고 세습을 금지했다. 신분 차별적인 주자학을 비판하며 왕수인(1472~1528)이 양명학을 주창한 것도 이 무렵이다. “길거리에 가득한 백성들이 모두 성인(聖人)이다”(『전습록』)는 양명학의 요지는 시대의 흐름을 대변하면서 공맹 유학의 본령이 무엇인지를 환기시켰다. (오금성, 『국법과 사회관행』 『모순의 공존』) 

 

 

1489721215260.png

주)조선시대는 전반적으로 양명학과 주자학은 다양한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적어도 양명학은 조선에서 내재발전된 성리학과는 차이가 있는듯하다.또 성악이건 성선이건 성악혼재건 도가적이건 불가적이건 중국의 유학은 인간의 선함에대해 비교적 큰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인간을 해석하려 했다.

이는 양명학과 기독교의 분석에 개인적인 생각을 쓴 명나라시기 마테오리치의 저작이 양명학이 유행하던 중국에서 인기를 끈 이유와도 같다고 생각한다.   https://www.dogdrip.net/195309204

 

다시 기사글로 돌아가서 조선인의 눈으로 기록한 명나라의 노비문제를 보자

 

명나라 때는 또 과거에 합격한 신사만 노비를 소유할 수 있게 했다. 아무리 돈 많은 부자라고 해도 법적으로 노비를 소유할 수 없었다. 부자들은 양자와 양녀를 들여 노비처럼 부리기도 했지만 그들은 일종의 계약제로 언제든 신분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분세습을 전제로 한 노비와는 달랐다. 청나라 강희-옹정-건륭제를 거치며 당시 조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별이 완화되었고 1750년대 들어서는 법적으로 노비 소유가 금지되었다. (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94쪽) 
  

 

임진왜란 의병장 중봉 조헌(1544~1592)이 일찍이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북경을 다녀온 후 선조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東還封事’·1574)에서 명나라의 신분제 실상을 알렸다. 조헌은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는 명나라를 본받을 것을 제안하면서, 조선에서도 공·사노비를 양민화해 징병자원을 증대시키면 20년 뒤 100만의 정예 병사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족문화추진회, 『연행록선집Ⅱ』) 
  
실학의 시조 유형원은 『반계수록』(1670년)에 조헌의 ‘동환봉사’를 세 번이나 인용했다.(‘勿限門地’, ‘奴隸’) 유형원 스스로 “중국에는 노비가 없고 모든 용역에 임금노동자(雇工)가 쓰인다”고 서술하기도 했다. 이익도 이미 중국에는 신분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다음과 같이 단언한 것으로 보인다. “노비가 세습되는 것은 또한 고금에 사해를 통틀어 있어본 적이 없다”(『성호사설』). 이들이 중국의 노비제 폐지 사실을 몰랐다면 시세의 흐름에 무척 어두웠다고 할 수 있겠고, 알고 있으면서도 조선의 노비제 폐지에는 눈을 감았다면 이들은 ‘시대의 선각자’가 아니라 시대의 진실 은폐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황태연,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65~73쪽) 
  

주)물론 16세기까지는 노비가 인구구성비에 있어 최고조였고 17세기부터 차츰 줄어들기 시작한다.

때문에 노비 감소에 대한 요구는 16세기가 더 적극적이었던 걸로 보인다. 

 

 

정약용은 점진적 노비 유지 입장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은 어떨까. 정약용은 1731년(영조7) 노비종모법을 실시한 이래 노비가 감소하자 이를 비판하며 오히려 그 이전의 악습인 일천즉천(부모 중 한 사람이 노비면 그 자식도 노비) 방식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신해년(1731) 이후 출생한 모든 사노(私奴)의 양처(良妻·양인 신분의 처) 소생은 모두 어미를 따라 양인이 되게 하니, 이때부터 위는 약해지고 아래가 강해져서 기강이 무너지고 민심이 흩어져 통솔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노비법을 복구하지 않으면 어지럽게 망하는 것(亂亡)을 구할 수 없을 것이다.” (『목민심서』 ‘辨等’) 
  

정약용이 살던 18세기에는 노비가 큰 폭으로 줄어들기 시작하지만 노비제 유지에 대한 목소리는 여전히 유효 했다.

 

Great_philosopher_Wang_Shouren.jpg

        왕수인(호:양명) 센세.. 

주)양명학의 아버지 왕수인은 늘 인간에게는 선할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했다.또 길거리의 모든 백성이 성인(聖人) 이라는 왕수인의 전습록(傳習錄)의 표현이나 사람이 쓰러지면 달려가 부축하는 행인들을 보며 사소한 측은지심이나 배우지 않아도 남을 돕는 사례를 집대성해 양지(良知)의 범주에 넣어 인간을 유니콘 같은 가능성의 동물로 묘사한게 양명학의 핵심이다.  

때문에 평등을 중요시하고 서로 돕는 공동체적 성격도 강조한다고 볼수 있다.   

(다만 명나라 시대에도 교육에 대한 남녀평등은 터부시 하는부분이 있어서, 이탁오와 같은 여성의 학습을 권장한 사람은 옥고를 치르던중 사망하기도 했다) 

사담이지만 양명학을 본받아 인터넷이라고 해도 상대는 선할 것이라 믿고 쓸데없는 욕설은 점진적으로 지양해보도록 하자. 

 

 

주)노비나 소작농의 역사적 실태는 자유민주주의 국민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고, 전쟁이나 천재지변과 같은 예외상태에 의한 복고시대로의 회기가 오더라도 절대 모방해서는 안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노비에 대한 문제는 국내 교과서에서 다루는 부분보다 경각심을 두고 봐야 한다고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4개의 댓글

Ol6
2019.04.14

잘 읽었습니다

0
2019.04.14

노비문제는 역사에서 크게 다루었으면 함

0
2019.04.14

시진핑은 법가 그 자체인데

0
2019.04.18

도올 새끼 나와서 ㅉㅉ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1208 [역사] 송파장과 가락시장 5 Alcaraz 6 1 일 전
1207 [역사] 미국인의 시적인 중지 2 K1A1 12 2 일 전
1206 [역사] 역사학자: 드래곤볼은 일본 제국주의사관 만화 16 세기노비추적꾼 13 6 일 전
1205 [역사] 애니메이션 지도로 보는 고려거란전쟁 6 FishAndMaps 6 16 일 전
1204 [역사] [English] 지도로 보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 3 FishAndMaps 4 21 일 전
1203 [역사] 지도로 보는 우크라이나 전쟁 2년 동안의 기록 9 FishAndMaps 12 23 일 전
1202 [역사] [2차 고당전쟁] 9. 연개소문 최대의 승첩 (完) 3 bebackin 5 28 일 전
1201 [역사] [2차 고당전쟁] 8. 태산봉선(泰山封禪) 3 bebackin 4 29 일 전
1200 [역사]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이야기 3 에벰베 6 2024.02.28
1199 [역사] [2차 고당전쟁] 7. 선택과 집중 bebackin 4 2024.02.28
1198 [역사] [2차 고당전쟁] 6. 고구려의 ‘이일대로’ 2 bebackin 4 2024.02.27
1197 [역사] [2차 고당전쟁] 5. 예고된 변곡점 1 bebackin 3 2024.02.26
1196 [역사] [2차 고당전쟁] 4. 침공군의 진격 1 bebackin 3 2024.02.25
1195 [역사] [2차 고당전쟁] 3. 몽골리아의 각축 1 bebackin 5 2024.02.24
1194 [역사] [2차 고당전쟁] 2. 당나라의 ‘수군혁명’ 4 bebackin 9 2024.02.23
1193 [역사] [2차 고당전쟁] 1. 서설 & 참고문헌 목록 2 bebackin 6 2024.02.23
1192 [역사] 광개토대왕의 정복 전쟁 애니메이션 맵 14 FishAndMaps 5 2024.02.16
1191 [역사] 비트코인 화폐론, 나무위키를 곁들인. 23 불타는밀밭 14 2024.02.13
1190 [역사] 역사) 한산, 망국을 막아낸 전투. 5 2NAUwU 7 2024.01.30
1189 [역사] 해리 터틀도브의 대체역사소설 열전 시리즈 1부 5 식별불해 6 2024.0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