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천학문답(天學問答) -안정복

천학문답(天學問答) -안정복 

 

예수교 뼈 부러트리는 조선 유학자

 

에 나온 천학문답 번역문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근래의 이른바 천학이라는 것이 옛날에도 있었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있었다.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지상의 사람들에게 참된 진리를 내리셨으니, 그 변함없는 본성을 따라서 그 올바른 도리를 실천한다면’ 하였으며,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문왕(文王)께서는 삼가고 조심하여 상제를 잘 섬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이 유업(遺業)을 보전하리라.’ 하였으며, 공자(孔子)는 ‘천명(天命)을 두려워한다.’ 하였으며, 자사(子思)는 ‘하늘이 명한 것을 일러 성(性)이라 한다.’ 하였으며, 맹자(孟子)는 ‘마음을 보존하여 본성(本性)을 배양하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일이다.’ 하였다. 우리 유자(儒者)의 학문 또한 하늘을 섬기는 것에 불과하다. 동중서(董仲舒)가 이른바 ‘도(道)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온 것이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유자의 학문이 진정 하늘을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대가 서사(西士)의 학문을 배척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이른바 하늘을 섬기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지만 이쪽은 정당하고 저쪽은 사특하다. 그래서 내가 배척하는 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 서사(西士)가 동정(童貞)의 몸으로 수행을 하는 것은 중국의 행실이 독실한 자들도 능히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또 지식과 이해가 뛰어나서 하늘의 도수를 관측하고 역법(曆法)을 계산하며 기계와 기구를 만들기까지 하였는데, 아홉 겹의 하늘을 환히 꿰뚫어 보는 기구와 80리까지 날아가는 화포(火炮) 따위는 어찌 신비스럽고 놀랍지 않겠습니까. 우리 나라 인조(仁祖)때 사신 정두원(鄭斗元)이 장계하기를, “서양 사람 육약한(陸若漢)이 화기(火器)를 만드는데, 80리 떨어진 곳까지 날아가는 화포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였다. 약한은 바로 이마두(利瑪竇)의 친구이다. 그 나라 사람들은 또 능히 온 세계를 두루 다니는데, 어느 나라에 들어가면 얼마 안 되어서 능히 그 나라의 언어와 문자를 통달하고, 하늘의 도수를 측량하면 하나하나가 부합하니, 이는 실로 신성한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이미 신성하다면 왜 믿을 수 없단 말입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것은 과연 그렇다. 그러나 천지의 대세(大勢)를 가지고 말한다면, 서역은 곤륜산(崑崙山) 아래에 터를 잡고 있어서 천하의 중앙이 된다. 그래서 풍기(風氣)가 돈후하고 인물의 체격이 크며 진기한 보물들이 생산된다. 이것은 사람의 배안의 장부(臟腑)에 혈맥이 모여 있고 음식이 모여서 사람을 살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중국으로 말하면, 천하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양명(陽明)함이 모여드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런 기운을 받고 태어난 자는 과연 신성한 사람이니,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주공(周公)·공자(孔子) 같은 분들이 이들이다. 이것은 사람의 심장이 가슴 속에 있으면서 신명(神明)의 집이 되어 온갖 조화가 거기서 나오는 것과 같다. 이를 미루어 말한다면, 중국의 성학(聖學)은 올바른 것이며, 서국(西國)의 천학은 그들이 말하는 진도(眞道)와 성교(聖敎)일지는 몰라도 우리가 말하는 바의 성학은 아닌 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무슨 말입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오직 이 하나의 마음만이 천성에 근본을 둔 것이다. 만약 이 마음을 붙잡아 보존하여 그 본성을 보지(保持)함으로써 우리 상제(上帝)께서 부여한 천명(天命)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하늘을 섬기는 도리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굳이 서사처럼 밤낮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지난 잘못의 용서를 빌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구하기를 무당이 기도하는 듯이 하면서 하루에 다섯 번 하늘에 예배하고 7일에 하루를 재소(齋素)를 해야만 하늘을 섬기는 도리를 다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세상에는 세 가지 교가 있으니, 유교와 불교와 도교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사가 ‘천(天)’으로 그 학(學)을 이름한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성인의 도는 하나일 뿐인데 어찌 세 가지 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삼교(三敎)란 이름은 후세의 속견에 끌린 것이다. 불(佛)은 서방의 교로서 인간의 윤리를 끊어 없앴고, 도(道)는 현세를 벗어난 교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도리와는 무관하다. 그런데 어찌 유교와 함께 비교하여 같은 차원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서사가 천으로 그들의 학을 이름지은 것은 그 뜻이 이미 참람하고 망령스럽다. 대개 서역 지방에서는 예로부터 이학(異學)이 마구 일어나서 불씨(佛氏) 이외에도 갖가지 교가 많았으니, 《전등록(傳燈錄)》 등의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서사들이 천이란 말을 쓴 뜻은, 더할 수 없이 높은 것이 천이므로 천이라고 말하면 다른 교들이 감히 겨룰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인바, 이는 마치 천자(天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려는 것과 같은 의도로서, 그 계산이 또한 교묘하다 하겠다. 우리 유교로 말하자면, 성인이 하늘의 뜻을 이어서 천자가 되어 하늘이 할 일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것으로서, 질서를 세우고 토벌을 명하는 일들이 하늘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 없으니, 모두가 천명(天命)의 유행(流行)이다. 어찌 굳이 ‘천’이란 말을 써서 그 학(學)에다 이름을 붙여야만 진도(眞道)가 되고 성교(聖敎)가 되겠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서사 이외에는 다시 천을 말한 자가 없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묵자(墨子)》에 천지편(天志篇)이 있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모두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득을 주어서 반드시 상을 받게 되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자는 각자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 해를 끼쳐서 반드시 벌을 받게 된다. 삼대(三代)의 성왕(聖王)인 우·탕·문·무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여 상을 받은 자이며, 걸(桀)·주(紂)·유(幽)·여(厲)는 하늘의 뜻을 거역해서 벌을 받은 자들이다. 그 일로 말하자면, 위로는 하늘을 높이고 중간으로는 귀신을 섬기며 아래로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늘이 사랑하는 것을 다같이 사랑하고, 하늘이 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을 다같이 이롭게 한다.’ 하였으니, 이것이 묵자가 하늘에 대하여 말한 것으로서, 다같이 사랑하고 다같이 이롭게 한다는 것이 그 근본 강령이다. 서사의 ‘원한을 잊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다같이 사랑하라[兼愛]는 것과 다름이 없으며, 자신을 단속하여 고통을 견디는 것은 묵자의 상검(尙儉)과 서로 같다. 다만 서로 다른 것은, 묵자는 현세(現世)로써 하늘을 말하였고 서사는 후세(後世)로써 하늘을 말하였으니, 묵자에다 비교한다면 한층 더 궤탄(詭誕)하다. 대개 서학(西學)에서 후세를 말한 것은 전적으로 불씨(佛氏)의 여론(餘論)이며, 사랑과 검박(儉朴)을 말한 것은 묵씨의 지류(支流)이다. 이것이 어찌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를 배운 자가 익힐 바이겠는가. 오늘날의 이른바 유자(儒者)는 일찍이 도불(道佛)의 천당·지옥에 관한 설과 묵씨의 겸애론(兼愛論)을 비판하였으면서, 유독 서사의 말에 대해서만은 변별(辨別)하지도 않고서 곧장 말하기를, ‘이것은 천주를 모시는 교이다. 중국의 성인이 비록 존귀하지만 어찌 천주를 능가할 수 있겠는가.’ 한다. 미치광이처럼 거리낌없이 함부로 말하는 것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耶蘇]는 세상을 구제하는 사람을 이름한 것이니, 성인이 도를 행한 뜻과 다른 점이 없을 듯합니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예수의 세상에 대한 구원은 전적으로 후세에 관한 것으로서 천당과 지옥의 설을 통하여 이를 권면하고 징계하지만, 성인이 도리를 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현세에 관한 것으로서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을 통하여 교화를 펼쳐나간다. 그러니 그 공사(公私)의 차이가 자연히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설사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실제로 천당과 지옥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현세에 살면서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여 행실이 온전하고 덕이 갖추어진다면 틀림없이 천당으로 갈 것이며, 선을 버리고 악을 행하여 행실이 옳지 못하고 덕이 없다면 틀림없이 지옥으로 갈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현세에 사는 동안에 열심히 선을 실천하여 하늘이 내려준 나의 참된 천성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그뿐이지 어찌 털끝만큼인들 후세의 복을 바라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겠는가. 정자(程子)가 말하기를, ‘석씨(釋氏)는 사생(死生)을 초탈하여 오로지 자기 개인의 사적인 일만 추구한다.’ 하였으니, 천학(天學)이 지옥을 면하기를 기구하는 것은 자기 일신만을 위하는 행위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고금에 천학을 말한 자가 없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추연(鄒衍)이 있었고 아조(我朝)에 와서는 허균(許筠)이 있었으니, 그 내용에 대하여 듣고자 합니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추연의 하늘에 대한 논의는 너무 한만(汗漫)하여 헤아리기가 어렵고 귀결되는 곳이 없어서 서사들의 천도(天度)와 지구(地毬)에 대한 논의가 착착 들어맞는 것 같지 않다. 허균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했으나 행실이 전혀 없어서 거상(居喪) 중에 고기를 먹고 아이를 낳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비루하게 여겼었다. 그래서 스스로 사류(士流)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음을 알고 불교에 귀의하여 밤낮으로 부처에 예배하고 불경을 외우면서 지옥을 면하기를 기구하였다. 그러면서 부르짖기를, ‘남녀간의 정욕은 하늘이 준 것이고, 윤리와 기강을 분별하는 일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은 성인보다 높으니, 차리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다.’ 하였다. 이래서 당시에 그의 문도(門徒)가 된 문사(文詞)깨나 하는 경박한 자들이 천학에 대한 설을 제창했으니, 그 실체가 서학과는 하늘과 땅처럼 달라서 같이 비교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대개 학술에 차질이 빚어지면 모두 이단으로 떨어지게 되므로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노담(老聃)·불씨(佛氏)·양주(楊朱)·묵적(墨翟)이 모두 틀림없이 신성한 자들이었지만 끝에 가서는 결국 허무적멸(虛無寂滅)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한 교리로 귀결되고 말았다. 왕양명(王陽明)은 유학을 크게 창도(倡道)했지만 그 내면은 실제로 이단이었다. 그래서 그의 문도인 안산농(顔山農)이란 자는 한 개의 ‘욕(欲)’자로 법문(法門)을 삼았고, 하심은(何心隱)이란 자는 한 개의 ‘살(殺)’자로 종지(宗旨)를 삼았었다. 그러면서 다들 말하기를, ‘우리 선생님의 양지(良知)의 학문은 마음을 스승으로 삼는 것이니,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양지이다. 그러니 나는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따르겠다.’ 하였다. 그러다가 끝에가서는 남만(南蠻)과 연결하여 반란을 일으키다가 주살(誅殺)되고 말았다. 이를 가지고 말한다면 배우는 자는 응당 학문을 하는 첫머리에 잘 변별해서 이와 같은 말류의 폐단이 생기지 않을까를 살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서사의 학설은 이와는 달라서 단지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는 것인데, 무슨 유폐라고 말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그게 무슨 말인가. 선은 행해야 하고 악은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어리석거나 지혜롭거나 현명하거나 불초하거나 간에 모두가 다 아는 바이다. 지금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지극히 악한 사람이라고 하자. 그러나 누가 그를 보고 ‘그대는 착한 사람이다.’고 칭찬을 하면 그는 기뻐할 것이고, ‘그대는 악한 사람이다.’고 하면 그는 성을 낼 것이다. 그러니 선악에 대한 구별은 비록 악인이라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세상에 악을 행하고 선을 버리는 학문이 있단 말인가. 이 때문에 예로부터 이단들이 모두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는 것으로써 가르침을 삼았던 것이다. 지금 서사가 착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서사들만 하는 말이란 말인가.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 말류의 폐단으로써 말한 것이다. 그 학문이 현세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오로지 후세의 천당과 지옥의 응보에 대해서만 말하니, 이 어찌 허탄하고 망령되어 성인의 올바른 가르침을 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의 가르침은 오직 현세에서 의당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광명 정대하여 조금도 감추어지거나 왜곡되거나 흐릿한 것이 없다. 그래서 공자는 괴(怪)·력(力)·난(亂)·신(神)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으니, 괴란 드물게 있는 일이고, 신(神)이란 보이지 않는 사물이다. 만약 드물게 있는 일이나 보이지 않는 사물을 가지고 끝없이 말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선동되어 모두 황탄(荒誕)한 곳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 그 중에 큰 예를 들어 말하자면, 한(漢)의 장각(張角), 당(唐)의 방훈(龐勛)과 황소(黃巢), 송(宋)의 왕칙(王則)과 방납(方臘), 원(元)의 홍건적(紅巾賊), 명말(明末)의 유적(流賊) 따위가 모두 그러한 부류이다. 기타 소소한 요적(妖賊)들로는 미륵불(彌勒佛)을 일컬은 백련사(白蓮社)의 무리들이 곳곳에서 무수히 일어났으니, 사전(史傳)은 이를 엄정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영종조(英宗朝) 무인년에 신계현(新溪顯)의 요무(妖巫) 영무(英武)란 자가 미륵불로 자칭하였는데, 여러 고을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생불(生佛)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면서 합장하여 맞이하고 예배하였다. 백성들로 하여금 받들어 모시던 모든 신사(神社)와 잡귀들을 모조리 제거하도록 하면서, ‘부처가 이미 세상에 나왔는데 어찌 모실 다른 신이 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이 모두 그 말을 따라서 이른바 기도니 신상(神箱)이니 신항(神缸)이니 하는 것들을 모조리 깨뜨리고 불태워버렸다. 그리하여 몇 달만에 황해도에서부터 고양(高陽) 이북과 강원도 전체가 휩쓸리어 그를 따랐던 것이다. 서사의 이른바 천주교라는 것이 따라서 교화되는 속도에 있어서 어찌 이보다 더 빠르기야 하겠는가. 그때 상께서 어사 이경옥(李敬玉)을 보내어 조사하여 처벌하였지만 그 소동은 한 달이 넘도록 진정되지 않았으니, 사람의 마음이 동요하기는 쉽고 진정되기는 어려우며, 미혹하기는 쉽고 깨닫기는 어려운 것이 대개 이와 같다. 지금 세상에서 이 학(學)을 하는 자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상제를 받들어 섬기기를 잠시도 쉬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 유가의 주경(主敬)의 학에다 비교하고, 또 ‘몸을 단속하고 거친 밥을 먹으면서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하면서 우리 유가의 극기(克己) 공부에 비유한다. 사실 이 학을 하는 자들이 비록 문로(門路)는 다르지만 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니, 어찌 귀하지 않겠는가. 다만 세상의 도리는 거짓되고 사람의 마음이란 측량하기 어려운 것이다. 가령 어떤 요사스러운 사람이 나와서 ‘동쪽에도 한 분의 천주(天主)가 내려왔고 서쪽에도 한 분의 천주가 내려왔다.’고 거짓으로 떠들어 댄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탄망(誕妄)한 것에 익숙하여 실제로 그럴 것이라고 여겨서 바람에 휩쓸리듯 이를 따를 것이다. 이때에 가서 이 학을 하는 자들이 ‘나는 정당하고 저쪽은 사특하며, 나는 진실하고 저쪽은 거짓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성학의 모적(蝥賊)이 되고 난적(亂賊)의 화살이 되는 것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서 여기에 만족해하고 있으니, 슬프고 슬픈 일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현세와 후세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현세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상을 말하며, 후세란 죽은 뒤에 영신(靈神)이 없어지지 않아서 착한 일을 한 자는 천당에 가서 영원한 쾌락을 누리고 악한 일을 한 자는 지옥에 가서 영원히 모진 형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가 현세를 소중히 여기는 것은 과연 우리 중국 성인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으므로 고쳐서 평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런데 이른바 영신이 죽지 않는다는 것과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설은 또한 실제로 그러하여 의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이것은 형체도 없고 분명하지도 않은 것에 대하여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치로써 미루어 보고 경서(經書)의 말이나 전기(傳記)의 기록을 가지고 말해본다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듯하다. 우리는 공자(孔子)를 배우는 자들이니, 다만 자로(子路)가 공자에게 물은 것을 가지고 말해 보겠다. 자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사람 섬기는 일을 모른다면 어찌 귀신 섬기는 일을 알겠는가.’ 하였으며, 죽음에 대하여 묻자 대답하기를, ‘삶을 알지 못한다면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 하였다. 이처럼 성인의 대답이 모호하고 분명하지 않으니, 곤륜탄조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자로는 성문(聖門)의 고제(高弟)로서 후진의 신학(新學)과는 다르다. 그러니 지금 이 질문에 대해서 의당 대답하기를, ‘사람이 태어남은 전적으로 천주의 양생(養生)의 덕을 받은 것이니, 당연히 천주를 섬기는 것으로 과업을 삼아야 한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없어지더라도 영신(靈神)은 길이 남아서 살았을 때의 선악에 따라 죽은 뒤의 영신이 천당이나 지옥의 응보를 받게 된다.’ 해야 할 듯하니, 이렇게 명백하게 말한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설사 이런 일이 있다 하더라도 성인의 뜻은 괴신(怪神)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자 하여 그런 것일 뿐이다. 더구나 반드시 알 수는 없는 일임에랴. 만일 그렇다면 성인의 학은 천주교의 구세(救世)의 학과는 다른 것이다. 성인은 하늘을 법받았으니 어찌 하늘을 거스르면서 가르침을 행하였겠는가. 이것이 내가 저들을 배척하여 이학(異學)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서사가 현세를 배척하는 것은 단지 그 학의 차이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그리 심하게 배척하는 것입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내가 왜 심하게 배척하겠는가. 다만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뿐이다. 내가 이미 이 현재의 세상에 살고 있는 이상 의당 현세의 일에 대하여 진력하기를 위에서 말한 바대로 해야 할 것이니, 여기에 다시 더 보탤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서사의 말을 가지고 한 번 말해보자. 그들은 말하기를, ‘지금의 세상은 괴로운 세상이다.’ 하고, 또 ‘현재의 세상은 잠시 머물러 가는 세상이다.’ 하고, 또 ‘현재의 세상은 사람의 세상이 아니라 금수(禽獸)의 근거지이다.’ 하고, 또 ‘이 세상은 금수의 세상이다.’ 한다. 이 때문에 그들 나라의 현사(賢士) 흑랍(黑臘)이라는 자는 항상 웃기만 하는데, 세상 사람들이 허물(虛物)을 좇아 다니는 것을 웃는다는 것이며, 덕목(德牧)이라는 자는 항상 곡을 하는데, 그들이 불쌍해서 곡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독 서사(西士)만 아는 것이란 말인가. 대우(大禹)가 말하기를, ‘삶은 나그네 살이이며 죽음은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누구나 다 이 세상을 여인숙(旅人宿)으로 여기니, 어찌 장구히 연연해 할 만한 것이겠는가. 그들의 말은 옳지만, 이른바 금수의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상제(上帝)께서 이 삼계(三界)의 세상을 만듦에 위로는 외연(巍然)히 하늘이 높고 아래로는 퇴연(頹然)히 땅이 놓여 있다. 하늘의 양기는 밑으로 내려오고 땅의 음기는 위로 올라가서 서로 섞이어 합쳐져서 만물이 화생(化生)하는데, 상제는 그 중에서 가장 청숙(淸淑)한 기질을 받은 자를 사람으로 명해서 삼재(三才)에 참여시켰다. 이 사람이 하늘을 가리켜 하늘이라 하고 땅을 가리켜 땅이라 하며, 만물 중에서 사육할 만한 것은 사육하고 잡아먹을 만한 것은 잡아먹고 이용할 만한 것은 이용하니, 어느 것도 우리 사람들이 상제를 도와서 이루어주는 도리가 아닌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금수의 근거지이다.’ 하고, ‘금수의 세상이다.’ 하니, 그것이 과연 말이 되는가. 그 말이 엉터리라는 것은 굳이 여러 말로 따질 필요조차 없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들이 미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만약 서사의 말대로라면 그 유폐가 필시 살지 않는 것을 선(善)이라고 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만약 모든 인류가 다 없어지도록 한다면 이 천지간이 텅텅 비어서 정말 금수의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서사들이 말하기를, ‘사람에게는 세 가지 원수가 있다. 자기 몸이 첫번째 원수로서 성색(聲色)·취미(臭味)·게으름·방자함·안일 등을 가지고 남몰래 내면으로부터 자신을 빠뜨린다. 세속(世俗)이 두 번째 원수로서 재물·권세·공업(功業)·명예와 즐거운 놀이나 진기한 노리개 등을 가지고 바깥으로부터 드러내놓고 자신을 침범하며, 마귀(魔鬼)가 세 번째 원수로서 거만하면서도 매혹적인 수단을 통해 나를 속이고 어지렵혀서 안팎으로 자신을 공격한다.’ 하니 이 말이 어찌 절실하지 않겠습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그대의 미혹됨이 심하구나. 자기 몸이 원수라는 말은 윤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 몸이 있는 이상 형기(形氣)의 욕망이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이 우리 유자(儒者)들이 극기(克己) 공부에 관한 설을 세운 까닭이다. 지금 만일 이 몸의 존재를 원수라고 한다면 이 몸이 어디에서 태어났는가. 이 몸이 태어남은 부모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이렇게 되면 부모를 원수로 여기는 것이다. 또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부귀와 빈천, 궁통(窮通)과 이해(利害)가 따르는 것은 형세상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를 성찰하여 극복하는 노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서 이 세속을 원수라고 한다면, 임금과 신하 사이의 의리 또한 끊어지게 된다. 마귀에 관한 설은 더욱 이치에 닿지 않는다. 사람이 형기(形氣)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 형기의 욕망은 성인이라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성인과 우인(愚人)의 나뉨은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유자(儒者)의 극기 공부는, 자신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래의 마음으로 형기의 욕망을 다스려 절제하여 중정(中正)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귀를 누가 보았겠는가. 설사 마귀가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외물(外物)이다. 외물에 유혹되어 자신의 본성을 잃어버리는 일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사람이 선하지 못한 것은 형기의 욕망 때문인데 이것이 어찌 모두 마귀의 일이겠는가. 안팎으로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서 둘은 서로 같지 않다. 유자의 극기 공부는 내면적인 것인데 반하여, 서사의 말은 형기를 도외시하고 마귀에서 연유한다고 하니, 안과 밖, 긴하고 헐함에 있어서 둘은 자연히 서로 같지 않다. 이것은 굳이 논의할 필요도 없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저들이 말하기를, ‘서국(西國)의 옛 경(經)에, 「천주가 천지를 개벽하고 즉시 남자 하나를 낳아 이름을 아당(亞黨)이라 하였고, 여자 하나를 낳아 이름을 액말(阨襪)이라 하였다.」 했으니, 이것이 세상 사람의 시조이다.’ 하는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이치로 따져보건대 이 또한 그렇지 않다. 천주의 신권(神權)으로 무엇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천지가 개벽하던 때 음과 양 두 기운이 올라가고 내려가서 서로가 결합하여 만물을 화생(化生)함에 있어서 맑고 선량한 정기(正氣)를 얻은 것은 사람이 되고 더럽고 탁한 편기(偏氣)를 얻은 것은 금수와 초목이 된 것이다. 지금 목전의 사례를 가지고 말해보자. 이[蝨]가 생겨나는 것은 사람에서인가, 옷에서인가. 몸을 깨끗이 씻어서 한 점의 때도 없게 한 다음에 새로 만든 옷을 갈아 입어도 며칠 안 되어서 반드시 저고리에도 몇 마리의 이가 생기고 바지에도 몇 마리의 이가 생기니, 이 이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필시 사람과 옷의 따뜻한 기운이 서로 상승 작용을 해서 이것을 만들어 내는 것일테니, 기(氣)가 변화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한 삼태기의 흙을 풀뿌리 하나 나무 열매 하나 없고 벌레나 개미 한 마리 없는 상태로 빈 시렁 위에 얹어 둔다고 하자. 바람이 불고 비가 적시어서 습기가 서리면 역시 얼마 안 되어 틀림없이 초목이나 벌레가 그 속에서 생겨 나오니, 또한 기가 변화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기화를 한 이후에 그로 인하여 형체가 변화하여 그 숫자가 자꾸만 번성하는 것이다. 사람의 태어남 또한 이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지구상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아당 한 사람의 자손이라고 한다면 과연 말이 되겠는가? 만일 그 설과 같다면 금수나 초목도 처음에는 단지 하나만 있다가 이렇게 번성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설들은 굳이 깊이 탐구할 것도 없고 믿을 것도 못 된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서학을 하는 자들이 원조(原祖)니 재조(再祖)니 하고 말하는데, 그것이 어떤 것입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원조는 바로 위에서 말한 아당이며, 재조는 지금 말하는 천주 예수[耶蘇]이다. 《천주실의》에 말하기를, ‘천지가 개벽한 처음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병이 없고 언제나 날씨가 따뜻하며 항상 매우 즐거웠다. 새와 짐승 등 만물이 모두 그들의 명에 순종하여 따랐으므로 상제만을 받들어 모시면 되었다. 그런데 사람이 천주의 명을 거스르자 만물도 사람을 배반하여 온갖 재앙이 생기게 되었으며, 그들의 자손들이 모두 더러운 행동에 익숙하여지게 되었다.’ 하였으며, 또 그 글에서 말한 《진도자증(眞道自證)》에 말하기를, ‘천주가 원조를 낳아 천하 만인의 조상으로 삼고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서 자유롭게 놓아주었다. 이 원조는 성품이 착하고 인정이 아름다우며 만 가지 이치를 다 비추어 보므로 천지간의 만물이 그의 명을 천주의 명처럼 따랐다. 사악한 마귀가 시기하여 그를 제거할 궁리를 하자 천주는 이 기회에 원조를 한번 시험해 보고자 하여 사신(邪神)을 시켜 유혹하게 하였다. 그랬더니 원조는 근본을 상실하고 은혜를 잊어버린 채 마귀를 좇아 천주의 명을 거역하였다. 그래서 천주의 인애(仁愛)가 의분(義憤)으로 바뀌어 죽은 뒤에 지옥의 고통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자손들도 영원히 그 벌을 함께 받게 되었다.’ 하였다. 아, 이 무슨 말인가. 상제가 아당을 만들어서 인류의 조상으로 삼았다면 그 신성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찌 상제가 마귀의 거짓말을 곧이 듣고 마귀를 시켜서 아당의 마음의 진솔성 여부를 시험하였겠는가. 설사 아당이 참람되고 망령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상제로서는 의당 다시 주의를 주고 권면하여 고치게 하기를 훌륭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듯이, 좋은 스승이 제자에게 하듯이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상제로서 이런 일을 하였겠는가. 이 말을 한 자는 하늘을 업신여긴 그 죄를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설사 아당에게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죄가 그 자신에게서 끝나면 그뿐이지 어찌 만세토록 자손들이 그 벌을 같이 받아야 하는 이치가 있는가. 선왕(先王)에 대한 징벌은 그 사왕(嗣王)에게 미치지 않았다. 그런데 더구나 만세에 이르면서까지 그 자손을 괴롭힌단 말인가. 《천주실의》에서 중사(中士)가 ‘선악에 대한 응보가 본인에게 없으면 반드시 자손에게 있으니 굳이 천당과 지옥을 말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고, 서사(西士)가 ‘왕패(王覇)의 법에서도 죄가 아들에게 미치지 않는데 천주가 본인을 두고 아들에게만 갚겠는가.’ 하였으니, 이 조항에서 한 말을 가지고 말하자면 그 설이 서로 모순된다. 이 또한 매우 가소롭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다시 재조(再祖)의 일에 대하여 묻기에,

대답하기를,

 

“그 설이 지극히 복잡하여 말하기가 어렵다. 이미 그 대략에 대해서는 대충 말하였다. 《천주실의》에, ‘아당이 스스로 온갖 재앙을 불러들임에 자손들이 서로 이끌고서 더러운 짓을 하여 순박하던 습속은 점점 엷어지고 성현(聖賢)은 죽어서 떠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욕망을 따르는 자는 많아지고 이치를 따르는 자는 드물어갔으므로 천주가 크게 자비심을 발휘하여 친히 내려와서 세상을 구원하였다. 한(漢) 나라 애제(哀帝) 원수(元壽) 2년에 동정녀를 택하여 어머니로 삼고, 남녀간의 교감(交感)이 없이 태반을 빌려 강생(降生)하였다. 이름을 예수[耶蘇]라 하였는데, 예수란 바로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이다. 서토(西土)에서 33년간 널리 교화를 펼치다가 다시 올라가 하늘로 돌아갔다.’ 하였다. 친히 내려와서 강생하였다는 이 설에 의거하여 말한다면, 이 때에 천상에는 상제가 없었던 것인가? 또 《진도자증》에, ‘성경에 「천주께서 원조(原祖)의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다시 세워서 인류의 재조(再祖)로 삼았다.」 하였고, 또 「천주의 성자(聖子)로서 진짜 천주와 다르지 않다.」 하였다.’ 하여 친히 강생하였다는 말과 같지 않으니, 그 학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또 말하기를, ‘예수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자신의 책임으로 여겨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다.’ 하였다. 이미 상제가 친히 강생하였다고 하고 또 진짜 천주와 다름이 없다고 했으면서, 감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 천수(天壽)를 다 누리지 못했다.’고 한단 말인가. 그 우매하고 무지하여 존엄한 천주를 업신여기는 것이 심하다 하겠다. 이런 종류의 말을 십분 온당하다고 여겨 믿고 따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대로라면 그들의 설은 모두 망령된 것이겠습니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우리 중국으로 말하면, 먼 옛날에는 전하는 말들이 대개 허황되어 신빙성이 없었는데, 성인이 나온 뒤에야 이런 것을 모두 삭제하여 버렸던 것일 뿐이다. 그러니 서토(西土)라고 해서 그 옛날에 허황되고 괴상한 말이 없었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들이 말하기를, ‘천지가 개벽한 이후의 문자가 모두 지금까지 남아 있다.’고 하면서 이것을 성경(聖經)이라 하며 믿고 받든다. 이것은 대개 어떤 신성한 자의 작품으로서, 이러한 설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권면하고 달래었던 것이니, 이 또한 신도(神道)로써 가르침을 베풀려는 뜻이었다. 다만 우리 중국에서 성인이 나와 능히 바로잡은 것보다 못할 뿐이다. 예를 들면, 여와(女媧)가 돌을 불리어 뚫어진 하늘을 보수했다거나, 후예(后羿)가 아홉 개의 해를 쏘아 맞혔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삭제하여 바로잡은 것들이다. 예수의 일은 비록 매우 기이하기는 하지만,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현성(顯聖)이니 현령(顯靈)이니 하는 부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상제가 진짜 천주로서 친히 와서 이런 영괴(靈怪)한 일들을 하였겠는가. 따라서 그 학의 원두(原頭)가 분명 이단(異端)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세 가지 원수에 관한 설은 과연 매우 망령되고 기탄함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몸을 원수라고 한다면 이 몸이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니 부자간의 윤리가 이미 어그러지는 것이며, 세속(世俗)을 원수라고 한다면 성인이 도를 행하여 은택을 다한 공이 모두 허사가 되어 군신(君臣) 간의 윤리가 괴리되어 버립니다. 그 학이 동정(童貞)의 몸을 귀히 여기고 《칠극(七克)》 책에 금혼(禁婚)에 관한 말이 있으니, 그렇게 되면 부부간의 윤리가 끊겨 버립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 가지 윤리를 귀하게 여기는데, 이들 모두 순간적인 것이라 하여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천당과 지옥만을 중히 여기니, 이것은 불씨(佛氏)의 유파입니다. 또 그 마귀의 설은 더욱 허황되고 괴이하여 우리 유자(儒者)가 말할 바가 아니니, 그대가 배척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서사들이 말하는 천학(天學) 공부라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이것은 이미 전후로 대략 말한 바이다. 그들이 말하기를, ‘매일 아침에 눈과 마음으로 하늘을 우러러, 천주께서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고 가르쳐 주기까지 한 무한한 은혜에 대하여 감사한다. 그리고는 오늘 하루 나를 도와서 망령된 생각을 하지 않고 망령된 말을 하지 않으며 망령된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 맹세를 꼭 실천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땅바닥에 엎드려서 그날 자신이 한 생각, 말, 행동이 망령되지 않았는지를 엄밀하게 성찰한다. 그 결과 잘못이 없으면 그 공을 천주에게 돌려 은혜롭게 도와주신 것에 머리를 조아려 감사하며, 만약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골 아프게 뉘우치고는 용서하여 주기를 천주께 기도한다.’ 하였으니, 그 대체가 이와 같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 유자(儒者)의 성신(誠身)의 학과 비슷한 것인데, 지금 이 학문을 하는 자들이 유학과 대등한 것으로 보아 이것이 참된 것이라고 하니 어찌된 것인가. 또 그 거조나 모양이 우리의 성훈(聖訓)과 같은가, 다른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서사가 말하기를, ‘불씨(佛氏)가 우리 나라의 가르침을 훔쳐서 따로 문호(門戶)를 세웠다.’ 하는데, 사실이 그렇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불씨의 석가는 주(周) 나라 소왕(昭王) 때에 태어났고, 천주교의 예수는 한(漢) 나라 애제(哀帝) 때에 태어났으니, 선후의 분별에 대해서는 여러 말로 따질 필요도 없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서사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에 개벽 이후의 사기(史記)로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전부 3,600권이다. 그런데 예수의 출생에 대해서도 모두 시기가 예언되어 있으니, 중국의 사기가 민멸되어 없어지거나 거짓이 뒤섞여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고 하는데 실제로 그렇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내가 보지 않았으니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령 있다고 한다면 지금 그 책에서 인용한 경문(經文)이 바로 그 말일 것이다. 필시 그 중에서도 좋은 것만을 골라서 인용했을텐데, 지금 안목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보게 한다면 우리 중국 성인의 말씀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낫고 어느 것이 못하다고 할 것인가. 그대가 만약 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들은 오로지 가르침을 베푸는 것만을 중히 여겨서 8, 9만 리 되는 바다를 건너 사람을 잡아먹고 사람을 죽이는 나라들을 지나면서도 두려워 할 줄을 모르고, 상어·악어·호랑이·이리를 만나도 피할 줄을 모릅니다. 소견(所見)이 확실하고 역량이 뛰어난 자가 아니고서야 이럴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역사를 상고해 보면, 요진(姚秦)의 구마라습(鳩摩羅什)과 소량(蕭梁)의 달마(達摩)가 모두 대서국(大西國)에서 바다를 건너 왔는데, 이들도 역시 중국에 그들의 가르침을 베풀고자 하여 온 것이니 저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이들 두 중이 전한 것은 지금 유행되는 불서(佛書)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서사의 학문을 중국에 유행시키고 싶다고 하더라도 이 또한 그런 유에 불과하니, 시행하는 것이 지금의 불서 정도에 그칠 것이다. 그런데 어찌 우리 유자들로 하여금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도를 버리고 그들을 따르도록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서사가 말하기를, ‘예수가 가르침을 편 이후로 지금까지 1천 7, 8백 년이 되는데, 가르침이 이웃 나라에 전파되어 찬탈하고 시해하는 일이나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해가 없어져서 서국(西國)의 수만 리 지역이 지금까지도 그러하다. 중국에는 성인이 많기는 하지만 한 대(代)가 일어났다가는 없어지고 마니, 중국의 가르침이 그 근본을 탐구하지 못해서 그런 것임을 알 수 있다.’ 합니다. 우리 유자들이 이런 말을 듣고는 망연자실하여 도리어 중국 성인의 가르침이 저들만 못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서역 일대가 풍속이 돈후하고 인심이 순박하여 중국처럼 교묘한 수단으로 속임수를 일삼지 않는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과장하여 부풀린 말이다. 일찍이 역대의 역사책을 보건대, 한(漢) 나라 애제(哀帝) 이후로 대서(大西)의 오랑캐들이 서로 침략하여 병합한 경우가 많았으니, 역사책이 어찌 거짓말을 하였겠는가. 이것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또 왜국(倭國)의 시조 협야(狹野)는 곧 그들의 이른바 신무천황(神武天皇)으로서, 주(周) 나라 평왕(平王) 때 나라를 세워 지금까지도 한 성씨가 계속 이어오고 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나 봉건의 제도 또한 지금의 중국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렇지만 어찌 이것을 가지고 중국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들이 모두 천학을 알아서 그런 것인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가 세상을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못박혔는데, 능히 천지 만물을 흔들어 움직이면서도 자신을 못박은 사람을 하나도 상하게 하지 않았으니, 지극한 인(仁)이 아니고서야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이것은 위에서 이른바 ‘원수를 잊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기인서(畸人書)》에, ‘천주가 사람들에게 덕으로 원수를 갚고 원한으로 원수를 갚지 말라고 가르쳤다.’ 하였다. 그런데 원수에는 두 종류가 있다. 만약 나를 해친 원수라면 옛날의 군자 가운데 이렇게 한 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임금이나 아버지의 원수를 두고 이런 식으로 가르친다면 의리를 해치는 바가 클 것이다. 이것이 내가 겸애(兼愛)를 주장하는 묵자(墨子)의 부류라고 말한 까닭인데, 이들이 더 심한 자들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서사는, 중국인들이 상제가 이 천지와 만물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배척합니다. 그런데 주자(周子)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이(理)가 만물의 근원이다.’라고 하였으며, 주자(朱子)는 또, ‘천(天)이 곧 이이다.’ 하였는바, 이 설은 어떻습니까?”
하기에, 대답하기를,

 

 

“상제는 주재(主宰)에 대한 호칭으로서 만물의 총체적인 주재자라는 말인데, 우리 유자가 이미 말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늘을 일컫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주재하는 하늘로서, ‘하늘이 명한 성(性)’이라고 하거나 ‘천명을 두려워한다.’고 하는 것들인데, 이 하늘은 곧 이(理)이다. 하나는 형기(形氣)의 하늘로서, 이 하늘은 곧 물(物)이다. 주자(周子)의 그림은 ‘태극(太極)이 양의(兩儀)를 낳는다.’는 공자(孔子)의 말에서 근본한 것으로, 주재한다는 관점에서 말하면 상제(上帝)이지만, 무성무취(無聲無臭)의 측면에서 말하면 태극이며 이(理)이니, 상제와 태극의 이를 둘로 나누어 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말하기를, ‘옛날의 군자가 천지의 상제를 공경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태극을 받들어 모셨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理)는 의뢰하는 것으로서, 사물이 있으면 그 사물의 이치가 있고 사물이 없으면 그 사물의 이치도 없으며, 임금이 있으면 신하가 있고 임금이 없으면 신하도 없다. 이와 같이 공허한 이(理)를 가지고 사물의 근원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불로(佛老)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말들이 과연 말이 되는 것인가? 상제는 이의 근원으로서 이 천지 만물을 만들었다. 천지 만물은 저절로 생겨날 수 없고 반드시 천지 만물의 이치가 있기 때문에 이 천지 만물이 생겨난 것이다. 어찌 그 이치가 없으면서 저절로 생겨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후유(後儒)들이 주장하는 기(氣)가 이에 앞선다는 설이 따질 거리가 못 되는 까닭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태극이 양의(兩儀)를 낳는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한 번 음(陰)이 되고 한 번 양(陽)이 되는 것을 일러 도(道)라 한다.’ 하였으니, 도는 곧 이인 것이다. 만일 서사가 말하는 대로라면 공자까지도 아울러 배척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 유자(儒者)는 응당 눈을 밝게 뜨고 정신을 가다듬어 곧장 배척하여 물리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천주실의》나 《기인(畸人)》 등의 책을 보면, 서사의 말에 대해 중사(中士)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옷깃을 여미고서 믿고 따르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어째서 그렇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이런 책들은 모두 서사가 물음을 만들고 자답(自答)한 것이므로 이런 것일 뿐이다. 만약 도리를 아는 유사(儒士)와 함께 더불어 말한다면 어찌 옷깃을 여미고서 믿고 따를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천주(天主)라는 칭호가 중국의 글에도 더러 보이는 일이 있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경전(經傳)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를 보면, 팔신(八神)에 제사지낸 기사가 나오는데, ‘첫째는 천주(天主)로서 천제(天齊)에 제사했다.’ 했으며, 《한서(漢書)》의 곽거병전(霍去病傳)에는 ‘원수(元狩) 1년에 휴도왕(休屠王)이 하늘에 제사하는 금인(金人)을 얻었다.’ 하였고, 김일제전(金日磾傳)에는 ‘휴도왕이 금인을 만들어 천주(天主)에게 제사하였다.’ 하였으니, 천주라는 명칭이 여기서 보인다. 이에 대해 여순(如淳)은 주를 달기를, ‘하늘에 제사할 때 금인(金人)을 신주로 삼은 것이다.’ 하였다. 안사고(顔師古)는 주를 달기를, ‘금인을 만들어 천신(天神)의 상(像)으로 삼아서 제사한 것인데, 지금의 불상(佛像)이 그 유법(遺法)이다.’ 하였으며, 《한무고사(漢武故事)》에 말하기를, ‘곤야왕(昆耶王)이 휴도왕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에게서 금인의 신상(神像)을 얻었는데, 상(上)이 이를 감천궁(甘泉宮)에 두었다. 금인은 모두 길이가 1장(丈)이 넘는다. 그들은 제사 때 소나 양 등을 쓰지 않고 단지 향을 피우고 예배만 하였는데, 상이 그들 나라의 풍속에 따라서 제사하게 하였다.’ 하였다. 이런 여러 설들을 근거해 보건대, 안사고의 주에서는 비록 지금의 부처를 이른다고 했지만, ‘천신(天神)’이란 두 글자로 미루어 보면 부처와는 다른 것이다. 아마도 금으로 천주(天主)를 만들어서 제사하기를 오늘날 이 학문을 하는 자들이 천주의 화상을 그려 놓고 예배드리듯이 한 듯하니, 이것이 고금의 변화이다.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이 서쪽으로 서역과 교통하면서 그 교를 받아들여 제사한 듯하다. 또 그들의 책 《진도자증(眞道自證)》에, ‘예수가 태어나자 성모(聖母)가 안고 성전(聖殿)으로 가서 천주대(天主臺) 앞에 바쳤다.’ 하였으니, 천주란 명칭은 한(漢) 나라 애제(哀帝)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인바, 예수가 천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열자(列子)》에, ‘상태재(商太宰)가 공자에게 성인에 대하여 물으면서 「구(丘)는 성인이십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내 어찌 감히 성인이라고 하겠는가.」 하였다. 또 삼황(三皇)·오제(五帝)·삼왕(三王)에 대하여 묻자, 모두에 대하여 「성인인지 나는 모르겠다.」 하였다. 상(商)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누가 성인입니까?」 하자, 대답하기를, 「서방(西方)에 성자(聖者)가 있는데,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럽지 않고, 말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믿으며, 교화하지 않아도 저절로 행하여지니, 너무나 위대하여 사람들이 무어라고 이름을 붙여 형용하지 못 한다.」 하였다.’ 했는데, 부처를 믿는 자들은 이것이 부처를 가리켜 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천주를 가리켜 한 말인 듯 합니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황당한 《열자》의 내용을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공자가 요(堯) 임금을 칭송하기를, ‘너무나 위대하여 사람들이 무어라고 이름을 붙여 형용할 수가 없다.’ 하였으니, 서방의 성인에 대한 것과 같다. 그런데 오제(五帝)를 성인이 아니라고 하였으니, 그것이 어찌 그렇겠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듣건대, 그 학을 하는 자들이 교사(敎師)로 대부(代父)를 삼고, 천주가 대부(大父)이므로 천주를 대신하여 가르침을 베푸는 자를 대부(代父)라고 하는 것이다. 천주의 자리를 설치해 놓으며, 배우는 자들이 목에다 석 자 되는 깨끗한 천을 걸고는 손으로 정수리를 씻는데, 이것이 마테오[瑪竇]가 말한 성수(聖水)로서 마음의 때를 씻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촛불을 밝히고는 배우는 자들이 엎드려서 지금까지의 잘못을 모조리 열거하면서 뉘우치는 뜻을 전하고, 또 입교(入敎)한 이후에는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또 별호(別號)를 정한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어떻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이것은 전적으로 불씨(佛氏)가 하는 양태이다. 불씨에 법사(法師)니 율사(律師)니 하는 것이 있으며, 팔을 그을러서 참회하거나 관정(灌頂)하는 의절(儀節) 등이 있으니, 이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 내가 그들의 습속은 성인의 가르침을 익힌 우리 중국 사람들이 행할 것이 못 된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마테오 리치가 말하기를, ‘영혼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생혼(生魂)·각혼(覺魂)·영혼(靈魂)이 그것이다. 초목은 생혼만 있고 각혼과 영혼은 없으며, 금수는 생혼과 각혼은 있으나 영혼은 없는데, 사람에게는 생혼·각혼·영혼이 다 있다. 생혼과 각혼은 형질(形質)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의존하던 형질이 없어지면 생혼과 각혼이 함께 없어지지만, 영혼은 형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죽더라도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하였는데, 이 설은 어떻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우리 중국에도 그런 설이 있다. 《순자(荀子)》에, ‘물이나 불은 기운은 있지만 생명은 없고, 초목은 생명은 있지만 지각은 없으며, 금수는 지각은 있지만 의리는 없다. 그런데 사람은 기운·생명·지각·의리를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가 된 것이다.’ 하였는데, 이 말을 진서산(眞西山)이 《성리대전(性理大全)》에 표출(表出)하였다. 서사의 말은 이것과 대체로 같지만,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말은 석씨와 다름이 없는 것으로서, 우리 유자가 말하지 않는 바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근래에 어떤 상사생(上舍生)이 석전(釋奠)에 참석하려고 하자 천학을 하는 그의 친구가 말리면서 말하기를, 무릇 거짓 형상을 설치해 놓고 지내는 제사는 모두 마귀가 와서 먹는다. 어찌 공자의 신이 와서 먹을 수 있겠는가. 인가(人家)의 제사도 역시 그렇다. 나는 비록 풍속에 따라서 하고는 있지만, 마음으로는 그것이 망령된 것임을 알기 때문에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다는 뜻을 천주에게 묵묵히 아뢴 뒤에야 지낸다.’ 하였다고 하니, 예(禮)를 거스르고 가르침을 무너뜨림이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이 역시 서사의 말이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조상 중의 선한 자는 하늘에 있으니 결코 제사를 먹으러 올 리가 없고, 악하여 지옥에 떨어진 자는 비록 오고 싶다 하더라도 올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이것은 성인이 제례(祭禮)를 제정한 뜻과는 같지 않으니, 그대가 예를 거스르고 가르침을 무너뜨릴 것을 걱정한 말은 참으로 옳다. 또 하나 가소로운 것은, 지금 이 학을 하는 자들이 천주의 형상을 걸어놓고 예배하고 기도하는데, 이 또한 하나의 거짓 형상이니 역시 일종의 마귀인 셈이다. 성호 선생이 이른바 ‘갖가지 영이(靈異)한 일들이 마귀에게 덮어씌인 데서 나온 것이 아님을 어떻게 알겠는가.’라는 말은, 선생이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다면 변환(變幻)하여 헤아리기 어려운 마귀라는 것도 선을 가장하여 세상을 미혹하게하는 자가 있어서 이로써 낮은 백성들을 우롱하는 것인데, 서사가 여기에 현혹되어 높이 떠받들고 있으니 어찌 가소롭지 않겠는가. 그들의 말을 들으면 거짓 천주가 있다고 하는데, 이 또한 마귀의 환롱(幻弄)일 것이다. 거짓 천주라고 가칭하였다면 거짓 형상에 의탁하지 못 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도교(道敎)·불교 및 서사들이 마귀란 말을 많이 하는데, 마귀는 과연 어떤 신이기에 천주도 막지 못하여 악을 행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그 설은 이렇다. 처음에 천주가 명하여 순신(純神)을 만드니 그 품성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이를 아홉 등급으로 나누어 천주의 명령을 받들도록 했기 때문에 이름을 천신(天神)이라 하였다. 또 거대한 신이 있었는데, 오만하고 자신이 제일인 양하여 천주와의 인연을 끊고 악신(惡神)의 괴수가 되었으므로 천주가 지옥에다 떨어뜨리고 이름을 마귀라 하였다. 그런데 천주가 그를 잠시 놓아주어서 선인의 공력을 단련시키고 악인의 죄를 응징하도록 한 것이다. 선인의 공력을 단련시킨다는 것은 천주가 마귀를 시켜서 선인을 유인하여 악한 일을 하라고 시켜보아서 그 공부가 어떤가를 시험한다는……. 이하 원문 빠짐”
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그대의 말을 들어보니 천학이 이단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 유학의 명덕(明德)과 신민(新民)의 공부는 모두 현세를 가지고 말한 것인데, 서사(西士)의 선을 실천하고 악을 버리는 일은 모두 후세를 위해서 말한 것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응당 현세의 일에 힘을 다하여 그 최선을 추구할 따름이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후세의 복을 기대하는 마음을 가져서야 되겠습니까. 그들의 학으로 들어가는 문로(門路)는 우리 유학과 크게 달라서 그 뜻이 전적으로 한 사람 개인의 사적인 욕망에서 나온 것이니, 우리 유자의 공정한 학문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응당 그대의 말로써 표준을 삼겠습니다.”
하므로, 내가 듣고 웃었다. 손이 물러간 후에 그와 문답한 것을 써서 이 글을 만들었으니, 혹시라도 세상의 교화에 보탬이 있을까 하는 바람에서이다. 을사년(1785, 정조 9) 가평일(嘉平日)에 우이자(虞夷子)가 쓰다.

 

천학문답(天學問答) 부록(附錄)

 

어떤 사람이 물러갔다가 다시 와서 묻기를,

“지금 이 학을 하는 자들이 흔히 성호 선생도 이 학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하므로, 내가 대답하기를,

 

 

“내가 병인년(1746, 영조 22)에 처음으로 선생을 찾아 뵈었는데, 선생이 경사(經史)의 여러 설에 대하여 담론한 것은 빠뜨린 바가 없다고 할 만하였다. 끝에 가서 서양학(西洋學)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선생이 말씀하기를, ‘서양 사람들 중에는 대체로 이인(異人)이 많아서 예로부터 천문(天文)의 관측, 기기(器機)의 제조, 산수(算數) 등의 기술은 중국이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이런 일들을 모두 호승(胡僧)에게 비중을 두었으니, 주자(朱子)의 설을 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 지금의 시헌역법(時憲曆法)은 백 대가 지나더라도 폐단이 없을 것이라 말할 수 있는데,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역가(曆家)의 역수(曆數)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전적으로 세차법(歲差法)에 대한 요지를 터득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나는 항상 서국의 역법은 요 임금 때의 역법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이 때문에 더러 헐뜯는 자들이 나를 보고 서양학을 한다고 말하니, 어찌 가소롭지 않은가.’ 하였다. 내가 인하여 묻기를, ‘양학(洋學)도 학술로써 말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하니, 선생이 ‘있다.’고 하고, 이어서 삼혼(三魂)의 설 및 영신(靈神)이 죽지 않는다는 설, 천당과 지옥의 설에 대하여 말하였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이것은 분명 이단으로서 전적으로 불씨(佛氏)의 별파(別派)이다.’ 하였다. 당시에 들은 것이 이와 같다. 그 뒤에 내가 다시 물은 일이 있었는데, 대답하기를, ‘천주의 설을 나는 믿지 않는다. 귀신도 지속(遲速)의 차이가 있으므로 하나 하나가 같은 것이 아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칠극(七克)》은 바로 사물(四勿)의 각주(脚註)와 같은 것이다. 그 말 가운데 대개 폐부를 찌르는 말이 많기는 하지만, 이것은 단지 문인(文人)의 재담(才談)이나 아이들의 경어(警語)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 황탄(荒誕)한 말들을 제거하고 경어만을 요약한다면 우리 유자(儒者)의 극기(克己) 공부에 얼마간의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단의 글이라 하더라도 그 말이 옳으면 취할 뿐이다. 군자가 사람들과 더불어 선을 행하는 데에 있어서 어찌 피차의 구별을 두겠는가. 요는 그 단서를 알아서 취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선생이 또 《천학실의(天學實義)》의 발문을 지었다. 위에 보인 글을 참고하라. 지금 선생이 나와 더불어 문답한 말 및 이 발문을 가지고 본다면 과연 선생이 천학을 존신(尊信)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무식한 젊은 자들이 자신들이 빠져들어갔다는 것 때문에 사문(師門)까지 끌어다가 이를 합리화하려는 것이니, 거리낌이 없는 소인들이라 할 수 있겠다. 다행히 내가 지금 살아 있어서 그 시비를 가릴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나마저 죽었더라면 후생들이 틀림없이 그 말을 믿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어찌 사문(斯文)의 큰 수치가 아니었겠는가.”
하였다.

 

어떤 사람이 또 묻기를,

 

“성호 선생이 일찍이 마테오 리치[利瑪竇]를 성인이라고 했다 하여, 이들 무리 중에 핑계삼아 말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하므로, 내가 듣고 나도 모르게 실소(失笑)하면서 대답하기를,

 

“성인에도 여러 유형이 있는바, 부자(夫子)와 같은 성인도 있고 삼성(三聖)과 같은 성인도 있으므로 한 마디로 뭉뚱그려 말할 수가 없다. 옛사람이 성(聖)자를 풀이하기를, ‘통명(通明)함을 일러 성이라 한다.’ 하였으니, 광대(光大)하여 화성(化成)하는 성과는 서로 같지 않다. 선생이 그런 말을 했는지 나는 모르겠으니, 혹시 했는데 내가 잊어버린 것인가? 그러나 가령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서사의 재식(才識)이 통명(通明)하다고 이를 만함을 말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어찌 요순(堯舜)·주공(周公)·공자(孔子)와 같은 성인으로서 허여한 것이겠는가. 근일에 사람들이 흔히 모인(某人)을 성인이라고 하는데, 그 모인은 나도 본 사람이다. 선생이 설사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인의 유에 불과한 것이다. 어찌 진짜 성인이겠는가. 아아, 우리의 도가 밝혀지지 않아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좁은 소견을 가지고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그리하여 후생(後生)을 그르치기까지 하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달리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하였다. 이날에 다시 쓴다.

3개의 댓글

2019.02.06

이건 전공자인 나도 보기 깝깝한 가독성이다...

0
2019.02.06
@아나키즘활동

수정해줌

0
2019.02.07

3줄 요약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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