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혁명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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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시대-
에릭 홉스봄 저

제1장
1780년대의 세계
'18세기는 팡테옹에 놓여야 한다.'
-생-쥐스트

1.
1780년대의 세계에 대해 맨 먼저 이야기해야 될 것은 그것이 현대세계에 비해 훨씬 작기도 하고 동시에 훨씬 크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것릉 특히 지리적으로 작았은데, 왜냐하면 당시 가장 교육을 많이 받고 박식했던 사람일지라도 [말하자면 독일의 자연과학자며 여행가였던 홈볼트(Alexander von Humboldt. 1769~1859)같은 사람] 인간이 거주하는 지구상의 전 지역 중 극히 일부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유럽보다 과학적으로 덜 발전되고 덜 팽창주의적인 사회들에서 '알려진 세계'는 분명히 이보다 더욱 작았다. 그것은 그 영역을 벗어나면 모든것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앞으로도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지도 모를, 무지한 시칠리아의 농부나 미얀마의 경작자들이 죽을 때까지 그 안에서 살았던 지구상의 아주 작른 부분으로 축소된다.)

전부는 아니었다고 해도 해양의 대부분은, 쿡(James Cook)과 같은 18세기 해양탐험가들의 괄목할 만한 경쟁에 힘입어 이미 조사되고 그에 대한 해도도 만들어졌다. 20세기 중반까지 해저에 대한 인간의 지식이 보잘것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현대적 기준에서 보면 그리 정확한 것은 아니더라도 대륙과 대부분의 섬에 대한 주요 윤곽이 알려졌다. 유럽 산맥의 크기와 높이는 꽤 정확하게 소개되어 있었다. 남미 일부 지역의 산맥들은 대충 알려져 있었으나, 아시아의 산맥들과 아프리카의 산맥들은(아틀라스 산맥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중국과 인도를 제외한 세계의 큰 강의 수로는, 그 지역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몇 안되는 사냥꾼, 장사꾼 또는 벌목꾼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몇몇 지역 [이 지역들은 여러 대륙에서 해안으로부터 내륙으러 몇 마일 이상 더 들어가 있지는 못했다] 을 벗어나면 세계지도는 장사꾼이나 탐험가들의 두드러진 발자취 이외에는 하얀 여백으로 채워져 있었다. 여행가나 변경에 주둔하는 관리들에 의해 수집된 임시변통의 2차, 3차 정보가 없었더라면, 이 하얀 여백은 실제보다 더욱 컸을 것이다.

'알려진 세계'는 오늘날의 세계보다 작았을 뿐 아니라 인구수에서도 오늘날의 세계보다 적었다. 사실상 이용할 수 있는 자료가 없으므로 모든 인구의 측정치들은 순전히 추측일 뿐이지만, 지구에는 현재 인구의 일부 [아마 3분의 1을 크게 넘지 않는]에 해당하는 사람들만 살고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가장 흔히 인용되는 추정치가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면 당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살았던 인구의 당시 전 세계 인구에 대한 비율은 현재의 비율보다 높았고, 1800년의 유럽 인구는 1억 8700명 정도로(현재는 약 6억) 세계 인구에 대한 비율이 다소 낮았으며, 미주 대륙에 거주했던 인구의 세계 인구에 대한 비율은 현재 비율에 비해 분명히 훨씬 낮았다. 1800년의 경우 대개 아시아인은 세 명 중 두 명꼴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유럽인은 다섯 명 중 한 명, 아프리카인은 열 명 중 한 명, 아메리카 또는 오세아니아인은 서른 세 명 중 한 명꼴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훨씬 적었던 인구는, 중국.인도 및 중서부 유럽의 일부 지역들처럼 집약농업이나 고도의 도시집중이 발달되고 인구밀도 면에서 현대와 견줄 수 있을 만한 자그마한 지역들을 제외하고는 지표면 위에 아주 드문드문 흩어져 살았다.
인구가 이처럼 적었듯이 사실상 인간의 주거지역도 그러했다.

기상조건(더 이상 1300~1700년의 소 빙하기와 같은 최악의 기간만큼 춥고 축축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보다는 다소 춥고 축축했을 것으로 추측된다)으로 인하여 주거의 한계는 북극에까지 확대되지 못했다. 또한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도 많은지역에서의 거주를 제한하고 있었다.-그 한 예로서 오랫동안 사실상 점령되지않은 상태에 있다가 19세기 동안 점차적으로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던 해안평야를 낀 남부 이탈리아를 들 수 있다. 특히 수렵과 토지 낭비가 많은 계절적 가축이동 등 원시적 경제형태는 아폴리아 평원과 같은 한 지역 전체를 대규모 정착이 이루어질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그러한 풍경에 대한 친근한 삽화로는 로마 대평원을 묘사한 9세기 초 여행자의 판화들, 몇몇 폐허와 가축뿐인 텅 빈 말라리아 지역 및 기묘란 모습의 산적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그 후에 경작의 대상이 된 많은 토지는 유럽에서조차 여전히 볼모의 황무지, 물이 괸 소택지와 거친 목초지 및 삼림 등이었다.

인류는 세번째 측면에서도 현재보다 더 작았다- 즉 대개의 유럽인들은 현재보다 두드러지게 키가 작았으며 몸도 가벼웠다. 이러한 일반화의 기초가 되는 징집병의 체격에 관한 풍부한 통계로부터 한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즉 리구리아 해안의 한 군은 1792~1799년에 신병의 72퍼센트가 1미터 50센티미터가 안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18세기 후반의 남자들이 지금 남자들에 비해 허약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프랑스혁명기의 야위고 발육이 덜 되었으며 훈련이 안 된 병사들은, 현재 식민지의 산악에서 활동하는 왜소한 게릴라들만이 지니고 있는 신체적 인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완전군장을 한 채 하루에 30마일의 속도로 1주일 내내 행군을 계속 하는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정예의 중기병대나 근위대 등 엘리트 연대를 형성했던 '키 큰 친구들'을 당시 왕이나 장군들이 특별히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현재보다 당시 인간의 체격이 매우 보잘것없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여러 측면에서 세계가 오늘날보다 좁았다 하더라도, 통신이 더없이 어렵고 불확실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현재보다 훨씬 거대한 세계였다. 이러한 어려움을 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18세기 후반은 중세나 16세기의 기준에서 보면 풍부하고 신속한 통신의 시대였으며, 철도혁명이 아직 일어나진 않았지만 도로, 마차, 및 우편업부 등의 발전은 상당히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과거에는 런던이서 글래스고까지의 여행이 10~12일 소요되었으나 1760년대와 18세기 말 사이에는 62시간으로 단축되었다. 우편마차 혹은 승합마차제도는 18세기 후반에 창설되어 나폴레옹 전쟁 말기에 철도가 설치되기 전까지 광범위하게 확장되었는데, 이로써 통신에는 상대적 신속성뿐 아니라(파리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의 우편업무는 1833년에 36시간이 걸렸다) 규칙성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육상승객 수송설비는 소규모였으며 또한 육상화물 수송설비도 느린데다가 운임도 지나치게 비쌌다. 그렇다고 해서 공무나 상행위를 수행했던 사람들이 서로 연락을 끊고 살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보나파르트와의 전쟁 초기에 천만여 통의 편지가 영국의 우편국을 통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우리가 고찰하는 시기의 말기에는 이의 10배 정도에 달했다). 그러나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글을 읽을 수 없었디 때문에 사실상 편지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으며, 여행은(아마 시장을 오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사람이나 화물이 육상으로 이동할 때에는 거의 도보나 짐마차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는대, 19세기 초만 해도 하루에 20마일이 채 못 되는 속도의 짐마차가 프랑스 화물 운송량의 6분의 5 가량을 운반했다. 급사는 급송문서를 가지고 먼 거리까지 쏜살같이 달렸다. 마부들은 승객이 12명 정도 탄 우편마차를 급히 몰았는데, 이때 이들은 골이 흔들릴 지경이었으며가죽으로 된 새 버팀대가 부착된 경우 심한 멀미를 해야 했다. 귀족들은 개인마차를 타고 빠른 속도로 돌아다녔으나, 대부분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말이나 노새 옆에서 걸어가는 짐마차꾼의 속도가 육상운송을 지배했다.

따라서 이렇게 느렸던 육상운송에 비해 수상운송은 훨씬 간편하고 저렴했을 뿐 아니라 날씨만 좋다면 오히려 더 신속했다. 괴테가 이탈리아 여행중 배를 타고 나폴리에서 시칠리아로 갔다가 돌아오는 데 각각 4일과 3일이 소요되었다. 그가 동일한 거리를 육로로 안락한 상태에서 여행했을 경우 소요되였을 시간을 생각하면 펄쩍 뛸 정도로 놀랄 만한 시간이다. 그러므로 항구에 가까이 있는 것은 세계에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실질적인 의미에서 런던은 노퍽의 브레클랜드에 있은 마을보다 플리머스나 리스에 더 가까웠고 세비야는 발야돌리드보다 베라크루스에, 함부르크는 포메라니아의 시골보다 바이아에 접근하기가 더 쉬웠다. 다만 수상운송의 주된 약점이 있다면 배가 아주 이따끔씩 운항되었다는 것이다.

1820년만 해도 함부르크와 네덜란드로 가는 영국 우편물은 한 주에 두 번, 스웨덴과 포르투갈로 가는 것은 한 주에 한 번, 북아메리카로 가는 것은 한 달에 한 번씩 모아서 보냈다. 그러나 보스턴 및 뉴욕과 파리의 연결이 마라마로스의 카르파티아 지역과 부다페스트의 연결보다 더 밀접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리고 거대한 대양 너머로 화물과 사람들을 대량 수송하는 것이 더 손쉬웠듯이[예를 들어 4만 4000명이 5년 (1769~1774)에 걸쳐 북아일랜드의 항구에서 아메리카로 배를 타고 가는 것이 똑같은 항구에서 5000명을 3세대에 걸쳐 던디로 수송하는 것보다 더 쉬웠다] 마찬가지로 시골과 도시를 연결하는 것보다 멀리 떨어진 각국의 수도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이 더 쉬웠다.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 소식은 13일 내에 마드리드의 민중들에게 도착했다. 그러나 수도 파리에서 불과 13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페론에는 28일이 지나도록 '파리로부터의 소식'이 전달되지 않았다.

따라서 1789년의 세계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거대했다. 그들 대부분은 징병과 같이 무시무시한 운명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지 않은 한 자신이 태어난 고장이나 교구에서 살다가 죽었다. (바로 1861년까지도 프랑스의 90개 현 가운데 70개 현에 거주하는 사람들 10명 중 9명 이상은 자신의 출생 현에서 살았다. 그들에게 지구상의 나머지 지역들은 정부 관리들의 활동 무대이거나 소문의 대상일 뿐이었다 
소수의 중류나 상류 계급을 대상으로 한 신문밖에 없었으며(1814년에 프랑스 신문의 통상 발행부수는 5000부였다) 어쨌든 글을 읽을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소식은 여행자와 일뷰 유동인구(상인과 도부꾼, 순회영업하는 직인, 이주하는 장인과 계절 노동자, 순회수사와 순례자로부터 밀수꾼 도적 및 장이 선 곳에 모인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자유인과 부랑인들로 뒤섞인 다수의 사람들)를 통해서 대다수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2.
1789년의 세계는 압도적으로 농촌적이었는데, 이러한 기초적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당시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도시가 그다지 융성하지 못했던 러시아와 스칸디나비아 및 발칸 제국 같은 나라에서는 전 인구의 90~97퍼센트가 농촌인구였다. 비록 쇠퇴했지만 도시적 전통을 지닌 지역에서조차도 농촌 또는 농업인구의 구성비율이 극히 높았다. 이용 가능한 추정치에 따르면 롬바르디아가 85퍼센트, 베네치아가 72~80퍼센트, 칼라브리아와 루카니아가 90퍼센트 이상이었다. 실제로 매우 번성했던 몇몇 공업 및 상업 지역을 벗어나서, 거주민 각 다섯 명 중 적어도 네 명이 도시 사람으로 이루어진 꽤 큼직한 유럽국가를 찾기는 곤란했다. 영국에서조차도 도시 인구의 수가 1851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지방 인구수를 막 넘어섰기 때문이다.

'도시적'이라는 낱말은 물론 애매한 표현이다. 이 낱말은 우리 기준으로 보아 1789년까지 진정 대규모였다고 불릴 만한 유럽의 두 도시 (즉 인구 100만 명의 런더과 50만 정도의 파리) 와 10만여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20여 개의 도시를 포함한다. 이러한 도시는 프랑스에 둘, 독일에 둘, 에스파냐에 넷 정도, 이탈리아에 다섯 정도 (지중해 연안은 전통적으로 도시의 본고장이었다) 그리고 포르투갈, 폴란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및 유럽터키에 각각 하나씩 있었다. 그러나 이 낱말은 또한 대다수의 도시민이 실제로 거주했던 수많은 지방 소도시들도 포함하는데,그 실제의 규모는 공공건물과 명사들의 저택들로 둘러싸인 교회 광장에서 들판까지 산책하는 데 몇 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여기서 고찰하는 시기의 후반(1834) 무렵에조차 오스트리아 전 인구의 19퍼센트에 해당하는 도시 거주민 중 4분의 3 이상이 주민수 2만명 미만의 지방 소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도시에 사는 오스트리아인의 절반은 인구 2000~5000명 규모의 지방 소도시에서 살았다.

프랑스 일주에 나선 프랑스 직인들은 이러한 지방 소도시들을 거쳐갔으며, 이후 수세기 동안 침체로 인해 원형대로 보존된 이들 지방 소도시의 16세기 모습을 독일 낭만파 시인들은 자신들의 시에서 조용한 풍경의 배경을 묘사함으로써 그대로 되살렸다. 이 소도시들의 위론 절벽처럼 가파른 에스파냐식 대성당들이 우뚝 솟았다. 이 소도시의 진흙탕 속에서 차시드 유대인들(Chassidic Jews)은 기적을 행하는 그들의 라비들을 숭배했고, 정통파 라비들은 법칙의 신학적 난해성에 관하여 논쟁했다. 고골리의 감찰관은 부자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치치코프는 죽은 영혼의 매입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기 위해 이러한 소도시들로 향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도시들은 또한 혁명을 수행하거나, 자신을 따르는 첫 민중을 얻게 될 야심 차고 열렬한 젊은이들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로비스피에르는 아라스, 그라쿠스 바뵈프는 생캉탱, 나폴레옹은 아작시오 출신이었다.

이러한 지방 소도시들은 작았금에도 불구하고 도시적이었다. 지방의 진짜 도시민들은 영리하고 유식한 사람들이 그저 힘이나 세고 느릿느릿하며 무식하고 멀청한 사람들을 경멸하듯이,주변의 시골을 멸시했다.(진실로 세상을 잘 아는 사람의 수준에서 볼 때 활기 없는 시골 소도시가 자랑할 만한 무엇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 독일의 풍속 코미디는 시골뜨기들을 조롱하는 것만큼이나 잔인하게 크래빈켈[Kraehwinkel:매우 작은 자치시]을 조롱했다).
지방 소도시와 농촌 또는 소도시 점유지역과 농촌 점유지역 사이의 경계는 매우 분명했다. 다수의 나라에서 물품세 장벽이나, 오래 된 성벽의 선으로도 때로는 이 둘을 갈라놓았다. 프러시아와 같이 극단적인 경우에는 징세 대상 시민을 적절한 감독 아래 두고자 했기 때문에, 정부는 도시와 농촌의 활동을 거의 완전하게 구별했다.

그렇게 엄격한 행정적 구분이 없었던 지역에서조차도 지방 소도시민들은 종종 신체적으로 농부들과는 달랐다. 동유렵의 광활판 지역에서 그들은 슬라브, 마자르 또는 루마니아인의 호수에 떠 있는 독일, 유대 또는 이탈리아인의 섬이었다. 주변의 농부와 같은 국적과 종교를 가진 지방 소도시민일지라도 다르게 보였다. -그들은 다른 옷을 입었고(실내애서 노동을 착취당하는 사람들이나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농부들보다 키가 컸다 -아마 말랐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아마 자신이 남들보다 이해가 빠르며 꽤 많이 배웠다는 사실을 분명히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생활양식에서는 농촌 사람들만큼이나 자기 생활지역 밖의 사정에 어두웠으며 폐쇠적이었다.

지방 소도시는 본질적으로 여전히 농촌의 사회와 경제에 속해 있었다.지방 도시는 농민들의 빨랫감을 맡아서 해주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예외 없이 주변 농민들에게 의존하면서 살아갔다. 지방 소도시의 중류 및 전문 계층은 곡물 및 가축상인, 농산물 가공업자, 토지가 지주의 사유지인지 공동체 소유의 일부분인지 확정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소송과 귀족의 토지에 관한 일을 다루었던 법률가 및 공증인, 지방의 방적공이나 방직공에게 선대하고 다시 돈을 거둬들였던 기업가적 상인들, 보다 존경받았던 정부의 대표자들, 영주 또는 교회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 소도시의 장인과 소매상인들은 주변의 농민들이나 그들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소도시민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었다.

중세 말기의 전성기를 지나면서 지방 소도시들은 비참하게 몰락해갔다. 그것이 '자유도시'이거나 도시국가인 경우는 아주 드물었으며, 넓은 시장을 위한 제조공장의 중심지이거나 국제교역의 중간집결지였던 경우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었다. 지방 소도시는 쇠퇴해갈수록 자신이 모든 진입자로부터 지켰던 시장의 지역적 독점에 더 완고하게 매달렸다. 젋은 급진주의자와 대도시의 협잡꾼들이 조롱했던 지방주의의 대부분은 이러한 경제적 자위의 움직임으로부터 나왔다. 남부 유럽에서는 신사들, 때로는 귀족들조차도 토지의 지대를 수입원으로 해서 살았다. 독일의 경우 대규모 영지와 거의 비슷한 크기인 소규모의 수많은 공국에 속한 관료들은 성실하고 말없는 농민들로부터 거둔 수입으로 전하의 요청을 수행했다.수수한 고전적 또는 로코코 스타일의 석조건물이 지배하는 소도시의 정경이 서유럽 일부에서 여전히 입증되듯이, 18세기 말의 지방 소도시는 번성하고 팽창하는 공동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번영의 근원은 주위의 시골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3.
따라서 농업문제는 1789년의 세계에서 기본적인 것이었으며. 대륙에서 최초의 경제학파였던 프랑스의 중농학파가 왜 토지와 지대가 순소득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농업문제의 요점은 경작하는 사람과 그것을 소유한 사람, 즉 부를 생산하는 사람과 그것을 축적하는 사람의 관계였다.

토지소유 관계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유럽(혹은 서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복합체)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유럽의 서쪽으로는 해외 식민지가 있었다. 미국의 북부와 이보다는 덜 중요한 몇몇 독립적 영농지역을 제외하면, 이곳 식민지의 전형적인 경작자는 강제 노동자나 사실상 농노로서 일했던 인디언, 그리고 노예였던 아프리카인이었다. 다소 드물긴 해도 차지농민, 소작농 등도 있었다(동인도의 식민지에서는 유럽 이주민에 의한 직접 경작이 더욱 드물었는데, 토지관리인에 의한 강제의 전형적 형태는 네덜란드령 섬들에서 생산된 커피나 향료 등 농작물의 할당량을 강제로 배급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지역의 전형적인 경작자는 부자유스럽거나 정치적인 제약을 받고 있었다.

전형적인 지주는 거대한 준봉건적 토지(아시엔다, 핀사, 에스탄시아) 또는 노예 플렌테이션의 소유주였다. 준봉건적 토지 경제는 원시적이고 자기충족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어쨌든 순수하게 지역적인 수요에 연결되어 있었다. 에스파냐령 아메리카는 사실상 인디언 농노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생산한 광물을 수출했으나 농산물은 별로 수출하지 않았다.카리브 해의 섬들에 중심을 두고 남아메리카의(특히 북부 브라질) 북부 해안과 미국의 남쪽 해안을 따라 형성된 노예 농장권 경제의 특징은 설탕, 그리고 이보다 비중이 낮은 담배와 커피, 염료 및 무엇보다도 산업혁명 이후 재배되어 온 목화와 같은 매우 중요한 소수의 수출용 농작물을 생산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이는 유럽 경제의 한 구성요소가 되었으며, 노예무역을 통해 아프리카 경제의 일부를 형성했다. 기본적으로 당시 이 지역 역사는 설탕의 쇠퇴와 면화의 상승이라는 관점에서 씌어 질 수 있다.

서유럽의 동쪽, 더욱 구체적으로는 엘베 강, 오늘날 체코의 서부 국경 그 다음 남쪽으로 트리에스테까지 이어지는 선(이 선은 오스트리아를 동부와 서부로 나눈다)의 동쪽으로는 농노제 지역이 존재했다. 사회적으로 토스카나와 움브리아 지방 이남의 이탈리아와 남부 에스파냐가 이 지역에 속했던 반면 스칸디나비아는(덴마크와 남부 스웨덴을 제외하고) 이에 속하지 않았다. 이 광활한 지역은 가술적인 이유로 해서 자유로웠던 농민들의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슬로베니아로부터 볼가에 이르기까지 전 지역에 흩어져 있던 독일의 소농 식민개척자, 일리리아 오지의 황량한 암벽 속에서 살던 사실상의 독립적인 씨족들, 최근까지 기독교인과 터키인 또는 타타르인 사이의 군사적 경계선을 형성해온 지억에 살고있는 판두르족과 코사크족 같은 야만적인 농민전사들, 영주와 국가의 영향권 밖으로 진출했던 자유로운 개척자들 또는 대규모 영농이 불가능했던 광활한 삼림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그러나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경작자는 자유롭지 못했고, 15세기 말과 16세기 초 이후 거의 끊임없이 도를 더해온 농노제의 홍수로 전신이 거의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러한 농노제의 현상이 가장 불분명하게 나타났던 곳은 당시까지 여전히 직접적 지배 아래 있었던 발칸 지역이었다. 각 분할 단위가 비세습적인 터키인 전사를 먹여 살릴 수 있도록 토지를 분할하는, 전 봉건적인 터키의 원래 토지제도는, 오래전에 이슬람교 영주의 지배를 받는 세습적 영지제도로 변질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영주들은 영농이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가능한 정도까지만 농민을 착취할 뿐이었다. 이 때문에 다뉴브와 사베 이남의 발칸 제국은 19, 20세기에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났을 때 토지 소유가 집중된 나라로서가 아닌, 극히 영세한 소농이기는 하나 본질적으로 소농 국가로서 등장했던 것이다.그러나 발칸의 농민들은 기독교인으로서 법적으로 부자유스러웠고 적어도 그들이 영주의 영향권 내에 있는 한, 농민으로서는 '사실상' 자유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그 밖의 지역애서의 전형적인 농민은 한 주일의 대부분을 영주의 토지에 나가 강제노동을 하거나 이에 상당하는 다른 형태의 의무를 이행하는 대 바치는 농노였다. 농노들은 폴란드의 일부와 러시아에서 토지와 분리돠어 판매가 가능했던 노예와 거의 비슷한 예속상태에 놓여 있을것이다.

1801년의 「모스크바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선전문이 씌여 있었다.(전체 농노 중에서 가사용 농노가 전 농노의 거의 5퍼센트였다)

노련하고 매우 예의바른 마부 세명과 용모 단정하고 여러 종류의 육체 노동에 능숙한 15세 및 16세의 여자 두 명을 판매함. 동 상점은 피아노, 오르간과 함께 두 명의 미용사도 팔려고 내놓았는데, 그 중 한 명은 나이가 21세이고 글을 읽고 쓰며 악기를 다루고 기수장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다른 한 명은 숙녀 및 신사의 머리를 손질하는 데 적당함.

서유럽과의 주요 교역통로였던 발트 해의 인접지역에서는 농노제적 농업에 의해 서부의 수입국으로 수출할 농작물이 대대적으로 생산되었다-옥수수, 아마, 삼 및 대부분 조선에 사용될 목재였다. 다른 지역에서는 농노제적 농업이 지방적 시장에 더욱 의존했는데 그 시장은 작센, 보헤미아 및 거대한 수도 빈 등과 같이 공업과 도시적 발전이 상당히 진전된, 접근 가능한 지역을 적어도 하나 정도는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적 시장의 대부분은 후진적인 상태였다. 흑해 통로의 개통과 서부 유럽, 특히 영국의 도시화로 인해 러시아 흑토지대의 곡물 수출은 이제 막 촉진되기 시작한 단계였다. 곡물은 소련의 산업화 시기 전까지 러시아 대외무역의 주요 상춤이었다. 따라서 동부의 농노제 지역은 해외 식민지와 유사하게 식료품과 원자재를 생산하는, 서유럽에 '종속된 경제'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농민의 지위가 법률적인 세부사항에서 다소 차이가 있었다고 해도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의 농노제적 지역은 유사한 경제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대체로 이 지역은 대규모 귀족영지로 구성된 지역들이었다. 시칠리아와 안달루시아에서는 대규모 귀족영지 중 몇몇은 로마 라티푼디움의 직계후손이며, 라티푼디움의 노예와 콜로니가 이 지역의 특징적 요소였다. 목장 경영, 곡물 생산 및 궁핍란 농민들로부터 최대한 수탈한 것은 이 모든것의 소유자인 귀족들이 가져갔다.

농노제 지역의 영주는 이렇게 대규모 영지의 귀족적 소유자이자 경작자 혹은 착취자라는 특징을 갖는다. 대영지의 거대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예카테리나 여제는 총신들에게 4, 5만 명의 농노를 하사했고, 폴란드의 라드치빌스는 아일랜드의 반만한 영지를 가지고 있었다. 포트키는 우크라이나에 3만 에이를 소유하고 있었고, 헝가리의 에스터헤이지 가(하이든의 후원자)는 한때 700만 에이커에 가까운 영지를 소유했다. 수십만 에이커의 영지는 보통이었다. 비록 종종 무시되었고 원시적이며 비능률적이었다 하더라도 그 영지들은 막대한 소득을 낳았다.

어느 프랑스인 방문객이 황량한 메디나 시도니아의 소유지에 관하여 말했듯이. "포요하는 것만으로 자신에게 접근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혼비백산케 하여 쫒아버리는 숲속의 사자와 같이 군림" 할 수 있는 에스파냐인 대공은 돈이 풍족한 영국 귀족을 기준으로 해도 전혀 현금이 부족하지 않았다.


개꿀잼이라 가져와봄 나머지는 빌리던지 사서 읽어봐

6개의 댓글

2018.08.26
내용 재밌어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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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6
정말 좋은책인데 번역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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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7
프랑스 좌파 ㅇㄱ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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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8
@두통있음
ㅁㅊ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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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8
결국 서양도 산업혁명 이전에는 극소수의 식자층을 제외하고는 동양과 다를 게 없었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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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8
에릭 홉스봄 책 넘 난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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