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펌]고려 말 왜구와의 전쟁사 역사상 최악의 졸전들

6. 왜구에게 모욕을 당한 고려 수군

신사일. 왜적의 배 27척이 양천(陽川)을 침구해 사흘 동안 머물렀는데, 장수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했으나 아군은 죄다 성중애마(成衆愛馬) 소속으로 수전에 익숙하지 못한지라 전투에서 대패했다. 왜적은 아군 원수(元帥)의 지휘용 깃발과 북을 탈취한 후 강화까지 가서 고을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갔다. ─ 고려사 공민왕 21년


1380년의 진포 해전 전까지 고려 수군은 왜구를 상대로 졸전과 졸전을 거듭했다. 특히, 중앙의 병마사라던지 수군에 익숙치 못한 지휘관들이 수군을 지휘하는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1372년 양천 전투에서 고려 수군은 수군이면서도 수전에 익숙치 못한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왜구에게 손도 써보지 못하고 대패했다. 심지어 고려군 원수의 깃발과, 군사 지휘용 북 마저 왜구에게 탈취당할 정도의 대패였다.


그런데 왜구들은 돌아가는 도중 굳이 강화도에 들러, 강화도 백성들에게 이 깃발과 북을 돌려주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군대의 상징과 같은 물건들이 적의 손에 들어갔다가 일반 백성들에게 하잘것 없다는 듯이 보내졌으니, 고려군으로서는 대단히 큰 모욕을 당한 셈이었다.



5. 1377년 왜구의 고려군 병사 1,000여명 납치 사건

피해 규모 : 강화도 초토화, 고려 병사 1,000여명이 포로가 됨


1377년의 왜구들은 '병력' 면에서 사상 최대 수준이었던 1380년의 왜구를 제외하고는, 그 끈질김과 계속되는 공격에선 사상 최대 수준이었다. 이 당시 한반도의 전역은 왜구에 침략을 당했다. 이 당시 강화도는 왜구와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지고, 심지어 거의 왜구 소굴이 되기도 했을 정도의 지옥과 같은 전장이었는데, 그러한 상태에서 추가로 나타난 50여척의 왜구 함선은 부사 김인귀(金仁貴)를 살해하고 수자리를 서던 고려군 병사 1,000여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1,000여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고려의 상황을 고려할때 상당한 규모였으나, 그 정도 병사들이 제대로 된 반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왜구에게 포로로 잡혀 버린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훗날 진포대첩의 영웅이기도 한 나세를 파견하여 이 왜구 세력을 쫓아내도록 했으나, 왜구들은 물러나면서도 강화도 전역에서 살육과 약탈을 하며 철저한 파괴를 자행했다.



4. 1376년 김진의 졸전

피해 규모 : 경상도 지역 초토화


1376년은 최영의 홍산 전투가 있었던 해다. 그러나 홍산에서 대패한 왜구들은 기세가 전혀 꺾이지 않고 여전히 의기양양했으며, 고려 전역을 유린하고 있었다. 특히 왜구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당한 곳은 합포 지역이었다. 경상도에서 남해안을 타고 서해안을 향해 가는 왜구들의 세력 때문에 합포의 고려 군영은 끊임없이 왜구에 타격을 입었으며, 이곳을 방어하는 임무는 대단히 중요한 임무였다.


그런데 1376년 당시 이 부근에서 원수로 있던 사람은 김진(金縝)이었다. 그러나 김진은 평소에 왜구를 막는 일에는 관심이 거의 없었고, 늘 얼굴이 예쁜 기생을 골라 노는데만 여념이 없었다. 김진과 그의 주요 패거리들은 매일같이 놀기만 했으므로, 사람들은 이들에 대해 '소주패' 라고 불렀다. 맨날 소주만 마시는 패거리라는 소리다.


김진과 이 소주패 패거리들은 자신외의 일반 고려 병사들에게는 대단히 엄하여, 매일같이 일반 병종들을 욕하고 때리며 위세를 부렸다. 그런데 이 해 12월, 실제로 왜구가 쳐들어와 김진이 싸우려 하자, 항상 모욕만 당한 일반 병졸들은 싸우는것을 거부했다. 늘 김진이 소주패만 끼고 다니니, 자신들이 나설것도 없고 소주패를 데리고 나가서 싸워보라는 것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전투가 벌어질 수 없었고, 결국 합포의 고려군영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의창(義昌)ㆍ회원(會原)ㆍ함안ㆍ진해ㆍ고성ㆍ반성(班城)ㆍ동평(東平)ㆍ동래ㆍ기장 등 현(縣) 등은 모두 약탈 당하고 백성들은 학살 당했다.



3. 1377년 착량 해전

피해 규모 : 전함 50여척 침몰, 병사 1,000여명 이상 사망


착량은 강화도와 본토와의 사이 좁은 해협의 길목을 일컫는다. 당시 본토 외곽의 서해안 지역은 왜구의 소굴이 되었고, 강화도 역시 여러차례 왜구에게 점령당하는 판이었으므로 1380년의 진포 해전 이전까지 왜구를 상대로 해상으로 졸전을 거듭한 고려 수군으로서는 함부로 바다에 나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최고 군 지휘관인 최영은 착량 부근의 수군을 이끄는 만호(萬戶) 손광유(孫光裕)에게 "착량 어귀에서 군대의 위세만 보이며 적에게 위압감을 주기만 하고, 절대로 바다로 나가서는 안된다." 며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손광유는 어느날 술을 진탕 마시고 그대로 곯아떨어져 군대의 지휘를 완전히 손에서 놓아버렸다. 그 상태로 고려 수군은 착량에서 나가 바다 부근에서 어정거리고 있었다. 어쩌다 바다로 나왔다면 최대한 빨리 다시 본토 부근으로 복귀해야 함에도 지휘관이 술에 취해 잠을 자고 있는데 일사불란한 명령이 이루어질 수 없었고, 왜구는 바다에서 어정거리고 있는 이 먹잇감을 놓치지 않고 기습해 왔다. 그 결과, 병선 50여척 이상이 침몰하고 사망자만 1,000여명 이상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어디까지나 '사망자' 만 1,000여명이므로, 추가적인 피해가 어느정도 수준일지는 짐작하기도 힘들다.




2. 1364년 이작도 해전

피해 규모 : 80여척의 병선 중 60여척 침몰


이작도 해전은 단순 피해 규모만을 따지지 않고, 그 과정의 한심스러움을 본다면 가히 최악의 패배로 손꼽혀도 할 말이 없는 졸전 중의 졸전이다. 1364년, 조정에서는 왜구의 기세가 너무나 심각하여 지방의 조운선 마저 올라오지 못하게 되자, 일단의 병력을 파견하여 이러한 조운선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겼다. 왜구들은 종종 조운선을 호위하는 이런 호위선단 마저도 격파하고 조운선을 약탈했기에, 이때의 호위선단의 규모는 자못 웅장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교동(喬桐)·강화(江華)·동강(東江)·서강(西江)의 80여척이나 되는 대선단을 꾸려 지방으로 내려 보낸 것이었다.


이 선단들을 지휘하는 사람은 경기우도병마사(京畿右道兵馬使) 변광수(邊光秀)와 좌도병마사(左都兵馬使) 이선(李善)이었다. 배를 타고 이동하던 그들은 대도(代島) 지역에 도착했는데, 때마침 왜구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인물로부터 현재의 인천 근처인 이작도(伊昨島)에 대규모의 왜구가 매복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게 된다. 전쟁에서 첩보란 대단히 중요하고, 특히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어려운 해전에서는 더욱 중요한 법이지만 변광수와 이선은 이러한 정보를 우습게 여겨 무시하고 군사를 움직였다.


그러자 왜구는 두세척의 소규모 함선을 출동시켜, 고려군과 언뜻 교전을 하는듯 하더니 후퇴하는 기만책을 사용했다. 그러나 고려 수군은 이러한 기만책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유인되었으며, 이후 갑작스레 나타난 왜선 50여척은 숫자로는 거의 두배에 가까운 고려 함선 80여척을 오히려 포위하고 일방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왜구의 일방적인 공세에 장교들 조차 손도 써보지 못하고 전사했고, 급기야 장교 급들의 죽음을 본 일반 병졸들도 전의가 극도로 떨어져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렇게 죽은 사람의 숫자만 열에 아홉, 여덞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병사들의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것이 최고 지휘관의 역할이지만, 변광수와 이선은 병사들을 내버려 두고 자신들만 살기 위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병사들은 "어찌 달아나시느냐, 같이 머물며 왜적을 격파하자." 고 거의 절규하듯 소리쳤으나 변광수, 이선은 이를 못 들은척 하고 남은 병사들을 지옥같은 왜구들의 한가운데 내버려 두고 도망치고 말았다.


최고 지휘관들이 모두 도주하고 왜구에 포위된 지옥과 같은 상태에서 부사(副使) 박성룡(朴成龍)은 홀로 분전하다 몸의 여러 곳에 화살을 맞고 큰 부상을 당했다. 병마판관(兵馬判官) 전승원(全承遠)과 판관(判官) 김현(金鉉), 산원(散員) 이천생(李天生) 등은 왜구와 치열하게 싸워 간신히 포위망을 돌파했으나, 도주에 성공했다고 여기는 순간 갑자기 그들의 앞을 왜선 2척이 가로 막았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 치열하게 싸운 고려 병사들조차 모든 희망을 잃고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가운데, 전승원 만은 홀로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다가 창을 여러 번 맞고 바다에 빠졌다.


하지만 치명상을 피한 전승원은 그대로 바다를 표류하며 적의 눈을 속이다 밤을 틈 타 왜구의 작은 배에 올라탔다. 전승원은 자신 역시도 기진맥진한 몸으로 큰 부상을 입고 거의 정신을 잃은채 뱃전만을 붙들고 있는 고려 병사 한 명을 구출하고는, 망망대해에서 직접 노를 저어 3일간 이동한 끝에 간신히 남양부(南陽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남겨진 자들이 처절하게 살아남거나 죽어가는 동안 변광수와 이선이 이끈 20여척은 무사히 귀환에 성공했고, 교동, 강화, 서강, 동강 등지에서는 가족을 잃은 백성들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패배를 당한 변광수와 이선은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1. 1374년 합포 전투

피해 규모 : 5,000명 이상 사망


대몽항쟁 이후 고려의 전쟁사가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다 보니 이 시기에 활약한 역전의 무장들, 이를테면 우리 성계 형님의 신출귀몰함 등도 그동안 잘 부각이 안되는 측면이 있었으나, 이 '부각이 안된다' 는 것은 '잘난 사람이 잘난것을 인정받지 못한다.' 는 뜻 뿐만 아니라, '막장인 사람의 막장성을 잘 퍼뜨리지 못했다.' 는 것도 포함된다. 바로 여기서 소개할 인물인 김횡(金鋐)이 그러하다.


사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중에 막장스런 행보를 보인 지휘관은 한 두명도 아니고, 왜구와의 전쟁 극초기는 물론이고 후반에도 우왕이 조준 등을 감찰관으로 파견하려고 애를 썻을만큼 지휘관들의 무능한 행보는 자주 있었지만, 게중에서도 이 인물은 매우 질이 좋지 않았다.


고려사에 따르면 김횡은 본래 의성현(義城縣) 사람으로, 다름 아닌 우리의 쾌남아 충혜왕 형님을 모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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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형님과 같이 놀면서 형님의 포스를 흡수해서 그런지 몰라도, 김횡은 그 막장력이 하늘을 찔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후 김횡은 면직이 되었는데, 이것은 그에게 있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면직이 된 김횡이 자리를 잡은 곳은 전라남도 나주였다. 나주하면 나주곰탕과 나주배로 유명하건만, 그러나 김횡은 먹거리보다는 땅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이 곳에서 남의 노비와 땅을 마음대로 빼앗아 자신의 재산을 불렸다. 그렇게 배를 두둑하게 벌리고 있었는데, 그런 김횡의 경력에서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 왜구가 나주에 침입하자, 김횡은 목포 사람들을 규합하여 나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친 것이다.


이 공으로 김횡은 다시 복직 될 수 있었다. 또한, 고려사 세가의 기록에 따르면 김횡은 1359년 전라도추포부사(追捕副使)로 전남 무안(아무래도 좋은 이야기지만 필자의 현재 집이 있는 곳이다)에서 왜구를 상대로 소규모 승전을 거두었다.


이 이후의 막장스런 행보를 본다면 의아할 수도 있으나, 이 무렵의 김횡은 왜구와 싸우는 일에 대해서 약간 괜찮은 활약을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서도 김횡이 전라도 포왜사로서 제법 큰 공을 세웠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김횡은 전부터 수탈하여 모아둔 돈, 그리고 한두번의 승리로 거둔 재물을 이용해 윗선에 뇌물을 부지런히 바치고 있었다. 따라서 작은 공이 유난히 부각되었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 김횡은 홍건적의 침입 이후 개경 수복전에 고려가 전력을 탈탈 모으고 있을때 함께 해서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일등 공신이 된 김횡은 이후 전라도 도순어사가 되어 상당한 실력을 누리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게 볼만한 전공들이 좀 있었다. 그 이후부터는 얄짤 없다.



당시 전라도는 대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었던데다가, 왜구가 수차례 침입하는 바람에 전란의 후유증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다. 그런데 도순어사가 된 김횡은 이를 위무하기는 커녕, 되려 온갖 방법으로 백성을 수탈해 재산을 불렸다.



여기까진 일반적인 악독한 지방관 같은 면모를 보였다고 치자. 김횡의 비범한 면모는 '군량미의 절반을 착복' 했다는 부분이다. 왜구를 막으라고 보냈더니, 혼자서 전라도 병력의 군량미 절반을 해먹고 있는 것이다! 당시의 전라도가 완전히 평화로운 곳이었다면 그런 부패상이 벌어질 법도 하나, 당시의 전라도는 현재진행형으로 끊임없이 왜구와의 전투가 순천, 장흥, 나주, 무안 등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현장의 병사들에게 갈 군량미 절반을 빼앗았으니, 김횡의 배포를 알 수 있다.



또 대단한 부분은, 김횡이 군량미 뿐만 아니라 조운선에도 손을 쓴 부분이다. 그는 전라도 여러 고을의 조운선에게 모두 세금을 부과했고, 그 세금은 자신의 주머니로 흘러갔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자면 고려는 왜구의 공세로 인해 조정에 제대로 조운선이 오지도 못했으며, 공민왕은 이를 막기 위해 '호위 병력' 으로만 수백여명을 지방에 파견하여 조운선을 호위하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구는 호위병 수백명을 살해하고 조운선을 약탈했다. 조정에서는 죽을 듯 살듯 저러고 있는데 정작 조운선을 출발시키는 인물은 거기서도 또 해먹고 있는 것이다.



토지와 점탈과 횡령 이라면 이미 훌륭한 탐관오리의 기상이 느껴지게 할텐데, 이 김횡이라는 인물은 여기에 더해 참 알기 쉽게 '음행' 까지 더해졌다. 김횡의 옆에서 일하던 사람 중에 송분(宋芬)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송분이 죽고 부인만 혼자 남았다. 김횡은 그 부인을 일 핑계로 부르더니, 상도 안 끝난 미망인을 벌건 대낮에 강간 한 후 첩으로 삼았다. 이 부분은 아마 충혜왕 형님에게 한 수 배우지 않았던가 싶다. 하다 못해 배에 여자 데리고 탔다는 원균도 대낮에 과부 강간(그것도 상중에)은 안 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조정에 조운선은 바쳐야 했으므로, 1364년 김횡은 현재의 충청남도 예산군과 당진군 부근인 내포(內浦)까지 조운선을 호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병력의 절반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여기까진 그럴 수도 있다. 나폴레옹이라도 질 상황이 되면 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김횡은 뇌물을 기가 막히게 바치며 공민왕의 측근들에게 아부했고, 이 공민왕의 측근들은 김횡을 칭찬하며 병력 절반을 잃은 패배를 되려 승전으로 바꾸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문에 김횡은 처벌은 커녕, 되려 공민왕으로부터 "앞으로도 열심히 하라." 고 술까지 받았다. 이에 온 나라 사람들이 분개했다고 한다.



이 김횡은 이후 신돈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 되었지만, 패배도 승전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졌는데 그깟 신돈의 일파설이라 별다른 위협도 되지 못했다. 김횡은 이후 동지밀직에 임명되어 복직했다. 그는 다시 전라도의 등골을 빼먹기 위해 전라도로 갔으나, 초창기에 왜구를 몇번 막아내던 행운도 사라지고 없어 왜구의 침입을 막지 못했다는 탄핵만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되자 김횡은 이제 전라도에서 해먹을 것은 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는 김흥경(金興慶)과 환관 김사행(金師幸)이 공민왕의 총애를 받는다고 판단,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뇌물 공세를 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경상도 도순무사로 화개장터 넘듯 넘어올 수 있었다.




경상도에서 김횡이 한 짓도 비슷했다. 그는 경상도에서 온갖 막장 짓를 다 하면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에 보다 못한 안렴사 유구(柳玽)를 탄핵했는데, 여기에 김횡은 혁시 비상한 태도를 취하였다. 즉 이번에는 자신이 역으로 유구의 뒷조사를 해서 탈탈 털어 구린점을 찾고, 역으로 유구를 탄핵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전라도를 떠나 자신의 선택으로 온 경상도에서, 김횡은 느긋하게 배를 두들기고 있었다. 경상도야 말로 이제 더 해먹을 것도 없을 전라도 대신 그에게 주어진 선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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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4년, 무려 350여척의 왜구가 경상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 350여척의 왜구는 그때까지 나타난 왜구 함선의 숫자 중에서도 최고 수준이었다. 이 350여척의 왜구 함선에 각각 30명씩만 탔다고 해도 그 숫자는 1만이 넘는다. 25명씩 탔다고 해도 8,000명이 넘는 숫자였다. 당시까지 고려가 왜구를 상대로 거둔 최대의 승리는 1364년 김속명이 왜구 3,000여명을 참살한 진해 전투와 왜구 1,000여명을 참살한 홍사우의 삼일포 전투 등이 다였다. 그 승리도 다른 경우와 비교하면 대단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350여척의 습격을 받았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다.



갑자기 저 멀리서 나타난 엄청난 숫자의 왜선들은, 거칠 것도 없이 다른곳도 아닌 고려군이 모인 합포의 군영을 공격했다. 갑작스럽게 대규모 함선이 기습을 가하고, 군영에 불이 붙자 합포의 고려군은 별다른 반항도 못하고 처참하게 학살되었다.



이때 사망한 고려군의 숫자는 고려사의 기록으로는 무려 5,000여명! 전사자에 대한 숫자는 고려사에서는 오천여명五千餘人, 고려사절요에서는 오십여명五十餘人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극형을 내린 공민왕의 태도를 보자면, 만일 350여척의 함선이 공격해 왔는데 50명이 전사했다고 극형을 내리는 왕이라면 공민왕은 양심도 없는 인간이 되므로 50명은 5,000여명의 오기로 보인다.




이 5,000여명이라는 전사자의 숫자는 가히 엄청나 수준이었다. 당시 고려는 한숨을 돌렸다고 할만한 1388년에도 제 2차 요동원정에 5만여명, 전투병력만 따졌을지 3만 8천명 정도를 동원했을 뿐이다. 요동 원정 외에 왜구를 막기 위해 남은 병력을 최대한 많이 잡아 1만이라고 하여도 당시 고려의 군대는 6만 남짓이었을텐데, 그렇다면 1388년의 기준으로 보아도 국가 전체 병력의 12분의 1이 제대로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하고 녹은 셈이다. 하물며 1374년 당시에는 그보다도 상황이 열악했을 터이다.



더구나 이 경우는 고려군이 모여있던 합포의 군영이 공격을 받은 경우로, 각지에서 일단 사람을 대충 끌어모아 20만의 숫자를 만들어 내세웠던 개경 수복전처럼 삽시간에 병력을 불린 경우도 아니었기에, 이 5,000여명의 병력 피해는 엄청난 수준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심지어 한국 해전 역사상 최악의 패배라는 칠천량 전투 당시의 전사자도 이보다 더 많을지 장담 할 순 없다. 칠천량 전투의 '전사자' 에 대해 난중잡록 등에서는 엄청난 수준이었다는 늬앙스로 묘사되어 있으나, 이덕형의 보고 등에서는 거의 죽은 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물론 대규모 군대가 흩어지고 슬금슬금 숨어 있다가 명량 이후에나 합류하곤 했기에 군대의 피해가 막심하긴 하나, 본래 근대 이전의 전투에서 살상률은 그리 높은 편은 아니고 대부분은 한번 무너지면 우르르 흩어지곤 하는 점이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확실하게 사자(死者)가 5,000명이라고 하는 합포 전투의 피해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죽은 사람이 5,000명이라면, 혼란한 와중에 도망친 사람들을 포함하면 대체 몇명이라는 이야기인가?




전투에 나섰다가 갑자기 포위되거나 한 것도 아니고, 멀쩡히 군영에 머물던 병력 5,000여명을 불귀의 객으로 만든 김횡은 이제 뇌물로 어떻게 수습해볼 수 있는 정도를 넘어가고 말았다. 결국 김횡은 그 즉시 공민왕이 파견한 조림(趙琳)에 의하여 처형되고, 시신은 완전히 찢겨저 각 도로 보내져서 지휘관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쓰여졌다.



결국 김횡은 자기 나름대로 알랑방귀 뀌면서 전라도에 이어 다시 한번 경상도를 기회의 땅으로 삼았지만, 갑자기 나타난 350여척의 대함대 때문에 그 경상도가 되려 끝장이 나는 땅이 되고 말았다. 사실 1360년도 후반부부터 1370년도 초반까지는 '어디까지나 비교적' 왜구의 대규모 침입이 드물었던 소강기 였기에 김횡 역시도 어느정도 안심을 하고 있었겠지만, 1372년을 지나면서 왜구는 다시 한번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며 쳐들어왔다. 그리고 제딴에는 머리 좀 굴린다고 했을 김횡은 거기에 말려들고 만 것이다.






적들이 강화부를 떠나 수안현(守安縣 :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양촌면·대곶면지역)·통진현(通津縣 :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동성현(童城縣 : 지금의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등지를 침구해 통과하는 곳마다 깡그리 약탈해갔다. 적들이 동성현에 이르자, “아무도 저지하는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낙토(樂土)로다.”라고 떠들었다. 최영이 경복흥(慶復興)·이인임(李仁任) 등과 함께 경천역(敬天驛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에 숙영하면서 방어 작전을 짜다가, “왜구가 이처럼 제멋대로 잔악한 짓을 하니 원수(元帥)로서 면목이 없다.”고 탄식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러나 원수 석문성(石文成)이 노래 잘 하는 기생이 왔는가에만 관심을 가지자, 사람들은 두 사람의 태도가 완연히 다름을 보고 한탄했다. ─ 고려사 최영전



이렇게 끊임없이 졸전을 거듭하다 보니, 왜구들은 고려를 마음대로 활보하며 "아무도 막는 자가 없으니, 이렇게 좋은 땅도 있단 말인가!" 하고 내키는대로 소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강화도 부근에서 수도를 위협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나서있던 최영은 왜구의 이런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자 분함을 참지 못하고 "왜구가 이렇게 마음껏 활보하는데, 이를 전혀 막지 못하니 내가 원수된 몸으로서 사람들에게 면목이 없다." 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나, 당시 최영과 같이 나선 다른 원수인 석문성은 이렇게 왜구가 활보하며 '막는 자가 없다' 고 소리치는 와중에도 '노래 잘하는 기생이 군영에 와 있는가' 만 관심을 가지는 판이었다.



왜적이 서쪽 변경을 침구해오자 해주(海州) 수미사(須彌寺)가 풍수지리상 일본의 맥(脈)이 된다 하여 거기에 문수도량(文殊道場)을 열고 액막이를 하게 했다. ─ 고려사 우왕 3년 3월


급기야 고려 조정은 이상한 짓을 하기에 이른다. 1377년, 조정에서는 해주에 있는 수미사라는 절이 풍수 지리를 살펴 보니 일본의 맥이라는 듣도 못한 이야기에 혹해 맥을 못 추게 한다고 불교 관련 행사를 열고 액막이 짓을 하는 희한한 짓을 하며 왜구를 막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 해는 왜구의 침략이 최절정으로 오른 해로, 이러한 시도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출처 : https://m.cafe.naver.com/booheong/101379

13개의 댓글

2018.06.08
[삭제 되었습니다]
2018.06.08
@ㅇㄱㄱㅈ
왜구=일본 x

왜구= 한중일 혼합 거대조직

원나라 군벌귀족+고려범죄집단+일본 영주집단

삼국 쓰레기들이 모인 졸라쌘 무력집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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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3
@ㅇㄱㄱㅈ
신라구라고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해적질 일본가서 햇던걸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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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삭제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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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저승사쟈
나라가 말기인데 제대로 굴러가길 바라는건 무리지.
그리고 고려말 저 왜구는 단순 왜구도 아님. 걍 왜구로 표기되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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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sileus
보면 거의 국가급이고 훈련받은 정규군 같은데...
어느 세력이 한반도 침공을 한거냐
저때면 일본 전국시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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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걸스캔두애니씽
남북조시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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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걸스캔두애니씽
남조가 북조한테 개털리고 한반도로 멀티 시도했다는 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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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심지어 일본인들은 변방 난민들이 어디 털고 다녔는지 관심도 없어서 역사 기록에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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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eMarai
왜냐면 일본이 아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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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8
저떄 왜구는 단순한 해적 이상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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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9
최무선이 해전에서 압승한 기록은 언제쯤 나옴? 너무 처참한데..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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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1
일본이 항상 한반도를 좆밥으로 여긴 이유는 조선은 항상 일개 지방영주들에게 개좆밥으로 강간당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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