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펌]명종 대 을묘왜변 당시 조선의 국방 실태에 대해서

1555년 명종이 재위했을 때 벌어진 을묘왜변 당시, 주요 방어선 중 하나였던 달량성에는 수비 병력이 100명 단위도 아니고 달랑 20명만 있던 상태였습니다. 당시 전라도 병마절도사였던 원적 역시 휘하에 있던 병력은 군관과 산직에 있던 무사를 모두 합쳐 20명에 불과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한 도를 방어할 임무를 지닌 병마절도사가 즉시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20여 명 뿐이라는 것이며 1차 방어선이었던 달량성의 경우 20명의 수비 병력만을 보유하고 있었으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일단 원적이 동원령을 내렸고 장흥부사 한온이 병력을 끌고오면서 200명으로 불어났지만 왜구의 숫자에 비하면 상대가 되질 않았습니다.


당시 침공해온 왜구의 숫자는 선박의 숫자로 유추할 수 있는데 약 70여 척을 끌고 왔으니 약 1,500여 명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숫자의 차이는 어마어마 했습니다. 그나마 달량성에서 20명의 조선군이 버티고 있었고, 외곽에서 전라병영 소속의 소집 병력과 변협의 병력이 타격을 하면서 잠시 왜구들을 주춤거리게 만들었지만 이내 수적 열세로 밀려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달량성이 함락당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전라병사 원적과 장흥부사 한온이 전사했고, 영암군수 이덕견은 투항했으며 이들을 증원하기 위해 3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급히 달려왔던 해남현감 변협이 격파당했고, 전라우수사 김빈과 진도 군수 최린 역시 깃발까지 빼앗기는 등 최악의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전라도의 전 군을 지휘해야 할 전라병사가 달량성에서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전사해버렸으니 전라도 전체의 방어 시스템이 마비된 셈이며 주요 방어선의 요새나 지휘관들이 패배함으로서 이를 저지할 엄두를 내지도 못합니다.


원적의 전사로 전라도 병영과 장흥부에 있던 군수물자와 식량은 왜구가 모조리 털어갔을 지경이었으니 말을 다한 셈이었습니다.


당시 이러한 문제점을 보인 것은 진관 체계가 가지던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를 보여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병마절제영이 보유할 수 있는 병력은 기본 숫자가 500명 단위였고 이 중 원적과 한온이 이끌고 간 병력이 모두 합쳐서 200명 수준이었습니다.


이게 날아가고 나머지 300명도 박살이 나버렸으니 제대로 동원이 어려웠던 셈입니다. 대규모 외침이 있을 경우 각개격파를 해버리면 답이 안 나오던 것이 진관 체계의 문제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점이 을묘왜변 당시에 드러났던 것이죠.


오죽 동원 가능한 병력이 없었으면 이런 급박한 상소문들이 올라왔겠습니까.


-전라도 병마 절도사 조안국(趙安國)·경상좌도 방어사 김세한(金世澣)이 배사(拜辭)했다. 조안국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수사(水使) 【김빈(金贇).】 의 군사는 대부분 복병(伏兵)들에게 살해되고, 병사(兵使)가 죽었을 때에도 정병(精兵)이 모두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흩어져 도망한 군사를 수습하더라도 사세를 다시 떨치기는 어려울 것이니, 한잡인(閑雜人)들 중에서 군관(軍官) 10명을 더 배정하여 뒤따라 내려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심연원(沈連源) 등이 아뢰기를,


"서울은 근본이 되는 곳이므로 과연 든든하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신들도 이를 염려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전라 병사(全羅兵使) 원적(元績)이 이번에 함몰되어 본도(本道)의 인심이 흉흉하며 장차 무너져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정병(精兵)을 많이 보내어 기세를 떨쳐 구원하게 한 다음에야 본도 사람들이 믿는 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순찰사(巡察使)가 청한 것은 5백이니 비록 다 들어주지는 못하지만 3백은 더 뽑아야 할 것입니다.


또 모든 군사는 말이 있은 다음에야 싸움에 나갈 수 있으니, 서너 사람씩이 힘을 합쳐 말을 준비하도록 하소서. 또 신들이 대책을 세우느라 항시 대궐 안에 있으면서 소란을 떠는 것은 미안하니, 중추부(中樞府)에 모여 의논하게 하소서."


하니, 다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병력이 하도 부족해서 겔겔거리는 당시의 조선군이었습니다. 사실상 전라도에서 동원 가능한 정병이 부족해서 수도에서 병력을 긁어모아왔으나 이로도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순찰사는 500명의 병력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200명만 보내줬고, 저 병력도 수도 내의 공/사천과 한량을 급하게 긁어모아서 보낸 것이었습니다.


수도에서 정병을 모조리 빼내가니 수도 방어가 취약해지자 이러한 조치까지 취하게 됩니다.


-간원이 아뢰기를,


"나라의 형세가 바야흐로 위급하여 조야(朝野)가 두려워하고 있고 도성 안의 정병(精兵)들은 거의 모두 싸움에 나갔습니다. 군대를 모집하니 군사들이 수고로움을 꺼리지 않으며 농민들은 쟁기를 놓고 창을 잡았습니다. 그런데도 군사의 기세가 진작되지 못하여 방비가 염려스럽기만 합니다. 삼가 전교를 보건대 능침에 있는 중들은 뽑아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때를 당해 만일 환란이 가까이 닥치게 되면 조정에 있는 신하들도 모두 달려가 적과 싸워 나라의 위급을 구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능침에 있는 중들은 배부르게 먹고 편안히 누워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중들을 뽑아 군사에 보태어 군사의 기세를 돕도록 하여 나라의 근심을 없게 하는 것도 또한 능침을 보호하여 편안히 하는 일입니다. 양종(兩宗)의 우두머리 중으로 하여금 건강하고 씩씩한 사람을 뽑아서 거느리고 가 몸소 방수(防戍)에 붙이게 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오래 아뢰니, 답하기를,


"우선은 그대로 윤허한다."


하였다.-


능침에 있는 중들을 긁어모아서 급하게 병력으로 전환시켜 수도를 방어하도록 했습니다. 그만큼 조선은 급박할 정도로 병력 부족 문제가 심각했고 500명의 증원 병력을 채우기에도 역부족이었던 상황입니다.


부족한 병력은 급한 대로 청홍도(지금의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정병 500명씩을 각각 동원하여 투입했고 그런 대로 진압군의 숫자가 꾸려지자 전라도 도순찰사로 임명된 이준경이 영암에서 왜구를 격파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어찌어찌 이준경이 영암성 전투에서 왜구들을 격파하고 이후 조선군이 이들을 밀어냈기는 했으나 진관 체계의 한계점이 여실없이 드러나는 것이었던 셈입니다. 오죽하면 최전선인 동래부의 방어 병력이 200명에 불과했겠습니까.


사실 조선군 주력 자체가 북방에 집중된 탓도 있었지만 방군수포제가 아예 중종 때부터 자리를 잡게 되면서 병력 동원력이 심각하게 떨어진 이유가 가장 컸습니다. 상상이 잘 안 갈겁니다. 양란 때 10만은 우습게 동원하던 조선이 불과 임진왜란 37년전만 해도 중앙에서 500명의 병력 파견도 어려워서 쩔쩔 메던 것을요.


이후 선조가 이탕개의 난 이후 전반적인 국방 시스템을 점검하면서 많이 개선이 되었던 것을 보면 아찔하기도 합니다. 임란 당시 경상감사 김수도 경상도 방어라인이 작살난 이후에도 휘하 아병만 백 단위로 데리고 다니고 있었는데 37년 전 전라병사 원적은 20여 명에 불과했으니 병력 동원 자체가 게임이 되지 않았던 셈입니다.



출처 : https://blog.naver.com/kkumi17cs1013/221273826416

23개의 댓글

ㄹㅇ 조선은 대단한 나라임
1
2018.06.02
고려때는 초중반에 거란여진이랑 싸우면 10~20만은 걍 동원했고 후반에도 3만 정도 원정 보낼 수 있었는데 조선은 왜캐 동원력이 후달릴까
0
@반팔맨
말이 양인개병제지 솔직히 있는 놈들은 다 빼고 도망감
0
2018.06.03
@반팔맨
제도 차이라고 보는게 맞을 듯...
결국 임진왜란에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조선도 15만 이상은 긁어모으니까.
0
2018.06.03
@반팔맨
고려야 지방은 봉건제처럼 돌아갔고, 왕건은 고구려 땅 회복하자고 북진을 외치고 위에서는 거대한 거란이 있었으니 통일 이후부터 군대 빵빵하게 굴려야 했지만 조선은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 그런거지. 그러니 조금씩 세다가 이 일로 터진거지.
0
2018.06.03
@반팔맨
고려시대에 병력동원은 어느정도 과장이 들어갔다고 봐야지.
그리고 조선도 임진왜란때 20만 가까이 동원했음.
0
2018.06.04
@반팔맨
세수가 안걷쳐서 그럼

인~명때 온갖 재해 가뭄이 졸라게 많았고


가뭄들면 면세 온갖 면세지 졸라 많고 은결많고

실질적 국가 재정이 안받쳐줘서

인종때 20만명모아서 여진족치러 갔는데 생각보다 군량이 안모여서

어쩔수없이 사람은 모였겠다 여진족 치로가서 8명인가 목배고 일주일만에 다시돌아옴 ㅋㅋㅋ


세금을 많이 안걷어서그럼
0
2018.06.04
@반팔맨
그리고 고려는 권문세족들의 사병들이 졸라게 많아서


실질적 봉건제같이 사병들을 모아서 방어가능함 근데 조선은 태종때 사병혁파시킴
0
2018.06.02
이런거 보면 선조도 참 능력있는데 어째 조선중후반 군주들은 죄다 보위지킬라구 쏘시오패스가 되버려서.. 참
0
씹창난 군대는 조선의 전통
0
2018.06.02
조선은 무장이 만든 나란데, 국방력은 진짜 ㅈ같음
0
2018.06.02
@순살이맛있어
엥 이거 완전 송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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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2
차라리 조선이 '살려만 드릴께' 수준으로 세금 거뒀으면 어땠으려나
0
@캔디
대륙 정벌하고 중화민족이됨
0
@ㄴㄴㅇㅀㄳㅎㅅㅎㅍㄿ
좋조죽조
0
2018.06.02
무능하네
0
2018.06.03
지금 유럽 생각하면 됨.
0
2018.06.04
@레나짱카와이
진짜 요즘 독일군 생각하면 딱 맞지 않을까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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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4
털릴만하니 털렸네ㅉㅉ
명종때 진짜 나라 앵간히 망쳐놨더라
사치가 횡행하면서 북방오랑캐들한테 말, 철, 식량 같은 군사 자원을 내주고 모피 사들여옴.
서양같으면 그 모피나는 산지를 찾아서 정복할 생각을 하지 이딴식으로 훗날을 고려하지 않은 거래는 하지 않는데 씁..
0
2018.06.04
@년차 익머생
인종이 오래살았어야 했는데 좃같은 명종애미떄문에
0
2018.06.04
@할로드
레알 이름 까먹었는데 그새끼가 레알 씹년이었지
거 때문에 명종은 평생 시달리다가 유명을 달리했고
0
2018.06.05
@년차 익머생
여인천하 난정이가 다 조져놓음
0
2018.06.06
저게 나라냐 ㄷㄷ 조선 전성기는 성종때 아닌가
상비군 40만이랬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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