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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과 거짓된 명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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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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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 첫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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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 두번째 이야기
https://www.dogdrip.net/284307216
조망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 세 번째 이야기
https://www.dogdrip.net/284450284
유머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 마지막 이야기
https://www.dogdrip.net/284479970

 

 

 

 

 

 

 

 

글이 너무 딱딱하고 건너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거 유연하게 만들기엔 남아 있는 멘탈이 없습니다.

믿겨지지 않겠지만 처음 글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나온 글입니다...

 

 

1. 비트겐슈타인의 두 가지 명료성

 

비트겐슈타인은 명료하지 않은 글을 쓰기로 유명하고, "명료성"이라는 용어조차도 명료하지 않게 쓰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옹호를 하는 글을 쓰려고 합니다.

참된 명료성과, 거짓된 명료성인 "수정 같은 순수성"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쓰고,

비트겐슈타인이 왜 그렇게 모호한지에 대해 쓰겠습니다.

 

 

1.1.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정말 모호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정말 모호합니다.

정말입니다.

"논리철학논고"는 논리적이기라도 하지, "철학적 탐구"는 정말 모호하게 쓰여졌습니다.

굉장히 호의적인 주석가인 Glock조차도 "그가 명료성을 위해 쓰여진 곳은 종종 극도의 모호함을 보여줬다"고 말했습니다.

정말 중요한 부분에서 그는 최대한의 수사학을 발휘하여 최대한 돌려 쓰는 듯한 경향을 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1.2. 순수성과 명료성

 

모호하다는 것을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몰랐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기존의 논리적인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 방식이 가지는 명료함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는 그런 방식을 "수정 같은 순수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비판적인 어조로 말했습니다.

 

"논리학의 수정 같은 순수성은 실로 나에게 탐구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의 요구였다... 그 요구는 이제 공허한 어떤 것으로 될 우려가 있다. 우리는 마찰이 없는, 그러니까 어떤 뜻에서는 그 조건이 이상적인,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걸어갈 수도 없는 빙판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걸어가기를 원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대지로 되돌아가자!" (철학적 탐구 107)

 

(이 수사학으로 넘쳐나는 글을 어떻게 해야 이런 글에다가 제대로 집어넣냐 ㅠㅠㅠ)

그는 마찰이 필요하기 때문에, 거친 대지로 되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수정 같은 순수성이 잘못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 명료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얻고자 애쓰는 명료성은 물론 완전한 명료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단지, 철학적 문제들이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다." (철학적 탐구 133)

 

어... 이렇게 인용하니까 별로 잘 나타나지를 않네요.

님들이 받아들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명료성입니다.

"일상 언어의 질서에 대한 명료한 이해"가 그의 가장 중요한 목표예요.

그냥 그렇다 치고 넘어갑시다 여기...

 

 

1.3. 수학철학, 다채로움

 

저는 비트겐슈타인의 수학철학 관련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은 "철학적 탐구"를 초월할 만큼 더 모호합니다.

그곳에서는 "조망가능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조망가능성이란 용어의 원어를 직역하자면 "명확하게 볼 가능성"처럼 나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조망가능성을 증명과 같은 단어처럼 사용하는데,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사상을 많이 담아 굉장히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조망가능성이라는 단어가 명료성과 큰 관련이 있는데, 정작 이 단어가 무엇인지는 엄청나게 모호하다는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 수학철학 책을 읽으면서 저는 사실 거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매우 말하고 싶은 단어가 하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채로움"입니다.

조망가능성이 무엇인가의 다채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조망가능성이 "새로운 봄의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조망가능성에 부여된 이상한 속성이었던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도록 우리의 개념을 바꾸게 한다는 점”이 왜 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조망가능성이라는 용어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흐름을 아주 잘 포착한 용어입니다.

조망가능성 전에 논리철학논고에서 있었던 용어로 "영원의 관점"이라는 용어가 있었습니다.

영원의 관점을 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기존의 사고방식에서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신적이고, 종교적이며, (어떻게 말해서) 형이상학적인 주제였습니다.

그는 이것에 잘못이 있음을 깨닫고 좀 더 세속적인 철학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영원의 관점이란 단어에서 조망가능성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사고방식을 보는 것,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그 전 목표였던 기존의 사고방식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 목표를 위해서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고방식을 얻는 것이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다채롭게 보는 방식을, 보다 더 개념을 다채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사물을 보는 방식을 바꾸도록 우리의 개념을 바꾸게 한다는, "초점 변경"이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비트겐슈타인의 독특한 생각인 것 같습니다.

누가 명료성을 말할 때 다채로움을 연결짓는답니까?)

 

 

1.4. 비유로서 본 순수성과 명료성의 비교

 

비트겐슈타인은 숲길을 숲길 걷듯이 걸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경치를 지켜보면서, 어떤 생명체 하나가 다른 생명체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음미하면서 걸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숲길에 왔을 때부터 “나는 길을 훤히 알지 못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숲길을 제대로 보는 방법을 알지 못한 채 언어를 쓰려고 합니다.

언어가 오해받는 능력은 엄청나게 강합니다. 숲길에 트랙터를 가지고 들이미는 것처럼.

사람들은 트랙터로 자연의 경치를 밀어버리고, 생명체의 연관성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상황 앞에서 투쟁하려고 합니다.

언어를 친환경적으로 세심하게 써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목요연하게 풍경을 조망하자고 하고, 숲길에서의 중간 고리들을, 이정표들을 만들어서 제대로 숲길을 걸을 수 있게 하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명료성은 숲길에 있는 생명체들의 관계를 알아거나, 숲길을 제대로 걸을 수 있기 위한 이정표를 만들어내는 활동입니다.

순수성은, 숲길을 전부 트랙터로 몰아낸 뒤에, 포장도로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조망가능성이 사라졌습니다.

 

 

1.5. 비트겐슈타인의 글은 왜 그렇게 모호한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어떤 것인지 또다른 예를 알려주겠습니다.

철학적 문제는 엉켜 있는 실과 비슷합니다. 지금까지의 철학자들은 그것을 풀기 위해 마구잡이로 잡아 당겨서 하나는 헐렁하게 풀려졌지만 다른 하나는 더 세게 묶여진 상태로 남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하려는 활동은 지금까지의 철학자가 한 활동을 거슬러서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철학자들이 철학적 문제에 빠져 있었던 만큼이나 복잡하고 매우 깊게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어찌저찌 해서 엉켜 있는 실을 원래의 엉킨 상태로 바꾼 뒤에 무엇을 하느냐.

 

비트겐슈타인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풀어야 할 이유가 없고, 또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는 곳, 거기서 나는 멈춰 선다.”

 

엉켜 있는 실로 비유를 하면 이 행동이 굉장히 이상할지도 모릅니다.

풀어야 하지 않을까? 풀 수 있지 않을까? 칼을 쓰면 어떨까?

하지만, 기존의 숲길의 비유를 생각해봅시다.

숲길은 “풀려져야” 하나요?

 

이제 비트겐슈타인이 글을 왜 모호하게 썼는지에 대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목표는 엉켜 있는 실을 원래의 엉킨 상태로 바꾸는 것입니다.

명료성이라는 다채로운 상태를 복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우리가 잠깐만 있으면 저지르는 일반화와 일의화에 저항합니다.

이를 위해서, 글은 계속 멈춰 서서 보고 있는 독자에게 물어봅니다.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오해를 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글이 계속 이어지지 않고 숫자에 따라 적혀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그 책을 “다수의 풍경 스케치를 담고 있는 하나의 사진 앨범”에 비유했는데, 만일 사진에 없는 내용까지 꽉 채우는 하나의 영상으로 만들면 그의 사고 경향과 반대될 것입니다.

영상같은 장문의 글들로 적는다면 다의성과 다양성을 살려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수정 같은 순수성"을 명료성으로 받아들일 때 문제

 

여기선 일상 생활에서 순수성을 명료성으로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2.1. 사람은 지도처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도, 특히 구글 지도를 생각해봅시다.

지도는 “덧셈”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이 “덧셈”입니다.

더 세밀한 지도를 요청하면 그에 따른 더 세밀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이미 세밀한 지도가 다 있는 상태에서 보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에 반해, 사람이 이해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덧셈”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합니다.

 

“초점 변경”이 일어나면 그 전에 가지고 있었던 연관성이 더 이상 성립하지 않게 됩니다.

 

비트겐슈타인 하면 유명한 오리-토끼 그림이 이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거 설명을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ㅠㅠ)

 

 

2.2. 명료하지만 순수하지 않은 예시 : 유머

 

비트겐슈타인은 유머를 중요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적어도, 유머가 자신의 철학에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유머의 예시를 하나 들어주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jzEZei0QCQ

 

이수근이 감방에 갈 뻔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강호동이 감방에 갈 뻔한 것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둘 다 압니다.

하지만 이를 연결시켜 유머로 만드는 것은 정말 재능이 있어야 하는 일입니다.

 

유머의 세계에선, 아무것도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감추어져 있는 것으로 유머를 만들면 공대개그라고 욕을 먹을 것입니다.

유머는 다 드러나 있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다 드러나 있음에도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순수성을 명료성으로 받아들인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원하는 사실은 다 드러나 있으나, 그것을 일목요연하게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유머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일목요연하게 볼 수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다 드러났음에도, 그것에 대해서 초점을 변경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2.3.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려고 하지 않을 것

 

(글쓰다 멘붕. 뒤에서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뒤로 넘깁니다.)

 

 

3. 순수성, 거짓된 명료성을 추구하는 사회

 

제가 글을 쓰고 싶었던 이유는 비트겐슈타인의 이 명언을 부각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머는 분위기가 아니라 세계관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치 독일에서는 유머가 말살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면, 이는 사람들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그런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깊고 중요한 어떤 것을 뜻한다.”

 

제 전 글에서는 여기 나와 있는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고 했죠.

그렇게 이 명언을 이렇게 바꿀 수 있었습니다.

 

“유머는 분위기가 아니라 인간의 복잡한 삶을 이해하는 통찰의 다채로움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치 독일에서는 유머가 말살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면, 이는 사람들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그런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훨씬 더 깊고 중요한 어떤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글을 전달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 나치 독일의 사례가 너무 먼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는 점이었습니다.

유머도 삶에 있어서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아보인다는 점도 있고요.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이 바라본 그 비관적인 미래는 당장 지금 사회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 점들을 어떻게 부각시킬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3.1. 조망가능성이 전부 없어진 사회

 

수정 같은 순수성을 명료성으로 보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우리는, 오직 순수성만을 요구하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꽤나 쉽게 이뤄질 수 있습니다. 각성한 사람이 별로 없다면 말입니다.

 

이 순수성만을 요구하는 사회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숲길을 완전한 포장도로로 만들어놨으니 조망가능성이 있을 리 없습니다.

조망가능성이 없으면, 새로운 사고방식을 보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해방되기는커녕 오히려 고정되어집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알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기 태도가 변화되어야 할 필요를 못 느낍니다.

이것을 다른 철학자들은 “무사유”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종종 멋진 용어를 사용해가면서 사유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삼아왔습니다.)

 

우리는 나치 시대를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 인터넷 커뮤니티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글은 언제나 간단명료 3줄요약의 수정 같은 순수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남에 대해서 깊게 사유하는 글 대신 팩트를 통해 저격을 하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다채로운 사회 앞에 획일화된 언어 사용이란 칼을 들이밀던 사람들을 말입니다.

 

저는 모든 커뮤니티에 이 순수성의 사상이 산재해 있는 것을 봅니다.

 

 

3.2. 반시대적 고찰

 

비트겐슈타인은 자기의 철학 사상이 사회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데 매우 비관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철학, 다채로운 명료성을 얻기 위한 자신의 투쟁과도 같은 철학이 시대의 진보와 역행하고 있는, 아주 반시대적인 철학이라고 봤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비관적이어야 했을까요.

 

비트겐슈타인의 주석가인 Gorden Baker는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얻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의 전부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게 전부라고 말하는 건 그의 철학을 축소하는 것 아니냐”라고 했지만, Baker는 이렇게 반박합니다. “이것 하나만큼도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라고, “이것 하나만으로도 인생을 투자할 일이다”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명료성에 다채로움을 연관시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다른 인간의 삶의 형태를, 타인의 복잡한 삶을 이해하기 위한 통찰을 얻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최대한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관점들을 얻어야 하는 겁니다.

이미 다 드러나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초점 변경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초점 변경 따위가, 아니 초점 변경이야말로 인생을 투자할 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시대, 혹은 지금의 사회는 그러기에 너무나 열악합니다.

우리가 따르던 거짓된 명료성, 즉 순수성이,

조망가능성을, 초점 변경의 가능성을 파헤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명료성 앞에 타인의 사고방식의 다채로움을 앗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오늘도 누군가는 나와 우리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 그 디폴트 세팅 안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됩니다.

 

 

3.3. 유시민의 이 말은 잘못 쓰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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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2389440 (1).jpg

 

 

 

저는 이 짤방이 너무나 잘못 쓰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커뮤니티에서, 어느 때에, 이 짤방이 가장 많이 나오는지 아시나요?

"반대쪽 진영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더 잘 표출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전문적인 말을 썼을 때"입니다.

 

 

저는 이 짤방을 볼 때마다 "패왕별희"의 한 부분이 생각납니다.

 

[

학생들 : 그럼 현대극은 경극이 아닙니까?

청데이 : 목소리는 노래가 되고, 움직임은 춤이 되어, 그것이 경극의 아름다움이죠. 예를 들어...

학생들 :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청데이 : 좀 더 피나는 연습을 하면 자연히 알 거야.

학생들 :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청데이 : 서야!

서 : 이해가 안되는걸 어떡하라구요!

서 : 왜 예부터 영웅과 미녀가 있어야 경극이고 노동인민을 얘기하면 경극이 아니죠?

]

 

글자로 쓰니 전혀 감이 안 살아나네요.

영화를 보신다면 알겠지만, 서와 학생들은 마오쩌뚱의 극렬한 추종자들입니다.

 

청데이가 얼마나 많이 말을 하든, 얼마나 쉽게 말한다 하든

학생들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시민은 이 짤방이 이렇게 쓰이는 것을 바라지 않았을 겁니다.

이것을 다뤘던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그가 나열한 책 리스트에 "침묵의 봄"과 "총, 균, 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두 책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책의 내용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읽어봤으면 알겠지만 그 책들이 적어도 불친절하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책은 Conventional Wisdom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책이라는 점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일반적 통념에 대항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러한 통념을 가진 일반인들의 초점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불친절하게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커뮤니티에서 논리적 순수성을 추구한 단순한 글만이 나온다는 것은, 여기에다 글을 쓰기에 좀 까다롭다는 그런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깊고 중요한 어떤 것이 말살되었다는 점을 뜻합니다.

지금 한국 커뮤니티는, 초점을 변경해주려는 글이 나오기 아주 어려운 환경인 것 같습니다.

정말 필요해서 전문적인 용어를 쓴 글을 사기 치려는 사람의 글과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복잡한 삶을 이해하는 통찰은 그 본질이 다채롭다는 점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거짓된 명료성이 다채로운 조망가능성을 없애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문제가 미래엔 제대로 해결될 수 있을지에 대해 굉장히 비관적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미래 사회를 바라본 것처럼 말입니다.

4개의 댓글

2020.10.12

책에서 읽은 건데 어떤 책인진 까먹음..아마 클루지인 것 같은데.

 

우리는 무언가를 안 순간(적어도 그렇게 느낀 순간) 다시는 몰랐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사람의 뇌 자체가 이미 어떤 생각을 이해했다고 판단하면 그 이후에는 그것을 뿌리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

명료성같은 경우는 자신의 생각을 독자가 바로 알 수 있게. 한마디로 독자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최대한으로 전달하는 것이 지금에 와서는 상식이 되어버렸고 지금 전자기기/인터넷 문화가 이를 가속화 했다고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 저서를 단 한권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마지막 문장은 저도 동의합니다. 명료성은 과학 문명에 있어서도, 현대인들의 문화를 보아서도 수정과 같은 명료성은 오히려 더욱 중요해 질 것 같네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 진 모르겠지만 이 글에서 졸 수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최대한 수정과같은 명료함으로 바꿔보면 마치 값비싼 안경에 아주 깨끗한 안경을 샀다고 아주 좋아할 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그것은 시력을 희생해야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이다. 일까요..

그리고 이런 치환 역시 비트겐슈타인은 극혐하겠죠. 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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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2

그러니까 이런 글에 세줄요약을 요구하면 글쓴이가 좋아 죽는다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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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2

처음에 나오는 문장을 보고

 

내가 한 때 가졌던 감각, 감정, 특수한 종류의 경험, 사유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은 '수정 같은' 언어로는 타인에게 온전히 전달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감하고 거칠게 표현되는 화두를 던져 타인이 이에 대해 사유 하게 하여 최대한 비슷한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이 더 적합한 전달 방식 아닐까?

 

라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더 읽어보니 감정, 혹은 주관적 인식이 배제된 언어만으로 소통하게 된다면 개인이 인식하는 세계관에 변화가 일어날 수 없으니 위험하다는 얘기인 것 같네요

 

저도 윗 댓에 동의 하는게, 명료한 언어가 보다 더 비용-효율적이고 사람들이 받아들일 때 머리를 별로 쓰지 않아도 되므로 (그에 대해 머리 아프게 사유 할 필요가 없고 그냥 팩트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계속, 그리고 주도적으로 쓰일 것 같습니다.

 

뭔가를 씹어서 넘기기에는 너무 바쁘고 지치는 세상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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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2

별개로, 써주신 글들은 잘 읽고 있습니다. 첫 글이었던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삶의 의미가 특히 제게 많은 도움이 됐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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