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슬라보예 지젝의 조커 리뷰(2)

원문 : http://myheartwillgoonandsoonandsoon.blogspot.com/2019/11/slavoj-zizek-more-on-joker.html?m=1

1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첨가된 긴 글

 

프랑스 조커.jpg

 

  시작하기에 앞서 조커 같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할리우드와 이 영화를 대흥행작으로 만드는 대중에게 찬사를 표한다. 하지만 영화의 인기는 배트맨 신화가 생존하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기원에 근거하고 있다. '조커'가 배트맨이라는 기반이 없는 채로 존재한다고 생각해보자, 이야기는 그저 현실적 어려움에서 도피하기 위해 광대의 얼굴을 뒤집어 쓴 불우한 애새끼의 것으로 영락한다. 그렇게 해서는 이야기로 기능할 수 없다. 그저 도처에 산재한 현실적인 드라마 나부랑이가 될 뿐. <타임 아웃>은 조커를 후기 자본주의의 진정한 악몽이나, 사회적 공포 장르의 영화라는 식으로 규정한다. 최근까지 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견해였다. 완전히 이격된 두 장르의 결합-과장된 공포와 사회적 불운의 현실적인 결합, 결합은 물론, 현실이 호러의 자리를 차지할 때 기능할 수 있을 뿐이다.*[1]

 

  *조커가 메타 픽션의 갈래인 건 명백하다. 이는 배트맨 이야기에 기원을 제공하고, 기원은 배트맨 신화를 기능하게 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채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지면에서는 이러한 양상을 무시하도록 한다.

 

  영화에 대한 미디어의 주된 세 가지 흐름은 우리 사회의 세 가지 정치적 영역에 따라 정확히 삼등분된다. 수꼴들은 사람들이 이걸 따라할까 무서워하고, PC충들은 영화에서 인종차별주의와 여러 클리셰(앞부분에서 흑인 소년들이 아서를 줘팬다.)를 발견한다. 더하여 불특정 다수 대상 범죄에 대한 애매한 환상까지. 좌빨들은 폭력이 늘어나는 사회조건을 충실히 보여줬다며 좋아라들 한다. 그러나 조커가 정녕 사람들로 하여금 아서의 행동을 따라하게 하는가? 현실에서? 당빠 그럴리 없음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서-조커는 별로 이입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사실, 영화 전체가 이게 말이 안 됨을 전제로 작동하고 있다. 이 새끼는 그냥 끝까지 남일 뿐이다.

 

조커 무비에 대한 위험성.jpg

https://abcnews.go.com/GMA/News/video/military-fbi-issues-urgent-warning-ahead-joker-release-65872529

 

  조커가 나오기도 전에 벌써 미디어들은 이 영화가 폭력선동 영화일 거라고 떠들어 댔었다. FBI는 인셀 새끼들 나대지 말라고 경고도 했었고.(물론 영화에 영감 받고 폭력행위를 저질렀다는 얘긴 없다.) 영화가 세상에 나온 후에, 비평가들은 이걸 어떤 카테고리에 넣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냥 배트맨 시리즈의 찌꺼기로 오락영화인가, 병리학적 폭력의 근원을 찾는 깊이 있는 연구인가, 아니면 그냥 비평가 꼰대질일뿐인가? 급진좌파적 시각에서 마이클 무어는 조커를 "사회 비평의 공시적 조각이며 미국이 앓고 있는 사회적 질병의 결과에 대해 완벽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아써 플렉이 어케 조커가 되는지 좀 살펴본다면, 의료복지 붕괴, 은행원(*총 맞은 친구들)들의 역할, 빈부격차에서 이 꼴이 나온 걸 알 수 있다. 무어는 그래서 영화를 두려워한 이들을 조롱한다. "미국은 깊은 절망 속에 있고, 구조는 붕괴되어 있다. 퀸즈에서 온 미친놈은 핵무기에 접근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몇 가지 이유에서, 이 영화는 두려워할 만하다. /…/ 우리 사회에 있어 가장 위험한 건 너 새끼들이 이 영화를 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영화는 트럼프 얘기는 아니다. 트럼프가 만들어 낸 미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을 도울 필요 없다고 여기는 미국에 대한." 결과적으로, "<조커>에 대한 개지랄들은 전부 정략이다. 이는 우리가 동료 시민들로부터 눈을 떼고 외면하도록 획책하는 수작질에 지나지 않는다. 의료보장을 전혀 받지 못하는 3천만의 미국인의 존재 자체가 현실의 폭력이다. 수백만의 학대받는 여성과 아이들이 폭행의 공포 아래 살고 있다."

 

  하지만, 조커가 단지 미국의 현실만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한 가지 불편한 명제를 던져준다. "언젠가 빈자들이 이러한 불평등에 맞서기 시작한다면? 이는 그저 투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 영화가 그런 사람들에게 참으로 폭력적일 수 있다 말한다. 정말로 그러한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고려해보아도, 정말로 그러한가?" 짧게 말해 영화는 "순박한 사람들이 삶을 함께 꾸려 나가지 못하게 되면 끝내 조커 같은 부류로 변하고야 마는지에 대해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폭력에 선동되었다고 여기는 것보다 관중은 "당신 똥꼬나 지켜줄 가장 가까운 출구를 찾게하기보단 맞서서 싸우고 매 순간 당신 손 안에 쥐고 있는 비폭력적인 힘에 집중하게 하는-새로운 욕구로 당신을 연결해준 이 영화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2]

 

*[2] Quoted from https://www.good.is/the-five-most-powerful-lines-from-michael-moores-masterful-joker-review.

 

  그렇지만 정말로 그렇게 될까? 무어가 언급한 "새로운 욕구"란 조커의 것이 아니다. 추동과 욕구 사이의 정신분석학적 차이를 한 번 알아보자. 추동은 강박적인 반복이다. 욕구가 절단면을 만들어 새 차원을 여는 중에 우리는 추동 속 같은 지점을 계속해서 맴돌게 된다. 조커는 추동 속의 존재로 남아 있을 뿐이다. 영화의 끝에서 그는 무력하다. 폭력적 행동이 터져나오는 것은 그저 분노의 무기력한 표출에 지나지 않으며, 근본적인 무력함이 행동으로 나타난 것뿐이다. 무어가 언급한 욕구가 표출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주관적) 태도의 변화는 우리가 조커의 분노에서 "비폭력 저항"으로 나아가는 존재가 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힘(욕구)을 인지하는 순간 당신은 폭력을 내려놓을 수 있다. 물리적 폭력을 내려놓으며 당신이 시스템에 위협이 되는 존재로 변할 때에, 역설적으로 당신은 진정으로 폭력적인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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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커의 행동이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말레비치적 순간에 가까운데, 저항의 영점으로 이르는 감소를 뜻한다. 말레비치의 하얀 표면 위 검은 광장은 먹히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하는 종류의 자기파괴적 심연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새로운 시작을 얻기 위해 지나쳐야 하는 지점을 의미하고 있다. 검은 광장은 승화*의 공간을 열어제끼는죽음 충동*의 순간을 형상화한 것이다. 같은 방향에서 미니멀리스트적인 회화에서 말레비치는 액자와 배경의 위치를 최소한으로 축소시켰고, 조커는 저항을 내용 없는 자기파괴의 형태로 추락시켰다. 추동에서 욕망으로- 허무주의자의 자기파괴적 지점을 지나 새로운 시작으로서 기능하는 영점을 만들기 위해 추가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조커의 교훈은 우리가 현존하는 질서를 없애기 위해 이 영점을 지나야만 한다고 말하는 데 있다.

 

*욕망의 대상을 큰 차원으로 이끔

**정신분석학의 타나토스, 라캉의 경우 이를 이드로 이르기 위한 현실원리로 해석함.

 

  무엇보다도, <조커>의 어두운 세계관에 대한 우리의 몰입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환상과 단순화를 치료한다. 이 세계에선 누구도 성적 관계에 있어서의 상호합의가 진정한 동의를 이끌어낸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합의된 성관계'란 커다란 헛소리에 불과하다. 불편하고 가혹하고 어두우며 트라우마의 왕국에 속한 성애의 영역에 번듯하고 이해하기 편한 언어로 구성된 평등주의자들의 사회적 정의를 덧씌우려는 시도는 헐렁한 노력일 뿐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며, 그들의 욕망에 의해 원하는 바를 방해받으며, 그들이 혐오하는 것을 선망하며, 그들의 아비를 싫어하나 애비를 따먹고 싶어하며, 그들의 어미를 싫어하나 애미를 따먹고 싶어하며, 영영 그러한 상태에 놓여 있다." 누구든 조커가 "이건 합의된 거야, 그러니 옳아." 라고 하는 주장에 한 번 크게 웃고 치울 거란 걸 알 수 있다. 이게 그 어미가 그를 망쳐버린 방식이다. 조커가 합의를 정당화로 일축해버릴 방식과 동일하게, 그는 다른 이를 침대에 눕히기 위해 제 정체를 속인다면 그것은 강간이라는- 그러한 생각을 일축해버렸을 것이다.

 

  "물론 노골적인 사기행각은 나쁘지, 서로 이용해먹으려고 거짓말 하는 사람들도 나쁘고. 하지만 우리는 이미 우린 늘 스스로에게, 남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살고,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한심한 벌레 새끼에 불과한데도 '진짜 사람'인 것처럼 꾸미려 애쓰지. 지금 파트너보다 더 나은 사람이랑 섹스하고 싶어하는 판타지를 가지지 않은 척 거짓말 하면서- 그리고? 매일 아침에 일어나려고, 그냥 말 그대로 서로를 이해시키려고 말하는, 불완전하고 파편화된 끝없는 소용돌이로부터 도출된 '진실'을 말하는 것 따윈 예외라 할 수 있겠지."*[3]

 

*[3] Mike Crumplar, personal communication.

 

  쉽게 말해 성(性)은 거짓의 범례이다. 영점은 잃을 게 전혀 없는 상태의 경험을 가졌거나 아서가 영화에서 했던 말 : "나는 잃을 게 없어. 더는 누구도 내게 상처를 줄 수 없는 거야. 내 삶은 코미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냐." 즉, 프롤레타리아의 위치로 불렸던 것의 오늘날의 형태이다. 이는 트럼프가 권력을 가진 조커라는 생각에서 한계를 찾을 수 있는 지점이다. 트럼프는 이 영점을 지나지 않는다고 확언할 수 있다. 그는 그 자신의 정치적 방향 위에서는 터무니없는 광대일지 모르나, 조커와는 다르다. 조커와 트럼프를 비교하는 건 조커에 대한 모독이다. 영화에서 아버지 웨인은 권력의 외설을 보여주는 단순한 요소로서 "조커(카드?)"이다.

 

  이제 우리는 M.L Clark*이 어디에서 조커의 허무주의적 지점의 잘못된 방향으로 내 철학을 독해했는가 알 수 있다. "엉성한 대중문화와 결합한 지젝의 헤겔철학은 오직 하나뿐인 실재는 창조된 무의미가 아니라 존재를 뒷받침하는 공허와 우리 모두의 도덕적 해이,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필연적인 시도 사이의 긴장이라고 끊임없이 역설한다." 간단히 말해, 내게는, 기초적인 존재론적 진실은 궁극적인 무의미한 공허/균열과 우리 인간성이 이 혼란스러운 균열 위에 어떤 보편적인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 사이의 긴장이다. 이같은 입장은 그다지 특별한 것도 아니다. 이는 우리가 던져진 세계의 혼돈 속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영웅적인 노력을 경주할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인지하는 확고한 존재론적 인본주의를 재생산한다. 하지만 Clark에 따르면, 나는 여기서 조커의 방향 쪽으로 한 발 더 나아가게 된다. 시원의 혼란스러운 공허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모든 시도가 이 공허를 혼란스럽게 만드므로 위선적이다. 즉, 존재의 기본적인 역설로부터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에 이들은 도덕적 결함이 있는 행동을 하게 된다. 혹은, 이 지점을 극단으로 끌어내기 위해 (우리 실재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로서) 도덕성 그 자체가 도덕적 해이의 형태가 되어 버린다. 따라서 유일한 도덕적 입장은 우리의 불화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주는 모든 보편적 인본주의적 기획을 포기하게 하며, 우리의 혼란스러운 삶에 이정표 하나 세우려는 모든 시도를 파괴하는 폭력을 즐겁게 지지하는 완전한 허무주의뿐이다.

 

*https://www.patheos.com/blogs/anotherwhiteatheistincolombia/2019/10/tribelessness-secular-zizek-joker/

해당 문단은 이 글에 대한 반박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이 순간적인 불화나 지속적인 개인차보다 강한지 아무리 주장하고 싶어도 지젝과 <조커>는 설득될 리가 없다. 그들 개개의 이념 체계는 이를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사회적 긴장을 계속적으로 지적하곤 한다. 이 긴장이라는 것이 항상 더 나은 사회를 조직하고자 하는 집단적 압력의 역할을 수행하는 혼란이다."*[4]

 

 *[4] https://www.patheos.com/blogs/anotherwhiteatheistincolombia/2019/10/tribelessness-secular-zizek-joker/.

 

 

 

 

  물론 나는 이 같은 급진적 허무주의의 입장을 나의 정견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여기며 또한 자기모순적이라고 생각한다. 급진적 허무주의는 허무주의적 파멸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해 주고 그 위선을 벗길 수 있게끔 해 주는 허구의 도덕적 상대를 필요로 한다. 그 안에는 개인적인 비극을 인셀, 클라운셀, 머레이를 쏘기 전의 조커가 연습해 만든 승리한 코미디로 반전시키려는, 모든 필사적인 시도의 한계가 기거하고 있다. 그는 머레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밖에 나가 본 적이 있어, 머레이? 스튜디오를 떠나 본 적이 있기는 한가? 저 밖의 모두가 서로에게 소리치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고. 아무도 예의를 지키지 않아! 아무도 다른 놈에게 어떻게 굴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는다고. 토마스 웨인 같은 놈이 나 같은 놈이 되는 게 어떤 일인지 생각이나 해본 적 있을까? 그놈들이? 절대 그럴 리 없지. 그저 착한 애새끼처럼 주저앉아 모든 걸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지! 늑대인간이 되어 날뛸 거라고 여기지 않으니까!" 즐거운 파멸의 주장이 여전히 이 불만에 기생충처럼 남아 있다. 조커는 현존하는 질서를 파괴하는 일에 있어 그리 "멀리" 가지는 않는다. 그는 헤겔이 "추상적 부정성"*이라 말한 지점에 멈춰있으며, 구체적인 부정성을 제안할 수 없다.

 

*헤겔의 부정성 개념은 절대적 자유로 가기 위한 발판의 역할을 함. 조커의 현상태는 이 부정성을 완전히 이루지 못한, 이전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지젝은 주장하는 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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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부정성을 프로이트적 명칭인 죽음충동으로 부르는 한, 탄핵 시도에 대한 트럼프의 방어를 죽음충동의 징후로 여기지 않기 위해 각별히 주의해야만 한다. 그렇다, 트럼프가 기소를 거부하는 동안, 동시에 그는 바로 그 범죄를 확인했다.*[5] 그렇다, 트럼프는 혐의를 부인하는 동시에 연루된 범죄로 비난을 받고 이에 대한 방어를 하면서도 위법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리함으로써 그저 법치의 근간-법을 만든 그 기관이 법치의 영역으로부터 면제되는 역설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5] See https://www.lrb.co.uk/v41/n20/judith-butler/genius-or-suicide.

 

  그렇다, 트럼프는 엽기적인 행동을 일삼지만, 이런 식으로 단지 그는 법 자체를 역행하는 터무니없는 결과만을 이끌어낼 뿐이다. 그의 행동의 "부정성"은 그의 야망과 행복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조커가 세운 존재론적 명령으로서 자기파괴는 그에게서 터무니없이 멀다. 질서를 어기는 것을 자랑하는 트럼프에게는 어떤 자기파괴적 징후도 없다. 이런 일들은 그가 해외로 미국을 촉진할 수 있고, 부패한 엘리트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대통령이며, 꼭 해야만 하는 월권행위들이 있는 이유는 오직 규칙을 깨는 사람만이 워싱턴 정가라는 복마전을 쓸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간단한 메세지의 일부일 뿐이다. 이처럼 합리적이고 잘 짜인 전략을 죽음 충동의 언어로 읽는 것은 대통령이 나랏일을 잘 하는 중에 관료적이고 합법적인 위치에서 잔소리를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좌파 리버럴들의 또 다른 예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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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란의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는 진실을 대변할 뿐이다. 고담 시티에 대한 테러의 의도는 명료하다. 조커와 그 무리들은 배트맨이 그의 가면을 벗고 그의 진실된 정체성을 밝히는 순간 멈추게 될 것이다. 뭐, 그러면, 조커는 마스크 아래에 있는 진실을 폭로하기를 바라며 사회 질서를 무너뜨릴 이 폭로가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그런 이인가? 그는 가면 없는 사람이 아니고, 대조적으로, 뒤집어 쓴 가면에 의해서만 정체성을 얻는 사람이다. 그는 곧 그의 가면이다. 그의 가면 아래에 "평범한 사람"은 없다. 이것이 조커가 배경과 다른 명확한 동기를 결여하고 있는 이유이다. 그는 제 상처에 대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가 그를 있도록 만든 깊은 트라우마 따위를 가져야 한다는 망상에 조소를 던진다. 이는 <조커>가 그의 사회심리학적인 종류의 기원을 제공하고 그가 현재의 조커가 되도록 정신적 외상을 입힌 사건을 의도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얘기다.*[6] 말인즉, 조커는 병리학적 상황의 결과이나, 이 상황은 오직 조커가 이미 이 세상에 있을 때에만 소급하여 이 캐릭터의 고유한 설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니발 렉터에 관한 초기 소설 중 하나를 읽고 한니발 렉터의 괴물성이 (초기의) 불행한 상황의 결과라는 주장은 개소리 취급을 받는다.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게 아니다. 그는 그냥 저질렀을 뿐이다."

 

*[6] 그저 비평적 반응만 읽고 영화를 보기 전에 나는 이 영화가 조커에 대한 기원을 설명하는 영화일 거라 생각했다. 이제 영화를 봤으니, 나는 공산주의자 식으로 자아비판을 하겠씨요- 내가 틀렸음을 인정합네다. 수동적인 피해자성으로부터 새로운 형태의 주관성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이 영화의 중점적 순간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당연하게) <조커>를 이 반대 방향에서 읽고 조커의 캐릭터를 형성하는 주된 행동이 그냥 그가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행한 자율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7] 그는 그의 운명으로 정체성을 얻지만 이 과정은 자유로운 행동에서 비롯된다. 일련의 과정에서 그의 고유한 주관을 통해 정체성을 못박는다. 우리는 영화에서 반전이 이루어지는 결정적 순간을 찾을 수 있다. 영웅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진짜 웃게 만드는 게 뭔줄 알아? 나는 내 인생이 비극이라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이제 깨달았어, 내 인생은 좆같은 코미디였다는 걸." 또 우리는 아서가 제 어미를 베개로 눌러죽이면서 하는 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 그 사람이 엄마가 맞긴 했나? 아서는 그녀의 존재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행복한 표정을 짓고, 웃으라고 말했어. 내가 세상에 기쁨과 웃음을 전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말야." 이것이 순수한 모성적 초자아가 아니겠는가? 그녀가 아들을 아서가 아니라 "해피"라고 부른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는 웃으라는 그녀의 말에 완전히 동일시함으로써 어머니의 품을 없애버리게 되었다.

 

*[7] 광대충들 또한 그들이 처한 상황만으로 단순하게 규정되지 않는다. 통상적인 인셀들 이상으로 그들은 그들이 처한 고통을 유희의 형태로 바꾸는, 그러한 상징적 행위로 인해 규정된다. 그들은 명백하게 그들이 처한 곤경을 즐기며, 이를 자랑스럽게 드러내고, 따라서 그들은 그저 운나쁜 상황의 희생자만은 아니게 되고, 그들 스스로가 상황에 책임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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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도덕성은 우리가 공공선이라고 여기는 것을 타인과 얼마나 공유하느냐에 따라 조절되는 반면, 윤리는 우리의 욕망을 정의하는 대의에 대한, 쾌락 원리를 넘어서게 하는 충실성과 연관되어 있다. 기본적인 의미에서 도덕성은 사회관습에 반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옛 그리스 인들이 eumonia라고 부르던, 공동체의 조화로운 행복 자체를 일컫는다. 한 가지 더, 안티고네 서사의 시발점에 누군가(안티고네) 크레온의 금지령을 어기고 폴리네이케스의 제례를 치루어주었을 때, 코러스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살펴보자. 연극의 마지막 라인에서 온전히 재조명되는 공동체의 조화로운 질서를 무너뜨리는 악마적인 행위와 관여하여 알게 모르게 책망받는 "추방자"는 안티고네 그 자신이다. "행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 신께 불경한 짓을 하지 않는 지혜라, 오만한 이들은 이를 자랑스러워하니 / 신벌의 무서움을 불러오게 되리 / 늙은이만이 지혜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공동체(eumonia)의 입장에서 안티고네는 명백히 악마적이고 불쾌한 사람이다. 그녀의 반항적인 행동은 도시의 "아름다운 질서"를 방해하는 관측키 어려운 과한 고집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의 자기멋대로의 윤리는 도시의 조화를 저촉하며 "인륜 너머"에 있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한 건 안티고네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게끔 하는 고대 법률의 수호자로 존재하면서 행동하기는 제멋대로에 경우없는 혐오스러운 존재처럼 행동했다는 점이다. 사람냄새 나는 여동생 이스메인과 비교해봤을 때 알 수 있듯 그녀는 확실히 냉혈하고 비인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조커가 도덕적이지 않지만 윤리적인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아서의 성인 플렉이다. 이는 독일어로 얼룩,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서는 사회라는 체계에서 조화될 수 없는 얼룩이다. 그에게 걸맞는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그를 이런 얼룩으로 만드는 건 그저 그의 존재가 불우한 탓에 그치는 게 아니라, 조절할 수 없고 강박적으로 자주 터져나오는 웃음에 있다. 이 웃음의 상태는 역설적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외부적이고 친밀하다. 아서는 이것이 그의 내면의 중요한 코어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엄마가 나한테 내 웃음이 병이라고 했던 거 기억해? 나에게 문제가 있어서 그런 거라고 했지? 아니야. 이게 있는 그대로의 나야"*(엄마를 죽이기 직전의 대사) 하지만 웃음은 그의 인격에 있어 외부적인 것이며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독립된 일부로 완전히 정체화된, 라캉 식으로 "증상과의 동일시" 현상의 한 사례로서 겪게 되는 것이다. (혹은 "sinthome"* : 무의식의 암호화된 메시지의 전달자를 뜻하는 게 아니라, 대상의 쾌락에 대한 기초적인 식으로서 쾌락의 기호를 뜻하는 sinthome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역설이 생겨난다. 아주 표준적인 오이디푸스 이야기에서 아버지-의-이름(Name-of-the-Father*)은 객체가 어머니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 준다. 조커의 경우, 아버지의 기능을 하는 요소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주체는 어머니의 초자아가 내리는 명령을 넘어서 자기 주체화를 할 때에만 어머니를 벗어날 수 있을 뿐이다.

 

*sintome 증상을 뜻하는 라캉 고유의 표현

*name-of-the-father 정신세계의 구축은 어머니를 통해 이루어진다.(일차적 동일화) 아버지를 이상화하고 동일시하기 시작하면서 나르시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상상계 → 상징계)

 

  영화는 조커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기원을 제공하는 것뿐 아니라 시위가 조커가 이끄는 새로운 부족의 형태로 가게 되는 사회에 대한 비난 또한 시사하고 있다. 조커가 제 주관대로 한 행동이 있으나, 이것이 새로운 정치적 바람을 불러오지는 못한다. 영화의 끝에 가서 우리는 새로운 흐름의 지도자가 된 조커를 보게 되지만, 거기에 새로운 정치적 시도는 없다. 그저 악이 터졌을 뿐. 머레이와의 대화에서 아서는 정치적인 뜻이 없었다고 두 번이나 이야기한다. 그의 분장을 지적하며 머레이는 묻는다. "그 얼굴은 뭐요? 당신도 그들과 한패요?" 아서가 답하기를 "아뇨, 전 그 무엇도 믿지 않아요, 아무것도요. 그냥 내가 하려고 하는 일에 맞겠다 싶어서 한 거지." 그리고 이어서 말하기를 "난 정치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사람들을 웃게 하려고 애쓸 뿐이죠."

 

https://www.nytimes.com/2019/10/03/movies/joker-review.html

 

  뉴욕 타임즈의 A.O Scott은 조커를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모습과 음향/…/깊이와 무게감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무게감 없고 얕다"라고 할 때 요점을 놓쳤다. 실상 조커의 마지막 지점에는 무게와 깊이가 없다. 그의 폭동은 "무게감 없고 얕다" 그리고 이것이 영화의 가장 절박한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위적인 좌파는 이 영화가 그리는 세계관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의 세계는 세계화된 폭력과 부패가 자리잡은 평범한 세계에 불과하다. 영화에 그려진 자선 행사 따위가 이를 잘 대변해준다. 만약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람이 이 세계 속에 있다고 하면, 그녀는 당연히 웨인이 조직한 자선행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웨인과 같은 자본가들의 자선 놀음에 말이다. 조커의 폭동에 긍정적 대안이 없다는 식의 접근처럼 멍청한 비평은 더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에 이런 장면들이 담겼으면 어땠을까? 가난뱅이, 실업자, 건보소외자, 경찰과 길거리잡배들의 폭력의 희생자들 등등을 교화하는 이야기라든가, 여론을 통해 비폭력 시위가 조직되는 장면 따위를. 아마 인종주의가 거세된 마틴 루터 킹 같은 것이었을 터이다. 엄청나게 지루한. 조커의 미친 행동이 없는 영화라, 퍽이나 재미있을 것이다.

 

  문제의 중점을 건드려 보자, 좌파들에게 비폭력 시위와 파업만이 유일하게 쓸 수 있는 방법으로 보이기 때문에, 인즉, 권력에 효율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보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적 논리와 재미를 볼 수 있는 서사의 효율 간의 간극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조커 식의 무분별한 폭동은 정치적으로 교착 상태이겠으나 이야기는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 준다.) 혹은 조커가 상징하는 자기파괴적 태도에 내재된 정치적 필요가 있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한 가지 분명한 건 우리가 조커가 선 자기파괴적 영점을 뚫고 지나가야만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겪지는 않더라도, 어떤 위협이나 가능성 정도로는 겪어볼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시스템을 박차고 나갈 수 있고 새로운 무언가를 상상해볼 수 있다. 조커의 태도란 눈 먼 채 걷는 골목길이요, 완전한 교착상태요, 불필요하고 생산성 없으나 역설적으로 이 무가치한 캐릭터를 알기 위해서는 이를 거쳐 가야만 한다. 현실의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건설적인 방향에 직도(直道)란 없다.

 

공론장맨.jpg

(공론장맨 하버마스)

 

  동유럽 공산주의의 몰락에 대한 해설에서 하버마스는 궁극적으로 좌파 후쿠야마주의자임을 드러냈고, 현존하는 자유-민주주의 질서가 가장 나은 길임을 조용히 받아들였으며, 우리가 이 질서를 보다 공정하게 만들기 위해 분투해야 하며 이 기본적 전제에 도전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이것이 많은 좌파들이 동유럽 반공주의 시위를 결함으로 본 것을 그가 환영한 이유이다. 사실 이 시위들이 포스트-공산주의의 미래에 대한 비전에 동기를 얻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의 말마따나 중부와 동부 유럽에서의 혁명이란 것들은 대개 "따라잡기"나 "정상화" 식의 혁명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서구 유럽인들이 이미 쥐고 있던 것들을 가지자는 데 있었다. 즉, 그들은 서유럽이라는 정상성의 범주에 다시 들어가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홍콩 시위가 이 같은 틀에 꼭 들어맞을지 모르나, 현재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시위는 이 같은 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에 조커와 같은 인물이 이들과 함께해야 한다. 어떤 흐름이 현존하는 질서의 규범적인 토대가 되는 근간에 의문을 던질 때, 폭력 없이 평화시위만으로 목표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맺음말을 내자면, <조커>의 고아함은 자기파괴적 추동에서 영화에는 부재한 해방적인 정치적 기획으로서의 새로운 욕망으로 넘어가는 중대한 움직임이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달려 있다.

이 빈 부분은 우리, 관중들이 채워야 한다. 

 

 P.S. Fragments of this text are already circulating on the web. I am grateful to LARB’s “The Philosophical Salon” for its readiness to publish the integral version which dispels many confusions that the fragments which circulate gave rise to.

 

  이 찌끄래기가 웹에 좀 돌아다니고 있으니 나중에 모아서 출판을 해보련다.

13개의 댓글

0
2020.01.20

스크롤 쫙 내려버린 형냐들 있음? 2222222222222

4
2020.01.20

중간에 뭔가 딥다크가 있었던 것 같은데

1
2020.01.20

고생추

 

2번이나 읽어봤는데 반절이나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네 이거

0
2020.01.20
@스카우루스

주제별로 구획이 제대로 안 나눠져 있고 문장도 길어서 옮기기가 어렵더이다

키배 얘기 럼프 얘기 키배... 라깡 키배 이러니

0

번역 고생했음 분량 미쳤네

아버지의 기능이 아예 없다기보다 머레이가 그 대안이 됐다고 봤음

근데 현실의 아버지가 아닌 TV와 상상으로 조립된 존재였기에 뭐라해야되나 실패는 그렇고 부작용이 생겼다 해야되나 여튼 그리 봤음

덕분에 글 재밌게 봤엉

0
2020.01.21

정말 고생 많았음.

내가 좋아하능것들만 딱 모여있네 지젝, 영화 조커

근래에 개드립 앱을 가장 오래 키고 있게하고

정말 전투적으로 열심히 갈고 씹어서 읽었다.

감사 눈물 찬사 박수

눈아픔

0
2020.01.21

글 자체도 좋지만 조커 영화 한편가지고 이렇게 할 얘기가 많다는게 경이롭다

0
2020.01.21

너무 어려워 ㅜㅜ

0
2020.01.21

재밌따

0
2020.01.22

분량 미쳤네 개고생

0
2020.01.24

수고했다 잘 봤어

0
2020.01.24

1편 2편 그냥 봤는데 이 사람은 아직도 50년전에 살고있는거같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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