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나의 폐급 이야기 -5-

-5- 두 조교들

 

제대로 안 합니까?! 똑바로 안 할 거야??”

 

우리생활관 선임 조교 현00 병장이다. 제대로 하라는 저 말은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그 당시 나는 훈련소에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 훈련을 버틸 체력이 부족했다. 밖에서 1년을 운동도 못하고 시달리다 끌려오다시피 한 군대였다. 3km 달리기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모든 훈련소가 그렇듯, 대부분의 훈련장은 산에 있다. 사격훈련, 수류탄, 각개전투까지 모두 고지대에 있어 가는 데만 해도 어느 정도의 체력을 필요로 했다. 난 대열에서 낙오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눈에 띄는 행동은 소대장과의 면담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훈련장에 도착할 때까지는 기를 쓰고 힘을 냈다. 아무리 힘들어도 움직일 때, 훈련할 때는 살아남기 위해 노력을 했다.

 

문제는 내 마음이었다. 나는 버티는 것 이외에 다른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그냥 시간을 보내다 가고 싶었다. 이곳에서 위로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괜히 그러려고 시도해봤자 뺑끼부린다는 소리밖에 못 듣는다는 걸 인식했기 때문이다. 뒤쳐질 수는 없지만 굳이 잘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훈련병의 기본인 소리 크게 내기를 거부했다. 훈련소 초기에 많이 혼난 이유다. 조교들은 누가 소리 안 내는지 다 알 수 있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조교들은 실제로 누가 소리를 안 지르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전체 분위기를 보고 한 놈을 찍어 혼낼 뿐이다. 내 기수, 우리 소대에선 그 시범타가 나였다. 소대장 면담은 물론, “?”를 고치지 못해 일주일을 넘게 혼나면서 내게는 이미 낙인이 찍혀있었다.

 

나를 콕 찍어 혼낸 것에 악의는 없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때는 그 사람도, 나도 모두 20대였고 군대라는 억압적인 조직에서 각자의 사정이 있었을 테니까. 나를 자주 혼냈을 뿐 훈련과 일과가 끝난 이후에는 만날 일도 거의 없었다. 그리고 한 번은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자신이 뭘 하다 왔는지, 어디 사는지, 학교는 어딜 다녔는지 등 입사지원서 서류에나 쓸 법한 피상적인 얘기지만 군대라는 조직에서 인간성을 느끼기엔 충분한 정도였다.

 

선임 조교는 미대생이었다. 처음 자대를 배정받고 짬찌일때는 미대생인게 싫었다고 했다. 그림을 그려달라는 선임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줄 수가 없어서 그랬단다. 훈련소 조교의 일과는 매우 고되다. 그 일과를 마치고 자는 시간을 쪼개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니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당시만 해도 훈련소엔 조교들 간의 구타가 남아있던 때였다. 선임의 요구를 받고 그림을 그리지 못한데다, 수면 부족으로 갖가지 실수까지 했을 테니 자기 전에 맞지 않으면 편하게 잠을 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내 대에서는 구타를 끝내자는 모든 군인들이 할 법한 생각을 했단다. 그런 생각을 할 정도로 입대 초기엔 굉장히 부드러운 사람이었다는 게 본인 주장이었다. 자기도 처음부터 이렇게 소리 지르고 윽박지르고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했다. 본인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진 못했지만, 추측은 가능했다. 하필 자대를 훈련소로 받고, 어느 부대보다도 생활 통제의 강도가 높은 곳에 있다 보니 변해버린 것 같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태도를 보이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왜 하나 싶었다. 이제 막 병장을 달아 제대도 100일 넘게 남은 사람이었다.

 

다음 주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생활관 전담 조교가 현00 병장의 맞후임으로 바뀐 것이다. 훈련소 시스템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자기 생활관을 두고 훈련병들과 잠을 자는 게 불편하리라는 점은 알 수 있다. 아마 그 훈련소는 병장부터 자기 생활관에서 잠을 자게 해줬던 것 같다. 생활관 조교로 들어온 사람은 조00 상병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한 마음이 커지지만, 단 한 번도 고맙다는 말을 못했다. 훈련소를 떠날 때 한 번 쯤은 직접 말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는 한국의 군 체계, 비합리적 관행 등에 문제를 느끼고 있었다. 가장 억압적인 훈련소에서 찾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마 그 훈련소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조 상병이 유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주장이 너무나 강했던 나머지 계급이 낮을 때 몇 번 갈등이 있었다고 했다. 그 때문에 조 상병은 짬 높은 사람들 사이에선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입대도 늦었기에, 나이는 나와 비슷했다. 무엇보다 다른 조교들과 달리 내가 어머니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써야한다는 이야기를 납득해줬다. 정신이 박살난 상태에서 오래 지내다보면 상대가 나를 호구 잡으려는 건지, 진짜 호의를 베푸는 건지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게 된다. 조 상병은 후자였다. 돌아보면 이 시기의 전화는 내 인생에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군대에 와있는 것은 나였지만,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은 어머니였다. 그래서 어머니의 안전을 매일 확인하는 것은 훈련소 생활을 견디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래서 고마운 마음을 더 표현하지 못 한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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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무리하는 김에 하나 더 올립니다.

힘드니까 지난 글 요약이랑 링크는 나중에...

4개의 댓글

2019.11.14

5252 기다렸다구?

0

조교가 착하내

0
2019.11.14

글 잘 읽었어욤

이기적이지만 같이 군생활 안해서 다행이네요

0

근데 좀 열심히 하지 그랬냐

같은 부대였으면 진짜 어우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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