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오타쿠란 말의 기원

1.

덕후. 다들 알다시피 일본말 오타쿠를 한국화(?)시킨 단어다.

그냥 마니아 정도 기존에 쓰던 말을 계속 써도 됐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한국서 마니아는 '자기 취미가 확고한' 정도 꽤나 긍정적인 이미지로 쓰이는 단어였기 때문이다. 오타쿠는 다르다. 오타쿠는 그 마니아들 중에서도 사회성이 떨어지고, 외견이나 행동거지도 불편하며, 뭔가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마니아집단 내 소수인종(?) 멸칭이다.

근데 계속 파고 들어가다보면 오타쿠도 지금과는 사뭇 다른 진원지를 갖고 있음이 드러난다.

많이들 알다시피, 오타쿠는 お宅, 즉 한국어로 '댁' 정도다. 상대방을 가리키는 경칭(敬稱) 대명사.

애초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에서 히카루와 린민메이가 서로를 경칭으로 불렀던 게("어머, 댁은 그때 그분?") 오타쿠들에 깊은 인상을 남겼고, 거기다 플러스로, 오타쿠들 자체가 '실제로' 사교성이 좀 부족한 사람들이기에 소프트 등을 교환하러 처음 상대를 만날 때 저런 어색한 경칭으로 서로를 부르던 게 그 효시라 알려졌다.

여기까지만 보면 저 '사회성이 떨어지고 말이나 행동거지도 좀 어색하고 불편한' 사람들 이미지와 얼추 일치하긴 한다. 그런데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럼 애초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속 민메이와 히카루는 왜 저렇게 어색하게 서로를 부른 건데?

 

2.

사연을 파고 들어가면, 애초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를 만든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누에 내에서 서로를 그렇게 부르는 풍조가 있었고, 거기서 더 파내려가면, '게이오대학 부속유치원 출신 샌님들'이란 SF동호회 일부가 스튜디오누에에 입사하면서 동호회 내에서 자기들끼리 쓰던 호칭을 그대로 쓴 게 회사 전체로 퍼져나가게 됐단 것.

그리고 '게이오대학 부속유치원 출신 샌님들' 측은 또 저게 자기들끼리만 쓰던 특이한 문화가 아니라, 게이오대학 부속유치원부터 부속초중고 등까지 꾸준히 쓰이던 호칭이란 배경이다.

게이오대학 부속유치원은 일본서 가장 들어가기 힘든 유치원이다. 거기서부터 에스컬레이트로 부속초중고, 결국 명문 게이오대 특별입학전형인 '내부생'으로 '쉽게' 진학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게이오대 내부생들 내에서도 부속유치원부터 올라온 애들만 '성골' 인사이더로 취급하는 분위기도 존재하고.

그런만큼 게이오대 부속유치원은 신입생 선발에 상당히 까다롭다. 아이들 학습능력은 물론, 특히 부모직업과 집안 등을 '굉장히' 따진다. 그렇게 일본 상류층 자제 이너써클이 시작되는 거다. 위 쟤네들이 자신들을 '샌님'이라 지칭한 것도 그래서 그렇다.

결국 애초 '오타쿠'는 부유층 아이들 사이에서 부모와 학교 등에 영향 받아 일상적으로 쓰던, 굉장히 예의바르고 고풍스런 경칭이었다는 거.

거기서 더 멀리 나가면, 애초 오타쿠는 도쿄 서민층이 주로 살던 저지대 시타마치에 대응하는 고지대 야마노테에서 중산층 이상들이 흔히 쓰던 호칭, 즉 '야마노테말'이었다. '오마에' '안타' 등 서민들이 쓰던 가까운 일상호칭이 부유층 입장에선 천박하게 여겨져 자기들끼리 쓰는 일상호칭을 '좀 더 고급스럽게' 따로 만든 셈이다.

비슷한 예로 귀족들이 가는 학습원 및 몇몇 명문고에서 '아직까지도' 사용한다는 '고키겡요' '자마스' '아소바스' 같은 상류층 야마노테말 등이 있다.

그러던 게 저 부잣집 샌님들 중 SF나 아니메 좋아하던 애들이 실제 아니메업계에 들어가 퍼지고, 다시 얘네들이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는 물론 일본SF대회 등에 오프로 참석해 서로를 오타쿠라 부르는 모습을 본 아니메 팬들이 이를 '아니메 팬 문화' 일부처럼 받아들이게 된 게 바로 지금의 '오타쿠'로 이어졌단 순서.

아직도 오타쿠란 호칭을 일상적으로 쓰는 도쿄 상류층 노인들이라면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이긴 하지.

 

3.

흥미로운 점은, 오타쿠=>덕후로 간 한국 사정도 참 묘하게 일본과 비슷한 경로를 거쳤단 점이다.

애초 한국서 '오타쿠'란 호칭은 1990년대 인터넷 상용화 이전, 값비싼 아니메/만화 소프트나 관련 일본잡지 등 미디어상품들을 왕성하게 소비할 수 있었던 서울 중산층 이상 가정 '샌님들' 사이에서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 자신들 정체성을 드러내는 명칭으로 삼은 게 그 시발점이다.

그리고 이들 '샌님들' 가정의 교육열만큼이나, 대학 내 일본애니메이션 동아리가 처음 생긴 곳도 서울대였고.

그러던 게 2000년대 인터넷 상용화와 함께 불법복제 아니메나 만화 파일들이 무더기로 유통되는 상황을 맞으며 분위기는 크게 바뀌었고, 뭐 그러다저러다, 그저 현실부적응 취미광들을 가리키는 '덕후'로 넘어가게 된 순서.

뭐 한국 같은 경우는 일본처럼 '미치고 팔짝 뛸' 사람들은 없긴 하다. 다만 '그 시절' 사람들 중엔 그런 취미를 공유하던 아이들끼리 어디까지나 '암묵적인' 계급 이너써클이 형성됐던 추억을 지닌 사람들이 꽤 있을 뿐.

그나저나, 저때 저 게이오대 부속유치원 출신들은 지금쯤 뭐하고 있을까. 한국선 최소 실제 애니메이션업계론 안 가고, 1/3 정도는 의사가 된 거 같던데.

총총.

출처 - 문화평론가 이문원 페북

15개의 댓글

2020.11.16

오타쿠

0
2020.11.16
@친목감지
1
0
2020.11.16

お宅はオタクでござるか

0
@antianti
[삭제 되었습니다]
2020.11.17
@홍차녹차보이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0
2020.11.17
0
2020.11.17
0
2020.11.17

야마노테말은 뭐야?

구글링해도 안나오는 단어인데?

0
2020.11.17
@번째줄버그

山の手言葉

0
2020.11.17
@번째줄버그

도쿄의 야마노테 지역이라 함은 에도시대부터 고위급 사무라이들이 살던 동네로 상인, 서민들이 사는 시타마치와는 다른 문화가 있고 쓰는 단어도 좀 다르다는 얘기.

0
2020.11.18

슬슬 안쓰는 말 아니냐 씹덕이라고하지

0
2020.11.18

찐 씹덕으로 요즘은 옮겨갔지 ㅋㅋ

0
2020.11.19

한국은 오타쿠 > 오덕후 > 오덕 > 십덕 > 씹덕

0
2020.11.21
@곤다르다곤

여즘 파생단어 찐,육수,그리고...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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