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나의 폐급 이야기 -8-

-8- 훈련소 마지막 이야기

 

군대의 꽃이 말년이듯, 훈련소의 꽃 역시 떠나기 직전이다. 부대 생활에 적응을 했고, 어느 정도 조교와 친분이 쌓여 자유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는 대부분 각개전투를 한다. 각개전투는 솔직히 괜찮았다. 재미있었다. 쉬는 시간이 많아서 서로 얘기할 여유가 많았다. 체력도 어느 정도 올라와 뭘 하든 처음처럼 죽을 것 같이 힘들진 않았다.

 

우리에게 여유가 생긴 만큼 조교들에게도 좀 더 여유가 생겼다. 00 병장이 전출을 간 것이다. 00 상병이 또 맞고 있는 모습을 본 다른 후임이 위에 보고를 했다고 들었다. 자기 대에서는 구타를 끊겠다고 하던 말이 스쳐지나갔다. 가끔씩 우리를 맡아보던 현 병장이 사라지자, 00 상병은 그동안 많이 맞았다는 말을 했다. 구타를 없애겠다는 말은 말 뿐이었다며, 상꺾이 됐을 때 없애겠다던 그 말은 조 상병이 자대를 훈련소로 받은 첫 날부터 들었던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구타를 끊지 못 했고 결국 훈련병들보다 먼저 훈련소를 떠났다.

 

그가 떠난 후 우린 2차 각개전투 훈련을 받았다. 1차 훈련과의 차이는 매번 이번 기수는 최악이라고 말하고 다니던 우리 부소대장이 훈련장에 CS탄을 뿌렸다는 것이다. 각개전투 훈련은 하루 종일 이어진다. 당연히 밥도 거기서 먹고 온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뭐가 불만이었는지 밥 먹는 곳 주변부터 훈련소에 들어가는 길목까지 곳곳에 CS탄을 터뜨렸다. 밥이 들어갈 리가 없다. 방독면을 주지도 않았으니 마시라고 갖고 온 물은 모두 얼굴을 씻는데 다 써버렸다. 그래서 행보관이 씩씩대며 다른 부대에서 물을 얻어오기 까지 했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시간도 빠르게 흘러갔다. 훈련소의 마지막은 그렇게 다가왔다.

 

문제는 수료식이었다. 나를 제외한 다른 훈련병들은 모두 수료식에 누굴 부를지 생각하고, 어디서 뭘 할지 조교들에게 물어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가족을 부를 생각이 없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지만, 불렀다가 아버지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다음날 사회면에 우리 가족이 나갈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에게 수료식을 한다고만 말한 뒤, 오지마시라고 했다. 아버지에겐 당연히 수료식을 알리지도 않았다. 수료식 때 아무도 안 올 것을 대비해 간부와 조교에게 미리 말까지 해놨다. 도망 안 갈 거니까, 그냥 피시방만 갔다 올 거라고. 훈련소 돌아올 때 언제 어디서 뭘 타고 오면 되는지만 알려달라고 했다. 그렇게 당연히 혼자서 나간다고 생각하고 수료식을 맞이했다.

 

군에서도 인생은 그렇게 평화롭지 않았다. 조교에게 말을 하고 허락을 받으려는데, 부소대장은 아버지가 와 계신다고 말했다. 그냥 혼자 나가면 안 되겠냐는 내 말에 부소대장은 오셨으니까 그래도 만나보라고 했다. 가족이 오지 않은 병사는 반드시 부대의 관리가 필요하다. 그 말은 누군가를 붙여서 같이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막상 조교에게 이야기를 해놨지만 가족이 와있는걸 확인한 이상 조교에게도 부담을 주기 싫었던 것 같았다. 가족의 정이니 뭐니 그런 말을 했었지만, 귀찮음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러느니 차라리 안에 있겠다고 말했을 때, 부소대장은 갑자기 돌변하여 나가야 돼라고 힘주어 말했다. 애초에 배려가 아니라 관리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점을 파악하고 나니 기대가 생기지 않았다. 포기하게 됐다. 아버지는 군에 와서도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였다.

아버지는 흥신소 직원과 함께였다. 나에겐 친구라고 소개했지만, 아버지는 친구가 별로 없었고 그 친구들의 얼굴은 모두 내가 알고 있었다. 의도는 뻔했다. 어머니가 찾아올 줄 알았던 것이다. 일단 차에 타라는 말에 실랑이를 하기 싫어서 그 말대로 했다. 그 차에 목적지가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아버지의 의도는 더 확실해졌다. 아버지는 나를 태우고 근황 묻는 척을 하며 바깥의 사람들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좁디좁은 도시에서 차를 타고 터미널 주위를 빙빙 돌기만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곧 수료식에 온 목적을 드러냈다. 아마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거의 다 잡았다고 생각했을테니까.

 

~ ! 니 엄마는 아들이 수료식을 하는데 오지도 않고 진짜!

아들내미가 수료식을 하는데 이년이 안 와?!”

니네 엄마 참 대단한 사람이야! 그치 00?”

 

따위의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을 뱉었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집에서도, 입대하는 순간까지도 충분히 들었던 비슷한 얘기였다. 모르는 사람을 옆에 두고 가정사를 생중계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신호등에 차가 잠시 멈췄을 때, 무작정 짐을 챙기고 내렸다. 아버지는 놀란 듯 앞 유리를 내리고 말했다.

 

, 너 어디가!?”

그냥 가세요. 알아서 부대 들어갈 테니까. 그냥 들어가세요.”

아니, ! 아빠 친구있는데 그러면 되냐? 빨리 타!”

여기서 더 화가 났다. 친구가 아닌 거 뻔히 알고, 친구가 아니라는 거 차에서 직접 듣기까지 했는데도 그놈의 체면을 끝까지 챙기려는 모습이 더 혐오스러웠다.

 

같이 온 사람 보내고 오세요. 아니면 나 그냥 혼자 돌아다니다 들어갈테니까.”

 

아버지에겐 어려운 선택이었으리라 생각한다. 흥신소 직원에게 버림받은 아버지의 모습을 더 보이며 함께 어머니를 찾을지, 아니면 나와 함께하며 사랑받는 아버지인 하며 어머니의 단서를 캘 것인지 골라야 했으니까. 전자는 마지막 존심마저 팽개치고 스스로의 집착을 인정하는 길이었다. 절대 고르지 않을 선택지였다. 후자는 아들 사랑의 껍데기로 존심이 무너진 것에 대한 핑계를 댈 수 있는 선택지였다. 집착을 회피하면서도 실제로는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선택지였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직원 앞에서 보였던 마지막 자존심은 박살이 나야 했다. 그래서 화를 못 냈을 것이다. 부대로 돌아가버리면 나에게서 다시 단서를 찾기까지 몇 달이 걸릴지 모른다는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나와 함께 하는 것은 아버지 입장에선 기회였다. 나는 그 시간의 대가로 그 사람이 애지중지하는 체면을 요구한 것이다. 체면. 우리 아버지에게 본인만 갖고 있는 그 이상한 기준의 체면은 굉장히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었다. 관찰자 입장에선 아무리 봐도 겉껍데기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진짜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껍데기를 매우 소중히 여겼던 것 같다. 입대 몇 달 전, 동생이 출국하던 날도 그랬다.

 

동생은 공부를 잘했다. 나보다도 잘했던 것 같다. 지방 소도시 출신에 사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는데도 동네에서 공부로 유명한 학생이었다.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당시 동생은 모 재단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해외탐방에 지원했고, 면접까지 혼자 준비해가며 최종합격을 한 상태였다. 부모님도 나도 동생이 그걸 그렇게 진지하게 준비하는 줄은 몰랐다. 어쨌거나 동생은 최종 선정이 됐고, 그 날은 동생이 출국을 하는 날이었다. 다른 가족은 기분좋게 인천공항을 갔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아니었다. 차에서 어머니를 죽일 듯하던 아버지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체면을 찾기 시작했다. 공항엔 정말로 보는 눈이 많다. 화목해 보이는 가족들로 가득하다. 그런 모습에 지기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그냥 항상 해오던 체면치레의 관성이었을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계속 뽀뽀를 요구했다. 영화처럼 연륜있게, 품위있게 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어린 아이가 입 내밀고 하는 그런 뽀뽀를 요구했다. 그걸 공항 한복판에서 하라고 했다. 그런 아버지였다. 체면에 미쳐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행동이 이상해 보인다는 걸 생각 못하는 사람이었다. 수료식 날도 처참한 그 모습을 아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고 포장하면 흥신소 직원이 속마음을 모를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적어도 포장할 수 있다면 핑계를 댈 수 있으나 부정할 수 있으니까, 그 점에 안주했을 수도 있다.

 

목적이 뻔한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은 고달프다. 내가 그 목적을 이뤄줄 수 없을 때, 이뤄주기 싫은 때는 고통이 된다. 아버지는 결국 직원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고기를 사줬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먹기만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자 계산만 하곤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남들 다 찍는 가족사진을 나는 찍지 못했다. 물론 아버지와는 찍을 생각이 없기도 했다. 아마 다른 훈련소 동기와 함께 찍은 사진이 전부였던 것 같다. 훈련소 생활의 마지막이었다.

 

훈련소는 내 군생활의 압축판 같았다. 초기 폐급, 중기 반폐급, 말기 그냥 그냥 그런 병사로 지냈다. 아버지의 집착은 잊을 만하면 계속 나를 괴롭혔다. 이 사이클은 자대에서도 똑같았다. 초기엔 폐급이었고, 중간엔 비겁해졌으며, 말기엔 군 생활에 관심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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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가 길어질 예정이라 분량을 늘려봤습니다.

훈련소가 너무 늘어져서 바로 자대로 넘어가려 합니다

이제 ㄹㅇ 개털릴 예정.....

7개의 댓글

2019.11.27
0
2019.11.28

네 상처를 남한테 보여주는것만큼 무서운것도 없지만.. 그래도 여태 잘해냈네 내 생각엔 너는 폐급은 아닌거같다 정상적인 집안에서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애들이 폐급이지...

0

이러면 안되지만 점점 흥미진진...

 

지금은 잘 지내는거지? 그래야 죄책감없이 흥미진진하지

0
2019.11.28

죽여버리고 싶다..

0
2019.11.29

술술 잘 읽히는데에 반해서 내용이 피폐하니까 이 묘한 부조화에서 오는 묘한 감정이 혀 끝에서 자꾸만 도는데 영 씁쓸하다. 지금은 잘 살고 있댔지?

0
2019.11.29

재밌네.... 쭉 써줘라

0
2019.11.29

하 존나 긴 터널 빛도없이 기어가는느낌이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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