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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폐급 이야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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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사단본부 걷어차기

 

훈련소 중반 즈음, 일주일 내내 비가 왔다. 주말까지 5일 정도를 실내에만 있던 것 같다. 간부들은 어쩔 수 없이 야외 일정을 취소하고 실내교육을 진행했지만, 이틀이 한계였다. 그나마도 처음엔 아예 주말처럼 훈련병들을 놀게 뒀다. 자신들도 쉬고 싶었거나, 정말로 시킬 것이 없었던 듯하다. 이 이상한 자유시간은 훈련병들에겐 오히려 더 답답했다. 훈련병들이 쓰는 내무반에는 아무 것도 없다. TV, 책도 정말 아무것도 없다. 시간을 보내려면 대화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마침 나이 비슷한 남자들을 한 공간에 모아놨겠다, 각자 불안함은 가시고 시간 때우는 일에 익숙해졌겠다, 서로 대화할 여건은 충분했다. 하지만 대화는 반드시 웃음과 고성을 동반한다. 그걸 보다 못한 간부들은 조교들을 시켜 생활관 정리와 군장결속 같은 것들을 가르치라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사람들과 조금씩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비가 주룩주룩 오던 점심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감사의 기도를 하고 밥을 먹는 중에, 00 중사가 나를 불렀다. 또 뭘 잘못했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지만, 이번주는 정말 한 일이 없었기에 막연한 불안감을 갖고 따라갔다. 식당 뒤쪽 간이 천막에서 박 중사는 담배를 한 대 물며 말했다.

 

사단 본부에서 면접을 보겠다고 누가 왔어. 밥 먹고 생활관으로 오지 말고 바로 4층 강당으로 가봐.”

 

드디어 왔구나!’ 싶었다. 주변에 육군을 갔다 온 친구들 얘기로는 정말 재수가 없지 않고서야 모두 본부나 사령부로 뽑혀갔다고 했다. 그곳이 더 편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힘든 경우도 많았다. 그런 곳은 육체적 고통에선 많이 벗어나 있지만, 정신적 고통이 엄청난 것 같았다. 물론 이때는 그런 것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육체적인 노동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병사 생활을 하면서도 공부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들을 수 있는 이야기론, 사단 본부를 가면 정신적으로 힘들긴 하지만 공부할 시간은 충분히 주어진다고 했다. 당연히 맡은 일은 칼같이 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붙는 얘기였지만, 그때 나는 그런 걸 생각하지 못했다. 편협했다. 그래서 그냥 가고싶다!!!!!!’ 라는 생각만 앞섰다.

 

밥을 먹고 생활관 동기들과 나뉘어 4층 강당으로 갔다. 아직 면접관이 오지 않았다고 했다. 긴장되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조교와 함께 화장실을 갔다. 세수를 하고나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기대했다. ‘본부로 가면, 잘만 하면 이 안에서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어. 꼭 해내자.’ 라고 간절히 빌었다. 조교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별 상관없었다. 나는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면접 장소에 들어갔다.

 

테이블엔 90년대 스포츠머리를 한 상사가 본부 소속 병사 둘과 앉아있었다. 면접을 보러 온 건 나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다. 다른 한 명 역시 명문대였고, 다른 친구는 아버지가 국가 유공자라고 했던 것 같다. 이 친구도 군대를 안 와도 되는 친구였다. 면접 질문은 모두 똑같았던 것 같다. 신기한 것은, 어디서 정보를 받아오는지 우리가 딴 자격증과 신상명세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너무 어릴 때 따서 기억에서 잊혀진 자격증까지 그 사람들은 모두 꿰고 있었다.

 

“00 훈련병? 봅시다... 00 자격증도 있고... 00대학 00학과네. 훈련은 어땠어요?”

체력이 좋지 않아 처음엔 고생했지만, 얼마전 행군도 잘 해냈습니다.”

나는 간절했다.

... 우리가 둘을 뽑을지 하나를 뽑을지 모르겠는데, 인사병 뽑는거거든요? 컴퓨터는 좀 할 줄 아세요?”

, 파워포인트, 한글 모두 잘 다룰 수 있습니다.”

사단본부가 거의 코앞까지 온 것 같았다.

그런 것 같네요, 00프로그램 자격증도 있고. 좋네요.”

나는 간절했다. 하지만 융통성을 발휘할 만큼은 아니었다. 이 당시 내 기억으론 나에게 그 프로그램 자격증은 없었다. 초등학교 때 딴 자격증을 정신이 박살난 상태에서 기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정보가 잘못된 줄 알았다. 그리고...

그 부분은 잘못 된 것 같습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 자격증을 따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래요?”

병사 한 명이 서류를 뒤적뒤적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일주일 정도 뒤에 별 연락이 없으면 더 좋은 데로 가는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떨어졌다는 얘기일테지만 이 당시엔 그걸 희망의 메시지로 생각했다. 거의 일주일을 그 소식만 기다린 것 같다. 당연히 그런 소식은 없었다. 자기가 무슨 자격증을 가졌는지도 모르는데 굳이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내 실수가 아니라 자신들의 실수라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사단 본부에 가지 못 했다. 그래서 전투부대를 가게 됐다. 나중에 사단 본부의 일을 듣게 된 후,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당시엔 나는 조교, 다른 훈련병들에게 폐급일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폐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떠먹여줘도 못 먹는 병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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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소 이야기도 거의 끝나가네요.

6개의 댓글

ㅋㅋ 나도 헌병사무 뽑으러와서 면접볼때 농구 좋아하냐해서 안좋아한다했더니 옆사람 뽑아갔는데...

0
2019.11.21
@이기야노데스웅챠

저한텐 새옹지마였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있던 인사병이 장교들한테 너무 시달리다 전투부대로 전출가버려서 뽑는거였거든요

0
@아미라이프

사실 저도 비슷한 경우였어서...ㅋㅋ

 

헌병사무 못가서 경계부대로 착출, 근무만 졸래 서다왔거덩요

 

나중에 전역할때즘 전역자교육에서 그때 뽑혀간 형을 만났는데, 사수가 개 씹변태에 또라이라서 정신적으로 엄청 고통받았다고 들었네요ㅋ

 

그거 들으니 그냥 몸으로 때우는게 나았나 싶기도 합디다

0
2019.11.21
@아미라이프

인사과 가면 사회보다 더 굴릴때가 많아서 ㅋㅋ...행정도 일은 좆소급인데 분위기는 군대인 똥같음

0
2019.11.22

흔한병과중에 진짜 꿀은 운전병 무선통신병 투탑인듯

0

자격증 문제가 아닐걸? 특수한데로 빠지는 애들은 훈련병 때 조교가 이미 주변사람이랑 잘 어울리는지 일은 잘 하는지 다 기록해놓음. JSA 통역병 1차 면접 후에 조교 책상 위에 서류 보니까 보니까 전부 기록되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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