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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고 떠오른 잡념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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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치노, 헤라클레스와 안타이오스. 헤라클레스는 전무후무한 강자로 묘사된다>

 

헤라클레스는 힘의 화신이다. 일찌기 그보다 강했던 자는 없었고, 이후로도 헤라클레스는 강함의 정점이 되어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asss.jpg<호세 마누엘 펠릭스 막달레나, 아틀라스와 헤라클레스. 서로 자세를 봐주는 체육인들>

 

그는 모든 부분에서 뛰어났다 : 잘 생겼고, 용감했으며, 힘도 세고, 혈통까지 고귀했다. 머리도 비상했는데, 아틀라스를 속여 먹은 일화나 아우게이아스 임금의 축사를 치울 때 지략을 동원한 일화에서 짐작할 수있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특출난 능력을 발휘해 인간의 몸으로는 불가능한 여러 가지 위업들을 달성해 천하를 뒤흔들고, 비극적인 최후로 인간사에서 깔끔하게 퇴장함으로써 영웅의 대명사로 우뚝 선다.

 

당시 사람들에게 그의 삶은 참으로 귀감이 되었던 모양이다. 이후로 헤라클레스의 후예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계속 등장했거든. 도리아인들이 그러했고, 마케도니아인들도 그러했으며, 심지어는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인들조차 헤라클레스가 자신들의 시조라고 주장했다. 로마 시절에는 콤모두스 같은 황제가 아예 "나는 헤라클레스의 환생이다" 라며 대놓고 헤라클레스의 용맹을 모방했다. 고대인들에게 헤라클레스가 주는 임팩트는 이 정도로 거대하고, 또한 지역과 민족에 상관 없이 두루 통하는 구석이 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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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왕국 지도. 붉은 원은 미케네 3국이라 불리는 미케네, 아르고스, 티린스, 파란 원은 헤라클레스의 고향 테베이다>

 

그렇지만 모든 걸 다 가진 헤라클레스도 갖지 못한 것이 있다. 바로 아르골리스의 왕위이다. 헤라클레스는 이상하리만치 권좌와 거리가 먼데, 초인적인 피지컬로 모든 걸 해결했다던 헤라클레스가 왜 고향 땅 테베나 자신에게 권리가 있는 아르골리스를 차지하지 않은 것인지 의문이 남는다. 아르골리스의 왕좌는 항상 에우리스테우스, 자신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인물의 것이었다. 그리스인들도 이 부분은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헤라클레스를 위한 변명을 남겨두었다.

 

제우스가 곧 태어날 자신의 걸작을 과시하기 위해 신들에게 떠벌리기를, "이번에 태어날 페르세우스의 후손은 타고난 지배자일 것이오" 라고 했단다. 그게 자기 아들이 아닌 걸 아는 헤라는 제우스에게 일부러 "그게 정말입니까? 아직 나지도 않은 아이의 미래를 어찌 알 수 있습니까?" 하고 도발했고, 제우스가 흔쾌히 그 아이의 운명을 왕이 될 재목으로 못박아 두었다. 헤라는 곧 스테넬로스의 배냇 아이를 조산하게 만들어서 헤라클레스보다 먼저 태어나게 했으니, 그가 에우리스테우스이다.

 

물론 정말로 신들의 농간 때문에 그랬을 리는 만무하고, 그저 헤라클레스의 처지를 두고 세인들 간에 왈가왈부가 많았던 모양이다. 

 

여기서 질문 : 이렇게 완벽한 초인 헤라클레스는 어째서 왕이 될 수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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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안에 숨는 에우리스테우스. 쫄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이라 그런 거야>

 

먼저 헤라클레스라는 인간에 대한 환상부터 의심해보자. 신화의 내용이 사실이었다면 헤라클레스로서는 억울할 노릇이지. 그가 히드라의 맹독을 얻은 이후로는 신조차 모독하는 사상 최강의 영웅이 되었는데, 나약해 빠진 칠삭둥이 놈한테 굽신 거려야 했으니까. 헤라클레스는 말 그대로 신들을 모독했는데, 날씨가 덥다고 태양에 활을 겨눠 해를 지게 만들었고, 과업 때문에 바다를 건너야 했을 땐 물에 대고 활을 겨눠서 해결했다. 데이아네이라를 얻어가고자 할 땐 하신(河神) 아켈로오스를 두들겨 패서 뿔을 꺾어놨을 정도로 성미까지 더러웠다. 이렇듯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그대로 깽판을 놓는 헤라클레스가 에우리스테우스만은 어쩌지 못한 것이다. 

 

과연 헤라클레스가 에우리스테우스를 손대지 못 한 것이, 얇팍한 신탁 때문이었을까? 그는 아르카디아 연합군이 10년에 걸쳐 두드린 끝에야 겨우 열린 트로이의 성을 고작 1개 함대를 끌고와서 초토화시키고 프리아모스를 제외한 왕족을 모조리 주살해버렸다. 오죽하면 프리아모스의 이름이 그의 누이 헤시오네가 "내가 네 목을 샀다"고 속삭여 "팔린 놈"이란 뜻이었을까. 가혹한 정복자이자 폭력의 화신 같은 헤라클레스에게 에우리스테우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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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바예우 이 시비아스, 거인들의 몰락. 가운데의 제우스가 벼락을 내리꽂고 있고, 그 아래 사자가죽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곤봉을 휘두르고 있다>

 

그의 일대기는 놀라운 이야기 투성이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최후반부에서 드러난다. 히드라에게 중독되어 고통 끝에 사망한 헤라클레스가, 죽어서는 기간토마키아 대전에 참가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의 다른 모든 여정을 일종의 신화적 상징이거나 은유, 혹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가정해 보더라도 이것만은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죽은 사람이, 그것도 시간마저 거슬러 올라 과거의 대전쟁에서 향방을 가르는 중요한 일을 해냈다니. 그걸 누가 봤고, 어떻게 증명할 건데? 이는 당연히 후대의 창작이며, 영웅들에게 붙는 신화적 찬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왜 있잖아, 우리에게도 친숙한,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드시고 나뭇잎으로 강을 건너셨다는 분이. 설마, 헤라클레스가 말머리를 하고 식인을 일삼는 괴물을 퇴치했다던가, 지옥에 내려가서 머리 셋 달린 개를 완력으로 제압했다는 일화를 사실로 믿을 리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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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라와 헤라클레스가 그려진 도자기. 헤라클레스의 영광은 한 가정의 비극적인 파괴에서 비롯한다>

 

또 한 가지, 헤라클레스의 전성기도 어딘가 수상한 점이 발견된다. 분명 헤라클레스는 테베 왕 크레온이 공주까지 내려주며 부마로 삼아줬지 않나. 그 때, 헤라클레스의 신상에 이변이 발생한다. 헤라의 저주로 인한 광증이 도져, 처자식을 도살해 버리고 만 것이다. 심지어는 이복(동복) 형 이피클레스와 그 가족들마저 죽여버렸다. 이제 그는 테베에 있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는 델포이로 가서 정화 의식을 받고, 신탁을 통해 에우리스테우스를 섬기라는 계시를 얻었다. 그리고 우리가 익히 아는 12가지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기 시작한다.

 

이 때, 헤라클레스를 델포이까지 인도한 사람이 뜬금 없이 테세우스라고 나오는 판본이 있는가 하면, 아테나가 도와주었다는 기록도 있고, 헤라(!)가 직접 델포이로 갈 것을 권했다는 버전도 있다. 세 버전 모두 서사 상 모순되는데, 테세우스는 그 당시 애송이에 지나지 않아 아테네에 있지도 않았고, 아테나는 이 장면 이외에 한번도 나타나질 않으므로 덧붙여진 흔적일 뿐이며, 헤라의 강림은 병 주고 약 주는 식의 묘사이니 난해한 스토리로 변해버린다. 즉, 헤라클레스가 과업을 수여 받고 실천하는 장면의 드라마틱한 전개는 역시 창작이란 뜻이다.

 

 

정리하자면 신에 필적하는 그의 이적들은 분명 지나친 과장이다. 그렇다면 누가 주도한 행위인지를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헤라클레스의 과분한 능력과 믿을 수 없는 업적을 대대적으로 홍보해 그의 권위를 높여주고, 이를 이용해야 하는 세력 말이다. 또한 이를 이용할 수 밖에 없는 그들만의 이유도 찾아봐야 한다. 헤라클레스의 후손을 자처하는 도리아인이 가장 유력한 후보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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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의 헤라 석상. 헤라의 신성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로마에서도 그녀를 대신으로 모셨다>

 

아니, 나는 오히려 미케네인을 의심한다. 미케네의 지정학적 위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중심부, 아르골리스가 아니던가.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전통적으로 헤라 신앙이 강했던 땅이다. 이 땅 위의 신화 대부분은 헤라가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바로 모계 중심 사회의 깊은 뿌리 때문이다. 헤라는 순결의 샘 카나토스에서 몸을 정결히 함으로써 언제든지 자신의 처녀성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이에 따라 가정을 지키는 주부와 새로운 가족을 양산할 숙녀로의 자유로운 변신이 가능했던 전능한 여군주였다. 

 

헤라를 모시는 미케네인들의 자부심의 발로가 곧 헤라클레스 신화 곳곳에서 엿보인다. 멀쩡한 헤라클레스의 인생을 망친 자는 누구인가? 헤라다. 보잘 것 없는 에우리스테우스를 비호하는 자는 누구인가? 헤라다. 헤라클레스에게 갖은 고역을 내리는 자는 누구인가? 헤라다. 결국, 헤라클레스 신화는 시종일관 여신 헤라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 그리고 바로 그 헤라의 안배로 헤라클레스라는 불세출의 영웅을 다스리는 유일무이한 인간이 에우리스테우스, 아르골리스의 왕이다. 이러한 신화적 서사는 자연히 미케네인들의 국뽕을 자극한다. 대영웅 헤라클레스도 우리 왕 앞에 조아린다 ! 이로써 미케네의 입지는 흡사 항우를 얻은 유방, 여포를 얻은 조조를 방불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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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루이 라미, 암피트리온. 마누라가 신을 팔아먹으며 남의 집 씨를 받아왔다는데, 도통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헤라클레스 본인을 분육(賁育)에 비할 수 있었을까? 물론이지 : 헤라클레스의 가문은 무골 집안이다. 그의 아버지 암피트리온은 미케네의 원수 프테렐라오스를 쳐부수고, 엘렉트리온도 죽이고, 망명국 테베를 위해 전쟁을 수행했던 장수다. 헤라클레스 본인도 오르코메노스의 침공에 맞서 적국 에르기노스 왕을 주살하고 매년 소 200마리를 바치게 만드는 등, 용맹과 능력을 증명한 바 있다. 소가 많았다는 아우게이아스 왕의 축사를 청소할 때 강을 끌어와서 해결했다는 일화는 마치 관우가 번성을 깨뜨릴 때 수공을 가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소는 당시 그리스인들이 국력을 나타낼 때 쓰던 단위이니, 헤라클레스도 한신과 관우처럼 수공을 쓴 건 아닐까. 헤라클레스가 젊을 적 사람을 잘 죽였다는데, 그가 양민이었으면 진작에 마을 단위로 몰려와서 요절이 났을테지만 그러고도 무사히 자랐으니 그가 나름 유복하게 자랐음을 시사한다. 즉, 그는 엘리트 계층들이 향유한 군사학, 전략 및 전술학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헤라클레스의 진정한 실체는 아버지를 닮아 테베에서 이름 날린 용장 정도였을 것이다.

 

문제는 그 놈의 성질머리인데, 리라 못 켠다고 혼 낸 스승을 리라로 때려죽이질 않나, 처자식을 살해하질 않나, 죄 없는 이피토스를 죽이질 않나, 마치 사이코패스 같은 기질을 내비친다. 신화에서 헤라의 광증으로 포장된 이 면모는 어쩌면 헤라클레스의 성격적 결함일 수도 있고, 진짜 정신병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헤라의 저주로 묘사된 점에 의의를 둘 수 있겠다.

 

왜냐하면 헤라클레스는 그 정도로 놓치기에 아까운 인재였거든.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는 망나니 같은 인간이지만, 헤라클레스는 필경 유능했을 것이다. 당시 테베는 페니키아계 인사들이 이주해 설립한 국가로, 타 왕국에 비하면 선진적인 문물을 자랑한 곳이다. 헤라클레스가 오리엔트의 심원한 지식과 기술 등을 테베에서 접할 기회가 있었거나, 테베식 군사 제도에 깊은 이해가 있었다면 미케네에서 각광 받을만도 했겠지. 그러므로 헤라클레스가 귀부해 올 적에, 그의 허물을 덮어주기 위해 "그가 사람을 죽인 것은 헤라 여신의 뜻이었다" 정도로 실드를 쳐줬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임금이 직접 나서서 여신의 이름으로 그의 죄를 사해 주는데, 어느 누가 감히 이견을 말하겠는가. 그의 아버지가 반역 혐의로 추방되었던 전적을 고려할 때, 이렇게나마 그 자손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대우가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만큼 헤라클레스가 높은 가치를 지닌 인재였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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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세우스 가계도. 관련 없는 인물은 생략했다. 헤라클레스의 명예를 위해 제우스를 따로 넣었다>

 

헤라클레스의 가계를 살펴보면 그가 왕위와 별로 인연이 없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의 친부를 제우스로 두려는 신화적 찬양을 배제하고 볼 때, 헤라클레스는 암피트리온과 알크메네의 아들이다. 페르세우스의 사후 알카이오스가 미케네, 아르고스, 티린스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가 요절하면서 동생 엘렉트리온이 왕위를 잇는다. 이러한 왕위 계승을 문제 삼은 프테렐라오스가 미케네를 침공해, 엘렉트리온의 여섯 아들이 전사하고 소 3백 마리까지 강탈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엘렉트리온은 자신의 조카이자 알카이오스의 아들인 암피트리온에게 소를 되찾아올 것을 명했는데, 그는 테살리아 왕이 그 소들을 사갔다는 말을 듣고서 값을 치룬 후 소들을 끌고 왔다. 엘렉트리온은 "장물을 돈 주고 찾아 오는 놈이 어딨느냐"며 격분했다. 마찬가지로 개빡친 암피트리온은 홧김에 원반을 땅에 집어 던졌는데, 거기에 맞은 엘렉트리온이 뒤져버렸다(!!!). 이를 본 엘렉트리온의 동생 스테넬로스가 암피트리온을 살인자로 몰아 추방형을 내리고, 아르골리스의 왕위를 차지한다. 암피트리온은 테베로 도망치면서 엘렉트리온의 딸 알크메네를 데려갔고, 두 사람이 낳은 아들이 이피클레스와 헤라클레스이다.

 

당시 미케네 3국의 정계가 이렇듯 형제지간의 골육상잔도 불사할 정도로 혼란했다면, 부모가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몰락해버린 헤라클레스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는 외할아버지의 살인자로 낙인 찍혀 아르골리스에는 발도 들일 수 없는 상황. 헤라클레스가 혈혈단신으로 왕위에 도전한들 아무도 그를 지지해주지 않을 것은 뻔했다. 반면 스테넬로스는 암피트리온을 몰아내고 자신의 입지를 다진 끝에 아들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무사히 권좌를 물려줄 수 있었다. 이것이 헤라클레스를 받아들인 에우리스테우스의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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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의 과업이 이뤄진 장소들.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물론이고, 페니키아인들의 식민지까지 두루 침범한 흔적이 보인다>
 

미케네에서의 헤라클레스는 그야말로 날아다닌 모양이다. 그의 신화에서 등장하는 야수들이 위치한 곳은 대체로 아르골리스 인근 지방이다. 이들을 해당 지역의 토호 및 지배자들이라고 볼 때, 헤라클레스는 미케네의 안정화를 위해 분골쇄신한 전쟁의 명수였던 셈이다. 이렇듯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여 국위 쇄신에 이바지한 대장군을 미케네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당연지사. 그를 향한 미사여구가 얼마든지 붙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를 뇌신의 아들로 호도하고 신의 시련을 이겨내고 영광을 차지한 영웅으로 띄우는 찬양의 이면에는, 바로 그 영웅이 우리 편이며 우리 나라는 진정코 위대한 대국임을 선언하는 심리가 숨어있다. 문무왕이 죽어서 해신(海神)으로 민간에서 모셔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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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아인의 남하 사건. 이제 이 새끼들이 파괴한 사료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진짜 문제는 도리아인의 도래 이후. 헤라클레스라는 인물이 매우 성공적으로 광고되었는지, 그를 향한 빠심이 범국민적이게 발견된다. 때문에 제우스에게 그러했듯, 다양한 민족들이 스스로 헤라클레스의 후예를 자처하고 나선다. 특히 도리아인들은 아예 아르골리스의 정당한 계승권을 가진 힐로스를 들먹이며 미케네와 아르고스, 티린스 3국을 자신들이 차지해야 한다는 프로파간다로 써먹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 헤라클레스와 데이아네이라 사이에서 난 힐로스는 도리아인에게 신세를 의탁한 것에 불과했고, 도리아인과 헤라클레스는 혈연관계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저 도리아인 집단을 이끈 지배 계층이 헤라클레스 가계라는 주장은 있지만, 여하튼 도리아인과는 무관한 거잖아. 그러나 향후 도리아인들이 지배하게 된 왕국에서는 저마다 자신들이 헤라클레스의 피를 이었다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우리의 열등감 폭발하는 콩라인 아테네는 이걸 좌시할 수 없어서, 테세우스의 활약상을 어떻게든 끼워넣는 한편 그 자신들의 스타 플레이어인 테세우스 홍보에 여념이 없었다. 후대에는 헤라클레스를 깎아 내리는 작업도 병행했는데, 아리스토파네스의 「새」 같은 희극에서는 새 따위를 못 이겨서 그들에게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멍청이로 묘사되고, 여러 비극 작품에서 자기 손으로 가족을 죽이는 강상패륜 대역죄인으로 등장한다. 하긴, 특히나 숙적인 도리아인들이 그렇게 덕질해 마지않은 헤라클레스가 못마땅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라클레스를 향한 민중들의 사랑과 열광은 변치 않아서, 그는 죽어서도 우리 세상을 위해 승리를 쟁취한 영웅으로 그려졌다. 어쩌면 적대적인 환경과 전쟁이 연일 벌어지는 고대 그리스의 삶 속에서, 항구적인 평화를 바라던 백성들의 바람이 한 인간의 몸을 빌어 응집된 형태가 헤라클레스 신화로 나타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글에도 문제가 많지만, 대략 일곱 가지 문제가 있다 :

 

1. 어디까지나 신화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 신화를 취사 선택한 것과 취사 해석한 문제로 진실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2. 의외로 소탈한 인물이었을지도 모른다 - 헤라클레스가 꼭 입신양명을 지향하는 인물이 아니었다면, 굳이 왕위에 도전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곤봉을 훔친 도둑들과 농담따먹기 하다가 껄껄 웃으며 그들을 놓아주었다는 전승이 있을 정도이니, 털털한 인물이었을지도?

3. 어디까지가 과장인지는 알 수 없다 - 만일 헤라클레스가 정말로 초인적인 힘과 지략을 가졌고, 몇 몇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ex : 머리 아홉 달린 이무기, 사람 잡아 먹는 반인반마를 사냥한 일화 등)를 제외한 나머지가 실화라면 나의 추측은 허구가 된다. 

4. 테베가 선진국이지, 테베인이 선진적인 건 아니다 - 테베를 세운 페니키아계 인물들이 이집트로부터 여러가지 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은 맞지만, 그것이 당대 그리스에 비해 얼마나 뛰어났을지는 알 수 없다. 또한 지배계층만이 향유했을 가능성이 높고, 헤라클레스가 이를 접했을지는 미지수다. 즉, 헤라클레스가 장수였다기 보단 용력이 뛰어난 전사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5. 헤라클레스는 실존인물이다 - 나는 헤라클레스를 허구의 인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영웅담은 대체로 허구라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마틴 버낼 교수의 「블랙 아테나」에서는 헤라클레스가 이집트계 이주민의 후예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의 신이 이집트에 존재하기 때문이란다. 암피트리온 등은 이집트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이고, 그 아들 중 한 명이 위업을 남기고 스스로를 헤라클레스라 자칭했다는 것. 실제로 헤라클레스의 본명을 알키데스(알카이오스의 후예라는 뜻)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헤라클레스 신화가 본래 알키데스 영웅기나 알키데스 + 이집트 도래인들의 연대기를 의미하는 거라는 주장도 있다.

6. 미케네인이 날조했다는 증거는 없다 - 헤라클레스의 이야기를 꼭 특정 왕국에 친화적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이는 헤라클레스가 후일 그리스 전역에서 민중친화적인 영웅으로 칭송받게 되었기 때문이고, 그 이전의 모습을 유추하긴 힘들기 때문이다. 

7. 증거가 부족하다 - 신화에 기반한 뇌피셜이다보니 이렇다 할 증빙 자료는 없다. 위의 여섯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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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낭비하게 해서 미안

12개의 댓글

2019.04.13

늘 좋은 글 고마워용!

1
@불타는 수염

이번에도 좀 늦었군요, 늘 고마워요 :)

1
2019.04.13
@한그르데아이사쯔

아조씨 정말 책 안낼고야? (기대)

1
@불타는 수염

전공하시는 분들한테 민폐될 만큼 뇌피셜인지라..ㅋㅋㅋㅋㅋㅋ 읽판에서 즐겨주세요 :)

1
2019.04.13
@한그르데아이사쯔

(시무룩)

1
@불타는 수염

;)

1

헤라클레스에 대한 여러가지 재해석이 이뤄지는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카연갤 찔X이 작품의 헤라클레스야ㅋㅋㅋㅋ 개꿀잼!

0
2019.04.13

도리아인의 남하하다 자기들 거주지를 개척하면서 멧돼지, 사자, 뱀(히드라)로부터의 위협

 

다른 나라에서 교역이나 약탈해 소나 말을 얻거나, 야생동물을 가축화 시키면서 식인말을 생포하는 이야기가 만들어짐

 

마구간 청소하는건 인구가 늘어나면서 생기는 위생문제해결의 이야기

 

식인괴조를 사자가죽, 히드라독화살, 청동방패로 무찌른 이야기는 새를 숭배하는 원주민을 나름 문명화된 도리아인들이 지배하는 내용

 

아마조네스는 모계사회 원주민을 지배함

 

아틀라스의 황금사과, 하데스의 케로베로스 이야기는 지진, 홍수같은 하늘땅의 천재지변으로부터의 두려움을 줄여주는 목적으로 만들어짐

1
@쎾스킹

실은 이런 식의 해석이 자연스럽지 :)

0
2019.04.13

프로메테우스를 풀어준 것에도 맥락이 있었을까요? 이번 글도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그리고 혹시 다음웹툰 카산드라 보셨나요? 재밌습니다 ㅋㅋ

1
2019.04.13
@재롱이
1
@재롱이

숱한 헤라클레스 찬양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최후를 예견했고 인간에게 불을 준 죄인인데, 제우스의 아들이 그를 구해주는 건 아버지를 역성 드는 일인데도 신화로 남았으니까요. 카산드라라는 웹툰은 아직 못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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