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요란한 빈 수레의 삶

u-g-P90WV70.jpg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구(孔丘), 중니(仲尼). 동양철학의 정수로 여겨지는 유학의 시조이다. 경의를 담아 공자라 일컫는다>

 

인간의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뭘까? 단언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후보군에 반드시 포함될 것이 무엇인지는 알겠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소중히 위하는 마음"으로, 다양한 시적 표현들과의 공통점을 요약하면 "계속 생각하는 마음"이라 하겠다. 인간이 살면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던가. 그런데도 시도 때도 없이 자꾸만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다면, 우리는 그걸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인간은 참으로 많은 것들에 사랑을 느낀다 : 가족과 연인, 꿈과 취미, 사상과 종교, 직장과 나라, 그 밖의 것들을 사랑하질 않나. 인간은 숫제 사랑을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뭐, 자신은 다르다고? 사랑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공자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다. 그는 "인(仁)"이라는 가치를 강조하며, 사람의 본성은 인이므로 군자는 매사에 인하려는 노력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인을 사랑이라고 해석해도 무리는 없다. 비록 공자는 인을 정의한 적은 없으나, 인이 사랑을 뜻함은 명백히 알 수 있다 : 사랑이 연인에게 미치면 애(愛)가 되고, 부모에게 미치면 효(孝)가 되며, 나라에 미치면 충(忠)이 되고, 백성에 미치면 혜(惠)가 된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며 충 · 효 등등이 인의 일부를 이룬다고 했으니 인은 곧 사랑인 것이다 !

 

그러나 인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뜻하진 않는다 : 논어 선진(先進)편에서 명고이공(鳴鼓而攻)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북을 울려 놈을 쳐라"는 의미다. 염구(冉求)라는 공자의 제자가 노나라의 대부를 살던 계강자(季康子) 밑에 출사했을 적에, 백성들에게 중과세를 매겨 착취한 재물을 바친 일이 있었다. 당시 계강자는 이미 노의 임금보다도 부자였다고 하니 염구가 지나쳤던 셈. 공자는 개빡쳐서 염구의 비행을 힐난하며 제자들에게 북을 울려 성토할 것을 당부했다. 인을 떠받든 공자조차도 불의한 자는 품어주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이는 인의 개념이 선하고 바른 것에 대한 사랑임과 동시에, 악하고 추한 것을 향한 미움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인이란 분별력 있는 사랑이다. 
 

애석하게도 공자가 인본주의(仁本主義)를 외치며 천하를 주유하던 시절은, 인이라는 가치가 땅에 떨어졌던 춘추 시대다. 중화 대륙이 15개 봉국과 100 여 개의 소국으로 나뉜 혼란기에 그 누가 사리분별을 할 수 있었을까. 군주들은 부국강병만을 추구하며 가혹하게 백성들을 수탈했고, 신민들은 살아남는데 급급해 정(正), 역(逆)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과거 역아(易牙)는 "나는 세상의 모든 고기를 다 맛 봤소." 하는 제 환공에게 이 고기는 처음일 것이라며 자기 아들을 죽여서 바쳤고, 수초(竪貂)는 제 환공을 항상 가까이서 모시고 싶다며 스스로 거세하여 환관으로 입궁하기까지 했다. 이들의 행실은 당시 사람들이 지성으로 추구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만, 세상이 역아와 수초 같은 놈들을 본받으면 제 한 몸의 출세를 위해 천륜을 저버리고, 틈만 나면 남의 통수를 치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병탄하고, 이(利)를 보면 아귀처럼 달려드는 무리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천하에 옳고 그름이 없이 강약의 형세만 존재한다면 짐승과 인간을 무슨 수로 구분한단 말인가. 공자는 이처럼 기회주의자들이 득세하여 인의 정신을 훼손하고, 인간성이라는 최후의 질서 마저 상실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인의 실천에 대한 가르침을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 남겼다 : 제자 단목사(端木賜)가 인에 관해 평생 한 가지만 기억해야 한다면 무엇이 좋겠느냐고 묻자, 공자는 "서(恕) 이니라." 라고 답했다. 서는 용서할 때의 서 자로, 자신으로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것을 뜻한다. 공자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 했으니, 곧 내가 받고 싶은대로 남에게 주고, 내게 싫은 짓을 남에게도 하지 말라는 의미다.

 

as.jpg

 

<신 황제 왕망(王莽), 거군(巨君). 그는 중화 역사상 최초의 찬탈자로 이름을 남긴다>

 

왕망은 전한 말기에 등장한 권신으로, 비슷한 행실을 보인 동탁, 조조, 사마의와 더불어 "망탁조의"로 묶이곤 한다. 네 사람의 공통점은 바로 역적이었다는 것인데, 왕망은 시기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첫머리에 기념할 만 하다. 이 놈은 살아서 황제가 된 진짜 역적이거든.

 

왕망에게는 항상 고아한 명성이 뒤따랐는데, 그의 겸손하고 삼가는 태도 덕분이었다. 출세하기 전의 왕망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 가난했는데, 요절한 형을 대신하여 형수와 조카를 정성껏 건사했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궐에 들어 황문랑(= 황제 직속 비서)으로 관직 커리어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사람들을 존중하고 일 처리를 잘 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마침내 높은 자리까지 올랐음에도 집안 단속을 더욱 철저히 해서, 집에 놀러온 귀부인들이 대접하러 나온 왕망의 처를 보고 계집종으로 오해했을 지경으로 남에게 극진했다고 한다. 왕망은 관직이 계속 올라 상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고 딸까지 황제에게 시집 보내 국구가 되는 영광을 누리는데, 그의 치세에 태평성대가 이뤄져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도 줍는 이가 없다고 할 정도였다고.

 

하지만 왕망의 이러한 평판은 모두 그의 위선에서 비롯한 허명에 불과했다 : 왕망은 일찌기 자신이 거두었던 형의 식솔들을 애지중지 해서 아내가 한 소리 할 정도였지만, 정작 후일 자신의 명성에 누를 끼쳤다는 이유로 모두 목을 매어 죽도록 명했다. 그가 진심으로 힘든 시기를 버텨가며 이들을 돌봤는지도 알 수 없는데, 전한 말의 원성 왕씨는 효원황후 왕정군과 대장군 왕봉을 비롯해 수많은 열후를 배출한 외척이었기 때문이다. 왕정군은 한 성제(成帝) 유오가 등극하면서 황태후에 오르니, 이 때를 기해 조정의 고관대작은 모두 왕씨 가문이 차지했다. 성제는 B.C. 33년에 황위를 이었고, 왕망은 B.C. 45년에 태어났으므로, 왕망이 중학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원성 왕씨 집안은 고귀해져 있었단 말씀이다.

 

대사마 왕근이 병을 이유로 사직할 적에, 그 후임으로 순우장과 왕망이 거론됐던 바 있다. 순우장으로 말하자면 왕망과 권력을 다투었던 라이벌 관계로, 황후들을 주물러 막후에서 활약한 실세였다. 성제는 조비연이라는 궁인을 총애하여 본처였던 허 황후를 밀어내고 그녀를 맞이하려 했는데, 순우장이 이 일을 성사시켰다. 당초 황태후로 물러난 왕정군은 법도에 맞지 않게 천한 조비연을 싫어했는데, 순우장이 1년 내내 태후를 찾아뵈며 설득한 끝에서야 겨우 허락을 얻었다고 한다. 순우장에 대한 성제의 신임도 대단히 높을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순우장이 왕망의 사촌동생이었다는 점. 골육 간의 정리가 무색하게, 왕망은 순우장이 허 황후의 언니와 사통하면서 폐위된 허 황후를 복위하려고 꾀했다며 맹공을 가한다. 그 바람에 순우장은 옥중에서 사망했고, 대사마는 왕망이 챙겨갔다.

 

3년 뒤, 그렇게 순우장을 재끼고 얻어낸 자리에서 쫓겨나는데, 새로이 등극한 애제(哀帝)가 또 다른 척신 세력을 만들려는 움직임에 반발하다가 유배를 당했기 때문이다. 애제는 후계가 없었던 성제의 조카로 소의 부씨의 손자이자 정희 정씨의 아들인데, 효원황후 왕씨에게 밀려나 설움이 가득했던 부씨는 자기 일족을 조정에 들이려고 혈안이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왕씨 세력이 왕망을 필두로 압박을 가했지만 소용이 없어, 부씨는 황태태후(皇太太后), 정씨는 황태후에 봉해지는 것으로 결판이 났다. 그러자 왕망은 도당에 복귀하기 위해 묘수를 두는데 이것이 기가 막힌다 : 부덕한 짓을 했다는 이유로 자기 친아들을 자결하게 한 것. 이로 인해 전 중국이 울면서 "왕망은 참선비다"라는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 그 동정표를 활용해 왕망이 대사마로 복직할 수 있었다.

 

애제도 성제처럼 자손 없이 죽었지만, 왕망이 여덟 살짜리를 데려와 용상에 앉히니 그가 평제(平帝)다. 왕망은 이미 정권을 장악해 궐 내외로 권세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고, 억만 금을 풀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칭송하는 소를 올리게 했다. 왕망이 능신이어서 천하가 태평해졌다는 말은 사실, 왕망이 돈으로 산 것이나 다름 없었다. 오히려 이 시절의 전한은 가뭄과 한재, 메뚜기 떼의 창궐 등 갖은 재해를 맞아 민심이 크게 위태로웠는데, 태평성대가 웬 말인가. 한서(漢書)에 따르면 왕망이 청주의 신민들이 터를 잃고 유랑한다는 소식을 듣자 금 1 백만 전, 땅 30 경을 풀었고 이에 감복한 사람 200 여 명이 덩달아 기부 행렬에 동참했단다. 1 백만 전을 내놓았다는 것 자체가 그의 부귀를 짐작케 하는데, 이로써 위명을 떨칠 수 있었으니 싼 값에 정통성을 산 셈이다.

 

하지만 천성이 소인배였던 왕망은 내친 김에 더욱 위를 노리게 된다. 그는 애제 때의 일을 거울 삼아, 평제의 외갓댁을 박살 내고 궐 안에 결코 들이지 않았다. 평제가 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자, 마침내 왕망은 황제까지 독살하고는 보위를 찬탈, 아버지의 작호 신도후(新都侯)를 이어 "신(新)" 나라를 개창하기에 이른다. 아직 살아 있었던 왕정군은 비록 일족이긴 하나 탐욕이 극심한 왕망을 꾸짖으며 여생토록 책망했다고 한다. 이렇듯 왕망은 본성을 감춘 채 명성을 구하는데 탁월했고, 종래에는 나라를 훔쳐낼 수 있었다.

 

그러나 왕망은 나라 이름으로 새로울 신 자를 써놓고, 국책은 정작 케케 묵은 700년 전의 서주(西周) 것을 따랐다 : 신은 전국의 토지를 몰수해 국유화한 다음 정전제를 실시했고, 노예제를 폐지하여 이들을 일거에 해방시켰다. 또한 오균육관(五均六管)이라 하여, 정부 주도 대부업 + 여섯가지 품목에 대한 전매 제도를 실시해 시장에 적극 개입했다. 화폐 개혁은 무려 다섯 번이나 행해져서, 번다하기만 한 잡돈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한다. 이웃 나라들은 주 왕실의 법통에 준하여, 왕국은 모두 제후국으로 낮추어 칭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고(高) 자를 깎아서 하구려(下句麗)라 부르게 했고, 고구려 왕 또한 하구려후(侯)로 일컬었다고.

 

행정적으로는 쓸 데 없이 유학을 국시로 삼고자 사소한 것조차 일일이 경전에 맞추어 행했다. 지리, 예악에 관한 문서들을 정비하고 오경을 재작성하게 해서, 가뜩이나 새 나라 · 새 정책으로 바빠 죽을 공경대신들이 쓸 데 없는 허례허식의 고안에 투입됐다. 그리고 왕망은 "공무원을 15계급으로 나누고 봉록을 세밀하게 차등 지급하겠다." 라더니 관리들의 녹봉을 지나치도록 잡스럽게 책정한 바람에, 계산하기 어려워서 일절 지급하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기왕에 출사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생계형 탐관오리로 전락할 따름이었다. 상기한 모든 치적들은 왕망이 이상 세계라고 생각했던 주나라 시절의 도를 추구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건들이다.

 

이러니 나라 안 팎으로 사단이 날 수 밖에. 흉노를 시작으로 고구려, 구정, 서역, 토하라인들까지 신에 반기를 들었는데, 왕망은 이들을 제압할 방법이 없어서 수시로 털렸다. 뿐만 아니라 유현, 공손술, 왕랑 등의 군벌이 난립했고, 적미군과 녹림군 등 도적떼가 크게 횡행해 내환도 끊이질 않았다. 하필 이 때 황하까지 자주 범람해서, 하늘도 신을 돕지 않았다. 결국 곤양대전에서 3천 명의 유수군에게 40만 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으면서 왕망은 완전히 몰락했다. 수도까지 위기에 처하자 왕망은 하늘에 탄원한다며 매일 같이 제사를 지내고, 굿이나 벌였지만 상황이 나아질 턱이 없었다. 끝내 부하들에게 배신 당해 목이 떨어졌고,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달려들어 시체마저 갈기갈기 찢어갔다. 이로써 신 역시 멸망하고 말았다.

 

일부에선 왕망의 행보를 놓고 그가 사회주의적 제도를 고안한 천재라고도 평한다 : 특히 오균육관법은 나라에서 시장의 물가를 통제하고, 과잉 생산된 물품은 국비로 사들이며, 고리대금업자를 엄단하는 동시에 정해진 금리로 나라에서 돈을 빌려주고, 토지개간이나 장례에 필요한 돈 등의 생활비 일부를 제공하도록 하는 법이었다. 하지만 왕망을 사회주의자로 평가하는 것은 1980년대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견해로, 이전까진 신나라의 역사를 인정조차 않던 학통에 반하고 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구태여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더구나 왕망이 진심으로 덕치를 추구했더라면, 감히 권좌를 탐하고 자식들까지 주살한 이유는 무엇인가? 허명을 목숨처럼 여긴 자에게 시대를 앞서 갔다는 말은 과분할 뿐이다.

 

79fdba5b0a6227b3536a83f6ff7ae56bed07810a5704d7b12b9d7896e33bf108b83ab27fad3c92855b9e358f1c949a3482d30a674ef2367abb8de8d73de.jpg

 

<Koei 作, 삼국지 12의 등장인물 위후 오질(吳質), 계중(季重). 문장이 오질 났다고 한다. 마땅한 화상이 없어 게임 일러스트로 대체>

 

오질도 가난한 집 태생이다. 그는 왕망과 달리 끗발 날려주는 친척도 하나 없었다. 그러나 야심까지 없진 않았는지, 젊은 시절부터 지체 높으신 분들 댁의 문턱을 넘으며 교류했다. 그 덕에 학문에 통달하고 글재주가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었고, 조비가 수레에 태워와서 임관할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그런 오질을 고향 사람들은 선비라고 불러주지 않았으니, 고관대작들 꽁무니만 쫓아다니던 행실 때문이었단다.

 

조비라는 기회를 잡은 오질은 중요한 순간에 제대로 활약해 주었다. 당시 조비의 최대 고민거리는 동생 조식이었는데, 후계자 싸움의 상대였기 때문이다. 조조는 대통을 이을 아들 가운데 조식을 유달리 총애해서, 가히 드러내놓고 조식을 아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는 장남인 조비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오질은 그런 조비의 꾀주머니로서 많은 조언을 전했다. 「위서 - 오질전」에 따르면 조조의 출정식 날, 조식이 특유의 시적 감각을 살려 삼군을 빛내는 명시를 읊었지만, 조비는 펑펑 울어서 조조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이는 오질의 계책이었다고 쓰여있다.

 

조비가 오질에게서 대책을 묻기 위해 대나무 궤짝을 이용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 당시 오질의 임지는 외방이었는데, 조비는 비단을 싣는 궤짝에 그를 숨겨서 몰래 입궁시킨 다음 매양 책략을 논의했다. 이를 간파한 조식의 참모 양수는 조조에게 고자질하며, "조비가 사사로이 관리를 빼돌렸다 하는데, 그 비단 수레를 조사해보시면 아실 겁니다." 라고 공격했다. 조비가 걱정하자 오질은 "다음 번엔 진짜로 비단을 실어 오시면 됩니다." 라고 조언했다. 아니나 다를까, 벼르고 있던 조조가 조비의 궁으로 가는 수레를 털었으나 비단만 들어있자 양수를 못 미더워 했다고 한다.

 

이처럼 오질은 조비를 세자에 앉히기 위해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결국 조비가 위문제에 오를 수 있었다. 오질이 황제로부터 극진한 구애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는 북중랑장(= 근위대장)과 사지절독유병제군사(= 2천석 이하 관리 생사 여탈권 + 유주 & 병주 군무 총괄)의 직책을 얻었고, 조비가 황후까지 술자리에 데려와서 보여주는 등 돈독한 관계를 과시했다.

 

그런데 조비 코인이 떡상하자 자신감에 찬 것일까? 오질은 기껏 높은 자리에 앉더니 망발을 일삼기 시작했다. 독유병제군사로서의 오질은 당연히 유주의 군무를 장악했는데, 당시 유주자사 최림이 자신에게 사례하러 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좌천시켜 버렸다. 이로 인해 청렴한 선비들이 오질을 쓰레기 취급했다고 한다.

 

224년, 조비는 상장군 이하(즉, 오질과 동급) 모두를 오질의 집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토록 했는데, 여기서 오질이 흥을 돋운다고 광대들을 초대했더랬다. 이 때, 광대들이 가무를 뽐냈는데, 내용이 가관이다 : 오질은 일부러 뚱뚱한 사람과 야윈 사람을 뽑아 와서는 서로의 장단점을 두고 희롱하는 연극을 벌이게 했다. 이게 문제되는 까닭은, 당시 연회에 참여한 사람 중 조진은 풍체가 비만했고 주삭은 말라깽이였기 때문. 두 사람은 오질과 함께 황제의 총신으로 손꼽히는 자들인데, 오질이 먼저 이들을 자극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모욕을 준 셈이다. 

 

결국 참다 못한 조진이 붉으락푸르락 해진 얼굴로 발검한 채로 외쳤다 : "나는 대위의 장군이다! 네 놈의 일개 사졸이 아니란 말이다!" 그랬더니 오질 역시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받아쳤다 : "조 자단(= 子丹. 조진의 字), 상 위의 고기 같은 자여. 오질은 너를 통째로 삼켜도 이 하나 흔들리지 않고, 목구멍도 떨리지 않도다. 감히 권세를 믿고 교만하게 구느냐?" 이러고는 코웃음을 쳐대니 연회장 분위기가 얼음장 같이 냉랭해진다. 그나마 동렬인 주삭이 둘을 말리려 들었지만, 그 또한 오질에게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더니 마찬가지로 칼을 뽑아 바닥을 찍고는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를 후원해주던 조비마저 죽자, 누구도 오질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초조해진 오질은 새롭게 군주가 된 조예 앞에서 뜬금없이 진군을 열심히 헐뜯었다. 오질은 "사마의의 재주가 특출나므로 그를 중용하셔야 합니다. 진군은 허울 뿐이므로 가까이 하셔서는 안 됩니다."라고 진언했다. 구품관인법을 만든 진군에게 허울 뿐이라는 평을 내리다니, 제정신인가? 이 때문에 황제가 진군을 문책했다가 조야의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변호해주었다. 오히려 오질이야말로 비루한 사람이라는 반박도 뒤따랐다.

 

오질에 대한 평가가 오죽이나 별 볼 일 없었으면, 동오의 호종이라는 사람은 오질을 이용해 이간계까지 구사했다. 그는 오질이 손권을 향해 폐하라고 칭하고, 위 조정에서 연일 벌어지는 사건들의 배후에 오질이 개입한 것처럼 날조한 편지를 세 통이나 뿌렸다. 그것이 통하진 않았으나, 오질의 위상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다.

 

오질이 죽고나서 받은 시호는 "추(醜)"였다. 그 뜻은 "권세에 기대어 함부로 날뜀"이니, 참으로 오질의 삶에 부합한다. 아들인 오응이 항의해서 겨우 "위(威)"로 바꾸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영전에 존경을 다 할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cf99b08cb24565a0ca86e5588fe0ab7c.jpg

 

<경북 안산의 순흥군 묘비. 조부와 부친이 신도비까지 닦아둔 대묘인 것과 달리, 김경징의 묘는 단촐하기 그지 없다>

 

김류의 아들 김경징은 인조 반정에 참가한 공으로 정사공신 2등에 배석되었다. 광해군 연간에는 음서로 역마나 담당하는 찰방이었다가 문관으로 출사한다. 이후 인조 정권에서 승승장구하여 도승지(= 대통령비서실장)까지 오르는 삶을 살았다.

 

김경징은 광해군이 폐서인 되고도 탈출을 감행하려던 그의 아들을 미연에 붙잡는 공을 세운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인조가 왕실의 세금을 면해주는데 대한 비판도 제기했으며, 인목왕후 폐모론에 동조한 사람들이 버젓이 관직에 남은 작태를 지적하며 정권의 안정에 기여했다. 김류와 마찬가지로, 호란 초기에 파천부터 논하는 관리들에게 일갈하며 싸움 한 번 안 해보고 도망갈 수는 없다는 주전론을 폈다. 이렇게 보면 김경징이 가슴 뜨거운 충신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김경징의 실체는 그저 아비 잘 둔 귀공자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김류의 위세가 두려워 김경징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못 했는데, 인조실록 첫 권부터 벌써 그러한 정황을 엿볼 수 있다 : 광해군 시절에 행해진 과거 시험장은 부패의 온상이어서, 시험관이 문제를 유출하질 않나, 명문 자제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니질 않나, 권세를 저울질 하여 당락에 반영하질 않나, 개판 그 자체였다. 때문에 반정 이후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이 시기를 즈음해 관리가 된 사람들은 모두 쫓아내도록 간한다. 그런데 김경징도 광해군 때 관리가 된 자 아닌가? 사람들은 김류의 아들을 살려보기 위해, "아, 다시 생각해보니 부정행위를 저지른 사람만 골라내고, 나머진 그대로 둬도 될 것 같은데요." 라고 말을 바꾸었다. 이로 인해 김경징은 최종적으로 면접만 보고 문과에 급제할 수 있었다. 인조실록에서는 이 일을 두고, "새 조정을 맞아 첫 행사부터 구차함이 이러하니, 식자들은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을 것을 알았다" 라고 신랄하게 혹평한다.

 

공조참판이 된 김경징이 군관을 문초하는 과정에서 장형을 과하게 써서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다. 김경징은 죄를 청했는데, 인조가 다만 "앞으로 이 사람을 경계 삼아 형벌을 남용하지 말라"는 말만 남겼다. 사헌부에서 살인자가 어찌 면죄 받을 수 있냐며 탄핵했지만, 인조는 버럭 화를 내며 벌이 심하니 다시 양형할 것을 지시하고, 끝내는 삭직하는데서 그쳤다. 이는 임금조차 김류 눈치를 본 것이다. 인조의 이러한 경향은 갈수록 뚜렷해져서, 김경징이 삭직된 일로 앙심을 품은 김류 부자가 관련자들에게 보복할 때마다 응하여 체직, 좌천, 파직, 유배에 처했다. 나중에 김경징은 자기네 집안 노비가 식구들을 저주했다는 이유로 국문을 열었는데, 이것 역시 인조가 용납해주었다. 대신들은 역모도 아니고 이깟 일로 국문까지 하느냐며 비난했지만, 여지없이 보직 해임 되었다. 그 결과 역굿을 벌인 자들이 김경징에게 장살 당한 것은 물론이다. 왕족들에게 세금 갖고 시비 턴 일도 그렇고, 김경징은 임금 알기를 우스워 할 만큼 광망했고 사람을 물고 내는데나 열중했다.

 

그의 업적으로 꼽히는 일들도 기실 숟가락 얹기였을 뿐, 따지고 보면 대단찮은 성과다. 폐세자 이지(李祬) 사건의 경우, 김경징은 그를 탈출하도록 도운 공범을 고문하다 죽인 것이 공적으로 인정되었을 따름이다. 폐모론 운운한 일의 경우도, 승정원에 앉은 사람으로서 일하는 흉내만 낸 데 지나지 않는다. 폐모론에 대한 이야기는 숙종 때까지도 계속 언급될 만큼이나 상투적인 서인 정권의 기조였으니, 김경징이 딱히 의분에 찬 뜻으로 한 말이 아닌 셈이다. 한데도 인조는 김경징을 장하게 여기고 매양 그의 공치사를 들어주었다. 이렇듯 말 몇 마디 보태어서 구색 맞추는 건 김경징의 특기였다.

 

한심한 김경징의 실체는 머지 않아 드러나게 된다 :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 영의정 윤방(尹昉)은 왕실을 강화도로 옮겨서 전란에 대비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는 강화도가 피난처로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 윤방은 전쟁을 하든, 화친을 하든, 일단 본진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하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런데 김경징이 명색이 영상 대감의 말까지 끊어먹으며, "지금 논해야 하는 건 방어책이지, 피난책이 아닙니다. 강화도로 가는 건 나중에 논해도 됩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12월이 되어 청군이 국경을 넘어 개성까지 이르자, 조정에서 강도검찰사(= 강화도 수비 사령관)를 파견해 수군을 정비하게 했는데, 그 자리에 김경징이 천거됐다. 그를 강도검찰사에 추천한 사람은 김류였고, 때문에 당대에도 제 가족의 안위만 생각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이로써 말로만 쏘아붙이기 좋아하는 김경징의 밑천도 다 드러나고 말았다.


김경징과 일행은 종묘 신주와 소현세자,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 안평대군 등의 왕실 요인들을 함께 데려갔지만, 곳곳에서 말썽을 일으킨다. 피난민들을 구제한다는 핑계로 관아의 쌀을 털어서는 자기가 챙겼고, 강화도로 통하는 배를 혼자 점거한 채 자기 식구들부터 옮겨놓았다. 엄동설한에 이틀씩이나 왕가를 일절 돌보지 않아서, 보다못한 세자빈이 항의하자 달랑 동궁 부부 둘만 배에 태워 보내줬다고 한다. 그러더니, 방비 계획 같은 건 세우지도 않은 채 틀어박혀서 술이나 처먹고 놀았다. 누가 이러다가 큰 일 나는 것 아니냐고 물었으나, "아, 바다가 있는데, 오랑캐들이 어떻게 건너오겠느냐."며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정작 청군이 뗏목을 만들어 바다를 건너오면서 발포하자, 깜짝 놀란 김경징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 측근 몇몇만 데리고 충청도 방면으로 내뺀 것이다. 충청수사 강진흔은 고작 7척의 배를 이끌고 중과부적으로 항전하는 동안, 강화도 최고 지휘관이란 자가 이렇게 굴었으니 천혜의 요새인들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그의 탁월한 전략 덕분에 강화도는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 때는 처자식과 어머니조차 모시질 못 해서, 왕족들 역시 줄줄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남한산성에서는 강화도가 떨어졌다는 소식에 항복을 택할 뿐이었다.

 

애초부터 아무도 김경징이 강도검찰사로서의 직분을 다 하지 못하리라 예상했다는데, 그 말대로였다. 강화도로부터 온 장계에 김경징의 이름이 없자, 김류는 "아마 군사를 이끌고 다른 곳에 주둔 중이거나, 싸우다가 전사했나 봅니다"라고 했고, 인조는 "내 생각엔 도망간 것 같은데" 라고 했지만, 김경징이 요새를 지켜냈다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김류라는 뒷배가 워낙 탄탄했고, 김경징 본인이 조정 대신들 앞에서 추상 같이 호령한 기세에 모두가 눌렸기 때문에 뜯어말리지 못한 것이다.

 

김경징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대죄였다. 방비를 소홀히 하고 직임까지 방기한 채 경솔하게 행동하다, 강화도를 빼앗기는 건 물론이고 왕족들을 줄줄이 엮어서 적에게 헌납하는 바람에 전황까지 어지럽혔으니, 능지를 떠도 할 말이 없었다. "강화도 수호의 임무를 맡은 신하들이 날만 보내며 놀다가, 배가 보이자 저 한 몸 살겠다고 도망하는 통에, 종묘사직, 빈궁, 원손을 헌신짝처럼 내버렸고 섬에 가득한 생령들을 무참히 죽도록 했으니, 말 할 수록 기가 막힙니다.", 바로 김경징의 치죄를 탄원하는 신하들의 상소였다. 인조는 당초 김경징에게 유배형을 내리고, 열심히 싸운 강진흔은 참형에 처했으나, 조야가 들끓으며 김경징 같은 놈을 어찌 살려둘 수 있느냐고 하는데 이르자 결국 사약을 내렸다. 이야, 나라 하나 시원하게 말아 먹어도 곱게 죽을 수 있네.

 

김경징이 기왕에 말로써 방책을 거들었으니 말마디로 청군을 물러나게 했으면 장쾌했으련만, 그것이 본인의 실질에 미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끝내 사직의 안녕을 그르쳤고, 부친에게도 누를 끼쳐 "자식 간수 똑바로 못 한 양반"이라는 소리를 듣게 했다.

 

 

d03355126d9bfb1b049743db9bf97f0f.jpg

<독일 황제 프리드리히 빌헬름 빅토어 알베르트 (Friedrich Wilhelm Viktor Albert). 이 사람의 매력적인 수염 스타일이 바로 '카이저 수염'이다>

 

프리드리히 3세가 등극한지 100일만에 죽으면서 그 아들인 빌헬름 2세가 독일 제국의 황위를 이었다. 젊어서 군에 입대했던 빌헬름 2세는 그 곳을 꽤나 마음에 들어했다고 전하는데, 이 때문인지 그는 제위를 이은 후 쌈박질을 좋아하는 성향을 보였다. 빌헬름 2세의 호전적인 성미는 정작 독일 제국에 그다지 도움이 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당대의 독일 제국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안배에 따라, 대 프랑스 고립 동맹을 주도하는 위치였다 : 비스마르크는 "국내의 혁명 행위를 철저히 탄압한다"는 재밌는 발상을 품은 삼제동맹, 프랑스의 튀니지 점령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미끼를 더한 삼국동맹, 러시아의 공격으로부터 상호 원조한다는 내용의 독오동맹까지 이끌어내는 현란한 외교술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동맹들의 목표는 한결 같이 "프랑스를 견제한다"였는데, 독일 제국이 프랑스를 능가할 국력이 없다는 반증이었다. 때문에 역량을 완전히 육성하기 위해 프랑스를 묶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의 성향이 정반대였다는 점. 즉위 초부터 비스마르크와 대립한 빌헬름 2세는 대영 제국과 비빌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제국을 원했다. 그런데 통일 전쟁을 수행하느라 산업화가 늦어진 독일 제국이 어떻게 대영 제국을 넘본단 말인가. 비스마르크는 시기상조라며 황제를 말려보려 했지만, 도무지 들어먹지 않아 빌헬름 2세 등극 2년만에 사퇴해야 했다. 3대에 걸쳐 활약한 능신이 이런 식으로 떠나자, 빌헬름 2세는 오히려 팽창주의 정책을 더욱 확고하게 추진했다.

 

우선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을 유일한 동맹으로 공언함으로써, 유럽 전역의 평화를 뒤흔들었다. 알다시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발칸 반도를 놓고 다투는 사이였기 때문에 한 쪽 편을 들면 자연히 반대쪽과는 멀어지기 마련이다. 비스마르크 같은 종횡가는 이를 섬세하게 중재하여 동맹관계로 묶어둘 수 있었을지 모르나, 그는 이미 모가지 났잖은가. 결국 러시아가 프랑스와 협력 관계를 맺으면서 철혈재상 시절의 대전략은 깨어지고, 도리어 독일이 프랑스처럼 고립되었다.

 

또한 빌헬름 2세 치하의 독일 제국은 사사건건 열강들과 부딪히며 어그로를 쌓았다. 남아공, 모로코, 터키, 청나라, 심지어는 조선에까지 독립을 부추키는 간섭을 통해 존재감을 과시했다. 이는 영국이 일본,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으로, 모두 영국을 의식한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고 이들 국가에 직접적인 도움을 줬느냐면 또 아니어서, 보어 전쟁과 모로코 반란 당시 군사적 충돌을 방관하여 오히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고착화에 기여한다.

 

그러더니 불현듯 군함 제조에 열을 올렸다. 물론 해상 강국인 대영 제국을 상대하려면 많은 함선이 필요했겠지. 한데, 영국이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독일 제국 못지 않게 대영 제국도 군함을 만들면서 양국 간의 군비 경쟁이 무지막지하게 이어졌다. 도중에 영국 쪽에서 이쯤 하고 그만 두자는 메시지를 보내왔지만, 빌헬름 2세는 "아, 얘네 지금 쫄리는구나!" 라는 오판 때문에 더욱 가열차게 군함을 찍어내도록 했다. 독일 제국은 함대법까지 5차례 제정해가며 해군력 증강을 꾀했는데, 재미있게도 그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끝내 영국의 군함 수를 넘어서지 못 했다고 한다.

 

이윽고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를 저격한 사라예보 사태가 터졌고,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로 응답했다. 당시 빌헬름 2세는 망설이는 동맹에게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본때를 보여준다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도울 것이다." 라며 호언장담했는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여지껏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심기를 꾸준히 건드려 온 독일이 누가 봐도 러시아의 세력권인 세르비아에 개입하겠다고? 그 길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말았다.

 

막상 대전쟁이 임박하자 빌헬름 2세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치세 내내 호기롭게 해군을 양성했고 주변국과 대립하면서 정복 야욕을 불태웠건만, 황제는 군부에서 소외 당해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 했다. 왜냐하면, 독일 제국을 프랑스와 러시아라는 양쪽으로부터의 위협에 몰아넣은 장본인이니까. 게다가 혜안도 그다지 없어서, 小 몰트케(삼촌도 몰트케 가문 군인이라서 구분을 위해 小를 붙인다) 같은 인물을 참모총장으로 앉혀놓았다 : 小 몰트케는 "프랑스를 단기간에 제압 + 되돌아서 러시아를 저지 + 영국의 참전을 예방한다"는 내용의 작전을 구상하는데, 예술적으로 들리긴 하나 이 작전을 실현할 능력이 없었다. 小 몰트케 휘하 제국군은 목표 달성을 위해 중립국 벨기에를 때리는 미친 짓을 저지르지만, 벨기에군이 예상보다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단기 결전은 물거품이 됐고, 러시아군이 남하하기 시작했으며, 영국 역시 참전하는 3중 실패를 겪었다. 비스마르크가 그토록 경계했던 양면전쟁 사태가 도래한 것이다. 빌헬름 2세는 小 몰트케를 해임했으나 이후로는 참모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제 1차 세계 대전은 귀족의 무덤이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진정한 교양인의 정수라고 여긴 유럽 귀족들은, 최전선에 자원하여 싸웠고 장렬히 죽어갔다. 프랑스 혁명 이후 귀족들이 다 죽은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썩어도 준치랬다고 귀족 가문 자제들은 여전히 사회를 주도하는 엘리트 계층으로서 기반이 제법 확고한 편이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그야말로 귀족들의 씨가 말라버린다. 악몽 같은 참호전, 정교하지 못한 전술, 귀족 사회에 만연한 책임 의식 같은 것들로 인해 무수한 엘리트 청년들이 목숨을 잃는다. 그 결과, 사회 지도층이 될 재목은 전멸하고 진정한 의미로 민주주의가 태동하게 되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평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됐고, 특히 남자들이 전쟁하는 동안 군수품을 조달한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향한 갈망이 높아졌다. 마침내 독일의 패색이 짙어진 1918년 11월, 독일 각지에서 이따위 전쟁 그만 하자는 목소리를 띤 민중 봉기가 일어났다.

 

세상이 민주주의의 물결을 타고 흘러가니, 빌헬름 2세는 설 자리가 없었다. 그는 일주일만에 독일 전역으로 번져 나간 혁명 운동에 몸서리 치며 네덜란드로 망명함으로써 제국 체제의 종말을 선고한다. 빌헬름 2세의 대영 제국을 능가하겠다는 망상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낭만적 결단 때문에, 독일은 패전 이후 막대한 배상금 및 상품 수출 봉쇄 등의 불평등한 조치로 고생해야 했다. 이 때의 경험을 계기로 독일이 광기에 젖은 폭주를 거듭할 것을 생각해 보면, 빌헬름 2세의 치적은 후세에 길이길이 불행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경찰청 통계.png

 

<경찰청 사이버안전 관련 통계 자료. 사이버 범죄는 계속 늘어나는데 가장 크게 늘어난 것이 악플 범죄다>

 

본래 인터넷에는 게시물을 작성하는 기능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보를 공유하거나, 토론 또는 문학 작품처럼 소통할 목적으로 글을 쓰면 게시판이 동일한 주제에 관한 글로 도배되기 마련이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등장한 게 댓글 시스템이다. 댓글은 게시물에 대한 생각을 짧게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서식인데, 그 편의성 덕분에 단기간만에 널리 보급되었다. 초창기 댓글은 용량 제한이 있어서, 위트 있는 문장으로 간결하게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람들이 여기에 익숙해지자 세월이 지난 이후에도 재치 넘치는 글로 촌철살인하는 댓글 문화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촌철 "살인" 하는 일이 생겨서 문제다. 작년 한 해에만 유명 연예인 두 명이 세상을 떠났고, 과거에도 인터넷으로 가해지는 정신적 학대를 못 이겨 목숨을 버리는 연예인이 많았다. 지금 이 순간조차 악성 댓글로 피해를 보는 사람이 늘고 있다. 소위 "악플" 문제다. 악플은 비단 연예인 뿐만이 아니라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그 누구든 가리지 않고 해악을 끼치고 있고, 장소와 형태를 다양하게 바꿔가며 기승을 부린다. 경찰이 공개한 통계에 따르면, 사이버 모욕죄(= 악플) 명목의 신고 건수는 2014년에 8,800 건에서 5년만에 1만 6천 여 건으로 가파르게 증가했다. 이제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중심으로 퍼지는 걸 넘어, 게임과 유튜브 채널, 개인 블로그와 SNS, 뉴스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매체에서 악플을 볼 수 있게 됐다.

 

A.jpg

 

 

<동일한 사람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네이버 연예 뉴스 댓글 모음집. 올해 3월 들어 네이버는 연예 뉴스의 댓글을 폐지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몹쓸 짓을 벌이는 걸까? 애석하게도 인구통계학적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 경찰은 40 ~ 50 대의 사이버 모욕 범죄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주석을 달았는데, 이는 나이가 악플을 다는데 아무 관련 없음을 뜻한다. 한편, 앞서 언급한 다양한 인터넷 매체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이용하는 공간이므로 성별로도 분류하기 어렵다. 아무 게시물에나 들어가서 입 한 번 걸쭉하게 풀어주면 그게 곧 악플이므로, 워낙 성립되기도 수월하다. 그래서 악플은 그야말로 사람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악플을 다는 걸까. 단순히 스트레스를 발산하기 위해, 쿨하고 치명적인 표현으로 주목을 끌기 위해, 여론을 선동하기 위해 등등 나름의 이유가 있겠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들이 진정으로 자신의 행동에 책임 지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피해자가 고소장을 들이밀면, 열에 아홉은 고양이가 그랬다느니, 잠든 사이 동생이 그랬다느니 하며 반성문을 써재끼기 바쁘잖아? 이는 악플을 쓰는 사람 본인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하고 있다는 소리다.

 

잘못된 걸 알면서도 행한다? 나는 근본적으로 인터넷의 익명성과 더불어 중요한 특성인 비대면성 때문에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고 본다. 익명성은 자신을 상대로부터 감추는 기능을 하고, 비대면성은 상대방을 나로부터 감추는 기능을 한다. 때문에 TV로나 조금 볼 연예인, 혹은 게임에서나 어쩌다 마주치는 대상의 부모를 거침 없이 팔고 뚝배기도 부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눈앞에 보이질 않으니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거지.


악플러들은 공자가 주문한 "서(恕)" 한 글자가 모자라 이따위로 추잡하게 살게 된다. 저자를 인수분해 하기 앞서 자신이 그러한 모욕을 들었을 때 과연 기꺼울 것인지를 먼저 헤아리고, 비록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잡놈을 상대하더라도 점잖은 언행으로 충분히 꾸짖을 수 있음을 상기했더라면 그들로 인해 사람이 죽고, 집으로 고소장이 날아오는 일이 있었을까. 모니터 너머에도 사람이 있음을 깨닫지 못 하는 소인배는 인행(仁行)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자들이다.

 

Ce46QnIUAAAS3Ko.jpg

<동아일보 1930년 4월 14일 기사. 나도 고양이가 대신 써줬으면 좋겠네>

 

우리가 기왕 댓글을 남기는데 굳이 상스러운 표현을 써서 소인배가 될 필요는 없잖아. 항상 나부터 삼가고, 정당한 비판일지라도 비난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고, 자신이 보더라도 지나치지 않은지 돌이켜 보는 자세를 지키는 게 좋겠다. 그럼으로써 남이 상처 입고, 원한이 사무쳐 내게로 돌아오는 일을 예방할 수 있다. 아니면 집에 이런 고양이를 많이 기르시든지, 돈을 많이 벌어놔야 할 것이다. 머지않아 금융 치료를 당하게 될 테니 말이야.

31개의 댓글

2020.05.12

선생님 빈수레가 요란하고 나발이고 당신의 글에는 내가 첫빠따로 댓글을 달아야겠습니다 쒸바ㅏㅏㅏ 일단 글 달고 읽어야징

1
2020.05.12
@lIlIlIlIlIlIlIlI

오질이 손권을 향해 페하라고 칭하고,

> 여기 페하는 오타인지?

 

그리고 조식 이야기에 나오는 저 양수가 쬬한테 모가지 날아간 걔죠?

 

일단 마저 읽고 나머지 달아야징

1
@lIlIlIlIlIlIlIlI

감사합니다. 오타 맞습니다, 수정했습니다 :)

1
2020.05.12
@lIlIlIlIlIlIlIlI

다 읽었습니다. 모 늘 그렇듯 마지막은 교훈적인 내용이고...음. 하나 생각나는 단견이 있는데.

 

사실 생각해보면 나우누리 피씨통신 이런 시절만 하더라도 인터넷 공간을 사람들이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그다지 악플도 심하지 않았던걸로 기억합니다. 제 짧은 식견탓에 그리하였다 정도로만 기억할뿐, 실제로 그 당시에 악플이 만연하였는데도 제가 못본걸수도 있습니다만.

 

그런데 씨벌교황이라는 아주 유명한, 악플의 대부가 나타나면서 인터넷이 이제 비대면성과 익명성의 공간이라는 걸 생각하게 된거 같아요. 걔의 행동을 통해서 아, 여기가 세상과 유리된 별개의 공간이구나 하는 인식들이 사람들에게 퍼지지 않았나...저어는 그렇게 생각함미다.

그친구가 아니었더라도 결국 인터넷이 그런공간인걸 사람들이 인식하면서 악플은 생겨났지만 그 친구가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빨리 악플의 시대가 도래했을까요? 궁금하네요.

1
2020.05.12
@lIlIlIlIlIlIlIlI

났지만> 났겠지만

1
@lIlIlIlIlIlIlIlI

저 역시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상호 간의 예절을 지키는 게 불문율로 여겨지던 당시에 씨벌교황, 런던귀공자 같은 일부 사람들이 금기를 넘나들면서 사람들로부터 새로운 인식이 싹튼 것이겠지요. 그들의 존재와 영향으로 인터넷에 커뮤니티 충성적인 면모를 보이거나, 시니컬한 문체를 쓰는 등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된 것은 사실일 것입니다.

 

이러한 인터넷의 특성과 인터넷 문화의 부정적인 연결은 언젠가 우리 사회에 문제로 다가올 수 있었단 점에 대해서도 동의합니다. 다만, 오늘날 사회에서 악플 등의 문제를 인지하고 해결책을 마련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므로, 차라리 1세대 악플러인 씨벌교황 등이 그 때 설쳐준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먼 미래에 악플 문제로 우리 자식 세대가 고통받는 것보다는, 지금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게 더 좋겠지요.

 

항상 감사합니다 :)

1
2020.05.12

글 좋네

1
@PainkilleR

고마워잉 :)

1
2020.05.12
@한그르데아이사쯔

나중에 읽어야징

1
@PainkilleR
0
2020.05.13

가독성 10..

1
@응아잇

잘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0
2020.05.13
1
@오스만유머
0
2020.05.13

또 시작이네

 

아니 카테고리를 왜 계속 유머에 다냐고

자꾸 낚이잖아

 

계속 지적받았을텐데 왜 자꾸 이러는 거냐?

1
2020.05.13
@도토리키재기

세상사는게 유-머라서?

잡기 수준의 내용이라 웃고 넘기자고 유머 카테고리 달았나 보죠 뭐.

1
2020.05.13
@lIlIlIlIlIlIlIlI

저게 어딜봐서 잡기수준이고 단순 유머글이냐?

독일 유머도 저거보단 재밌겠다.

2
@도토리키재기

자꾸 봐주셨다는 말씀이시군요. 감사합니다. 제 사견이 많이 들어가서 지식 탭으로는 분류할 수 없었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

1
2020.05.16
@도토리키재기

드립웃기는데?

그리고 작성자 닉 보고 클릭하면 이런 일 없지?

1
@취생몽사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0
2020.05.13

유익한 글 재밌게 잘 읽었어요!😁

1
@시드니여우

고맙습니다. 다른 글도 잘 부탁합니다 :)

0
2020.05.16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중간에 몰트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大몰트케라고도 불리는 헬무트 폰 몰트케와 小몰트케라고도 불리는 헬무트 요한 루트비히 폰 몰트케 중 小몰트케를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독자분들을 위해서 이부분만 수정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
@Volksgemeinschaft

항상 좋은 글과 감상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대로 독자 분들이 헷갈려 하실 것 같아 수정했습니다 :)

0
2020.05.16
@한그르데아이사쯔

딱 하나만 감히 더 말씀드리자면, 언급해주신 작전을 구상하고 입안한 건 알프레트 폰 슐리펜입니다.

1
@Volksgemeinschaft

그렇군요. 저는 슐리펜 계획을 마지막에 틀어버린 게 小 몰트케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혹시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0
2020.05.16
@한그르데아이사쯔

죄송합니다. 일 보느라 댓글 확인이 늦었습니다.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은 1891년 참모총장이 되었습니다. 그가 맡은 최대 임무는 미래의 잠재적 적국이나 다름없던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존재하는 독일의 지정학적 특성을 고려하여 새로운 전쟁 계획을 수립하는 일이었죠. 물론 최선책은 비스마르크가 그래온 것처럼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러시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전쟁 발발을 미연에 방지하고 독일의 국익을 챙기는 것이었겠지만, 19세기와는 달리 20세기 초의 국제 정세는 그것을 허락치 않았습니다. 앞뒤 재지 않고 팽창주의를 추구하던 빌헬름 2세의 실정 탓도 있지만 몰락해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과 격동하는 발칸 반도의 민족주의, 영국과 러시아 간의 그레이트 게임과 프랑스와 영국의 관계 개선 등의 요소가 유럽 대륙에 전운을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슐리펜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쟁이 발발하는 사태를 가정하여 작전을 입안해야 했습니다.

 

슐리펜을 비롯하여 선대 독일군 참모총장들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분석한 독일의 고질적인 문제점은 바로 적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술한 바와 같이 기본적으로 국경을 맞댄 프랑스와 러시아가 모두 적성국이었고, 영국 역시 언제 대륙 문제에 개입하려 들지 몰랐죠.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믿음직스럽지 못했고 이탈리아는 귀추를 파악할 수 없는 나라였습니다.

 

결과적으로 글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프랑스를 단기간에 제압 + 되돌아서 러시아를 저지 + 영국의 참전을 예방한다"는 것은 어떻게 그것을 실현시키는가의 문제였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전쟁이 터지면 독일에게는 그것 말고는 아무 방법이 없었거든요. 프랑스와 러시아를 동시에 정면승부로 상대하기에 독일군은 중과부적이었고, 이 수적 열세를 만회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속도'와 '효율', '전략적 포위'였죠. 슐리펜 백작은 이 세 가지 요소를 고려하여 슐리펜 계획을 작성합니다.

1
2020.05.17
@한그르데아이사쯔

1) 속도

 

독일군이 어떻게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동원 속도와 수송 속도에 있어서 프랑스와 러시아를 훨씬 능가해야 했습니다. 독일 군부가 19세기 중반부터 철도에 그토록 집착했던 것도,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을 내리 대승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속도를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효율적인 동원제도와 참모본부의 지시에 따라 철저하게 작성된 병참 계획,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거미줄 같은 독일의 철도망이 속도를 견인했습니다. 이에 비해 프랑스는 병참 계획면에서 독일군 참모본부를 따라갈 수 없었고, 러시아는 철도망이 발전하지 못해 빠른 동원과 수송이 불가능했습니다. 슐리펜은 슐리펜 계획이라고 흔히 불리는 1905년 입안한 작전 계획에서 이것을 계산해 놓았습니다. 실제 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이 부분에서 노출된 한 가지 문제점은 독일군 우익이 이용하기로 되어있는 철도망에 대한 슐리펜의 제반 전제가 잘못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독일 북부에서 벨기에를 따라 북프랑스 평원으로 이어지는 철도망은 슐리펜의 생각보다 허술했고, 잘못 설계된 철도망은 병목 현상을 유발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실제 전쟁이 터졌을 때 슐리펜이 생각했던 만큼의 '속도'를 획득하지 못하게 됐죠.

 

2) 효율

 

중과부적의 상태에서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방어하는 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당백이 가능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훨씬 효율적인 작전을 벌여야 한다는 말이죠. 독일군은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선대 참모총장이자 독일 통일의 당당한 주역 중 하나인 大몰트케가 실시한 군제 개혁 덕분입니다. 大몰트케는 세계 최초로 근대적인 참모본부 제도를 도입했고, 참모본부는 신분이 아닌 능력 본위의 인사 운용을 통해 작전 효율을 극한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습니다. 우선 하급부대가 자율적으로 작전을 실시하고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임무형 지휘체계가 확립되었고, 둘째로 귀족들의 간섭과 영향력이 배제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당시 유럽은 아직까지 귀족들이 군의 요직 등 지휘관 자리를 차지한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독일 역시 각 영방의 왕족이나 귀족 자제들이 군 지휘관인 경우가 많았으나 참모본부가 이들의 간섭과 영향력을 벗어나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작전을 입안하고 실시할 수 있었기에 프랑스나 러시아보다 효율적일 수 있었던 것이죠. 빌헬름 2세가 군부에 대하여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찌보면 그만큼 독일 군제가 선진적이었다는 방증이 됩니다. 슐리펜은 슐리펜 계획의 운용 역시 임무형 지휘체계를 따르도록 하였으며, 각급 제대가 처해진 상황 하에 자율적이고 효율적으로 작전을 진행할 것을 명시했습니다.

 

3) 전략적 포위

 

大몰트케로부터 슐리펜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독일군이 맹신하고 또 성공시켰던 교리는 전략적 포위 전술입니다. 보불전쟁 당시에는 독불 국경을 따라 치러진 마르스-라-투르 전투, 그라블로트 전투, 스당 전투, 메츠 전투에서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슐리펜 시대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프랑스군이 국경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배후의 러시아까지 고려하면 독일군은 프랑스군을 상대로 정면승부를 벌이기 보다는 우회하여 포위 기동을 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죠. 이에 따라 슐리펜은 프랑스가 방어를 강화한 독불 국경이 아닌, 벨기에를 통해 우회하여 영불 해협을 차단하고 파리를 좌측에 끼고 도는 포위 기동을 계획했습니다. 문제는 상술한 '속도' 부분의 오차와 더불어, 독일군 우익에 너무 막대한 부담이 지워진다는 점이었죠. 슐리펜은 죽는 순간까지도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전차라던가 항공기와 같은 효과적인 전선돌파 수단이 부재한 상황에서 슐리펜으로서는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죠. 이것이 슐리펜의 책임은 아닙니다. 슐리펜은 독일군 우익에 주어진 이 과제를 후대에게 맡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실제 유언이 아니었음에도 "Macht mir den rechten Flügel stark!", 즉 "나의 우익을 더 강화시켜달라!"는 말을 남겼다고 알려졌을 만큼 만년의 그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과제를 넘겨받은 小몰트케는 우익을 강화하기는 커녕 우익의 전력을 동부 전선으로 이동시키는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이것이 '속도' 문제와 어우러지면서 프랑스군은 전열을 재정비하고 마른 전투에서 독일군을 맞아 극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고, 결국 독일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했던 것입니다.

1
2020.05.17
@한그르데아이사쯔

오늘날 슐리펜 계획이 정말로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는가는 역사학계의 오랜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만약 슐리펜 계획이 이대로 실패한 채 남아있었다면 논쟁의 불씨가 되지 못하였겠지만, 제 2차 세계대전기 히틀러의 독일군이 슐리펜 계획과 이론적으로 동일한 기반에서 출발한 낫질 작전을 통해 프랑스를 단 6주만에 정복함으로써 그 위상을 과시했기 때문입니다.

 

게르하르트 리터의 경우는 슐리펜 계획이 전장의 우연성을 무시한 채 입안되어 처음부터 실패할 수밖에 없던 계획이었다고 평가절하하고 있으나, 이는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그의 계획을 통해 전체적인 윤곽을 잡은 후 세부사항은 임무형 지휘체계를 통해 달성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습니다. 미국의 군사역사가 테렌스 주버의 경우는 슐리펜 계획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널리 인정받지 못하는 견해입니다.

1
2020.05.17
@한그르데아이사쯔

혹시 더 궁금한 내용이 있으시면 이메일로라도 자료 보내드리겠습니다.

1
@Volksgemeinschaft

정말 상세하고 명쾌하게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글의 내용을 더 풍부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0
무분별한 사용은 차단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추천 수 날짜
846 [유머] 부산에서 초보 운전이면 이렇게까지 해야함 8 콧물닦아 5 2024.01.16
845 [유머] 인생 7대 쪽 팔림 15 heyvely 10 2024.01.04
844 [유머] 넷플과 ocn의 차이점 19 콧물닦아 39 2024.01.02
843 [유머] [고전] 이무기와 교장 1 매드마우스 0 2023.12.15
842 [유머] 인스타 팔로워 팔로우 (인스티즈 펌 ! 가관이네) 1 Taetae 0 2023.10.01
841 [유머] 카페가서 여자친구 만드는 법 24 콜라개붕이 11 2023.09.26
840 [유머] 범죄를 가장 많이 저지른 아이스크림은? 11 베댓전문가 8 2023.09.24
839 [유머] 뜨겁지는 않지만 따가운 불은? 6 알로에맨 4 2023.09.23
838 [유머] 노래 시작하기 전에 들리는 도시는? 3 알로에맨 5 2023.09.22
837 [유머]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이가 몇이게? ㅋㅋ 21 최씨아닌최씨아닌 28 2023.09.04
836 [유머] 여권 3개나 가지고 있는 연예인.jpg 57 상큼한귤탱 34 2023.08.11
835 [유머] 음료수병 뚜껑의 비밀 ㄷㄷ.JPG 17 상큼한귤탱 41 2023.08.10
834 [유머] 기안84의 씨볶음밥 ㄷㄷ 16 상큼한귤탱 21 2023.08.09
833 [유머] 결혼지옥에 나온 역대급 빌런 ㄷ..JPG 43 상큼한귤탱 42 2023.08.09
832 [유머] 라스트 제다이 안 본 눈 삶 35 한그르데아이사쯔 8 2023.08.09
831 [유머] 나루토의 모든 것이 담긴 짤 12 qowlgh 11 2023.05.17
830 [유머] 딱밤 맞고 안울면 5만원에 도전한 잼민이.mp4 9 알라티 4 2023.04.20
829 [유머] 흔한 직장인의 저녁 김비밀 6 2023.03.28
828 [유머] 스포츠카 구매한 남성 xx 사이즈 작을 가능성 높아! 6 해와달의마녀 6 2023.03.08
827 [유머] 퇴근길 엘베 갇힘 실시간 28 해와달의마녀 16 2023.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