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솔잎과 송충이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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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잔키, 소크라테스. 독배를 든 채로 미소 짓고 있다. 그렇게 아테네의 등에가 죽었다>

 

아레테(Arete)란 "탁월성" 또는 "~ 다움"이라는 뜻으로, 그 고유의 성질을 드러내는 요소를 의미하는 고대 그리스어다. 흔히들 "미덕(美德)"이라고 번역하며 말의 아레테, 쟁기의 아레테 같은 식으로 주로 다른 단어와 붙여서 썼던 말이다 : 당연히 말(馬)의 미덕은 잘 달리는 것이고, 쟁기의 탁월성은 밭 가는 데 있다. 한데 열쇠, 우물, 책상 같은 사물 말고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일까? 물론, 장인의 아레테는 제련이고, 군인의 아레테는 투쟁이며, 시인의 아레테는 화술이다. 다 늙어빠진 말보다 팔팔한 말이 더 좋은 말이듯, 아레테를 실천하는 존재는 좋은 존재이고 유익한 존재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면 인간 그 자체의 아레테란 무엇인가? 무엇이 한 사람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가? 여기에 대해 용기, 지혜, 절제, 성실, 정의... 등등 갖가지 덕목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제일 잘 나가는 소피스트였던 프로타고라스는 이러한 덕목들이 인간의 미덕 가운데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용감한 사람, 지혜로운 사람, 정의로운 사람... 등은 확실히 사회의 탁월한 존재들이고, 그들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표상으로 여겨도 되리라.

 

하지만 프로타고라스, 용기정의가 서로 분화될 수 있다면, 용감한 자부정해도 되고, 정의로운 자비굴해도 된다는 말인가? 우리는 연일 힘 있는 자들이 남을 괴롭히고, 소시민들이 폭거를 묵인하는 모습을 목도한다. 이는 명백히 부덕한 것이다. 여기에 소피스트들 특유의 상대적 윤리관이 갖는 맹점이 있다. 인간의 덕성을 파편화시켜 이해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도덕이 부덕으로 탈바꿈하고 만다. 프로타고라스에 따르면, 이들은 각기 다른 덕목을 실천하고 있으므로, 결국 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게 되고, 우리 모두 이들을 따라 약자는 삥 뜯고 불의를 보면 전력으로 참아야 한다는 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이와 같은 상대적 윤리관의 반사회성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인간의 아레테에 존재하는 절대적 기준을 제시하고자 했다 : 바로 인간의 미덕은 인간 사회에 이로워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지혜를 가진 이가 남을 등쳐먹고, 성실한 사람이 악행에만 열중한다면 이를 두고 도덕적이라 말 할 사람은 없다. 이들은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바르게 미덕을 실천한 게 아니다. 진정 인간의 아레테를 실현한 사람은 자신이 존귀해질 뿐만 아니라 모두의 존경을 받고 사회에 공헌하게 된다. 즉, 도덕을 우리들에게 유익한 것으로 정의하고,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면 우리한테 이득이라는 말씀이다. 상대적 윤리관에 비해 보다 당위성 있으면서, 동시에 윤리가 가져야할 보편 타당성을 설명하는 멋진 통찰이다.

 

소크라테스는 미덕을 실천하는 방법론 또한 논했다 : 기마술에 뛰어난 사람은 말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궁술에 능한 사람은 활을 잘 알고 있어야 하듯, 용감한 사람용기를, 똑똑한 사람지혜를 잘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러므로 인간의 미덕을 수행하려면 일단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아레테를 우리가 능히 알아 낼 수 있는 게 아닌, 신들만이 아는 비밀로 여겼고, 물려주거나 남에게 가르쳐 줄 수 없다고 추론했다. 플라톤이 저술한 「메논」에서 소크라테스는 테미스토클레스, 페리클레스 등을 언급하면서 그 아들들이 훌륭한 아버지들의 기예는 본받았지만, 훌륭한 덕성까지 물려받지는 못 했음을 지적했다. 페리클레스 같이 위대한 아버지조차 기술은 가르쳐도, 미덕을 가르치지 못 했다는 비판은 그 누구도 미덕을 남으로부터 깨우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이롭고 몸에 좋고 맛도 좋은 미덕이란 놈을,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어주지 않을 리 없잖아?

 

어차피 신들 밖에 모르는 거, 내가 알아서 뭐하겠냐며 내팽개 친다면 거기서 그치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매사에 이것이 인간으로서의 미덕인지 아닌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길 적에도 노심초사하며 거듭 헤아려야 한다고 했다. 그리하면 수많은 시행착오와 수련 끝에 점진적으로 인간의 아레테를 체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소크라테스의 이 논리는 자기 자신을 알고, 겸허히 올바른 앎을 추구하는 것으로써 미덕을 함양, 사회를 보다 진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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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장군 여포(呂布), 봉선(奉先). "귀 큰 놈을 믿다니 !" 라고 말한 뒤 죽었다는데, 참으로 후안무치 아닌가>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여포를 두고 "효호지용(虓虎之勇 : 울부짖는 범과 같이 용맹함)"이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동시에 지략도 없고 경박하고 이익 밖에 몰라 패퇴했다고도 말한다.

 

여포의 무략이야 삼국지를 접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그는 삼국지에서 일대일 결투 기록을 남긴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며, 원소 밑에서 종군할 때 장연을 박살낸 일과 조조를 통수 쳐서 연주를 거의 다 먹은 일 등에서 짧지만 굵은 활약을 남겼다. 특히 조조는 여포를 얕잡아 보다가 복양 전투 초전부터 깨지더니, 야습을 걸었다가 죽을 뻔 하기도 했다. 물론 여포도 항상 이기기만 한 것은 아니요, 졸전을 치르거나 지레 겁 먹고 도망부터 놓는 등 추태를 보이긴 했지만, 천하의 조조를 상대로 선전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후세 사가들이 여포를 군인의 귀감으로 여기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바로 군재의 반에도 못 미치는 인성 때문이었다.

 

여포는 유독 자신이 타던 배를 부수고 떠나는 이적 행위로 난세의 후한 말에서조차 악명이 자자했다 : 당시 기도위(= 호위병 중 기병 담당관)로 봉해진 정원(丁原)에 의해 부관으로 거두어지면서 커리어를 시작한 여포. 그러나 낙양에 입성한 동탁이 기병을 벌충할 목적으로 정원을 제거하려 하자, 여포가 나서서 정원의 목을 냉큼 베어다 바쳤다. 이로써 역적과 한 솥 밥을 먹게 된 여포는 황실과 공경대신들의 무덤을 도굴하는 등 갖은 나쁜 짓으로 동탁을 도왔다. 그러더니 결국 사이가 틀어져, 왕윤과 합심해서 동탁의 등을 찔러 죽이고 황실의 공신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후일 원소에게 붙어서 제법 공을 세우는 것 같더니만, 하루 아침에 원소와 대립하던 장막의 편으로 돌아서서 연주 일대를 낼름 집어 삼켰다. 곤궁할 때 자신을 받아준 유비를 무참하게 배신해서, 서주를 함락시키고 자사라 칭한 건 또 어떤가. 이렇듯 변절이 난무하던 시대였음에도, 의리 따위는 내팽개 친 여포의 처세는 두고두고 화근이 되었다.

 

또한 여포는 오만하고 매우 자기 과시적인 사람이었다 : 이각과 곽사가 난을 일으켜 장안을 접수하자, 탈출한 여포는 신세를 의탁할 요량으로 처음엔 원술에게 접촉했다고 한다. 일전에 동탁이 원소의 거병 소식을 듣고 원 씨 일가붙이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처형해버린 일이 있었는데, 그런 동탁을 여포가 손수 죽였으니 자신은 원술에게 공을 세운 은인이라나. 하지만 원술 입장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소린데, 여포도 그 땐 동탁이랑 한 패였잖아. 이제 와서 의인 코스프레 하기엔 너무나 뻔뻔한 노릇이다. 때문에 원술은 잠시 여포를 받아두었다가, 그가 방자하게 굴자 이내 내쳤다.

 

그렇게 퇴짜 맞고 찾아간 곳은 다름아닌 원소 진영인데, 여기서도 가문의 은인 드립을 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 다음이다. 여포는 원소의 명을 받들어 흑산적들과 싸운 주제에 원소군 제장들을 대놓고 무시하며 함부로 사병을 모으고 약탈을 일삼았다. 이유가 가관인데, 원소 군벌은 자신과 달리 무법자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장안에 억압된 헌제를 천자로 인정하지 않았던 원소는 무단으로 기주목을 참칭하고 휘하 장수들에게 법적 근거가 전혀 없는 관직을 하사했다. 반면 여포는 황제로부터 직접 분위장군 직책에 가절을 받았고, 따라서 원소 따위는 비교도 안 되도록 지고하신 몸인 것이다. 그러니 원소야 어찌 생각하던 자기 맘대로 굴어도 된다는 말씀. 아, 그러셔? 근데 왜 원소 밑에서 따까리짓 했을까? 당연하게도, 원소군과 화합하지 못한 여포는 끝끝내 축출되어 방랑하게 되었다.

 

여포의 처신에는 원칙도 없었다 : 유비를 대하는 여포의 태도는 단짠단짠을 방불케하는 밀당의 연속이었는데, 모두 여포 본인의 변덕으로부터 벌어진 일이다. 조조에게 대패한 여포는 서주로 향했는데, 당시 서주목으로 주둔하던 유비가 그를 환대했다. 이에 여포는 금방 교만해져, 유비를 술자리에서 아우라고 부르는 등 무례를 범했다. 그러더니, 유비가 원술과 결전을 벌이는 틈을 타서 서주를 접수하고는 원술과 내통하기까지 한다. 말라죽기 직전이었던 유비는 결국 전투에서 패하고, 오히려 자신이 서주에 입조하여 여포 밑으로 들어가는 꼴로 전락했다. 그런데 원술이 역공을 가해 유비를 끝장내려 할 적에는, 그 유명한 원문사극 이벤트로 유비를 구원해주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유비 세력이 인망을 얻어 성장하고 있는 것을 경계한 나머지, 그를 쳐서 조조 편에 붙게 만든 사람도 여포 본인. 이렇듯 여포는 별날 정도로 유비에게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1m 안으로 들어오지는 말고 3m 바깥으로 나가지도 말라는 뜻이었을까?

 

결국 일군의 우두머리로서 조직을 지탱할 비전도 없고, 인망을 형성하지도 못 했던 그는 부하들에게 배신 당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내 생각에, 여포의 문제는 대국을 살피는 안목 부재보다도, 그 놈의 인간성이 말종이었던 부분이 아니었나, 한다. 여포의 최후에 이런 일화가 남아 있거든 : 포승줄에 묶여서 조조 앞으로 출두한 여포는 끝까지 뉘우치지 못 하고 남 탓을 시전했다. "내가 평소에 부하들을 잘 대해줬는데, 막상 위기가 닥치자 그들이 나를 배신했소." 하고. 그러자 조조가 답했다. "그대는 처를 버리고 제장의 아내를 겁탈했으면서 어찌 후대했다고 하시오?". 여포는 고순과 장료 같은 맹장들을 부하로 거느렸으나, 금주령을 어겼다는 사소한 이유로 "나를 죽이려고 작당모의라도 한 거냐?"며 길길이 날뛰고 가혹하게 처벌했으니 별로 신의를 갖고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다 부하 장수들의 아내까지 건드려댔으니, 여포 휘하 무장들이 증오를 품지 않을 수가 없다. 반면, 유비가 없으면 순망치한의 형세를 겪을 것이라는 발언이나 진궁이 최후에 간언한 농성계에 관해 옳다고 여기는 등 여포의 전략안이 아주 빵점은 아니었다. 이는 여포의 성품이 옹졸해서 기껏 일궈낸 자리조차 오래 보전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왕윤의 평가대로 협객이나 했으면 꽤 잘 나가지 않았을까? 일신의 무력을 믿고 방만하게 구는 모습이나 자신에게 은덕을 베푼 사람도 거리낌 없이 베어버리는 면모 등은 군주로서 남을 다스리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사적인 정에 연연하지 않고 칼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용병 일에는 썩 어울린다. 그러나 여포가 분수에 맞지 않은 벼슬을 하면서 많은 사람이 고통 받고 천하가 어지러워졌으며 본인도 신세를 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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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태부 제갈각(諸葛恪), 원손(元遜). 그는 이 수레에 앉은지 1년만에 목이 달아난다>

 

제갈량의 조카 제갈각은 동오의 꾀돌이로 같은 시기의 오나라 사람들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하지만 제갈량과 달리 국사의 풍모를 갖추지 못 해 파멸을 맞이한다. 아버지 제갈근은 제갈각의 경망스러움을 지적하며 장차 이 놈으로 인해 패가망신하겠다고 혀를 찼다. 대체 제갈각이 어떻게 처신했길래 부친한테 이리 혹독한 욕을 먹었던 걸까?

 

제갈각은 어려서부터 영민해서 여러 가지 재치 있는 일화를 남겼다 :

 

1) 손권이 제갈각을 불러다 이렇게 물었다, "네 아버지(= 제갈근)하고 네 삼촌(= 제갈량) 중에 누가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느냐?". 제갈각이 답하길, "저희 아버지가 더 낫습니다." 손권이 이유를 묻자, 다시 답했다, "저희 아버지는 섬겨야 할 분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말 한마디로 주군과 부친을 동시에 핥아줄 정도로 빼어난 제갈각의 입담은 그의 특기였다.

 

2) 촉에서 사신이 내방했을 때, 제갈각도 손권 곁에 있었던 모양이다. 손권이 접대를 마치고 사자를 돌려보내면서, "여기 제갈각은 말 타기를 좋아하니, 승상께 좋은 말 몇 필을 구해 달라고 청해 보시오." 라고 주문을 넣었다. 그러자 아직 준다는 얘기도 안 꺼냈는데 제갈각이 감읍하며 손권에게 사례했다. 어리둥절해서 손권이 왜 그러느냐고 물으니, "촉한은 폐하의 마굿간이므로 오늘 조서를 내리셨으니 반드시 이르지 않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 말 구할 길이 없는 오나라에서는 촉한으로부터 말을 충당했는데, 이걸 두고 마굿간일 뿐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우리 권이 기분을 업 되게 해 준 것이다.

 

3) 손권이 신하들을 초청해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당나귀를 끌고왔더랬다. 그러고는 봉투에다 "제갈자유(= 자유[子瑜]. 제갈근의 자)"라고 써서 나귀 얼굴에 붙였다. 좌중의 사람들이 그 꼴을 보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손권은 강력한 호족들의 연합체인 동오를 지휘하면서 늘 권력 콤플렉스에 시달렸는지, 이런 식으로 부하들을 자주 놀려먹었다. 이번에는 제갈근의 얼굴이 나귀상인 걸 두고 장난을 친 것인데, 토착민 출신이 아닌 제갈근이 가장 만만해서겠지. 그런데 어린 제갈각이 나서서 글자를 보탤 것을 청했다. 손권이 흔쾌히 허락해 붓을 내주었더니, 제갈각은 봉투에 "지려(之驢)" 두 글자를 덧붙여 "제갈자유지려"로 고쳤다. 그 뜻은 "제갈자유의 나귀"이니, 말 그대로 센스 지렸다. 손권을 비롯한 연회장의 사람들이 모두 감탄했고, 손권은 정말로 당나귀를 제갈근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와, 벌써부터 실세에게 아부하는 방법을 완벽히 터득했구나 ! 이렇듯 제갈각은 어린 나이에 범상치 않은 정치적 감각과 화술을 유감 없이 발휘했으며 장성해서도 그런 재담에 힘입은 삶을 살았다. 사람들도 그의 재능과 지략에 의지해 후일 제갈각에게 대권을 맡겼다.

 

31살(234년)에 단양 태수가 된 제갈각은 조정의 골칫거리인 산월족을 복속 시켜 위북장군에 올랐다. 이릉대전의 영웅인 육손조차도 완전히 평정하지 못 한 산월족을, 제갈각은 "마음을 써서 공격한다"는 기책으로 1년만에 접수하는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 태수로 부임한 직후 임지의 군대에게 절대로 산월을 공격하지 말 것을 명한 제갈각은, 관아에 이송된 산월인은 놔두고 오히려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를 잡아온 관리를 참수해 조리돌림했다. 그랬더니 산월족도 싸우려는 뜻이 없음을 깨닫고 제갈각의 휘하로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결국 제갈각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단양을 완전히 장악한다.

 

뿐만 아니라 제갈각은 동흥제 전투(252년)에서 위군을 도발, 장장 7만에 달하는 사마사군을 4만 정병으로 대파하고 수많은 무기와 말, 수레, 물자 등을 노획했다. 이 때의 승리는 군사적 성취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대승이기도 한데, 제갈각은 독중외제군사(= 나라 안팎의 군무 총괄) + 형주목 & 양주목 겸임(= 형주, 양주 방면 행정 총괄)이라는 직책을 얻었고 조정 내에 그 누구도 맡설 수 없는 권위를 획득한 반면, 사마사는 본인과 동생 벼슬도 깎고 근왕파의 정치적 공세에 그대로 노출되는 위험에 처해야 했다.

 

하지만 제갈각의 능력은 그의 나불대기 좋아하는 성격과 만나면서 겉잡을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하게 된다. 사람들도 일찌기 제갈각의 성미가 유별난 것에 근심했다 : 제갈각은 나이 아흔 살 먹은 노장 여대(呂岱)가 "매사에 삼가 열 번을 헤아리고 일을 하십시오." 하고 덕담했으나, "계문자는 세 번 생각한 뒤 행하라 했고, 공자는 두 번만 해도 충분하다 했거늘, 경이 내게 열 번 생각하라함은 나를 능멸하는 것 아니오?" 라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였다. 또한 손권이 제갈각을 한 번 써보려고 군량 담당관인 절도(節度)직을 맡겨놨더니 글쎄, 이웃나라 사는 제갈량이 "걔는 군량 보급 같이 중차대한 일을 맡길만한 재목이 아닙니다. 얼른 바꾸세요."라고 충고했고, 손권 또한 옳다 여겨 군을 지휘하는 보직으로 갈아치웠다고 한다. 이렇듯 이미 당대 사람들조차 제갈각이 인성 파탄 난 놈인 것을 인지한 상황.

 

단양 평정책은 사실 제갈각이 주야장천 제의한 계책이었다. 새파란 애송이 녀석이 한 번만 믿어달라고 연일 우겨댔으니 주위 사람들이 얼마나 성가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갈각을 총애했던 손권은 맛만 보자며 그에게 임무를 부여했다. 비록 성공하긴 했지만 중요한 점은, 그가 사병으로 1만 명의 단양병을 스스로 손에 넣었다는 점이겠지. 이는 특이한 세병제를 운용하는 오나라 조정 입장에서도 긴장할만한 사건이었고, 손권은 이후 자식처럼 대하던 제갈각을 냉대하기 시작했다. 이는 토착 호족이 아니라 형주 이주민 세력에 해당하는 제갈씨가 본격적으로 강동 4성의 귀족들과 반열을 나란히 하려는 도전적인 메시지로 읽힐 수 있었고, 제갈근은 바로 이 점을 염려해 "저 놈이 패가망신 시키겠구나" 하고 탄식했다고 말 한 것이다.

 

단양 건으로 공을 세운 제갈각은 내친 김에 더 달리려던 것인지, 최전방인 여강에서 지속적으로 위나라 접경 지대인 수춘을 노리며 소규모 교전을 벌여댔다. 이에 사마의가 직접 군을 이끌고 내려와 대치한다. 위 · 오 간 일대 결전이 벌어질 찰나, 손권은 돌연 제갈각을 후방인 시상으로 전임시켰고, 기껏 제갈각이 쌓아둔 군량과 성채는 불태우게 했다. 손권은 싸우기 전에 점을 봤더니 불길하더라는 핑계로 퇴각을 명했는데, 명민한 군주인 손권이 정말로 미신을 믿어서 그랬을 리는 없고, 그저 제갈각이 못미더운 탓이었을 것이다. 「오서 - 제갈각전」에 따르면 제갈각이 수춘으로 정찰병을 보내겠다고 설칠 때부터 손권이 이미 불가능한 목표로 여겼다고 적혀있거든. 제갈각 역시나 손권이 자신을 의심해서 군을 물렸다고 판단, 애꿎은 승상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했다. 내용은 대략, "세상 사람들이 서로 훼방하길 좋아해, 공이 있는 사람을 가로막으니 나는 걱정입니다. 공자 같은 성인께서도 흠결 있는 제자들을 받아들이셨는데, 요즘처럼 인재가 드문 시기에 조그만 하자 때문에 인력을 낭비해서야 쓰겠습니까? 남의 작은 과실을 계속 꾸짖다가는 대대손손 원수가 될 것입니다." 정도로, 다시말해 잘 나가는 자신을 질투해 폐하에게 이간질 했다간 끝장을 볼 것이라는 경고다.

 

오나라 조정을 뒤흔든 희대의 정치파동, "이궁(二宮)의 변" 때 보여준 제갈각의 기지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궁의 변으로 인해 고담, 주거, 오찬, 장휴 등 조정 내의 많은 능신들이 숙청 당하고, 후계자 자리가 오락가락 하며 동오는 정치적 대혼란에 빠진다. 이 때의 제갈각 일가는 본인과 아들의 노선이 달라 상당히 위태로웠는데, 손권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러자 제갈각은 놀라운 결단을 내려 안위를 보전한다 : 친아들 제갈작을 제 손으로 독살해버린 것이다. 아들이 죽어야 자신이 살아남는 비정한 정치판에서 눈물을 머금고 고육지책을 쓴 게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뒷날 제갈각이 보여준 행보로 추측컨대 냉혹한 판단력, 거침 없는 행동력을 통해 거목들이 쓰러지는 산에서 자리를 지키기 위한 제갈각의 정치적 기량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권력을 위해서라면 피도 눈물도 없는 자였던 거지.

 

직후 새로운 군주 손량을 보좌하게 된 제갈각은 태부 신분으로 여러 조치를 독단적이게 행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조세의 감면과 교관(校官)의 철폐였다. 백성들이 갚지 못한 세금을 면해주고 관세를 받지 않는다는 처분은 새롭게 지도자가 된 군왕의 대표적인 포퓰리즘 정책이며, 이를 베풀면서 제갈각이 매사에 은혜를 숭상했다고 하니 대놓고 군주처럼 굴었다는 뜻이 된다(= 역적질). 또한 교관이란 임금에게 신하들의 근태를 보고하는 자리로, 이를 철폐함은 신권을 강화시키는 조치였다. 손량이 어리다고 제갈각이 권세를 믿고 한껏 교만을 부리는 모습에 다름 아니다.

 

결국 동흥제 전투의 승리에 도취된 제갈각은, 채 넉 달이 되기도 전에 다시 군대를 일으켜 합비 공략을 시도한다. 제갈각이 합비를 공격하려 한 이유는 크게 세 가지인데, "첫째, 위나라는 크고 병력과 물산이 많으니, 동흥제의 패배에서 회복되지 못한 지금이 기회다.", "둘째, 사마사는 패전에 책임 지느라 국론을 모을 여력이 없고, 장수들도 신출내기들이라 가뿐하다.", "셋째, 내가 더 나이 들기 전에 천하통일 한 번 해 봐야지?" 로 요약 된다. 제갈량이 했어도 패기 넘치는 말이라며 조마조마 했을 대사를 눈썹 하나 까딱 않고 외치다니, 대단도 하지. 실제로 제갈각은 개전 표문에서 "나는 무능하지만 오늘 변방을 개척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늙고, 적들은 강성해지니 그 때 가서 목을 바쳐 사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라며 노골적으로 자신 이외에 조위를 정벌할 인재가 없음을 피력했다.

 

그렇게 동원된 군의 규모만 20 만 명 ! 사람들이 너무 빨리, 너무 터무니 없이 큰 병력을 보내는 것에 군과 백성들이 전쟁하는데 지쳤다는 정론으로 반박하자, 제갈각은 다만 "내가 폐하께 올린 표문이나 읽어 보시오(= 공부하세욧!).", "다들 안 된다고만 하니, 반대를 위한 반대 아니오?(= 아몰랑!)" 라고 답도 없는 소릴 해댔다. 닥치고 내 말이 맞으니까 따르라는, 전형적으로 권위를 동원해 반대를 찍어 누르는 식의 대응이다. 물론 그가 직전에 대승을 거두긴 했으니까 정치적 입지야 높았지. 때문에 아무도 뜯어말리지 못 했다.

 

어떻게 됐냐고? 합비 신성에서 고작 3천 명의 수비군에게 털려 전멸하는 대패를 당한다. 당시 제갈각은 작달만한 합비 신성을 포위하고도 군을 나누어 깊숙이 찔러 들어가지도, 적을 끌어내 회전을 벌이지도 않은 채 시일만 지체했다. 20만 대군을 징병하는 것 자체가 민심을 크게 말아먹는 짓인데,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기를 석 달 동안 했으니 군기가 매우 동요했다고 한다. 제갈각군이 봄에 출병했으니 3달 뒤면 여름, 병사들이 썩은 물을 마셨다가 전염병이 창궐하는 사태에 이른다. 그런데도 제갈각은 전사자보다 병사자가 더 많다는 보고를 믿으려 하지 않거나, 상황에 맞는 계책을 올리려는 장수들의 군권을 빼앗는 등 망발을 일삼았다. 끝내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게 된 제갈각은 후퇴해서 심양이란 곳에 주둔했는데, 둔전하면서 기력을 회복하면 다시 합비를 취하려는 뜻에서였다고. 하지만 함께 간 병사들 중 반 이상은 병들어 죽거나 낙오했고, 물자도 멀쩡한 게 없었으며, 조정에서는 이러다가 결딴 나게 생겼다며 연일 제갈각을 호출하는 조서를 보내왔다.

 

추(秋) 8월, 느릿느릿 군을 몰고 온 제갈각은 입궐하자마자 따지고 들며 "아 씨, 조금만 더 했으면 됐는데, 어떤 놈이 날 자꾸 보자고 재촉했냐?" 하고 성깔부터 부렸다. 그러더니 복귀한 직후부터 그간 임관한 조정의 신하들을 싹 물갈이해서 자신이 선발해 앉혔고, 군주의 숙위도 본인과 친한 사람만 기용했다. 또한 하루가 멀다하고 관료들을 불러다가 매양 책망하길, 너희 때문에 한타 말아먹었다고 맹비난했다. 주력을 20만이나 몰고가서 쪽박 차고 온 패전지장이 뭘 믿고 이렇게 까분담? 이 때문에 제갈각을 향한 사람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음은 물론이다.

 

기어이 제갈각은 정신 못 차리고 군대를 재정비 해서 서주를 취하자는 망언을 내뱉었다. 네 놈 입에서 군대 소리가 또 나와?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무위장군 손준은 두 달 뒤인 10월, 제갈각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서 손준은 제갈각을 주살하고 일가붙이까지 남김 없이 도륙했다. 이로써 과거 제갈근의 예언대로 된 것이다.

 

비록 손준 또한 인격자는 아니었지만, 그는 제갈각을 살해한 자리에서 시체만 치우고 그대로 술을 즐겼다고 한다. 천하를 호령한 오 태부 제갈각의 죽음이 손준에게는 한갓 술안주에 지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후 오는 두 번 다시 중원을 도모하지 못 하다가 멸망에 이른다. 만일 제갈각이 인품을 갈고 닦았더라면, 빛나는 지혜와 높은 공훈을 사모한 사람들의 지지로 국난을 슬기롭게 이겨낼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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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의 위양공(威襄公) 신도비. 그의 삶은 전적으로 임금의 총애에 기댄 것이었다>

 

이순몽은 명장들의 보조를 맞추어 대마도 정벌, 여진족 토벌 등 조선 초 정복 사업에 힘쓴 인물이다. 아버지 이응이 좌명공신인 덕택에 음서로 관직을 시작한 그는 정 3품 대호군(= 궁궐 숙위직)이었음에도, 군무로 공적을 쌓았다.

 

대마도 정벌 당시 이종무의 지휘를 받은 조선군은 대마도를 급습해 왜구 110 여 명을 죽이고 수많은 집과 배를 불태웠다. 깜짝 놀란 왜인들은 산으로 부랴부랴 도망쳐 숨었는데, 이들이 병량을 갖고 가지 않았음을 눈치 챈 조선군은 지역을 봉쇄하고 느긋하게 포위 작전을 편다. 그런데 우군절제사 박실이 상륙해서 적지를 정찰하다가 앞뒤로 매복에 빠지는 바람에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했다. 이 때 이종무의 중군은 구경만 했으나, 좌군절제사 이순몽은 하선하여 활을 쏘아대며 항전했다. 그 덕분으로 조선군의 피해가 그칠 수 있었고 이순몽은 공을 인정받아 좌군총제에 오른다.

 

여진족을 쳤던 파저강 전투에서는 최윤덕의 지휘를 받았는데, 중군절제사로서 선봉대 2천 여 명을 몰아쳤다. 이순몽은 여진족 70 여 명을 죽이고 56명을 포로로 사로잡아, 세종이 이를 흡족히 여기며 노비 8명과 판중추원사(= 경비대장)의 벼슬을 내렸다. 이처럼 이순몽은 그럭저럭 싸울 줄 아는 장군이었고, 사후 위양(= 굳세고 군공을 세움)이란 시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순몽의 포악하고 방약무인한 성격은 태종과 세종을 애먹였다. 도대체 이런 인사가 어떻게 후세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이순몽이 처음 등장한 것은 태종 16년(1416년), 취해서 당시와 이후에도 자신의 상관인 최윤덕에게 욕지꺼리를 하다가 의금부에 투옥되면서부터다. 명색이 대호군이란 자가 술을 처먹고 궐을 들어선 것도 모자라 주사를 부렸으니 응당 죄를 받아야지. 그런데 태종은 그를 특별히 아꼈고, 공신의 아들이란 이유로 금방 풀어주었다. 한 술 더 떠서 이듬해에는 아예 무과에 급제 시켜 주고 의용위절제사(= 근위병단장)를 맡기기까지. 하지만 또 다시 1년 뒤, 이순몽은 명나라 사신을 송별하는 모화루에서 세종과 태종 곁에 칼을 차고 올라갔다가 의금부에 갇히게 됐다. 이 때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패악질을 부려, 때려서라도 성질 죽여야 한다는 말이 나왔지만, 역시 태종에 의해 고문 받는 일 없이 고향인 영천으로 보내졌다.

 

군역에 있어서 이순몽의 언행도 걸작이다 : 대마도에서 귀환한 이순몽은 "출정했을 때 오직 신만이 상륙하여 고지를 거점으로 온 힘을 다해 적과 싸웠나이다. 또한 20일부터 25일까지 왜적을 격멸하고 공을 세운 자들의 등급을 매겨 보고했사온데, 우도절제사가 이를 누락했나이다. 공을 기록할 때 적의 목을 벤 사람만 기록하고, 적군을 쳐서 물리친 사람은 기록하지 않았으니, 장차 후임들에게 권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즉, 나는 공을 세웠는데도 이 정도 대접 밖에 못 받았으므로, 이것이 본보기가 되어 다른 사람들도 의욕을 내지 않을 거라는 말씀이다. 아니, 박실이도 싸웠고 이종무도 처음엔 잘 싸웠잖아? 이러한 사실은 쏙 빼놓고 입을 터는 것은 머리에 공명심만 들어찬 언사에 다름 아니다.

 

파저강 전투에 앞서, 사람들이 도절제사(= 도 내 군사령관. 여기서는 평안도절제사) 최윤덕에게 중군절제사를 겸하도록 해서 토벌대를 총 지휘하도록 하자고 건의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좌군절제사로 내정돼 있던 이순몽이 거들기를, "최윤덕이 기왕에 도절제사를 맡았는데 또 다시 좌 · 우군을 모두 통솔하면 고르게 다루지 못해서 새로이 중군 지휘관을 보내느니만 못 할 것입니다." 라며 반대했다. 때문에 조정에서는 결국 이순몽을 중군절제사로 임명했던 것이다.

 

평소 행실은 더욱 가관 ! 이순몽은 태종이 죽어 국상 중인 기간에 술을 먹고 뱃놀이를 하다가 그만 사람을 빠뜨려 죽인다. 이 일로 사헌부가 벌떼처럼 달려들어 물어뜯었지만 세종은 잠시 파직했다가 복직시키는 것에 그쳤다. 2년 후, 세종이 내린 금주령을 어기고 술 잔치를 벌였다가 또 탄핵을 당했는데, 이번에도 세종은 불문에 부쳤다. 3년 뒤, 이순몽은 친구의 첩과 사통하다가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는 임무마저 져버렸는데 변명하길 "처가에 내려갔다 그만 날이 저물어서 거가를 호종하지 못 했습니다." 라는 말로 거짓을 고했다. 그 친구는 이순몽의 간통을 알아차리자 두 년놈의 머리털을 박박 깎고 멍석말이를 놓았다. 거짓말도 들통나고 수모를 겪은 이순몽은 기망죄로 장 70대, 친구 첩 빼앗은 죄로 장 80대를 선고 받았는데, 세종이 공신의 자식이란 이유를 들어 모두 없던 일로 해주었다. 그냥 관직만 빼앗고 외방에 내친 정도? 그러고도 이듬해에 복직시켰다.

 

어머니 묘에 제사 지내고 돌아오던 길에, 세종의 금주령을 또 또 어기고 술에 취해 광망한 행태를 보였는데, 기생을 데리고 냇가에서 같이 목욕하다가 "나 기생이랑 행음(行淫)한다 !" 라고 외치더니 그대로 정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다른날에는 역시 취해서 입궐해서는 임금이 앉는 접이식 의자에 멋대로 앉았다가, 관원들이 놀라서 꾸짖자 도리어 팔뚝을 걷어부치며 욕을 퍼부었다. 2년 뒤, 군왕들의 전용 사냥터에서 자기가 사냥을 하다가 걸렸다. 이순몽이 뇌물을 받아먹었다고 하여 국문해봤는데, "나한테 준 게 아닌데 왜 내가 받았다고 그래 ! 그리고 너네들, 왜 몰래 너희끼리 짜고서 나를 찍어내려는 거야 !" 하며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세종은 이 모든 사건들을 겪고도 이순몽에게 죄를 주지 않았다.

 

이순몽의 처가 먼저 늙어죽자, 이순몽은 이쁜 과부댁 권씨와 재혼하기를 청했다. 권씨는 따르지 않으려 했으나, 이순몽이 말했다. "일찌기 네 어미가 나로부터 곡식을 꾸어갔으니 이를 갚지 못하겠거든 나와 혼인해야 한다. 네 어미도 과부가 아니더냐? 만일 듣지 않으면 임금께 아뢰어 네 어미에게 장가를 들 것이다." 이에 할 수 없이 권씨가 재가하니,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이 엄마를 찾아 부르짖는 소리에 이웃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왜 태종과 세종은 이런 말종을 계속 용납했을까? 그의 재주와 용기는 실상 웅략을 담았다고 보기 어려웠고, 남을 시기하고 자만하는 성품은 비루하기 그지 없어 도무지 관직에 쓸 재목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사관은 그의 졸기에 "남보다 무예가 뛰어나지 않았는데도 가는 곳마다 공을 세워 사람들이 그를 복장(福將)이라 했다."고 썼는데, 여기에 성품까지 고결했다면 그 복을 오래 누리며 높은 지위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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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원수, 게오르기 콘스탄티노프 주코프(Гео́рг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Жу́ков). 몇 안되게 인자한 얼굴로 찍힌 사진이다>

 

게오르기 주코프는 두 말 할 것 없는 소련의 명장으로, 흔들리는 불곰을 일깨워 동구권에 도사리는 야수로 빚어낸 장본인이다. 소련은 주코프와 분전한 장군들의 힘으로 2차 세계대전의 위난을 극복해내고 승전국으로 남을 수 있었다.

 

주코프는 천생 군인이었다. 입대하기 전까지는 가죽이나 만지며 일절 총부리와 관련 없는 삶을 살았던 그는, 훈련소에서 탁월한 성적을 올려 장교들의 주목을 받았다. 곧 제국군 기병대에 부사관으로 임관, 1차 세계대전에서 용감하게 싸운 공로로 훈장도 받는다. 제국이 붕괴하고 나서는 붉은 군대의 장교가 되었으며, 탐보프 반란 등 적백내전 당시의 여러 민란을 진압하는 자리에 투입되었다.

 

당대의 소련 원수였던 미하일 투하쳅스키는 종심타격이론이라 하여 적을 재빠르게 격멸하는 전술 이론을 주장했는데, 그 핵심은 기계화된 군단의 제파적 투입에 있었다. 그러나 투하쳅스키를 개인적으로 싫어한 스탈린이 목을 쓱싹해버린 이후, 아무도 기계화 군단의 필요성, 나아가 종심타격이론 자체를 거론하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주코프만은 일찌기 기계화 군단이 필요하며, 종심타격이론 또한 매우 유용한 전술이라 주장했다. 그는 할힌골 전투에서 일본 관동군 7만 명을 상대로 기계화 보병/포병 + 전차 연대(= 기계화된 군단)를 동원해서 포위 전술(= 종심타격이론)을 구사, 6만 명을 궤멸시키고 2주만에 승리를 거머쥐어 혜안이 있음을 증명했다.

 

총참모장(= 합참의장)에 오른 주코프의 담대함도 눈여겨볼 만 하다. 주코프는 독소전쟁이 임박하자 소련군 무장의 기계화를 더욱 서두르고 보다 많은 공군전력을 확보할 것을 끊임 없이 호소했는데, 스탈린은 독일을 쓸 데 없이 자극할 우려가 있다며 이를 거절로 일관했다. 결국 전쟁이 발발, 독일군이 진격하자 소련은 3달 동안 120만 명의 병사와 1,200 여 대의 비행기, 발트 3국을 비롯한 헤아릴 수 없는 손해를 입었다. 이 때도 주코프는 물자와 인력을 온존하기 위해 후퇴를 건의했는데, 스탈린은 결단코 물러서지 말 것을 주문했다. 개빡친 주코프는 계급장을 떼고, "내가 총참모장인데도 내 말 안 들을 거면, 나도 총참모장 안 합니다. 전장으로 보내주십시오." 라는 말과 함께 레닌그라드 수비사령관으로 내려간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끔찍한 전황을, 주코프조차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사기가 말이 아니었던 소련군을 지탱한 것은 주코프의 집념이었다. 주코프는 사령관으로 부임하러 가는 와중에 수송기가 피격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으나, 직후 독일군을 상대로 반격을 개시하여 핀란드와의 교접점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주코프는 다시 서부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모스크바로 떠났고, 독일군이 러시아의 장마철에 대응하지 못 해 미적대는 사이, 신속하게 방어선을 구축하고 철도를 활용해 미친듯이 물자를 끌어오면서 반격을 준비할 역량을 마련했다.

 

자신의 삽질로 전선이 고착화되자 능력의 한계를 깨달은 스탈린은 드디어 주코프를 최고사령관 대리로 임명하여 군사 방면의 모든 부분을 일임했다. 날개를 단 주코프, 이에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을 승리로 이끄는 것으로써 답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양측 합쳐서 200만 명의 인명 피해를 낳은 지옥 그 자체였고, 독일군도 소련군도 물러설 수 없는 일대 회전이었다. 주코프는 당시 총참모장 바실렙스키와 치열한 궁리 끝에 이중 포위 섬멸 작전, 일명 천왕성 작전을 구상했다. 작전의 요체는 스탈린그라드를 물고 늘어지는 독일군을 다시 한 번 둘러싸서, 안팎으로 포위하는 것 ! 이 작전의 실행만을 위해 100만 명 남짓의 병력이 모였고, 수뇌부에서도 아예 문서나 무전을 금하여 구두로만 명을 하달하고 스탈린그라드 현지에도 비밀로 하는 등 철저히 적을 교란하는 수완을 선보였다. 소련군의 허를 찌르는 역공으로, 독일군은 30만 명 가량의 병력을 그물 안에 던져놓게 됐다. 이들 독일 제 6군은 추위와 기아에 시달리다 끝내는 항복했는데, 9만 명 정도로 쪼그라들어 있었다고 한다.

 

자신감에 찬 소련군은 제 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참패한다. 여기엔 주코프도 책임이 있다. 제 6군은 독일군의 정예 부대였으니 이들을 쳐서 이긴 소련군이 승기를 잡았다고 낙관한 탓이 컸을 것이다. 주코프와 사령부는 아예 중부집단군을 섬멸하기 위해 남부 전선에 군을 깊숙이 밀어넣었다. 하지만 너무 깊이 들여보낸 나머지, 3개 야전군의 후방이 끊기면서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여기에는 포포프 전차군을 비롯한 소련군 주요 기갑군이 편제돼 있었기 때문에, 매우 뼈아픈 패배가 아닐 수 없었다. 독일의 명장 만슈타인은 애초부터 소련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거짓 후퇴하면서 신나게 함정을 파놓았던 것이다. 소련군은 결국 독일군의 기갑 부대가 잠시 이탈리아로 떠난 사이를 노린 주코프의 진격 명령으로 겨우 하르코프를 수습할 수 있었다.

 

이후 주코프는 바그라티온 작전, 베를린 진격전 등에서 화려한 전과를 세우며 독일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특히 바그라티온 작전은 물경 120만 명의 대병력과 5천 기 이상의 항공기가 동원된 거대한 규모의 작전이었고, 더구나 핵심은 적 전선의 좌우를 치는 척하며 정면으로 들이받는 기만에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난이도를 자랑했다. 이것을 성공적으로 기획, 집도한 주코프의 능력은 굉장하다고 할 수 있겠다. 전후의 주코프는 상기한 공과를 인정받아 국방장관직까지 오르고, 핵무기가 만능 열쇠로 작용한 다가올 전쟁을 대비해 군 부대를 개편하는데 힘썼다.

 

하지만 주코프는 부하들에게 유달리 가혹했다. 욕설은 기본이요, 구타해서 이빨이 나가게 하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같이 가망 없는 싸움에 앞서 군기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많이 상하게 했다. 그가 레닌그라드 수비 사령관이 되자마자 한 일은, 바로 항복한 사람의 가족들을 끌어내서 처형하는 일. 주코프가 소련군의 지뢰 제거 방식을 논할 때 했던 말도 유명하다 : "소련군은 지뢰밭을 보면 그냥 돌격합니다. 어차피 기관총에 죽든, 지뢰에 죽든 사상자 수는 비슷하거든요." 주코프식 지뢰 제거 방법은 자조적인 공상으로 끝난 게 아니라 실제로 동부 전선에서 자행된 방법이기도 하다.

 

또한 주코프는 매우 오만하고 분별 없는 사람이었다. 자서전이나 공석에서 자신의 공은 추켜세워도, 본인이 미워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폄하하며 소인배처럼 굴었다. 종전 이후 "스탈린이 한 게 뭐가 있어. 내가 다 했지." 라고 혀를 잘못 놀렸다가 숙청빔을 맞을 뻔 했을 지경. 독소대전의 전환점에 대해서 묻는 질문에 답할 때 "모스크바 공방전이 전환점이었다."고 대답했다는데, 그 나름의 전훈이 있지만 대체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꼽는 군인들 중에서 특이하게도 자신이 처음 투입된 전장을 고른 것이었다. 게다가 베를린을 칠 당시 자신의 실책으로 진격이 더뎌지자, 베를린 점령의 공을 빼앗길 것이 염려되어 먼저 가던 이반 코네프를 공격할 뻔 한 적도 있다. 이렇듯 인간성에 문제를 보인 주코프는 몇 차례나 증명해 보인 유능함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에게조차 냉혹한 사람이란 평을 듣게 되었다.

 

주코프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갈아넣어 버린 수 백 만의 장병들은 조국 소련의 명맥을 떠받치는 반석이 되었다. 그가 마냥 덕장이었더라면 끔찍한 2차 대전의 혼란을 넘어서지 못 했을 지도 모르지. 그러나 참회하는 기색이나 최소한 신경쓰는 마음씨조차도 갖지 않은 점에서, 주코프란 인물의 업적을 마냥 영광으로 치부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가 최소한의 인간미라도 보였더라면, 단호한 결단으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끝까지 명성을 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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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2019.7.15 기사. 직장인들이 감당해야 하는 것은 업무만이 아니었다>

 

과열경쟁 사회에서 노동 시장은 인간에게 기능성을 갖추라고만 강조해왔다. 처음엔 사지 멀쩡하기만 해도 고용해주던 기업들이, 이윽고 4년제 대학 나와서 자격증을 주렁주렁 매달고 인턴 경력 · 해외 연수 경험이 풍부해야 겨우 뽑아줄까 말까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바늘 구멍만 한 자리라도 비집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으니까. 고도로 첨예화된 스펙 경쟁의 시대, 청년들은 모두 자신을 상품화하는데 몰두하게 됐다. 팔아치울 수 있는 부분을 열심히 계발하고, 자기소개서에 훈장처럼 남겼다. 그 노고와 성과는 분명 소크라테스 시절의 고대 그리스 청년들과 비교해 볼 것도 없이 빼어나겠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성을 잃었다. 내가 잘 하고 좋아하는 것들로는 나를 팔 수가 없다. 남들이 좋아하고, 남들도 다 하는 걸 잘 해야 겨우 출발선에 서 볼 수라도 있다. 그렇게 여기며 남들처럼 NCS 공부하고, 면접에 좋다는 동영상 강의를 보약처럼 들이켜고, 취업 학원을 다닌다. 어렵사리 취직한들, 나를 대체할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는 불안감에 떨며 하루를 연명한다. 남들만큼은 해야 한다(= 규격화), 대신할 게 많다(= 대량생산)는 특성은 물건에 다름 아니다. 우린 인력 시장에 공급되는 물건이 된 것이다.
 

그 반동으로 우리 사회에 갑질 문화가 만연하게 됐다. 국가인권위원회의 2018년 통계에 따르면 직장인 1,500 여 명 가운데 74%가 갑질을 경험했다고 한다. 청년들이 스스로를 매대에 올려놓았으니, 손님 되시는 기업들이 찬찬히 골라온 물건들을 맘대로 쓰는 것이다. 물건이야 널렸고, 금방 새 걸로 교체할 수 있으니 더더욱 그들에게는 거리낄 것도 없다. 갑질의 사례로는 인격적 모독이나 노골적인 무시와 하대, 실적 가로채기 또는 근거 없는 비방, 심하면 손찌검과 성폭행 등 이루 말 할 길이 없다. 이러한 행위는 비단 기업이 아닌 그 누구라도 가할 수 있다. 여전히 가게에서 점원에게 돈을 던지거나, 업무 외의 서비스를 요구하거나, 생떼를 부리거나 폭언 · 폭행을 일삼는 손님들이 있잖은가. 시장 구성원이 인간성을 상실한 채 수요와 공급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그들이 사고 파는 게 사람이란 걸 망각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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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비디오 머그 표지.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이 통과되고 1달만에 200여 건에 달하는 신고가 접수됐다고 한다>

 

제도적으로 이러한 갑질을 예방, 처벌하기 위해 여러 장치들을 마련하고 있다. 공공분야 갑질 근절 종합대책이 작년 2월부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작년 7월부터 시행 중이고, 민간 차원에서도 직장갑질119(https://blog.naver.com/gabjil119) 등의 단체를 설립, 사회에서 갑질을 근절하고자 다방면으로 시도하고 있다. 좋은 출발이며, 매우 중요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단, 갑질의 영원한 추방을 위해서는 제도 뿐만 아닌, 민간의 인식 차원에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날 소크라테스의 아레테 론(論)이 갖는 의의는 크다. 바로, 인품과 미덕의 상관관계, 그리고 미덕과 사회 번영의 연결 고리를 분명히 하는 부분 때문이다. 상사가 나보다 실적이 많든 적든, 본청 업체 직원이 하청 업체 직원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서 취직을 했든 안 했든, 손님이 우리 가게 오시기 전에 나라를 구했든 말든, 갑질을 하는데 있어서 아무 상관이 없다. 진짜 문제는 갑의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다는데 있지. 그들은 인간의 아레테를 탐구할 기본적인 자세부터가 되어 있지 않다 : 겸손함이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미덕을 누릴 근본부터 상실했다.

 

동양권에서는 덕을 형이상적인 무언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사전적으로 너그러운 마음씨라나? 때문에 덕이란 게 뭐가 그리 중요하냐, 라고 되물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덕은 정의 사회 구현을 향한 의지를 뜻한다. 이러한 의지는 우리들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그래서 후덕한 사람을 많은 이들이 따르는 것이다. 우리도 우유 하나 살 때 꼭 뒷면의 제조사를 확인하며 한 번 더 생각하고, 편백나무 방향제를 구매해서 혼 내주는 등, 미덕의 순환에 동참하고 있지 않은가. 소크라테스 또한 탁월함을 이로운 것으로 여겼고, 개개인의 탁월함이 모여 사회의 번영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미덕은 마냥 아름답기 이전에 우리들에게 공익을 안겨 준다는 뜻이다.

 

덕은 사회적 이익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도 이득이다. 똑같은 사업가라도 덕망이 있는 사업가라는 평판이 더 잘 나가는 건 인지상정이다. 백종원 선생이 외골수처럼 자기 사업만 이를 갈면서 돌봤더라면 지금 같은 명성이 있었을까? 그는 이미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하나의 브랜드로서 위상을 떨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본인의 행적에서 드러난 성품이 한 몫 했다. 덕이라는 가치는 죽은 게 아니라 생생히 살아 있으며, 오늘날 오히려 새로운 경제적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으려 하고 있다.

 

우리들부터 겸손해져야 한다.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자성(自性)을 간직한 존재들로 비록 그것을 분명히 설명하진 못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각자의 행실에 조심하고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성 회복의 단초이며, 궁극적으로는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길이다. 이와 같이 믿으면서, 고용노동부에 신고하거나, 불매운동을 벌이는 등의 금융치료도 동반한다면, 머지 않아 우리 사회에 드리운 암운도 걷히지 않을까.

21개의 댓글

퍄 늘 느끼지만 개드립에 있기엔 너무 교양적인 글이다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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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갈다보니할말도없음

늘 봐주셨다는 말씀에 너무도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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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6

아조시가 쓴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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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

네, 직접 썼습니다. 부족한 부분이 많아 부끄럽기 그지 없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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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6

돌아왔어..그가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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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IlIlIlIlIlIlI

고맙습니다, 기다려주셔서. 실은, 미비한 부분들에 대한 송구스러움 때문에 쓰고 지우길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순간의 욕망을 못 이기고 등록 버튼을 누르긴 했지만, 여전히 성급했던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그렇지만 고맙습니다. 다른 글도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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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6
@한그르데아이사쯔

그 미비함이 때로는 독자로 하여금 사고를 다시금 이끌어내고 나는 좀 생각이 다른데...라고 하게 해주는 부분일수도 있습니다. 물론 지나친 미비함은 논리비약과도 같을테니 독자로 하여금 부정적인 시선을 갖게 할수도 있겠지만, 세상에 완벽이 어디있겠습니까. 다들 그렇게 우리는 하나씩 부족함에도 잘 살지 않습니까? 글 또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부담갖지 마십시오. 어차피 지나치게 미비하다 싶으면 독자들이 알아서 회초리나 빠따 들고 경을 치러 올테니 :p 맞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좋은 새벽 되시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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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lIlIlIlIlIlIlI

맞아 죽을까봐 그러죠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달게 맞는 버릇을 들여야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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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6
@한그르데아이사쯔

Aㅏㅎ힣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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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6

잘 읽었습니다. 정말 누추한 곳에서 누군가 쥐어준 깜짝선물 같아 기분이 좋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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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렌지야

좋게 읽어주셔서 좋은 글이 될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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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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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boo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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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6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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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㐃나무

고맙습니다, 다른 글들도 잘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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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6

선생님 다른 곳에도 올리시는진 모르겠는데 네이버 블로그나 티스토리나 브런치같은 곳에도 올려보세요. 개드립에서 썩고 있기에 선생님의 글은 너무 아깝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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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리지

언젠가 그럴 기회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개드립 식구들과 즐길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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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7

개추 크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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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綠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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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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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탕탕몽실이

저도 늘 봐주고 계셔서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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