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그림 보고 떠오른 잡념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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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라르트 데 라이레세, 아이네이아스에게 무구를 내어주는 아프로디테. 친자식도 아닌데 역작을 만들고 쓰러져 있는 헤파이스토스가 눈물겹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 영웅 측의 마지막 생존자다. 그의 아버지 안키세스가 트로이 왕족이었으므로, 그 또한 왕족이었다. 육촌 관계인 헥토르와 함께 아카이아 연합군을 상대로 전공을 세운 장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더 큰 숙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 멸망한 트로이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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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블레이크 리치몬드, 아프로디테와 안키세스. 장장 14일에 걸쳐서 사랑을 나눈 결과, 아이네이아스가 잉태 되었다>

 

아이네이아스의 어머니는 아프로디테, 인간에게 유독 자주 반하는 여신이다. 그녀가 트로이아 전쟁 내내 파리스의 편을 든 것은 어찌 보면 황금사과의 선택만 놓고 내린 결정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프로디테는 전쟁 도중 몇 번의 중요한 개입을 하는데,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인도하면서 한 번, 파리스를 도와 메넬라오스와 겨루도록 하면서 또 한 번, 그리고 아이네이아스를 디오메데스로부터 지켜내면서 또 한 번 트로이를 거든다. 小 일리아스 편에서는 아이네이아스에게 예언을 누설하여 역시 트로이를 돕고자 했다. 정확히는 아들의 거취를 마련하고, 그를 위해 애썼다는 것이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로이는 함락되고, 많은 유민들이 발생했다. 그들을 이끌어 줄 트로이 토착 세력은 약소해졌는데 반해 아카이아 연합군은 도시를 유린하고 있었다. 10년 간의 항쟁 동안 강인하게 버텨온 트로이인들에게 크나큰 시련이 닥친 것이다. 이에 아이네이아스는 시대의 부름과 타고난 사명에 따라 행동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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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코 바로치, 트로이를 탈출하는 아이네이아스. 아버지와 아들, 아내를 데리고 탈출하는 와중에도 일리오스의 신위만은 모셔가고 있다>

 

아이네이아스의 숙명은 서사시환에서 유별나게 강조되는데, 오죽하면 트로이 멸망에 표를 던진 포세이돈조차 아이네이아스를 아킬레우스로부터 구해주면서 "그는 트로이를 재건할 운명이니, 여기서 죽어선 안 된다" 라고 선언한다. 이 때문에 오히려 아이네이아스가 운명적으로 트로이를 부흥시켰다기보단, 후세에 아이네이아스의 행보를 관찰한 사람들이 그에게 일화를 덧붙여준 것이 아닐까 의심된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네이아스는 사실 A급 무장은 아니었거든. 급으로 따진다면 아이아스, 헥토르, 디오메데스 같은 자들이야말로 쳐줄 만 했지, 아이네이아스는 그들에 비해 듣보잡이나 다름 없었다. 당장에 디오메데스는 아레스와 아프로디테, 올림포스 신 둘을 따낸 전적이 있고, 아이아스와 헥토르는 존재 자체로 전세를 역전했던 양군 진영의 대들보였다. 비록 아킬레우스처럼 특급 무장은 아닐지라도, 이들 그리스 영웅들의 틈에 이름을 올려보려면 인상 깊은 활약상이 있어야 할텐데 아이네이아스에게서는 그런 면모를 찾을 수가 없다.

 

여기서 질문 : 그렇다면 누가 아이네이아스에게 그러한 사명을 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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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암 아돌프 부그로, 호메로스와 길잡이. 호메로스가 맹인이었다는 설을 차용한 묘사인 듯 하다>

 

나는 서사시환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서사시환의 중요한 명문인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호메로스가 썼다고 알려졌는데, 그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서사시환 후반부의 주인공은 오디세우스, 네오프톨레모스, 그리고 아이네이아스인데 세 주인공을 묘사한 온도차는 모두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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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앙드레 몽시오, 오디세우스의 귀환. 오디세우스의 이름은 "증오받는 자"로 풀이된다>

 

먼저 오디세우스부터 보자. 꾀돌이 오디세우스는 이타카라는 소국의 왕 신분이었으나, 고생길일 게 뻔한 트로이아 대전에 참가하기 싫어서 광인 행세까지 했던 인물이다. 밭을 갈면서 소금을 쳤다나. 이에 아카이아의 대현자, 팔라메데스가 광증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오디세우스의 갓난배기 아들을 밭 가운데 둬보았단다. 오디세우스가 아들 있는 곳을 슬슬 피해서 마저 밭을 갈았으니 들통나지 않을 리가. 이 일로 원한을 품은 오디세우스는 계략을 꾸며 훗날 팔라메데스를 엿먹인다. 그러자 장량급 모사를 잃어버린 아카이아 연합군은 그토록 많은 군세를 가지고도 우위를 점하지 못해 10년씩이나 전쟁을 질질 끌어야 했다. 지리멸렬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가 낸 전략은 이른바 "트로이의 목마" 작전으로 대표되는 매복 기습. 

 

「오디세이아」에선 갖은 고생을 하면서 귀향하고자 노력하는데, 이 때도 그의 지략은 빛을 발한다. 보통 고전 문학에서는 난관을 헤쳐나가는데 지혜를 쓰는 인물이 등장하지만, 오디세이아의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벌인 일을 수습하는데 머리를 굴린다. 폴리페무스에게 잡힌 일이나 키르케에게 선원들을 잃는 등의 이벤트에서 두드러지는데, 말빨과 기지를 발휘해서 (스스로 초래한) 위기를 모면하고는 하는 그의 모습은 익살스럽기까지 하다.

 

이렇듯 오디세우스는 시종일관 지고지순한 삶과 거리가 멀게 묘사된다. 오디세우스는 계략을 간파한 팔라메데스에게 복수하기도 했고, 거짓 퇴각과 야습이라는 기만 전술을 활용해 승리를 이끌었으며, 폴리페무스를 장님으로 만들었을 적에도 굳이 이름을 밝히며 놀려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자신의 빈 자리를 노린 구혼자들을 일일이 쏴죽이기까지 했다. 이로 미뤄보건대 오디세우스는 결코 정의로운 영웅이 아니었다. 그러나 또한 표독스러운 악인인 것도 아니었는데, 그의 행동에 있어 가장 큰 동기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당대 영웅들이 전투에서의 영광을 차지하는데 집중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오디세우스가 보여주는 계략들도 주로 임기응변인데, 대체로 자신이 실수하거나 자초한 일들을 떼우는데 썼다. 즉, 원대한 포부나 큰 야망이 있다기보단 다소 소박한 인물이었다는 말씀. 그러므로 오디세우스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선과 악이 혼재하는 인간적인 영웅"이라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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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조제프 르페브르, 프리아모스의 죽음. 이미 일리오스 성 내에 지옥이 펼쳐져 있다>

 

그런가하면 「일리오스 낙성」에서 보여지는 네오프톨레모스의 모습은 어떤가. 아킬레우스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닮아 당대의 미남으로 일컬어진 그는 고작 10살의 나이에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해 활약을 펼쳤다. 네오프톨레모스가 맡은 임무는 바로 트로이 섬멸전의 선봉대! 

 

네오프톨레모스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 먼저 트로이 입성을 도운 내응자 에우리필로스를 죽여버렸다. 트로이의 목마 작전에서 목마 안에 타고 있었던 사람도 네오프톨레모스였고, 프리아모스와 트로이 왕족들이 있는 궁궐에 침입해 앞을 막아서는 왕자 폴리테스를 죽인 사람도 그였다. 그런데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다리를 화살로 쏴맞추고는 처절하게 기어가는 그를 비웃으며 느릿느릿 따라가 칼로 찔러대고, 출혈로 죽을 때까지 괴롭혔다. 뿐만 아니라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갓난아이 아스티아낙스를 잡아채다가 프리아모스를 때려죽이는데 썼다. 말그대로 아기를 몽둥이 삼아 사람 잡는데 휘둘렀다고(성벽에서 내던져 죽였다고도 한다). 그런 뒤에는 안드로마케, 바로 그 아기의 어머니이자 바로 그 영감의 며느리를 아내로 취해 본국에 끌고갔다. 게다가 헥토르의 누이되는 폴릭세나를 죽이고 아버지의 무덤에 뿌려 죽음을 기렸다고 한다.

 

당연히 이 소름돋도록 냉혹하고 잔학스러운 묘사에서, 네오프톨레모스에 대한 평가는 "폭력과 충동에 지배 당하는 극악인"에 지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영광스러운 승리의 기록이라기에는 노소를 가리지 않는 난폭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네오프톨레모스 생전의 그리스인들에게는 칭송받을만큼 용맹스러울지 모르겠으나, 「일리오스 낙성」을 집필한 사람의 시절에는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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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바스티아노 콘카, 낙원을 바라보는 아이네이아스. 내 백성들을 인도해 주소서>

 

아이네이아스는 그들에 비해 지극히 신실하고 선하다. 어머니이긴 하지만 여신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따랐고, 트로이가 함락된 그 순간에도 신성하게 받들던 성상을 챙겨 나온 그였다 : 똑같이 어머니가 여신이었던 아킬레우스가 고집 부리다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보자. 아이네이아스는 현명하게도, 파리스에게 헬레네를 돌려줄 것을 충고했고 전쟁이 발발하자 앞장서서 싸움에 임했다. 본의 아니게 전투를 그만둬야 했지만, 스스로 직분을 져버린 채 물러서 본 적이 없으며 장군으로서의 책임을 다 했다.

 

이처럼 성실하고 모범적인 장수가 트로이엔 많았다. 특히 헥토르가 그랬지. 하지만 헥토르는 죽었고 트로이가 멸망하면서 트로이군은 와해됐다. 아이네이아스는 가망 없는 사태에 야음을 틈타 도주할 수도 있었다 : 동관에서의 조조처럼 ! 그러나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 생존자들을 이끌고 퇴각하는 길을 택했다 : 장판파에서의 유비처럼 !

 

유비가 그러한 평가를 받듯이, 아이네이아스도 이러한 행보를 통해 숭고하고 뛰어난 인품을 지닌 용사로 평가된다. 구태여 이런 묘사를 집어넣은 저자 또한 같은 생각이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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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의 공식 명칭, Senatus et PopulusQue Romanus. "로마 원로원과 인민들"이라는 뜻이다. 로마 왕국과는 관련 없지만 깃발이 없어서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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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리비우스 안드로니쿠스 흉상. 그는 라틴 문학의 개조로 칭해진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활동 시기가? 바로 로마 왕국의 탄생 연도와 비슷한 기원전 8세기에 해당한다. 로마 왕정은 기원전 753년에 로물루스에 의해 수립되었는데, 「일리아스」는 기원전 8세기 경에 지어져 기원전 6세기 쯤에 문자로 기록되었다. 로마는 이탈리아에 산재한 삼니움, 라티움 연맹 등의 숙적들을 제거하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했다. 또한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카르타고와 충돌, 포에니 전쟁을 유발하고 승리하여 외적인 팽창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렇듯 헬레니즘 문명권을 점차 흡수해가면서, 로마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경제적 상황이 부유해지자 사회의 고급문예를 향한 욕구도 커졌다. 그렇다고 로마 고유의 문학을 소비하기엔 몹시 저질이었던 모양인데, 당시 로마인들이 전쟁에는 능했어도 별로 교양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그리스 문학이 로마로 흘러들어오게 되고, 로마 문장가들이 열심히 그리스 문학을 모체로 연마하게 된다. 특히 안드로니쿠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라틴어로 번안, 기록하여 라틴 문학의 장을 여는 공을 세웠다.

 

앞서 호메로스를 언급하고 뒤이어 로마의 문화적 향상심을 이야기한 이유가 뭐냐고? 호메로스가 활동하던 시기, 즉 서사시환의 생성 연대와 라틴 문학의 활황기를 비교해 보면 이상하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는 아직 꼬꼬마였고, 서방세계는 마케도니아와 헬레니즘 문명권에 속해 있을 시기였다. 그리스적 가치를 공유하는 세계관이 널리 퍼져 있었을 시기라는 소리다. 이는 다시 말해 그리스적 가치관, 곧 파괴적이고 충동적이며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영웅상이 각광 받는 시절이라는 뜻이 된다. 아이네이아스는 여기서 설 자리가 없지 : 그는 운명에 순응했고, 그다지 용맹하진 않았으니까.

 

시간이 흘러 로마가 어느 정도 확장에 성공했다.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로마는 헬레니즘의 찬란한 수준에 한참 못 미쳤지만, 졸부들이 으레 그렇듯 로마인들 사이에 자수성가 했다는 자존심과 상류층을 향한 갈망이 상충하기 시작했다. 로마 내부에서도 "우리 문학의 정체성을 찾읍시다 !" 하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당대 엘리트들은 벌써 그리스 문학에 심취하고 그리스 것이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어 전통 로마 문화는 사양길을 걸었다. 이렇게 되면 로마가 군사력으로 볼 때 우위에 있었을지라도, 그리스가 문화 승리를 달성한 상황인데. 그래도 우리 가오가 있지, 어떻게 그리스 촌놈들 하고 우리 대 로마를 비빌 수 있겠어?

 

그래서 나온 묘책이 바로, 로마의 정체성을 그리스의 영원한 안티 테제, 트로이로 두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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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마 포르타의 아우구스투스 석상. 생전에 신이 된 위대한 사나이의 모습이다>

 

이 때다. 이 때가 바로 아이네이아스에게 광명이 깃든 때이다. 특히 푸블리우스 베르길리우스 마로는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으로 「아이네이스」라는 라틴 문학 희대의 걸작을 남기는데, 여기서 아이네이아스를 찬미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아이네이아스는 로마의 숙적인 카르타고를 한 때나마 지배했고, 여러 땅을 떠돌다가 정착하니 후일 로마의 근원이 될 라티움이다.

 

베르길리우스가 묘사한 아이네이아스의 삶은 숭고함 그 자체인데, 자신의 명예나 욕망 따위보다 더욱 중대한 사명을 위해 희생하는 구도자의 자세를 시종일관 견지하기 때문이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를 탈출하다 그만 아내를 잃고 말았는데, 그녀를 찾아 헤매다 신들로부터 내려진 명령에 수긍하면서 이 악물고 단념하는 장면은 몹시 비장하고 안타깝게 그려진다. 그 뿐인가, 카르타고를 다스리던 여왕 디도와 한 평생 해우하며 잘 먹고 잘 살 수도 있었을 그는, 또 다시 자신의 숙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호의호식 할 기회를 팽개치고 길을 떠난다. 실의에 빠져 장작 더미에 몸을 던진 디도의 소식에 애간장을 끓였음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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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코모 델 포, 투르누스와 아이네이아스의 결투. 로마의 뿌리가 바로 이 싸움에서 시작 되었다>

 

자비로운 성격의 아이네이아스는 투르누스와 라티움의 왕위 계승권을 놓고 결투해 승리한다. 투르누스는 패배를 인정하며 목숨을 구걸했고, 아이네이아스 또한 그를 용서하려 했다. 그런데 정의로운 아이네이아스의 눈에 투르누스가 착용한 허리띠가 보였다 : 이것은 당초 라티움을 공략하기 위해 부른 지원군인 팔라스의 소유물이었다. 동료가 죽었음을 깨달은 아이네이아스는 분노하여 소리쳤다.

 

"감히 그대가 내 전우를 참살해 그의 것을 전리품으로 갖고도 내게서 살기를 바라는가? 이 공격은 팔라스의 것이며, 팔라스가 자신을 죽인 자에게 피값을 청하는 것이다 !"

 

와, 베르길리우스가 아이네이아스를 거의 의리왕 김보성급으로 잘 양념해놨다, 그치? 이렇게 투르누스를 죽인 아이네이아스는 후일 로마로 거듭나게 될 이탈리아 땅에 라티움을 세우고 트로이계 난민으로 구성된 국가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고 한다. 아이네이아스의 애환과 삶의 모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존재했다. 로마를 탄생시키는 것 ! 그 장엄하고도 위대한 업적이야말로 아이네이아스의 존재 이유였고, 그가 숙명에 저항하지 않은 까닭이다.

 

명문장가 베르길리우스가 병으로 작고하면서 「아이네이스」는 완결될 수 없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는 즉시 로마 전역에 이 명저를 배포했고 민족 의식 고취를 위해 열심히 홍보했다. 아이네이아스의 아들이 별명으로나마 "일리우스(Ilius)"로 불리었는데,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이 또한 율리우스(Iulius)여서 "사실 나는 아이네이아스의 직계 후손임" 하고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다시 말해, 서사시환의 후반부 주인공들에 대한 평가는 후대 라틴 문장가들에 의해 고쳐지면서 로마식 가치관이 주입된 게 아닌가, 하는 게 나의 결론이다. 네오프톨레모스, 오디세우스로 대표되는 "그리스인" 영웅들은 당시 로마인들의 그리스인에 대한 시선을 노골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 영악하고, 포악하며, 소심하고, 이기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국부이자 대영웅인 아이네이아스는 다르지 : 그는 대의를 위해 헌신하고, 애민애국하며, 동료와 집단을 소중히 여기며, 신께 경건하다. 그야말로 모범적인 로마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네이아스에게 위대한 운명을 내려준 자는 다름 아닌 로마 시민이다.

 

문제는 트로이의 멸망과 로마의 건국 사이 시간적 간격이다. 로마인들이 고무되어 물고 빨았던 아이네이아스의 대탈출이 사실은 로마가 생기기 400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니. 이러면 로마 왕국을 건립한 로물루스와 아이네이아스 사이에 사실상 무슨 연관이 있냔 말이야. 하지만 로마인들은 가볍게 "그딴 거 무시하자구" 라는 자세로 쿨하게 임했다. 아이네이아스를 자신들의 기원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런 아몰랑 덕분에 로마는 훗날 문화적으로도 강성해져 지구상 유례가 없을 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 글에도 문제가 많지만, 대략 다섯 가지 문제가 있다 :

 

1. 어디까지나 신화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 신화를 취사 선택한 것과 취사 해석한 문제로 진실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2. 호메로스의 실존 여부는 불분명하다 - 서사시환의 중요한 두 작품을 호메로스가 썼다고 널리 알려져있지만, 호메로스가 실존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도 논의했을 정도로 불가사의한 사람이다. 그보다 후대 사람이 완성했는지, 한 사람이 쓰기는 했는지도 알 수 없다.

3. 서사시환의 원전이 맞을지도 모른다 - 이 글의 주요 논지는 1) 아이네이아스는 전형적인 그리스 영웅상에서 벗어난 존재다 2) 일리아스 등의 서사시환은 그리스 시대 작품이다 3) 한편 아이네이아스는 로마에서 밀어주던 영웅이다 4) 따라서 아이네이아스를 칭송하는 투의 서사시환 작품은 후대의 창작이다 의 순으로 진행되는데, 만일 서사시환에서 실제로 아이네이아스를 숭고하게 여겼거나 우연히 신탁이나 계시 같은 영적 경험에 의해 작가가 정말로 그가 대제국을 건설할 운명을 지녔다고 기술한 것일수도 있다. 그럼 다 개소리 되는 거지 뭐.

4. 아이네이아스가 어때서 - 사실 따지고 보면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 전쟁에 연루된 사람들 가운데 잘 풀린 극소수에 해당한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들은 대체로 비명횡사하거나 별 별 고생을 했는데,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러니 무적자 신세인 아이네이아스는 끌어들이기 좋은 소재였을 것이다. 그가 영웅답지 않은데 대접 받아서 수상하다고 여기는 내 뇌피셜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간편할 수도 있다.

5. 증거가 부족하다 - 신화에 기반한 뇌피셜이다보니 이렇다 할 증빙 자료는 없다. 위의 네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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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낭비하게 해서 미안

 

9개의 댓글

2019.03.28
1
@불타는 수염

너무 게으름 피운 것 같아서 빠르게 한 편 ;)

0
2019.03.29
@한그르데아이사쯔

아조씨 책으로 내주세요

1
@불타는 수염

이런 부끄러운 글은 세상에 나오면 안 돼요ㅠ

0
2019.03.28

르네상스 미술은 신화를 알고리즘으로 써먹는 경우가 많으니까 공부할라믄 신화에도 빠삭해야겠다. 특히 호메로스는 무안단물이네 그냥.

1
@뭘로해야되냐

그렇겠네, 심볼처럼 기억되는 강한 이미지일 수록 더욱 자주 인용되고 변용될테니까 :)

0
2019.03.28

잔멸치볶음 들어간 김밥 먹고싷다.

1
@몽실언니

난 참치김밥!

0
2019.03.28

딸칠때 왼손이야 오른손이야?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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