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

그림 보고 떠오른 잡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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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카바넬, 파이드라.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방 안의 모든 걸 가졌지만 금단의 사랑을 갖지 못 해 괴로워하고 있다>

 

파이드라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인 테세우스의 후처로 등장한다. 그녀에 대한 기록은 그리 길지 않은데, 임팩트는 매우 강렬하다 : 의붓아들 히폴리토스를 사모하여 그에게 구애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남편에게 모함한 뒤 자살해 버린 것. 히폴리토스가 자신을 강간하려 했다는 게 그 내용으로, 테세우스는 분노해서 히폴리토스가 나가 뒤졌으면 하고 빌었고 포세이돈이 옳다꾸나, 하고 히폴리토스를 죽여버렸다고 한다(다른 판본의 신화에서는 낙마했다고도 하고).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애잔하다가도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는데, 파이드라가 테세우스의 "후처"였다는 사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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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블린 드 모르간,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황량한 해변이 그녀의 심경을 보여주는 듯 하다>

 

테세우스의 전처는 누구일까? 신화 상으로 테세우스는 많은 여인을 거쳐갔는데, 전승을 따른다면 그의 첫 여인은 아리아드네, 바로 파이드라의 누이이다. 테세우스는 자매 덮밥을 실현한 셈이다.

 

아리아드네는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기 위해 제물이 될 것을 자청한 테세우스에게 반해, 미궁을 탈출할 방법을 일러주고 무구까지 준비해 준 크레타의 공주이다. 이후 테세우스가 미노스 왕의 진노를 살까봐 탈출할 적에 슬쩍 끼어들어, 부왕으로부터 도망쳐 나왔다. 그러다가 신화 판본에 따라 갈리는 모종의 이유로, 낙소스 섬에 내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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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그리스 지도. 최남단에 크레타 섬이 보인다.>

 

앞서 말 했듯 아리아드네와 파이드라는 자매지간이며, 둘 모두 크레타의 공주님이시다. 두 분의 부모님도 고귀한 혈통인데, 부왕 미노스는 제우스의 아들이고 모후 파시파에는 헬리오스의 딸이라고 표현된다. 그야말로 신족인 것이다. 신화를 현대적으로 각색한다면, 뭐 엄청 귀하신 몸이라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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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왕궁 크노소스 궁전 복원도. 개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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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벽화. 개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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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타 벽화. 개쩐다>

 

크레타로 말하자면, 서방 세계에 미케네 문명이 융성하기 전 광명을 비추었던 바로 그 크레타 문명의 발원지이다(BC 14세기까지). 당대의 크레타 문명을 절정으로 이끌었던 왕이 미노스였고, 그래서 크레타 문명은 미노스 문명이라고도 불린다. 즉 아리아드네와 파이드라가 살았던 곳은 전성기를 구가하던, 강대한 왕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미노타우로스에 관한 전승에서도 국력의 일부를 가늠할 수 있는데, 아테네에 미노타우로스 밥으로 바칠 제물을 요구했다는 점은 크레타의 강성함을 드러낸다고 봐야 한다.

 

그럼 여기서 의문 : 이렇게 잘 사는 집 딸내미인 파이드라가, 자기 누이를 이용해먹고 내다버린 개세우스를 왜 따라 나섰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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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를 중심으로 재편된 아티케 권역. 그림판으로 대충 그려서 정확하진 않다>

 

왜냐면 테세우스가 아티케 지방을 평정한 정복군주였기 때문. 부왕 아이게우스를 만나러 가면서 괴인들을 퇴치했다는 신화는 유명한데, 아마도 인근의 토호나 무력집단 또는 중소 폴리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는 기록이 신화화 된 게 아닌가 한다. 이를 현대적으로 각색하면, 당시 테세우스는 아직 후계자가 아니었으므로 후계 구도를 분명히 할 목적으로, 전공을 쌓고자 아티케 일대를 정복해나갔다고 할 수도 있다. 아이게우스는 그 때껏 두번이나 결혼했건만 자식이 없었던 반면, 아이게우스의 동생 팔라스는 50명에 달하는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세등등했고, 형의 왕위를 호시탐탐 노려왔다. 이러니 적장자로 태어난 테세우스이지만 정통성을 확보하고 중신들의 지지를 결집하는 차원에서 무위를 선보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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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 튈르리 정원의 테세우스 상. 소 인간을 때려잡고 있다. 민감한 부분은 무화과 잎으로 가렸다>

 

아이게우스로부터 후계자로 인정받은 테세우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미노타우로스 토벌 작전이다. 대담하게도 제물 행렬에 숨어들어서 미노타우로스를 쓰러뜨리기로 한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 일을 성사시킨다. 이 부분은 왕자 테세우스가 자신의 장기인 쌈박질을 믿고 아테네 팽창주의 노선을 강행한 것을 표현한 듯하다. 신화상으로 크레타에서 미노타우로스를 먹일 공물로 해마다 아테네의 소년, 소녀 일곱을 바치도록 했다는데, 영락없는 약소 식민지의 비애를 드러내고 있다. 이 조공관계를 끊고 새로운 질서를 정립하려는 목적으로 테세우스가 원정을 간 것이고, 그게 성공해서 미노타우로스가 죽는 것으로 표현되었다면 그럴싸하게 이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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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스 왕 석상. 훤칠하게 생겼지만 젊은 테세우스가 무서웠나보다>

 

이처럼 살기 넘치는 테세우스가 두렵기도 했을 것이고, 한편으로 싹수가 노랗다고 판단했다면 미노스 왕이 두 딸을 시집 보내서 혼인 동맹을 맺는 형태로 화약을 맺는 것도 가능했다고 본다. 아티케의 떠오르는 샛별 테세우스가 전도유망하므로 이 기회에 내륙으로 진출할 빌미를 걸쳐놓으려는 계산으로. 

 

에리크토니오스 왕조의 역사를 두고 보건대, 미노스 왕의 안배는 결과적으로 적절했던 것 같다. 테세우스와 파이드라의 사이에서 난 아들 데모폰이 왕위를 잇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기구한데, 왕가의 계보를 조사해보면 테세우스 다음 아테네의 왕위는 메네스테우스 즉 방계 혈통이 물려받기 때문이다. 신화 상으로는 테세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한답시고 삽질하면서 자리를 비운 사이, 메네스테우스가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 때 데모폰과 형제들은 무얼 했느냐. 아티케와 떨어진 에우보이아의 엘레페노르에게 맡겨져 있었단다. 이 중 데모폰은 트로이 전쟁 이후 무사히 돌아와 메네스테우스 계파를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말인즉슨, 왕이 부재한 사이 쿠데타가 발생했고 왕자들은 국내에 믿고 맡길만한 세력이 없어서 외국에 보내졌다가 극적으로 정권을 회복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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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세우스 석상. 죄 많은 남자...>

 

이는 사실 전적으로 테세우스의 잘못인데, 그가 건드린 여자만 해도 크레타 공주 두 명에다 스파르타의 헬레네,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안티오페라는 설도 있음) 등 한 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특히 히폴리테는 파이드라의 죽음과 관련 있는 히폴리토스의 어머니로 여겨지는 사람이다. 이렇게 여자가 많으니 후계구도가 꼬이는 건 당연지사. 그럼에도 명확한 정리 없이 불쑥 사라져서 저승에서 허송세월하고 앉았으니 내란이 일어나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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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나르시스 게랭, 히폴리토스와 파이드라. 철벽 치는 히폴리토스와 아들의 결백을 의심하는 테세우스, 잔뜩 삐친 파이드라가 보인다>

 

그런데 이것도 가만 두고 보면 묘하다. 이타케 전역을 다스리는 임금이라는 신분이니, 후궁을 몇이나 들인들 상관 없기도 했을 것이고 오히려 그에게 딸을 밀어넣어 정약 관계를 맺으려는 세력도 당시에 많았을 것이다 : 크레타 왕가처럼 ! 그렇게 흘러들어온 여인들이 테세우스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들을 낳아 서로의 목적을 갖고 경합을 벌였음이 짐작되리라. 히폴리토스도 어쨌거나 테세우스의 아들, 파이드라와 크레타 계파 입장에선 후계자 경쟁의 상대로 여겨졌음직하다. 그럼 파이드라 입장에선 싸워서 이겨야지 : 그래야 내 아들과 친정댁, 자신의 목숨이 안전해질테니까.

 

나는 파이드라와 히폴리토스의 비극적인 죽음을 그린 신화가, 후계구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을 암시하는 게 아닌가, 한다. 예를 들면 파이드라가 테세우스에게 모함을 가해 히폴리토스를 실각시켰거나, 역으로 히폴리토스 측에서 수작을 걸었으나 역풍을 맞았다거나. 이 과정에서 히폴리토스가 죽은 것은 틀림 없다고 봐야 한다. 파이드라에겐 크레타라는 막강한 배경이 있었던 반면, 히폴리토스는 어머니조차 명확히 전승되지 않고 있으며 아르테미스를 숭상해 순결을 지키겠다는 신념을 지녔다고 하니, 정치적 영향력이 약했다고 해석할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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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 일명 신의 아들들(디오스쿠로이). 형인 카스토르는 말 운전이 특기였고, 폴리데우케스는 권투의 달인이었다고>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테세우스가 헬레네를 납치해오자, 개빡친 그녀의 오라버니들이 아테네를 침공한 것이다. 당시 테세우스는 헬레네를 어머니 아이트라에게 맡기고 저승에 내려갔다는데, 이 틈에 분노의 스파르탄 왕자들이 쳐들어와 아테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테세우스의 엄마와 여동생을 잡아가 강간하고 스파르타에서 노예로 부려먹었단다. 태후와 왕녀가 납치될 정도면 얼마나 털린거야 대체. 이런 혼란기의 아테네에서 파이드라인들 무사하지 못했을 성 싶다. 

 

하지만 우린 앞서 크레타를 쳐부수고 아티케를 두루 섭렵한 아테네의 강함을 보았다. 왕자들 혈기에 그토록 쉽게 무너질 리가 없지. 나는 테세우스가 미처 솎아내주지 못한 궁정 내 파벌 중 일부가 디오스쿠로이 세력에게 내응했고, 그로 인해 아테네 왕가에 위기가 닥쳤다고 본다. 예를 들어, 꼭 히폴리토스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름 모를 아들이 있어서 그를 중심으로 대립했다던가, 아니면 메네스테우스로 대표되는 방계 혈족이 혼란을 틈타 왕위에 도전했다던가.

그리고 이러한 내외의 우환이 겹치면서, 파이드라의 신변에도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그녀의 히폴리토스를 향한 광증과 석연치 않은 죽음에 관한 신화는 이를 암시한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그녀는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아직 어린 왕자들과 함께 막강한 스파르타 병사들과 맞서 싸울지, 아니면 잠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볼지. 파이드라의 선택이 후자였다면, 역사의 흐름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신화 판본에 따르면 메네스테우스를 왕으로 옹립한 게 다름아닌 디오스쿠로이라고 나오는 것도 있다고 하니까. 또한 파이드라의 선택은 옳았다. 훗날 장성한 데모폰이 귀국해 당당하게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로써 크레타 왕가 계열의 혈통이 에리크토니오스 왕조에 편입되어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고, 미노스 왕의 큰 그림이 완성되었다고 하겠다.

 

이 글에는 문제가 한 둘이 아니지만, 특히나 큰 문제가 세 가지 있다 : 

 

1. 어디까지나 신화를 자의적으로 해석했다 - 신화를 취사 선택한 것과 취사 해석한 문제로 진실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

2. 테세우스는 문제가 많은 영웅이다 - 고대 아테네에서 테세우스를 미화하기 위해 온갖 영웅담을 붙여주다보니, 테세우스의 행적은 이리저리 짜깁기한 흔적이 역력하다. 테세우스의 일대기를 따라가다보면 역사적 사건의 시간대가 어그러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테세우스라는 인물이나 그의 업적이 후대에 창작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또한 일각에서 테세우스는 왕이면서 민주주의 제도를 창시한 자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정치 체계가 옛날에 있었단 말인가?

3. 증거가 부족하다 - 신화에 기반한 뇌피셜이다보니 이렇다 할 증빙 자료는 없다. 위의 두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 할 것이다.

 

다음 글 보러가기 - 그림 보고 떠오른 잡념 (2) (https://www.dogdrip.net/195191252)

 

시간낭비하게 해서 미안

13개의 댓글

저 아랫 게이가 좋은 책 소개 해 놨으니 신화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그 책을 참고해도 좋겠네여

0
2019.01.25
[삭제 되었습니다]
@디지털 망령

으하핰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현웃 터졌넼ㅋㅋㅋㅋㅋㅋ

0
2019.01.25

두번째 그림은 누구그림이야?

1
@상하이조

에블린 드 모르간(Evelyn De Morgan), 1877년작이래!

0
2019.01.25
@한그르데아이사쯔

우옹 고마워~

1

신화가 역사가 되는 순간은 역사가 신화가 되는 순간만큼이나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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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쉬 그리스신화가 잼나

1
2019.01.27

와!! 제목은 평범한데 글은 짱재밌는데요

1
@재롱이

간판이 잘 안 뽑혀서 장사가 안 돼요....

0
2019.01.30
@한그르데아이사쯔
0
2019.01.31

무화과 ㅋㅋㅋ

1
2019.02.01

어크 오디세이에서 본 이름들이 많이 보이네

거기 나오는 테세우스 방어구셋이 개 똥찌거기 수준인걸 보면

그 고증이랑 신화 물고 빠는 어크제작진도 태세우스 개망나니 취급을 돌려까기 한게 아닐까 싶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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