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기찻길 - 겨울의 시작

 

 

 

"넌 정말 앞만 보고 걷는구나"

"그건 이상한 말이네요"

정말 그랬다.

레일 위에서 앞만 보고 걷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다.

혹여나 뒤를 돌아보다가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다

"내가 이상한가?"

사내는 레일 옆에서 속도에 맞춰 걸었다.

그러면서도 숨이 차지 않고, 힘든 기색도 보이지 않았으니, 꽤 체력이 좋은 편인 듯했다.

사내는 며칠 전 대뜸 레일 너머에서 찾아왔다. 사실, 레일 바로 앞을 보기도 바빠서 얼마나 앞에서 왔는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그가 레일 위에 있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레일은 하나뿐이고, 그는 옆에서 말하고 있으니까.

레일 옆으로도 걸을 수 있었던가? 그 자체로 충분히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 신비스러움은 그의 말에 이상하고 매혹적인 속성을 띄게 하곤 했다

그의 질문이 지금처럼 터무니 없는것도 한 몫 하겠지만

"이상해요. 뒤를 보며 걸을 순 없잖아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사내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마치 준비된 답변인 양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동의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건 무슨 괴상한 답변이란 말인가?

동의도, 비동의도 아니고 내가 그런 말을 하는걸 허락한다는 건가?

아차, 초점이 흐려진다. 레일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떨어진다.

집중, 집중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내는 이어서 말했다

"게는 앞을 보면서 옆으로 걷고, 등산로의 할아버지들은 박수를 치며 뒤로 걷곤해. 왜 그런지 알아? 밸런스 때문이야. 그런 불균형들이 사실 여러 근육을 균형있게 단련시키거든.잠시 뒤를 보거나, 둘러볼수도 있지 않아? 내 옆엔 누가 있는지, 내 뒤엔 누가 있는지 말이야"

"그건 위험하잖아요

게는 다리가 많은 구조상 옆으로 걷는게 효율적이고, 등산로의 할아버지도 근육을 트레이닝하기 위해 뒤로 걷는거에요.

전 다리가 두개고, 근육을 트레이닝 하지도 않는데, 왜 그렇게나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해요?"

"뭐가 그렇게 위험한데?"

정말 앞에서 온 사람이 맞는가 싶어 한숨을 쉰다.

"굴러떨어지고, 다치니까요"

그러자 사내는 웃으며-그러나 비웃거나 기분나쁘지는 않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굴러떨어졌던게 언제야?"

나는 순간 그 질문에 숨이 턱 막힘을 느꼈다

아, 초점이 흐려진다

이 남자와 대화하고 있자면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것만 같다

"..."

사내는 대답이 없자

잠시 뜸을들이다가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이년전쯤이었어. 굴러 떨어졌다기보다는 넘어졌지."

"둘이 다른건가요?"

"응 굴러떨어지는건 걸어야 하는 길이 있는데 이탈된거고

넘어진건 지나다 지쳐서, 걸려서 잠시 주저앉은거지

굴러 떨어진건 철로로 오르기 위해 나아져야 하지만

넘어진건 스스로를 위해 나아져야 하는거야"

나는 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사실,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도무지 공감이 되진 않았다

다른 세계의 이야기처럼 한뼘 거리가 있었다

"레일 끝엔 뭐가 있는지 알아?"

"그건 당신이 아는 대답이잖아요"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보다 앞에서 왔는데, 그런 질문을 한다는건 날 시험하는건지.

짖꿏은 사람이다

"너는 내가 알고 있는 것 처럼 보이니? 그럴수도 있겠네"

사내는 다시 웃었다.

사실, 숨소리만 살짝 세어나와서 예상한것이었다.

사내가 웃고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실 나는 레일바로 앞에 집중하느라 그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사실 그의 웃음은 쓴웃음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걷고 있었기에, 스치는 생각들은 언어가 따라잡기 전에 너무도 빨리 지나간다

사내가 말했다

"만약 내가 안다고 하더라도, 꼭 모르는것만을 질문할 필요는 없어

너 스스로 질문했으면 해서, 그래서 질문할수도 있지"

"그건 좀 무례하네요"

나는 마치 그가 나를 가르치려는 것처럼 느꼈다

나는 누가 나를 가르치려는것에 진절머리가 난다

세상에 해답들은 뻔히 정해져 있다.

그런것들을 어른의 통찰을 더해 있어보이게 포장하는것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다

나는 이제 그에 말에 조금 거칠게 대답하기로 했다

그러면 그도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 않겠지

"이제 대답하지 않을게요. 당신때문에 점점 느려지고 있어요. 시간이 아까워요"

"저런, 기분 나쁘게 하거나 너를 방해할 의도는 아니었어. 왜 기분이 나빴는지 이야기 해주겠니?"

사내는 여전히 평화로운 톤으로 말했다

"별로 기분이 나쁜것도 아니에요. 그냥 당신이 방해될 뿐이에요"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어

언제든 편하게 이야기 해주렴"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나는 레일 앞만 보고 달릴 수 있었다

사내가 찾아오기 전처럼.

사내가 따라오지 못할 만큼 속도를 내다보니

속도에 속도가 붙었다

곧 바람에 볼이 베일만큼 빨라졌다

그나마 보이던 풍경은 잔상처럼 일자로 휘어지고

일렬 레일만이 풍경속에서 오롯이 정지해 있었다

계절을 넘을 만큼 빨랐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빠르게 왔고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길었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해 시작된 겨울이 몇년간 레일위를 지배했다

추위가 뭔지, 시간이 뭔지 레일에는 적혀 있다

그러나 왜 추운지, 왜 시간이 이리도 긴지는 적혀있지 않았다

그저 낮에는 낮이라 걸었고 밤에는 밤이라 걸었다

추우면 겨울이고 더우면 여름이었다

레일은 하나였고

앞은 멀고 뒤는 아득했다

돌아보지 않은 어둠은 때때로 쫓아오고 있지 않을까 두려웠다

두려울 때면, 사내가 했던 질문들이 때때로 찾아와 나지막히 속삭였다

'마지막으로 굴러떨어진 게 언제야?'

분명 나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려 했던 질문이라고 했다

나는 괜한 오기에 일부러 그 질문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럴수록 부풀어 오르는 생각이 있는 법이다

코끼리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하면 코끼리가 먼저 생각나듯이

나는 어느 사이 그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15살 때쯤이었나.."

"그래, 그때쯤이었구나"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몇년간 쉬지 않고 달렸는데, 그는 정말 계속 옆에서 걸으며 기다렸던 모양이다

하기야 나는 옆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 그가 따라오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계속 기다린거에요?"

"말하고 싶을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고 했잖아.

나는 할 수 없는걸 약속 하지 않아"

겨울눈비 추적추적 내리는 레일 위에서

처음으로

나는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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