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듀랑고에 떨어진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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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3소위원회 보고물 #133.

 
 
1. 개요
본 기록은 워프 직후 먼 바다에서 앙코라까지 표류하던 한 조난민의 일지를 필사한 것이다. 가지고 있던 도구들과 인종적 특성으로 볼 때 이 자는 아시아의 어느 지역으로부터 워프한 것으로 추정되며, 시간대는 지구 시간 기준 16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현재는 회사의 프로젝트 아래 듀랑고의 환경에 적응 중에 있다.
 
향후 같은 시간대에서 워프한 조난민이 있을 경우의 대처를 위하여 그가 기록한 일지를 모두 필사한 뒤 돌려주는 조건으로 아래 일지를 기록하기로 하였다.


*


(...전략)


 
—5월 6일
물이 다 떨어졌다.
 
작은 꾀를 시험해 보려고 생각하여 바닷물을 솥에 담아 솥뚜껑을 거꾸로 닫고 소주 내리듯이 하여 솥뚜껑에 겨우 반 사발 가량의 증류수를 받았는데, 그 맛이 과연 담담하였다.
 
그 후로 번갈아 가면서 불을 지펴 증류수를 받아 먹었다.


 
—5월 8일
초경(初更)쯤에 서북풍(西北風)이 크게 불어 우리는 큰 바다 복판에서 이리저리 표류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전에 내가 일본 지도를 본 일이 있었는데, 동쪽은 다 육지였다. 또 통신사를 수행하여 왕래했던 사람의 말을 들으니, 중간에 대판성 (*일본의 도시 오사카로 추정됨)이 있고, 동북방 강호(江戶)라는 곳에는 관백이 있다. 이제 우리는 동해가 다하는 곳까지 가면 반드시 일본의 땅일 것이니, 이는 하늘이 도운 요행이다.”
 
하여 달래니,
 
선인(船人)들은 다 말하기를,
 
“끝내 육지를 만나지 못하니 이것은 틀림없이 텅 빈 큰 바다와 통해 있어 돌아갈 길이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고는, 다들 하늘을 부르고, 부모를 부르며 통곡하였다.
 


—5월 9일
밤 2경 쯤에 큰 바람이 갑자기 일어나, 파도가 치솟아 뱃전에 부딪쳐 우레와 같은 소리가 나자 모두들 다 엎드려 빌었는데, 꼭 죽는 것만 같았다.
 
사방 천지에 울리는 소리가 우레와 같고 바닷물이 두 쪽으로 갈라지니 과연 생시(生時)인지 가늠할 길이 없다.
 
하늘빛이 먹과 같이 검고 뱃전 아래는 물이 간 데 없고 큰 폭포에 이른 듯이 하여 그 아래로 붉은 벼락이 치는데, 한 사람이 탄식하기를 “이 곳이 바로 지옥(地獄)이로다.” 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조상을 찾았다. 모두가 정신이 가물가물하여 단지 돛대만을 잡고 혼백(魂魄)을 잡기에 바빴다.


 
—5월 12일
오후 3시 즈음하여 광풍(狂風)이 멈추었다. 배 앞에 태산과 같은 것이 비로소 보였는데, 위는 희고 아래는 검었다. 희미하게 보이는데도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점점 가까이 가 살펴보니, 산이 푸른 하늘에 솟아 있고 눈이 덮여있어 아래 쌓인 흙이 검게 보이는 것이었다. 나아가 정박하려는 사이에 날은 이미 저물었다.
 
배에서 밤을 새고 아침에 육지를 바라보니 관목(灌木)과 수풀 등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사람 사는 집은 없고 이따금씩 큰 새(鵬)가 우는 듯이 하는 짐승 소리가 들려올 뿐 이었다.
 
산 중턱에 들어서니 소나무가 많아 마치 고향에 선 듯 싶으니 처자(妻子) 향한 그리움에 서러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직후에 나뭇가지 헤치는 소리가 들려 인기척인가 하여 둘러보았더니 괴상한 산짐승이 풀을 뜯는데, 그 동물이 생긴 것이 몹시 기묘하고 생경하여 보는 자마다 입이 벌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크기는 비록 소와 비슷했으나 그 빛깔은 검붉고 머리에는 부챗살(合竹扇)이나 돛과 같이 머리가 도드라졌고 그 끝에는 커다란 뿔이 달려있어 몹시 우람하였다. 주둥이 끝에는 까마귀(烏)와 같이 부리가 돋아있으매, 마소와 같이 투레질을 하는 것이 성질이 몹시 성급한 듯이 보였다.


*주: 트리케라톱스나 센트로사우루스류로 추정됨.

 

 

그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하여금 그 전의 눈물은 간데없고 궁금증(好奇心)으로 가득하여 보이는데 흡사 옛 고사에 황제가 보았다는 천록(天鹿)이나 상(商)나라의 짐승 무소(犀牛)가 아닌가하며 입방아를 찧기에 바쁜데, 사람의 마음이 가볍기가 과연 이러하다.
 
마침 불을 땐 자리가 보여 살펴보니 무수한 고기들이 꿰여 매달려 있었는데, 생긴 것은 마치 돼지나 소의 것과 같았으나 전에 보지 못한 종류의 고기였다.
 
선인들은 그것을 가져다가 삶아 먹고 목이 말라 물을 잔뜩 마셔서 배를 북처럼 해가지고는 곤히 누워 일어날 줄을 몰랐다.


*주: 앞 기록의 생물이나 기후에 대한 묘사로 미루어볼 때, 이들은 앙코라에 도착하기 전 툰드라 기후의 불안정섬에 먼저 도달했던 것으로 추정됨. 보통 갓 워프에 휘말린 조난자들이 불안정 섬에 갔다 살아 돌아오는 것은 몹시 드문 일이지만, 이들에게는 행운이 따랐거나, 아니면 이들이 가진 기본적으로 가진 지식이 불안정섬에서 아무 기반 없이 살아남을 정도로 뛰어난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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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아침 해안으로 올라 가보니 서쪽으로 10리쯤의 잘 보이지 않는 섬에서 연기가 제법 떠올랐는데, 인가에서 밥을 짓는 연기같이 보였다.
 
배를 저어 건넛 섬으로 나아가니 과연 초가 대 여섯 채가 드러났는데, 고기잡이 하는 해부(海夫)인 왜인의 움막일 것이라 여기는 차에 그 곳 사람 대 여섯 무리가 앞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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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모습을 보니, 모두 짐승 뼈가 달린 누런 옷을 입었고, 싯누런 머리칼에 긴 수염에다가 얼굴은 다 태운 숯 마냥 새하얬다.
 
우리들은 모두 놀라, 배를 멈추고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들의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니 실로 일본인들은 아니고, 끝내 무엇들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살해당하지나 않을까 하여 더욱 놀라고 공포에 떨었다. 그들 중의 늙은 몇 사람은 몸에 검은 깃을 단 털가죽 옷을 입고 있었다. 자그마한 배를 타고서 가까이 다가와서 말을 하였는데 일본어와는 아주 달랐다.
 
그들이 강한가 부드러운가를 시험해 보니, 모양은 흉악하게 생겼지만 본디 사람을 해치는 무리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본시 글자로 통하는 풍습은 있으나 그 모양이 쐐기(楔)나 나뭇가지와 같아 도모지 뜻을 헤아릴 도리가 없었으며, 피차 말로 통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입과 배를 가리키며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다는 시늉을 시험 삼아 해 보였더니 다만 뭉친 고깃덩이를 작은 그릇 하나에 담아 줄 뿐 밥을 주려 하지 않았다.


 
—5월 15일
천하의 인간은 다 곡식 밥을 먹는다. 이 무리는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터이니, 어찌 밥 짓는 풍속이 없겠는가?
 
곡기가 끊긴지 닷새가 지나 몹시 쌀이 궁하여 집집마다 가서 밥을 짓는가를 알아보았더니, 모두 밥을 짓지 않고 다만 절구에다 고기를 빻아 경단(瓊團)과 같이 하여 먹고 있어서, 그들이 본시 밥을 지어먹지 않는 자들임을 알았다.
 
쌀알을 가리켜 보였지만 머리를 흔들고는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 무리는 정말로 쌀이나 콩을 모르는 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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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모일
어떤 곳에 이르니 쇠뇌(小弩)를 든 사람이 산중에서 짐승을 잡고 있었다.
 
다가가 잡은 짐승을 보아하니 또한 생전 보지 못한 것이었는데, 크기는 개와 비슷하고 머리가 뱀과 같이 길쭉하여 온 몸에 비늘과 깃이 돋아 있는 것이 필시 이 세상의 짐승이 아닌 듯이 생경하였다.
 
잡아 놓은 짐승을 보고 신기해하며 바라보니 그를 일컬어 곡부소(曲部所)라고 하였는데,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필시 뜻이 통하지 않을 것을 알아 그만 두었다.
 
꼬리부터 매달아 가죽을 벗기고 뼈를 발라내는 모습이 몹시 날래어 이전부터 사냥을 해오는 자임을 쉬이 알 수 있었는데, 그 짐승 잡는 법을 가만히 보아하니 닭을 잡는 것과 그 이치가 비슷하였다. 한 마리를 얻어다 그 이를 흉내 내어 살을 발라내는 시늉을 하였더니 그가 몹시 좋아하는 기색으로 그 짐승 몇 마리를 더 주어 끼니를 면(免)하였다.


 
—모월 모일
날짜를 헤아리고자 하늘의 기운을 살펴보았는데 본래 하늘의 이치와 판이하여 절기(節氣)의 흐름과 달의 차고 기움을 분명히 할 수가 없었다. 하늘에 붙은 북극성이며 달이 하루아침에 간 곳이 없고 엉뚱한 빛만이 떠있으니 역법을 아는 자들은,
 
“하늘의 돌아가는 이치는 본디 불변(不變)하는 것일진대, 그 기운이 몹시 흐트러졌으니 이는 필시 큰 일이 일어난 징조라.”
 
 하여 매우 불안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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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월 모일
작일(昨日) 얻어온 짐승 껍질을 벗기는 내내 행색(行色)을 보는 그곳 무리들의 눈치가 미묘한 것이, 입은 옷을 원하는 것 같아 겉옷을 벗어 바꾸자는 몸짓을 하였더니 몹시 기뻐하는 내색으로 입고 있던 가죽옷이며 벗긴 가죽, 밧줄, 땔감 등속을 모두 내어주기에 마침내 불을 때고 천막(天幕)을 쳐 땅에 거처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본디 이곳에 처음 올 적에는 야인(野人)에게 잡아먹히지는 않는가 하는 근심걱정에 밤을 새웠는데 오늘에 이르러 이곳 사람들과 이같이 교류(交流)를 하여 먹고 살기에 걱정이 없으니 하늘의 이치는 흐트러졌어도 인륜(人倫)에 변함이 없음이 이와 같다.


 
—모월 모일
그곳에 머문 지 여러 날이 되자 그들과 얼굴이 익어, 비록 언어로 뜻을 통하지는 못할망정 이미 옷과 물건을 바꾼 정분이 있어 여러 사람이 각기 마른 고기를 안고 와서 정을 표시하였다.
 
부득이 주는 대로 받으니, 고기가 다섯 섬[石]이 넘었다.
 
나는 그들 중에서도 좀 낫다고 보이는 한 사람을 데리고 선두로 나가서 배를 가리키고 사방을 향해서 돌아갈 길을 애써 물었더니, 내 면전에 같이 서서 손으로 남쪽을 가리키고는 입으로 바람을 내는 모양을 지으면서 ‘안고라(案考砢)……’라 말하였다...... (후략)
 
 
*


2. 정리
 
* 이들은 지구에서 표류하던 중 워프에 휘말려 듀랑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임.
 
* 워프 직후임에도 불구하고 불안정섬에서 장기간 동안 (4일 이상으로 사유됨)생존하였으며, 따라서 생존에 필요한 기타 전반적인 지식이 풍부한 집단임을 알 수 있음.
 
* (적잖은 조난자가 그러했듯이) 영어와 알파벳은 통하지 않았으나 소위원회 중 중국어를 구사하는 인원이 있어 이들과 필담으로 소통에 성공했음.
 
* 조난자로써는 이례적으로 농업 분야 (특히 쌀과 같은 곡물류 전반)에 전문가 수준으로 능통한 것으로 밝혀졌음.
 
*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으로 현대인과 갈등을 빚을 것으로 우려되었으나, 우려와는 다르게 이곳 듀랑고의 환경과 사회에 빠르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
 
* 향후 농업 전문가로써의 귀추가 주목되는 바, 자연 비료를 이용한 고전적 농작기술의 복원과 그로 인한 농작량 효율 증대에 기여할 여지가 몹시 크다. 포섭한 뒤 필요한 부족에 가입시켜 소위원회로 활용할 여지가 충분함,
 
엮은 자: 제133소위원회 Nickie L. Jones, et 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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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글: 1696년, 이선달의 북극 모험기

http://dylanzhai.egloos.com/3494296

 

굉장히 재밌게 읽었던 기행문인데, 군데군데 듀랑고가 생각나는 부분이 있어서 조금 각색해봤어. :)

2개의 댓글

2019.02.02

재밌게 읽었당

0
2019.02.02

진행시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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