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글

[자작 소설] 광역시 히어로 집단 1화

광역시 히어로 집단


뜨거운 여름의 햇살이 선팅이 되지 않은 버스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낮 12시를 조금 넘은 시각이라 버스 안은 출퇴근의 시간의 
살인적인 인파가 무색할 정도로 매우 한적했다.

 

나는 버스 뒷좌석에 앉아 빵빵하게 틀어놓은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영국 밴드 Oasis의 'Don't looks back in anger'를 듣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정도 한가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할 일 없는 백수나 나같이 수업만 듣고나면 집으로 직행하는 대학생 뿐이겠지.

 

종점에서 종점으로.

 

1시간이 넘는 무료한 하교길을 견디기 위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쯤
좀 처럼 보기 힘든 미인이 버스에 탑승했다.


흰 블라우스 상의에 분홍색 테니스 스커트 자연스러운 갈색 머리를 한 여인은
평범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쳐다볼정도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버스 안을 한참 둘러 보던 여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뒷 좌석 쪽으로 걸어와 그 많은 빈 자리를 놔두고 내 앞에 멈춰섰다.

 

괜히 쑥쓰러워 이미 집중하지도 않는 핸드폰을 계속 보는 척 하는데
그 여자가 살며시 내 팔을 두드렸다.

 

나는 쓸데없이 얼굴이 빨개지지 않기를 바라며
최대한 자연스러운 느낌으로 이어폰을 빼고 여자를 보았다.

 

수지를 닮은 듯한 귀여우면서도 우아한 외모의 여자는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버스를 잘못 탄거 같은데 OOO센터에 가려면 어디서 내려야 해요?"

 

타지에서 왔나?
나는 'OOO센터에 가려면 OO에서 내려서 00번 버스로 환승하시면 돼요.'
라고 간략하게 알려줄 수 있었지만 굳이 지도앱까지 켜서 알려줬다. 
내가 지향했던 쿨함은 역시 아직은 먼 경지인 듯 누가 봐도 사심 가득한 긴 설명이었다.

 

여자는 
"그럼 맞게 탄거네요. 다행이다."
라고 말하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다시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을 봤지만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의식이 되서 도저히 집중이 되지 않았다.
여자들이 쓰는 스킨 특유의 좋은 향기에 
나도 모르게 이런저런 망상에 빠져 있을 때 쯤
여자는 다시 한번 내 팔을 두드렸다.

 

"저, 궁금한게 있는데요."

 

여자의 환한 이목구비를 보는 순간 
20년 가량의 경험이 축적된 내 자각센서가 정상적으로 작동이 됐다.

 

'신천지구나.'

 

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예쁘고 잘생긴 외모를 이용해 포교를 한다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괜히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져드는 게 아니구나
이렇게 예쁜 여자가 포교하면 빠질 수도 있겠다라고 통감할 때 쯤
여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혹시 초능력을 믿으시나요?"

 

나는 내 안색이 평범하기를 바랬다.

 

'뭐야. 사이비인줄 알았는데 미친년이었잖아.'

 

대학교 들어와서 애인은 커녕 평범한 여자친구도 없는 나에게
운좋게도 버스에서 말을 걸어온 예쁜 여자가 하필이면 미친년이 었다니
당장이라도 버스에서 내리고 싶어졌다.

 

아직 집까지 3분의 2나 남았고 버스비가 아깝다는 지극히 서민적인 이유로
나는 무시하고 자는 척이나 하자 라는 마음으로 눈을 감으려 했다.

이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여자는 다급하게 말을 이어갔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알아요. 그래도 꼭 해야 하는 말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이게 운명인 걸요."

 

운명이라는 단어의 달콤한 울림과 여자의 아름다운 얼굴에 조금 생각을 바꿨다.
미친 사람이면 어때. 얘기라도 잠시 들어보자.

 

"초능력이라면 염동력이나 미래예지 같은 걸 얘기하는 거 같은데...
 혹시 초능력자이신가요?"

 

여자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엽네. 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다.

 

"어떻게 바로 아셨어요?"

 

곧바로 수긍하냐. 
나는 예쁘고 미친 여자와 대화하는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어서 어질어질한 이마에 손을 얹었다.

 

"혹시 당신도 자신이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나요?"

 

신흥종교든 과대망상이든 대화를 따라갈 자신이 없었기에
나는 대충 답하기로 했다.

 

"아니요."

 

여자는 진심으로 아깝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길게 얘기했다.

여자는 올해 21살로 OO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미친게 분명해 보이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분하게도 나보다 학업성적은 좋았나 보다.
자신은 중학교 때부터 자신이 초능력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한 살씩 나이를 먹으면서 자신과 같은 초능력자를 만나고 싶었는데
오늘 버스에 타서 나를 보는 순간 내가 같은 초능력자라는 사실을 직감했다고 한다.

 

병원을 가기엔 조금 늦은 거 아닐까. 
나의 안타까운 눈빛이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다고 착각했는지
여자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그 모습은 어쩐지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당신이 가진 초능력이라는게 뭔데요?"

 

어차피 집까지는 한참이나 남았고 그냥 얘기나 하자라는 생각으로 나는 아무 질문이나 던졌다.
여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배시시 웃으면서 얘기했다.

 

"길을 진짜 잘 찾아요."

 

처음 탈 때 버스를 잘못 탔다고 하지 않았나?
나는 조금 황당한 기분을 느끼며 

"길을 잘 찾는다구요?"
라고 되물었다.

 

여자는 적당한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는지 조금 고민을 하다가 다시 설명했다.

 

"그러니까 진짜 길도 잘 찾지만 내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단 루트 또는 최적의 루트를 잘 찾는다는 말이었어요."

 

거참 편리한 능력이네. 초능력까지는 아닌거 같지만.
나는 이왕 이렇게 된거 왜 그게 초능력이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일단 길을 물어봤을 때 한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어요.
 이 능력은 점점 강해져서 최근에는 거의 데려다 주는 경지에 오른거 같아요."

 

여자는 조금 자랑스러운 듯 얘기했다.

'그냥 예쁘니까 잘 도와준 거겠지.'
나도 그랬지만.

 

"그뿐만 아니라 특정한 곳을 목표로 가고 싶다고 생각하면 곧 그곳에 도착해 있어요."

 

그건 좀 편리하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착각같으니 반론을 제기하기로 했다.

 

"그걸 초능력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감이 있지 않나요?"

 

여자는 내가 믿지 않는 눈치이자 살짝 삐진 듯 눈꼬리가 올라갔다.

"살면서 한 번도 길을 헤멘적이 없는데도요? 
 그리고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어요."

 

더 이상 논쟁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대충 수긍하기로 했다.
그것도 초능력이라 하면 초능력일거야. 어쨌든 나랑 상관 없으니까.

 

"저는 이 힘을 우리 사회의 정의를 위해 사용하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길을 잘 찾는거 만으로는 뭔가 부족하잖아요?
 저는 싸움도 잘 못하구.
 그 때 머리 속에서 파바박 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더군요.
 '역시 동료를 모으는게 낫겠어!' 라구요."

 

나는 '수고가 많네요.'라고 답했다.

 

"아무래도 히어로 네임도 필요할 거 같아서 직접 이름도 지었어요.
 저는 '네비게이터'라고 해요. 그냥 '네비'라고 불러도 되구요."

 

"길을 잘 찾는 능력을 가진 '네비게이터'라... 그걸로 정말 괜찮나요?"

 

여자는 꽤 고심끝에 지은 이름이어서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전방에 과속 방지턱이 있습니다' 
 어때요? 똑같죠?"

 

이건 그냥 성대모사잖아.
네비게이션 목소리랑 똑같아서 놀랍기는 했지만 이게 초능력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아무튼 재밌는 이야기네요. 그래서 동료는 많이 모았나요?"

 

여자는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가로 저으며 No 라는 표시를 했다.

 

"작년까지는 수험생이라 바빠서 찾을 기회가 없었어요.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찾으러 다녔는데 
 조금 괜찮아 보이는 사람은 있었지만 초능력이라고 불릴 정도의 사람은 없더라구요."

 

아마 그랬겠지.

 

"그래서 오늘은 아침도 안먹고 제 초능력을 최대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죠.
 '목표는 초능력자! 단숨에 최단루트로 찾는다!' 라구요.
 그 다음에는 몸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죠. 
 다행히 오늘 제 나침의는 제대로 작동한거 같아요."

 

그래서 찾은게 나라고? 적당히 끼워맞추기 선수구만.

 

"저는 초능력 같은거 없는데요."

 

여자는 조금 걱정되는 얼굴로 말했다.

 

"물론. 아직 자각이 없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를 믿으세요. 이제까지 본 사람 중에 당신만큼 강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슬슬 빠져 나가야겠다라는 생각이 들던 차에 호기심이 동해 물었다.

 

"제가 어떤 능력이 있는데요?"

 

여자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기척을 지우는 능력이죠. 처음 제가 버스에 탔을 때는 정말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요.
 제 초능력이 없었더라면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니까요."

 

이건 그냥 멕이는 거잖아. 
평소에도 존재감이 옅다던가 하는 자각은 있어 갑자기 서글퍼졌다.

 

"당신과 말하면서 점점 더 확신이 섰어요. 당신은 기척을 지우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아예 없는 사람 같아요."

 

제발 그만해. 그냥 아싸라고 팩트폭행하는 거 같잖아.

 

"히어로 네임은 '인비저블맨' 어때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거의 조롱에 가까운 여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말없이 버스 하차벨을 눌렀다.

 

"죄송하지만 다음에 내려야 해서."

 

여자는 깜짝 놀라 다급하게 말했다.

 

"큰 능력에는 큰 책임이 따라요!"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보아하니 제가 초능력자라고 한들 큰 능력이 있는거 같진 않은데요?"
라고 말했다.

 

여자는 내 말이 웃긴지 하하하 웃으며
"그러면 작은 능력으로 작은 책임이 있는 일을 하면 되죠."
라고 장난처럼 답하면서 연락처를 물었다.

 

난생 처음 번호를 물어보는 여자를 만났고
심지어 미인인데
하필이면 미친 여자라니.
인생의 무상함까지 느끼며 나는 처음으로 내 번호를 물어본 여자를 거절했다.

 

버스가 정차하고 내리려는데 여자는 뭔가 결심이 선듯 단호하게 말했다.

 

"아직 포기 하진 않았어요. 제가 다시 찾아갈 때까지 더 고민해봐요."

 

세상에 미친 사람이 생각보단 많았구나.
나는 될대로 되라는 기분이 들어 여자에게 행운을 빈다고 손을 흔들어 주고는
집까지 아직 반이나 남은 정류장에서 하는 수 없이 내렸다.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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