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혁명 운동은 1903년 7월 말, 파나마시티 외곽의 한 시골 별장에서 조직되었다.
주동자는 파나마 주 대표 콜롬비아 상원의원 호세 아구스틴 아랑고였다. 아랑고는 파나마 철도의 변호사, 토지 대리인, 그리고 주요 로비스트이기도 했다.
그 밖에 파나마 철도 회사의 토목기사인 카를로스 콘스탄티노 아로세메나, 부관리자인 미국인 허버트 G. 프레스콧이 있었으며, 아마도르를 비롯한 파나마 철도 직원들은 크롬웰과 정기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파나마시티의 미국 총영사, 파나마 주둔 미 육군 공병대 장교들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아마도르처럼 파나마 철도 직원으로서 크롬웰과 정기적으로 소통하고 있었다.
아랑고는 파나마 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으로, 지협에서 역할을 했다. 아로세메나는 철도 회사의 토목기사였으며, 프레스콧은 부관리자였다. 이들과 함께 파나마시티의 미국 총영사, 지협에 주둔한 미 육군 공병대 소속의 윌리엄 블랙 소령과 마크 브룩 중위가 있었다.
특히 아랑고가 혁명 운동을 조직하는 데 가장 핵심적 역할을 했다. 그는 1903년 5월부터 자신의 아들들과 사위들, 아로세메나와 함께 혁명을 모의하기 시작했다.
7월 모임의 주최자인 라몬과 페드로 아리아스 형제, 파나마 대표 영자 신문 《스타 & 헤럴드》 창립 편집자의 아들을 비롯해 미국에서 교육받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젊은이들이 먼저 주축이 되었다.
8월 초 아랑고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아마도르를 모집하는 데 성공했다. 마누엘 아마도르 게레로는 파나마시티 사교계의 저명 인사였다. 그는 1867년 파나마 주의 주지사로 임명되었으나 혁명으로 인해 취임하지 못했다. 패배하고 반대파에 의해 체포된 후 1년간 망명 생활을 했다. 그는 파나마 철도의 수석 의사로 활동하며 많은 영향력과 명성을 얻었다.
아마도르는 아랑고가 신생 파나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랑고는 예의를 갖추어 아마도르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아마도르는 이를 수락했다.
크롬웰은 이들에게 "최선을 다해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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