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지식

한국의 운동권은 이권 조직인가 이념 조직인가

운동권을 좁게는 86세대 학생지하조직, 넓게는 97 한총련 세대까지 범위를 설정할 수 있다. 이를 공산주의 전위당 이론에 기반한 이념적 결사체로 분석하는 관점도 있지만, 운동권 출신 전향자와 다수의 관찰자는 이들을 이념이 아니라 이권으로 얽힌 집단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념은 정부 권력을 통해 이권 사업을 창출하기 위한 수단이자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결국 이념과 이권이라는 두 가지 답변이 서로 다른 측면에서 동일한 현상을 설명한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공산 혁명의 최종 단계에서 직업의 탈전문화가 이루어지고, 특정 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가는 사라질 것이라 상상했다. 당연히 정치인, 관료, 직업 공무원과 같은 개념도 없을 것이라 보았다. 직업의 전문화는 인간의 이기심과 갈등, 소외를 조장하는 교환과 분업 체제의 결과물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붕괴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게 되었을 때, 다가오는 적백내전이라는 군사적 위기 속에서 전문성이 결여된 상태로 혁명 체제를 유지해야 하는 모순에 직면했다. 전쟁은 지하 활동가들의 열정만으로 수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며, 고도의 지식과 경험을 가진 전문가(예: 장교)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만든 체제에서 전문성은 필요하지 않다는 이념을 신봉하면서도, 체제 수호를 위해 전문성을 요구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때 도입된 것이 바로 전시 공산주의(War Communism)다.
 
(전시 공산주의라는 용어는 당시에는 단순히 공산주의로 불렸으며, 이후 신경제정책(NEP)으로 전환되면서 자신들의 정책적 오류를 부인하기 위해 과도기적 수단이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사용되기 시작했다.)
 
전시 공산주의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당국가(party state) 체제다. 표면적으로는 정부와 사회 기관들이 존재했으나, 실제로는 모든 조직에 당의 정치요원들이 투입되어 혁명 이념에서 벗어나지 않는지 감시하고 통제했다. 이후에는 전문성과 이념적 충성을 겸비한 '붉은 전문가'들이 양산되었지만, 적백내전 당시에는 이러한 체계가 구 러시아 제국의 장교들을 안심하고 기용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지하당 체제에서 드러난 인물과 실제 결정권자 간의 괴리는 불가피했으나, 지하 활동이 불필요해진 이후에도 이중성이 지속되는 이유는 분석이 필요하다.)
 
결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탄생한 체제는 다른 어떤 정치 체제보다도 모순과 이중성을 깊이 내재화한 구조를 형성했다. 표면적으로는 기능과 역할이 명시된 국가와 사회 조직이 존재하지만, 그 뒤에는 이 모든 것을 감시하고 지배하는 당이 있다. 당은 혁명 의식을 주입하기 위한 존재로 묘사되며, 국가와 조직은 책임을 전가하는 구조를 형성한다. 이 체계에서 당은 오류가 있을 수 없는 절대적 의식의 구현체로 간주되며, 만약 오류가 드러난다면 그것은 당의 본질과 무관한 것으로 취급된다.
 
이렇듯 거짓과 기만을 내재화한 제도가 발달한 이유는 마르크스 사상 자체가 유토피아적 성격을 지닌 데에서 기인한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상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저술 대부분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예언했으나, 이후 공산주의 사회가 어떻게 작동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구상을 내놓지 않았다. 그 결과로 그의 공산주의 체제 구상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극도로 발달하여 자동적으로 생산되는 엄청난 부를 소모하는 내용에 지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은 생산 문제라는 핵심적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하지 않았다. 따라서 공산주의 체제는 필연적으로 약탈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마르크스가 그도톡 혐오하고 경멸했던 교환, 분업, 전문화 같은 요소를 배제하고 그가 반대로 이상화했던 형제애와 탈전문화를 기반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는 발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국가를 구성할 수 없는 요소(F)로 국가를 건설한다는 허황된 약속을 하고, 실제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요소(T)를 끌고 와 그 불가능한 상상 속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활동을 위해 요소(F)에 요소(T)를 강제로 종속시키고, 요소(T)가 소모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세상의 어딘가로 가서, 그 분야와 조직에 혼란과 붕괴를 일으킨다. 그리고 그 분야를 재건하기 위한 조직과 인력, 자금을 끌어모은다. 그러나 실제로 인력과 자금은 재건에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에 의해 사용되지 않는다. 대신, 철저한 이중체계로 이념적 정파의 구성원이 실제로 통제하되 책임은 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구성원은 건설적인 지시를 내릴 수가 없다. 건설하는 법도 모르고, 건설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건설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탈전문화). 그것이 순수한 혁명 의식의 담지자로서 그의 전부이다. 그래서 그는 그가 활동가적 양심으로나 이기적으로나 할 수 있는 최선의 활동, 즉 자원 소모만을 하고 떠난다. 그리고 남은 조직은 붕괴한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운동권이 이념 조직인가 이권 조직인가를 논할 때, 정답은 둘 다라고 할 수 있다. 이념은 이권을 취하기 위한 수단이며, 이념에 충실한 이들은 이권을 추구하면서도 겉으로는 책임을 회피하는 구조를 형성한다. 반대로, 이권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이념은 생산과 건설에 대한 고민 없이 이권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이상적인 도구로 작용한다. 이처럼 이념과 이권의 이중성은 서로를 강화하며 공생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마르크스는 그가 공상적 사회주의자로 치부해버렸던 생시몽주의자보다도 훨씬 공상적이었다. 지금 지구상에 마르크스의 이름을 내건 사회주의 국가 중 그나마 제대로 굴러가는 단 한 국가의 이상은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 사회보다는 마르크스가 격렬히 비판했던 프러시아의 국가체제에 훨씬 근접해 있다. 마르크스는 과연 어떤 의미에서 인류에 진보를 가져다 준 인물인 것일까?)

5개의 댓글

2025.02.20

6.3 동지회 전통 모름?

0
@루카치

6.3 동지회면 이재오 이런 세대 아니오... 일반적으로 86 운동권과 같이 묶지는 않는 게 정설이오..

1
2025.02.20
@쀓꿻휋쮉뛟쀍휇꿿

놀랍게도 86년까지 졸업을 안하셨습니다 누군지는 숙제

0
@루카치

어느 운동권 족보에서 졸업년도를 따진답니까...

0
2025.02.20
@쀓꿻휋쮉뛟쀍휇꿿

이념+이권 조직이지뭐 ㅋ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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