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American Socialists-링컨대대의 투쟁과 최후(下)

벨치테(Belchite)-얕은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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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치테 전투 이전 벨치테 시내의 모습, 이지역은 과거 레콩키스타 당시 기독교 지역과 무어인 왕국의 경계였으며,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전장 중 하나였다.

적잖은 병력과 전력을 동원한 브루네테에서 공화국은 승리하지 못하고 막대한 피를 흘린채로 패했다. 1937년 8월 공화국은 아직도 공화파가 많이 있는 아라곤 지역의 유서 깊은 도시인 사라고사를 목표로 공세를 취했다. 아스투리아스 지역을 비롯한 스페인 북부 산악지역들을 국가주의자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사실 그외에도 아라곤 전역의 상당부분은 무정부주의자 민병대가 맡고 있었고, 바르셀로나 5월 사태 이후 공산주의 색채가 점점 진해지는 공화국군은 그들 무정부주의 민병대를 흡수할 필요성이 있는 것도 사라고사 공세의 숨겨진 이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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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치테 시내로 포격하는 국가주의자군의 모습을 그린 기록화

 

하지만 국가주의자군의 반격으로 사라고사로의 진격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래서 사라고사로의 진격을 포기하고 대신 작은 도시인 벨치테를 공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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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치테 전투의 전황도

 

그 당시 제15국제여단 참모장은 소령으로 진급한 로버트 메리먼 이었다.(상관은 하라마에서 수많은 병사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어줍잖게 다른 사람 핑계를 대던 블라디미르 코피츠였다.) 메리먼은 이전 전투들과 마찬가지로 늘 그러듯이 보급 문제, 훈련 숙련도 문제, 사기 문제, 가솔린 부족 문제, 끝도 없이 다투던 지휘관 문제로 고통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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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치테 시내 전투 전황도 붉은선이 15국제여단의 링컨 대대, 보라선은 15 국제여단의 디미트로프대대(불가리아 인과 그리스인, 유고슬라비아인으로 구성) 주황선은 스페인군의 진격도이다.

 

링컨 대대는 벨치테 전투에서 국가주의자군 1,000명을 잡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송수관이 파괴되어 고립된 요새에 있는 천여 명의 국가주의자 군은 갈증이 허덕인 나머지 비틀거리며 링컨대대 군에게 투항했는데, 이때 링컨 대대 병사들은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었다. 항복한 국가주의자군들 중 장교들은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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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치테에서 수많은 국제여단원의 목숨을 앗아간 교회탑, 그렇다보니 국제여단군에게 집중적으로 두들겨 맞아 교회탑은 걸레짝이 되었다.

 

벨치테 전투에서는 교회탑, 신학교, 토치카에 몸을 숨긴 국가주의자군들이 기관총 사격을 퍼부어 수많은 국제여단원들이 전사했다. 얕은 관개수로에 몸을 숨긴 링컨대대원들에게 총알이 빗발쳤다. 전투 첫 날에만 링컨대대 지휘관 3명이 전사했다.

 

전진을 하려니 자살행위가 될 것 같고 참호에 머물러 있으려니 기관총 사수들의 쉬운 표적이 될 것 같았다. 벌거벗은 땅으로 퇴각하는 것도 공격 때보다 오히려 더 많은 인명 손실이 날 것 같았다.

국제여단 통제위원 스티브 넬슨Steve Nelson의 내전 몇 년 뒤 벨치테 전투에 대한 회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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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은 어쩔 수 없다. 진격!(이무렵 메리먼은 15 국제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활동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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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로 사후 후임 대대장인 한스 암리 Hans Amlie, 1차대전 참전 용사로 형Thomas Ryum Amlie이 미네소타주 연방하원의원이라 정치적으로도 빽이 있었다. 후에 메리먼 부부의 친구인 밀리 베넷과 결혼했다.

참모장 동지! 이런 미친 명령에는 따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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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이다. 암리 동지! 따르도록! 안그러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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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국제여단 통제위원 스티브 넬슨, 크로아티아계 미국인으로 본명은 스테판 메사로스Stjepan Mesaros  

나 여단 통제위원 스티브 넬슨이오!  암리 동지가 항명행위를 지속하니 내가 직접 전선으로 가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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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왜 이러시는 겁니까?!? 진격하라고요? 도시는 기관총 저격병들로 가득차 있어요...... 위원께서는 대대 전체가 학살 되기를 바라십니까?

 

한스 암리의 항명 이후 로버트 메리먼은 벨치테로 흘러가는 깊은 수로를 확인하고 링컨 대대원 몇명을 수로로 보내 수로의 끝에 있는 빈 올리브유 공장으로 보냈다. 올리브유 공장을 통해 수많은 링컨 대대원들이 도시로 잠입했다. 곳곳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이어졌고, 건물에서 서로를 제압하기 위한 수류탄들이 튀어나오거나 들어갔다. 국가주의자군들은 국제여단의 포로가 되면 처형될 것이라는 상관의 말을 듣고 각종 잡동사니를 모아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저항했다. 일부 국가주의자군 지휘관들은 병사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맨발로 싸우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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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벨치테는 함락되었다. 그리고 옛 도시는 다시는 복구되지 않고 폐허에서 좀 떨어진 곳에 새로 도시를 재건했다. 여담으로 벨치테는 2차대전 나치 독일의 악명높은 학살사건으로 유명한 오라두르쉬르글란Oradour-sur-Glane과 자매도시이다.

 

치열한 전투 끝에 벨치테는 점령되었다. 도시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국제여단원들은 곳곳에서 약탈을 했다. 그 로버트 메리먼도 약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결국 붉은 침대 커버 2장을 훔치기도 했다. 벨치테는 본래 목적인 사라고사보다 훨씬 덜 중요한 목표였다. 얻은 땅은 조금이고 수많은 공화국군들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메리먼과 넬슨, 암리 모두 부상을 입었다.

 

결과적으론 공화국군이 국가주의자군에게 지반을 점점 잃어가는 가운데 전투는 공화국이 거둔 가장 큰 승리로 포장되었다. 미국의 언론들도 이 전투에서 링컨대대가 활약했기에 그들의 활약상을 홍보하기 위해 현실을 외면한 채로 과장된 보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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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메리먼의 아내 메리언 메리먼Marion Merriman

 

로버트 메리먼은 벨치테 전투 후 아내 메리언 메리먼을 불렀다. 표면상의 목적으로는 전쟁에서 전사한 국제여단원 가족들이 생명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도록 서류 정리를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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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마 전투 이후 부상을 입은 로버트 메리먼(좌측 모자와 안경을 쓴 건장한 사람)을 간병하러 온 메리언 메리먼, 스페인 무르시아 1937년 3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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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0월 초 스페인 전역의 전황, 아스투리아스 지역은 끝내 국가주의자 군에게 함락되었다. 아스투리아스 지역은 스페인 공화국에게 원자재 공급 및 수입을 하는 매우 중요한 지역 중 하나였다. 이시점을 계기로 스페인 내전 공화국과 국가주의자의 균형 축은 무너졌다.

 

로버트와 메리언은 오랜만에 만난 부부답게 한동안 같이 지내며 휴가를 보냈다. 이시기는 매우 공화국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37년 8월 바티칸은 프랑코 정권을 스페인의 합법 정부로 공식 인정했다. 10월에는 스페인 북부의 공화파 마지막 지역마저 국가주의자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아직은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등의 스페인 유서깊은 대도시는 공화국 손에 있지만, 그 대도시들의 공업지역에 원자재를 공급할 수 있는 중요한 수급처가 이젠 국가주의자군의 손아귀에 있었다.

발렌시아로의 짧은 휴가가 바로 이런 때에 시작되었는데, 영국인 친구 케이트 망건을 포함하여 몇몇 일행들과 함께 해변에 나갔고 메리먼은 아내 메리언에게 노란색 스페인 비단 숄을 선물했다. 그날이 바로 메리먼 부부가 결혼한 지 5년 째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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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수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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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이럴 수는 없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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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 푸른 하늘, 녹색의 파도, 게다가 돛단배까지 너무 아름다워 삶을 너무 사랑하게 만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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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먼 부부의 친구인 케이트 망건Kate Mangan 1904~1977, 내전 당시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로버트와 메리언, 오늘을 기념하는 사진을 한 장 찍어두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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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사진 없이도 잘 기억할 수 있어. 모든 게 그대로면 그게 더 힘들것 같아"

 

- 발렌시아 휴가 당시 메리언 부부와 케이트 망건과의 대화 중에서

 

그 사이 미국인 의용병 전사자는 더욱 늘어나 메리먼 부부가 알고 있던 이들까지 전사하게 되자, 남편 로버트 메리먼은 '의용병 모집을 위한 순회공연'이란 명목하에 아내 메리언 메리먼을 떠나 보내게 된다.

 

 

 

"도움을 못 받으면 우리는 전쟁에서 지고 말거야. 무기, 보급품, 비행기,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해..... 메리언, 하나만 약속해줘, 내가 죽으면 재혼한다고."

메리먼 부부가 마지막으로 같이 있게 된 1937년 11월 어느날

 

로버트은 메리언에게 작별의 인사와 함께 자기가 쓴 포켓 다이어리 2권을 꺼내 주었다. 메리언은 이렇게 마지막 밤을 보낸뒤 차를 타고 눈물의 작별을 했다.

 

 

 

 

 

링컨대대의 종말-간데사(Gandesa), 회광반조의 에브로강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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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2월 테루엘 전투 전황도

 

메리먼 부부의 만남이 있은 후 1937년 12월, 테루엘 전투가 벌어졌다. 38년 1월 테루엘 지방의 주도인 테루엘이 공화국에게 점령되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당장 테루엘을 탈환하라는 명을 내린다. 수많은 병력과 장비가 테루엘을 탈환하기 위해 쏟아졌고, 공화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결국 테루엘을 내주고 말았다. 미국인 의용병들은 다수가 이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혹독한 추위에 상당수가 동상을 입었다. 보급품이 모자른 공화국군들은 담요를 둘러싸고 신발을 누더기로 감쌌는데 이 모습을 본 미국인 의용병(제임스 네우가스, 본인도 신발에 구멍이 뚫려서 테이프로 그 신발구멍을 막은 상태였다.)은 그 모습이 흡사 거지꼴 같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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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다드 데 바르셀로나Ciudad de Barcelona 호의 사진, 다수의 의용병을 싣고 오던 배는 국가주의자군이 보유한 잠수함의 기습을 받아 침몰했으며, 미국인 의용병을 포함한 다수의 의용병들이 침몰로 사망했다. 이 배는 지금은 카탈루냐 지방 다이빙 포인트로 수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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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체의 명령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이탈리아 의용군의 Fiat CR 32 복엽 전투기

 

수많은 사람들은 소련의 물자가 오기를 기다렸다. 75mm 포, 비행기, 각종 물자 등등 허나 그들이 기다렸던 물자는 오지 않았다. 상당수가 이탈리아군에게 막혔기 때문이었다. 두체는 카우디요의 협조를 얻어 마요르카에서 폭격기를 띄운 다음 공화파군들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를 또 다른 스페인으로 만들고 싶습니까?

1938년 2월 독일 베르히테스가덴에서 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 총통이 쿠르트 슈슈니크 오스트리아 총리에게 한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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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엘리너 루즈벨트Eleanor Roosevelt 영부인의 사진

 

독일과 이탈리아가 스페인을 열성적으로 도와주는 와중에도 미국, 아니 루즈벨트 행정부는 요지부동의 자세로 스페인 내전에 미온적이었다. 영부인 엘리너 루즈벨트 여사가 공화국에 우호적임에도 루즈벨트 대통령은 끝끝내 스페인을 원조하지 않았다.(나중에 그는 이것을 매우 후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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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마드리드 전투 당시 아프리카 군단의 모로코인 부사관의 사진, 무어인 군단은 오합지졸이기도 했던 스페인 국가주의자군 중에서 최강의 무력을 자랑했다.

 

1938년 3월 초 안슐루스가 일어나고(정확히는 3월 12일) 안슐루스 직전 3월 9일에는 국가주의자군 15만 대군(국가주의자군 최정예 군단인 아프리카 군단이 포함되어 있었다.)이 공세를 시작했다. 하늘에는 만(卍)자가 그려진 콘도르 군단으로 하늘이 메워져 있었다. 3월 말에는 진격하는 국가주의자군이 제15국제여단 본부까지 진격하는 바람에 로버트 메리먼은 개인 물품도 다 버리고 후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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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바스키 박사, 바스키 박사는 2차대전 후 비미활동위원회(HUAC)에게서 반파시스트 위원회의 각종 자료를 넘기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거절했고, 그 댓가로 5개월간 투옥 및 6개월 의사 면허 박탈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 뒤 바스키 박사는 죽을 때(1895~1975)까지 사회활동에 투신했다.

 

이 시기 병사들을 진료하던 에드워드 바스키 박사는 하라마 전투 이후로 서로 알게 지내게 된 로버트 메리먼을 만나기 위해 제15국제여단 본부로 갔다. 지휘관 블라디미르 코피츠는 휴가를 갔고, 메리먼은 무심하게 "뭐, 그들이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겠죠."라고 대꾸했다. 무기, 병력 등등이 국가주의자군에게 열악한 상황에서 바스키 박사는 공화국군의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은 것에 대해 경악했다.

 

https://youtu.be/PUDRbiX7dLk?si=HGfVn5p3vOMX4D2I

스페인 내전에서 활약한 슈튜카JU-87에 대한 영상

 

이 후퇴에서 링컨 대대원들은 그 악명높은 JU-87의 최초 데뷔전을 당했다. 그리고 콘도르 군단이나 국가주의자 군들이 뿌리는 영어로 된 선전용 전단을 보며 두려움을 떤 채로 후퇴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두려움 없이 행동하던 이는 로버트 메리먼 이었다. 그는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걸어서라도) 낙오병들을 모았다. 또한 적의 형세를 파악하기 위해 부던히 힘을 썼고, 어떤 공포가 와도 내색하지 않으며 행동하며 부하들에게서 지속적인 헌신을 얻어냈다.

 

 

 

"그에게 다가가는데 마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에게 다가서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나 반가운지 나는 그를 얼싸안고 키스를 퍼부었다."

링컨 대대 생존자의 발언 중에서

 

 

후퇴는 에브로 강까지 이어졌고, 국가주의자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길에 나서 길이 가득 메워졌다. 공화국은 국가주의자군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훈련도 안된 미국 신참 의용병도 닥치는 데로 투입했다. 이 시기에는 의용병의 수도 줄어서 스페인 사람도 인원 수를 채우기 위해 그냥 국제여단에 투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1938년 4월 2일 동이 트기 1시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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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여단 패잔병이 집결한 에브로강 서편의 소도시 모라 데브레 Mora d'Ebre의 현 구글지도 사진

 

후퇴하던 국제여단원들은 그들보다 먼저 앞서나간 국가주의자군 1사단에 멋 모르고 발을 딛게 되었다. 이때 다수의 병력은 뿔뿔히 흩어졌고, 에브로강 부근의 다리가 놓인 소도시인 모라 데브레로 모여들었다. 링컨 대대 생존자들도 그곳에 모였다. 그러나 이날 이후로 메리먼의 소식을 들은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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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도 보로스의 사진

 

한편 제15국제여단 통제위원인 헝가리계 미국인 샌도 보로스Sandor Voros는 로버트 메리먼을 열렬히 존경했는데, 존경하던 투사이자, 상관이 실종되자 전령을 보내 메리먼을 찾게 했고, 전령이 돌아오지 않자 자신이 직접 메리먼을 찾아 그가 있을 것으로 확신되는 야산까지 찾아냈다. 이때 국가주의자 군의 포성이 울리는 가운데 패잔병이 된 수많은 병사들이 후방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통제가 안되는 와중에 샌도 보로스(그 와중에 그는 이 사단의 원인이 된 "평등주의"에 대해 욕설을 씨부렸다.)는 무기를 가지러 가기 위해 에브로 강 동편(이미 무기가 바닥난 상태였기 때문)에 갔다 다시 돌아온 순간 스페인군 장교가 멈추라는 신호와 함께 다리가 곧 폭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샌도 보로스가 간청하는 가운데 다리는 곧 폭발했다.

그리고 로버트와 수백의 링컨대대원들 그리고 다수의 공화파 군들은 에브로강 서안에서 포위되었다.

 

에브로 강은 건너기엔 너무 넓고 깊었으며,

수영을 치기엔 물살이 너무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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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4월 스페인 내전 전황도, 마드리드, 발렌시아 지역과 카탈루냐 지방이 양단되었다. 사실상 공화국의 패배로 끝나는 순간이다.

 

 

에브로강에서의 국가주의자군의 공세로 공화국은 영토가 남북으로 양분되었다. 링컨 대대원들은 몇 주 전에는 400명 이었지만, 이 공세 이후 생존자는 120명 밖에 남지 않았다. 막말로 해외에서 지원군이 오지 않는 한 전세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불리하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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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츠 요스트Heinz Jost의 사진 나중에 그 악명 높은 아인자츠그루펜의 사령관이기도 했다.

 

히틀러는 자국 보안 시스템의 구축을 도와달라는 프랑코의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여 장교들로 구성된 보안국 팀을 파견했고, 이들은 공화국의 문서와 불온분자로 간주된 200만명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방대한 기록물을 구축했다. 하인츠 요스트 친위대 소장이 살라망카에 파견되었고, 게슈타포도 스페인에 체류하면서 국제여단 포로들 중 독일인들을 인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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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 지휘관들이 죽거나 다쳐 졸지에 지휘관이 된 밀턴 울프Milton Wolff(1915~2008)의 모습. 나중에 2차대전에 참전했고, 전후 각종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사회운동가가 되었다.

 

얼마간의 휴가 후 1938년 7월 25일 동트기 전 링컨대대를 포함한 국제여단원들은 국가주의자군 지역과 공화국 지역으로 나뉘어진 에브로강을 공격하였다. 이때 링컨 대대의 현직 혹은 전직 지휘관들이 죽거나 부상을 입었기에 당시 브루클린 악센트가 강한 나이 22세 밀턴 울프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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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로강 전투 직전 공화국군(붉은색)과 국가주의자군(푸른색)의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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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교를 건너 전장으로 향하는 공화국군 병사들의 사진

 

조그만 나뭇배를 타거나 병사들이 엉성하게 만든 조잡한 부교를 건너 공화국군이 공격을 하자 국가주의자 군들은 이런 엉성한 공격에 당황하여 쩔쩔맸다. 공화국 군대가 설마 그런 곳에서 공격하겠느냐는 방심으로 인한 것이었다. 심지어 포로로 잡힌 링컨 대대 중위 한 명이 국가주의자군 장교에게 그들보다 더 많은 병력이 국가주의자 군을 포위했다는 블러핑을 하자 국가주의자 군 장교와 병사 208명이 오히려 중위에게 항복을 하고 제15국제여단으로 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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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로강 전투 당시 공화국 제226, 227 혼성여단은 아우츠Auts산에서 국가주의자 군에 포위되어 대부분이 학살당했다. 소수만 간신히 살아서 탈출했다.

 

초반의 기세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린 국가주의자 군이 공화국군에게 거센 반격을 가했다. 140대 이상의 폭격기, 급강하 폭격기들이 폭격을 하고 전투기들이 에브로강을 도하하려는 군대에 기총사격을 가했다. 부교의 트럭들은 전투기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국가주의자군 공병들이 강 상류, 피레네 산맥에 위치한 댐의 수문을 열어 부교를 모두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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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베시Alvah Bessie의 사진, 급한대로 투입되다 보니 훈련따위는 전혀 받지 못했다. 전쟁 전후시기 프랑스 문학 번역가와 할리우드 극작가로 활동한 알바 베시는 매카시즘의 광풍에 커리어가 완전히 망가져 할리우드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링컨 대대의 보충 신병들은 스페인인들이 들어왔다. 그나마 반파시즘으로 정신무장이 된 기존 국제여단원들과는 다르게 이들은 대개 지리멸렬했고, 너무 나이가 많거나, 어리거나, 전과자나 탈영병 출신들 이었다. 에브로강 도하 이전에 768명이던 링컨 대대의 병력들은 380명으로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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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평화, 이 종이조각은 평화를 1년만 유지 시켰다.

 

1938년 9월 에브로강 전투가 한창인 가운데 뮌헨 늑약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주는걸로 합의했다.

 

"유럽에서 들려온 소식은 영국과 프랑스가 체코의 일부 영토를 분할하는 데 동의하고 절충'안'을 제시했다는 것으로, 전보다 더 나빴다."

링컨 대대원 알베 베시의 기록 중에서

 

이런 와중에 후안 네그린 총리와 그의 내각은 국제여단원 다수가 전사상 한 것과 전세계 공산당들이 이젠 더이상 지원병을 보내주지 않을 것을 알고 소심한 모험을 했다. 민주주의 국가들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병력을 물리도록 프랑코에게 압력을 가할 것이라는 가망없는 희망을 품고 국제여단의 철수를 만방에 알렸다. 국제 연맹의 연설에서 국제여단의 모든 병력을 전선에서 철수할 것이며, 스페인에서도 내보낸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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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대대원은 아니지만 구급차 운전사로 활약한 제임스 네우가스James Neugass의 사진

 

여단의 붕괴 및 무질서한 퇴각을 우려한 여단의 일부 장교들이 노력한 보람도 없이 이 소식은 각 전선에 퍼져 나갔다. 몇몇 이들(융커스의 폭격으로 부상당한 제임스 네우가스)은 이미 국제여단원들은 지쳐버린 몇 천명 밖에 남지 않았기에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미국 의용병 대다수는 병원에 입원해 있고 겨우 80명 만이 전선에 남아 있었다. 네그린의 발표 사흘 후 국가주의자군의 맹포격으로 그 남은 인원들도 아수라장 속에 에브로 강을 넘어 탈주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스페인 내전의 전장에서 영원히 떠났다.

 

 

 

바르셀로나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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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별식은 무솔리니의 폭격이 있을까봐 고별식 20분 전에 시민들에게 알렸고, 나중에 사람들은 그걸 알고 헐레벌떡 국제여단원들을 마중하기 위해 모였다.

 

1938년 10월 28일 무솔리니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바르셀로나의 디아고날 대로는 국제여단 잔존 병력 2,500명의 고별 열병식이 열렸다. 색종이 조각과 감사를 담은 쪽지들이 그들의 앞에 떨어졌다.

 

"여자와 아이들이 아들, 형제라고 부르며 우리의 품 안으로 달려들고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어요. .... 그런 경험은 난생 처음이었죠. ..... 전투 밖에 몰랐던 투박한 병사들도 그 모습에 감동해 엉엉 소리 내어 울었어요."

고별식에 참석한 뉴욕 출신 의용병의 증언 중에서

 

 

"우레 같은 갈채가 연속으로 밀려드는 파도처럼 언제까지고 계속되었어요. ... 아홉 살 혹은 열 살 정도 돼 보이는 소년도 길모퉁이에 서서 얼굴에 검은 줄을 만들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죠. 아이가 다가오는 트럭 안에 붕대 감은 병사들이 탄 것을 보고는 길모퉁이에서 튀어나와 차를 막아서더니 측면으로 기어올랐어요. 얼굴에는 여전히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죠. 차에 탄 아이는 양팔로 나를 얼싸안고 두 뺨에 키스를 했어요. 나도 눈물을 맛보며 아이에게 키스를 했죠."

링컨 대대 출신 밀턴 로버트슨의 증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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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고별식에서의 돌로레스 이바루리의 모습

 

행진을 마친 의용여단원들은 마침내 도열했다. 네그린 총리가 감정을 복받치는 감정으로 내전이 끝난 후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국제여단 병사들에게 전원 스페인 시민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네그린 총리의 연설이 끝난 후 라 파시오나리아La Pasionaria라는 별명을 가진 스페인 내전 최고의 웅변가인 돌로레스 이바루리Isidora Dolores Ibárruri Gómez가 연단에 올라 전설이 될 명 연설을 했다.

 

 

https://youtube.com/shorts/th1_9PCrpFQ?si=WadngV7L0TeTmpCR

 

"국제여단 동지 여러분! 여러분은 정치적 이유와 국가적 이유로 송환되고 있습니다. 일부는 조국으로, 다른 일부는 강요에 의해 추방을 당하는 것 이지요. 그렇더라도 당당하게 가십시오. 여러분은 역사입니다. 여러분은 전설입니다. 여러분은 민주주의 결속과 보편성을 상징하는 영웅적 본보기 입니다. 우리도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화의 올리브나무가 새 잎을 틔워 스페인 공화국의 승리와 합쳐지는 날, 이곳으로 돌아와 주십시오."

돌로레스 이바루리의 연설 중에서 

 

 

https://youtu.be/zgm1d16QFYM?si=iVMR8aIO5nRhYe2q

1939년 바르셀로나 땅밟기를 시전한 프란시스코 프랑코

 

1939년 1월 26일 바르셀로나는 함락되었다. 국가주의자 군들은 오랫동안 울리지 않던 교회 종을 모두 울리게 한 후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기도 후엔 며칠 동안 바르셀로나 전역을 약탈했다. 국제여단원들의 열병식이 열린 거리는 '대원수거리'로 개명되었다. 국가주의자군 장군은 바르셀로나를 '죄많은 도시'라 선언하고 이제 말끔히 청소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바르셀로나가 함락되기 전 수많은 시민들은 피난을 갔다. 당원증과 노조원증 조합은 찢어진 채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내전에서 부상당한 공화파 병사 2만 명은 버려졌다. 그리고 수많은 시민들은 국가주의자 군의 기총소사와 폭격에 상당수가 목숨을 잃었다.

 

 

 

 

 

Aftermath

 

1939년 2월 카탈루냐 함락 후 공화국 지도부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도주했고, 마드리드와 발렌시아를 제외한 전 국토를 얻었다. 그리고 1939년 3월 28일 수도 마드리드가 함락되고, 4월 1일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통해 내전에서 승리를 알림으로서 스페인 내전은 공화파의 패배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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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집권 당시 탄압받은 교사들의 이름이 적힌 팜플로나의 비석

 

내전의 종결 후 패자에게는 피의 보복이 따라왔다. 국가주의자 지지자를 살해했거나, 재산을 빼앗은 지역은 일의 연관과 상관없이 그 지역에 살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1편의 펠릭스 모레노 아르다누이의 경우처럼 말이다.) 프랑코 정권의 승리 후 스페인에서 약 2만 명의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공화파 참여 여부에 관계없이 고발당했다면 끌려나가 감옥에 수감되었다. 1940년 정원이 2만명인 감옥에 27만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수감되었고, 수감된채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10만 명이나 되었다.

 

 

"카우디요는 왕왕 개인 사제가 옆에 있는 데서, 식후 커피를 마시며 사형자 명단을 읽는 습관이 있었다. .... 처형 대상자 옆에는 알파벳 'E' 표를 하고, 감형 대상자 옆에는 'C' 표시를 했다. 명백히 본보기가 될 필요가 있어 보이는 사람 옆에는 '교수형에 처하고 언론 보도'도 하라는 메모를 적어 놓았다."

앤터니 비버의 저서 "스페인 내전" 중에서

 

 

식사는 형편없고, 환경은 열악했다. 그래서 교도소에는 질병이 만연했고, 식수가 지급되지 않는 날도 있었다. 1941년 코로도바의 한 도시에만 502명의 사람들이 열악한 감옥 사정으로 인해 숨졌다. 간수들은 법원 판결문을 공포할 때 후안, 호세 같은 흔한 이름을 불러 다수의 사람들을 공포에 빠지게 한 다음, 그 공포를 음미한 후 성을 말하는 비열한 짓을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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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집권 시기 마드리드 여자 교도소의 모습

 

공화파 여성들은 성적으로 매우 유린당했다. 마드리드의 여성 교도소에 약 1만 4천명의 여성들이 수감되었는데, 다수가 수감 도중 윤간을 당하거나, 그 일로 임신하는 일이 많았다. 공화파 여성들이 낳은 자식들은 광신적 마르크스주의에 감염될 수 있다는 이유로 고아원에 보내졌는데, 그 아이들의 수만 1만 2천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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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몰자의 계곡El Valle de los Caídos 사진

 

약 9만 명의 사람들은 무장된 감시인원의 눈길 하에서 수감된 상태로 각종 토목공사에 노역을 했다. 이중 2만 명의 강제 노동자는 국가주의자 전사자를 추모하기 위한 "전몰자의 계곡"을 만드는데 동원되었는데, "전몰자의 계곡"은 완성되기 까지 약 20년이 걸렸다. 이들 강제 노동자들은 프랑코가 일한 만큼 형에서 감해준다는 권유협박에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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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 대대원이자 2차 대전 당시 명예훈장 수여자인 에드워드 카터 주니어Edward Carter Jr의 사진

 

살아남은 링컨 대대원들 148명은 1938년 12월 15일 정기 여객선 파리호를 타고 뉴욕에 도착했다. 도착즉시 그들은 여권을 압수당했다. 그들 주변으로 실종 통보를 받은 의용병 가족들이 가족의 소식을 듣기위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스페인 내전의 패자였기 때문에 빠르게 잊혀졌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스페인에 온 이들 중에서 아프리카계 의용병의 경우는 그들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전장 스페인이 아닌 고향 미국에서 더욱더 차가운 취급을 당해 좌절감을 겪은 이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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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흰 무지성 스탈린뽕에 속은거다. 범부들아... 

 

그들이 귀국한 후 8개월 뒤 스탈린은 링컨 대대원들과 의용여단 동지들을 죽이는데 앞장선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많은 링컨대대 소속 미국인 공산당원들은 이에 항의하며 대규모 탈당을 벌였다.(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제20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의 각종 검거와 굴라그가 사실이 맞다고 하는 역사적인 연설을 할 때 그나마 남은 미국공산당원들은 신념이 사라질 정도로 멘탈이 붕괴되어 또 대규모 탈당을 했다.) 1개월 뒤 9월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을 벌였고,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에는 미국도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많은 링컨대대원들은 이때도 애국심으로 참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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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스 "모" 피쉬먼 Mosess "Moe" Fishman의 사진, 그는 이후 2차대전 당시 상선 선원으로 참전했으나, 전후 매카시즘의 광풍 속에서 미하원 비미활동위원회(HUAC)에게 요주인물로 찍혔다. 프랑코가 사망할 때까지 그는 스페인 정치범들의 활동을 도왔다. 

 

하지만 곧이어 냉전이 시작되자, 이들 미국 공산당원들은 매카시즘의 광풍에 의해 스페인 내전보다 더욱 혹독한 환경에 놓이게 된다. 맨해튼 프로젝트 당시 소련의 스파이로도 몇몇 공산당원들이 참여했기에 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인원들은 에드거 후버의 감시하에 내전 당시 자기가 정리한 기록물들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파기했다. 일부 인원은 반공산주의자로 전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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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링컨 대대원 델머 버그의 사진

 

하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링컨대대원(2016년 에인슬리 델머 버그Einsley Delmar Berg의 죽음으로 링컨 대대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이 사망할 때 까지 미국 현대사에서 링컨 대대원들은 사회문제에 있어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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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오셔로프Abraham Osheroff의 사진, 2차 대전 전후 목수로 활동했으며, 미시시피에서 유색인종 인권 운동에 참여했다.

 

링컨 대대원은 아니지만 미국인 간호 의용병이던 헬렌 프리먼은 캘리포니아 이주 노동자 가족의 의료활동에 투신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미국 의료팀을 이끈 에드워드 바스키 박사는 2차대전 전후 의사면허를 정지당하는 탄압이 있음에도 굴하지 않고 의사와 간호사 단체를 조직해 미시시피 흑인 유권자 등록을 위한 "자유의 여름Freedom Summer"에 참여했다. 내전에 참여한 목수인 에이브러햄 오셔로프는 흑인 공동체를 돕기 위해 미시시피로 갔다가 백인 우월주의자의 테러로 차량이 폭파당했고, 간호사로 1년간 근무한 힐다 벨 로버츠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링컨대대 무선기술자인 해리 피셔는 미국-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를 하다 심장마비로 숨졌을 만큼 그들은 생애 마지막까지 잘못된 길로 가는 권위에 저항하며 투쟁을 벌였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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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언-로버트 부부의 사진, 좌측은 로버트 메리먼과 같이 후퇴했다가 실종한 데이비드 도란

 

남편 로버트 메리먼이 에브로강으로 후퇴 도중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아내 메리언 메리먼은 메리먼이 포로가 되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1938년 4월 14일 <오클랜드 트리뷴>에도 메리먼이 빌바오 부근 국가주의자군 감옥에 갇혀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5월에는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미국 외교관들도 그들도 같은 소식을 들었다는 소식을 메리언에게 통보했다. 뉴욕타임즈 종군기자 윌리엄 카니는 5월 29일 부르고스 부근의 강제 수용소에 미국인 18명이 수감되어 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단, 여기에 메리먼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윌리엄 카니는 그 뒤에 비공식적인 소식이지만 대개는 정확한 소식통이란 말을 덧붙이며 국가주의자 군이 미국인 포로를 재판없이 처형했다는 말도 언급했다.

카니의 기사에 메리언은 분노를 느꼈다. 특히 세비야의 미국 영사 찰스 베이가 미국인 전쟁 포로의 상황을 알아보라는 본국의 훈령을 받지 못했다는 말과 함께 "타국 깃발 아래 싸우러 온 미국인들이니 그들도 이후에 자신들에게 벌어질 일까지 본국 정부가 걱정해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을 때 분노가 폭발하여 나쁜자식!이라는 욕설을 내뱉었다.

로버트가 다녔던 캘리포니아 대학의 100명이 넘는 교수들이 로버트 메리먼의 구명을 요청하는 서신을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보냈다. 헐은 찰스 베이의 말이 의도와 다르게 전파되었다고 회신을 보냈다. 메리먼의 어머니가 영부인에게 보낸 탄원서는 국무부로 다시 보내졌다. 영국에선 일군의 학자들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에게 메리먼의 구명을 탄원하는 편지를 보냈다. 메리언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메리먼의 생사여부를 확인했으나, 결국 로버트 메리먼이 빌바오를 포함한 어떤 수용소에도 있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메리먼의 약속대로, 2년 뒤 메리언은 다른 남성과 재혼을 했다. 하지만 결혼 초에는 한동안 메리먼이 다시 살아온다면 현남편과 메리먼 중 어느 누구를 택해야 하는 가란 악몽에 시달렸다고 수십 년 뒤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메리언은 새남편과의 사이에서 아이 셋을 둔 후 스탠퍼드 대학교 행정 직원으로 살았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에드거 후버가 살아있는 동안 불순 분자로 FBI의 주기적인 방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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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언 메리먼의 1985년 사진

 

메리먼이 실종되고 49년 뒤 1987년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 한 의문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의 겉봉에는 "총장 앞"이라는 글만 써 있었다.

 

"관계자분들께 드립니다.

저는 지나간 시대, 제가 젊었을 때 .... 링컨 여단의 링컨-워싱턴 대대에서 복무한 구닥다리 스페인인이올시다.

그때 저는 프랑코의 기병대에 포로로 잡히고, 같은 날 로버트 메리먼은 대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죽었습니다. 1938년 4월 2일 간데사에서, 제 곁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 메리언 메리먼 여사의 우편 주소를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파우스토 비야르의 편지 중에서 그는 총장에게 영어가 부족한 점 사죄드린다고 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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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토 비야르의 사진,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생전에 회고록을 써 놓았다고 한다.

 

이 발렌시아 출신 가구 제작자인 파우스토 비야르Fausto Villar Esteban는 링컨 대대에서 6개월 복무했다.(영어는 워싱턴주 산림 감시원 출신 의용병에게 상업용 영어로 배웠다고 한다.) 비야르의 기록(미출간된 스페인어 회고록)에 따르면 그가 감정이 복받히는 목소리로 스페인인과 미국인들 앞에서 포위되었다는 사실과 적의 포위망을 뚫고 에브로강까지 자기가 이끌것이라고 말했다. 파우스토 역시 그런 메리먼의 카리스마에 끌려 무한한 존경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윽고 이파리 하나 없는 포도원을 지나갈 무렵 국가주의자 군의 기관총 세례가 이어졌고 몇몇 병사들과 함께 메리먼 역시 전사했다고 한다. 파우스토 비야르는 쓰러진 메리먼을 보며 '제발 메리먼! 제발!'이란 말을 내뱉으며 흐느꼈고, 이후 로버트가 전사했다고 확신한 뒤에 소수의 병사들과 포도원을 함께 가로 질러 헛간에 숨어 있다가 생포되어 강제수용소 및 노동 대대에 2년 간 갇혀 있었고, 프랑코 정권 수십 년 동안 요주 인물이기에 말을 못했다는 것이었다.

 

 

"밥이 죽는 것을 보았다고 말한 것은 그가 처음이었어요. .... 그것으로 모든 것은 마무리됐습니다. 거짓말 같았죠! 친구 팻도 파우스토가 언급한 이름들을 보더니 다 맞다고 했어요. 날짜도 정확하다고 했고요!"

메리언 메리먼이 링컨대대 생존자이자 퇴역병인 루크 힌먼에게 쓴 편지 중에서

 

 

 

 

메리언 메리먼은 파우스토의 편지를 받고 4년 후 8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스페인 내전 TMI

 

TMI) 미국인과 캐나다인으로 구성된 매켄지-파피노 대대 의용병 존 맥엘리곳은 1947년 바르셀로나에 자기가 탄 배가 입항하자 스페인인 상관이 그곳에서 구두닦이를 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아는체를 하자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피더니 재빠르게 쪽지에 주소를 적어 주었다. 그리고 옛 전우 10여명과 다시 만나 해후를 했다. 존 맥엘리곳은 이때 눈물을 흘렸다고 회상했다.

TMI) 네그린의 약속대로 1996년 스페인 의회는 국제여단 모든 생존병들에게 명예 시민권을 부여하기로 결의했고, 미국인 68명을 포함한 퇴역병 380명이 하라마 전역을 둘러보기 위해 마드리드를 찾았다. 80대의 늙은이들은 전설이 된 그들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참석해준 것에 감격의 눈물을 흘렀다.

TMI) 종군기자 허버트 매슈스와 헤밍웨이는 에브로강 다리가 폭파될 당시 실종된 미국인들을 찾아 나섰는데, 강을 간신히 헤엄쳐 건너 살아남은 2명의 미국인을 발견하고 구조했다. 그들의 이름은 조지 와트George Watt와 존 게이츠John Gates였다. 젊은 뉴요커였던 그들은 허버트 매슈스가 구조 당시 강 서편에서 무슨일이 있는지 적고 있고 헤밍웨이는 강 반대편의 국가주의자군을 향해 큰소리로 욕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리고 훗날 헤밍웨이의 2번째 부인이 되는 마사 겔혼은 헤밍웨이가 국제여단이 바르셀로나에서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울었다고 한다.(헤밍웨이는 테스토스테론 엑기스가 모인 마초 그 자체였다.)

TMI) 바르셀로나 변호사 협회장을 맡은 카밀 콤파니스 이 요베르는 다수의 성직자들을 공화파의 학살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도와주었는데(이거 살아남은 교구 사제가 증언했다.) 형제가 바르셀로나 지방 정부 대통령(유이스 콤파니스, 내전 이후 프랑코에게 처형된다.)라서 요주의 인물로 자기가 찍힌 것을 알고 프랑스로 도주한 후 자살했다. 그리고 프랑코 정부는 그가 얌전히 처형을 안받고 도망간 것에 열이 받았는지 그에게 15년 간 변호사 자격 박탈과 벌금형을 선고하며 부인에게 그것을 대납하도록 했다.

TMI) 무신론자이자, 지식인, 공산주의자 여성인 마틸데 란다Matilde Landa는 마요르카 정치범에 수용되어 있다가 가톨릭으로 공개 세례를 하라는 당국의 압박에 난간 밖으로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했지만 즉사하지 않았다. 당국은 그 자리에서 그녀가 죽기까지 45분 동안 가톨릭 의식을 통해 그녀를 가톨릭 신자로 강제 개종을 했고, 죽은 마틸데 란다의 시체는 가족에게 보내지 않고 가톨릭 묘지에 묻혔다.

​TMI) 공화파 출신 간호사인 올리바 카베자스 가르시아Oliva Cabezas Garsia는 역시 폴란드인 의용병 자크 그룬블랏Jaques Grunblatt 박사와 연인 관계였는데, 공화파의 몰락이 임박하자 피레네 산맥을 넘어 탈출할려고 시도했으나 이미 임신한 몸이라 불가능한 상태였기에 마드리드의 자매 집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출산 직전 진통 중이던 카베자스를 당국은 강제로 끌어내 춤을 추게 하였다.(다행히 태중의 아들은 무사히 출산되었다.) 자크 그룬블랏 박사는 이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했다.

​TMI)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스페인 내전 끝나기 까지 스페인 공화국에게 무기 지원을 하지 않았다. 스페인 주재 미국 대사 클로드 바워스가 간청을 해도, 영부인 엘리너 루즈벨트도 강력한 공화파 지지자 였지만, 끝끝내 거부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강력한 표심 중 하나인 가톨릭계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힘들어서 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루즈벨트가 스페인 무기금수조치 해제한다는 오보가 떴을 때도 요지부동이었다. 마침내 1939년 1월 27일 각료회의에서 지금 생각하니 스페인에 취한 무기 금수조치는 "중대한 실책"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지만,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TMI) 아이러니하게도 스페인 내전 당시 국가주의자군에게 가장 큰 원조를 한 것은 미국 석유 회사인 텍사코였다. 당시 CEO인 노르웨이계 미국인 토킬드 리버Torkild Rieber는 공산주의를 매우 싫어해 파시즘을 지원했으며(외상으로 당시 2천만 달러의 지금 기준으로 최소 3억 2천오백만 달러 수준의 석유를 공급했다.), 결국 친 파시즘 행보(2대전 시작부터 미국 참전 때까지 히틀러를 추종했다!?! 노르웨이 사람인데!)로 인해 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프랑코는 토킬드 리버를 위해 가톨릭 여왕 이사벨의 대십자 기사 작위를 토킬드 리버에게 부여했고 토킬드 리버는 스페인 국영 석유업체 미국 석유 구매 총책이 되어 각종 석유업체, 조선 등등 다양한 기업의 중역을 역임하며 승승장구 하다가 1968년 8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TMI)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 대해 미국 공산당원 및 미국인 의용병의 반응은 제각각 이었다. 일부(알바 베시)는 헤밍웨이가 소련의 대스페인 원조를 너무 폄하했고, 국제여단 사령관인 앙드레 마르티에게 지나치게 악의적이고 개인적인 공격을 퍼부었다.(나중에 알바 베시는 앙드레 마르티에 대해 "선동가에 맥없는 늙은이"라고 까버렸다.)는 반응을 보인 반면 국제여단 통제위원 스티브 넬슨은 소설의 서스펜스에 매혹되어 "미국 문단의 기념비 적인 작품"이라고 평을 내렸다. 나중에 미국 공산당 전국위원회의 철회 요구에 "헤밍웨이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이 책이 부르주아지의 문학 살롱에서 환호받은 것도 우연은 아니다."(나름 책의 줄거리가 매혹적이라 간접적으로 인정을 한 셈.)라고 덧붙였다. 미국 공산당은 헤밍웨이의 소설이 세계 각국의 노동자 계급에게 불멸성을 주는 작품이 되길 바랬다.

TMI) 스페인 내전에서 개찐빠를 낸 제15국제여단 지휘관 블라디미르 코피츠는 모스크바 소환 후 트로츠키주의자로 몰려 1939년 4월 처형되었다.

TMI) 에브로강 전투 이후 몇 년 간 그지역의 농부들은 종종 폭발에 휩싸여 죽었는데, 전투 당시의 불발탄등을 농사짓던 도중 잘못 건들어서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TMI)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이자 공화당 후보로 시카고 시장에도 출마한 로버트 E 미리엄Robert E Merriam은 로버트 메리먼과 이름이 유사하단 이유로 조사를 받았다.

2개의 댓글

14 일 전

스페인 내전은 보면 볼 수록 속이 쓰려옴... 연재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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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일 전

기예르모 델 토로의 악마의 등뼈와 판의 미로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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